Tuesday, February 7, 2012

만행 꿈의 화계사

꿈의 화계사

마침내 화계사에 도착햇다. 와, 드디어 숭산스님이 계신 곳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꿈에그리던 화계사, 위대한 선사 고봉스님이 돌아가신 곳 마치 성지 순례를 온 수도자처럼 가슴속에서 경건한 마음이 일었다.
어둠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가와지붕의 아름다운 곡선, 눈을 땔 수가 없었다. 밖이 추우니 빨리 들어가자는 무심스님의 재촉도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화계사 경내로 걸어 들어서면서 좀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뭔가 퀴퀴하다고 할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공항에 내릴 때 부터 내 코를 자극하던 냄새였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은 ‘연탄 냄새’였다. 그때가 1990년이었는데 그때만해도 서울의 난방재료는 연탄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연탄이 자취를 감추고 있으니 불과 10녀년 만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드디어 화계사에 방 하나를 배정받고 몸을 눕혔다. 옆에는 나와 미찬가지로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 온 서양사람이 이미 잠든 상태엿다.
그날 밤, 나는 몸이 피곤했는데도 흥분과 감동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 그러다 살프시 잠이 들엇다. 그러나 곧 너무더운 열기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몸 한쪽이 불에 데인 것같이 뜨거웟다. 온돌의 열기 때문이었다. 나는 덮고있던 담요를 접고 바닥에 깐 뒤에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화계사의 기상시간은 보통 세 시었다. 그런데 나는 두 시 반에 눈을 떠 영 잠을 자지 못했다. 화장실에 갔다가 들어왔더니 룸메이트도 깨어 있었다. 알고보니 프라비던스 젠센터에서 만난적이 있었던 닐잉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에게 큰스님이 지금 이 절에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는 손가락으로 다른 가와집 빌딩을 가리키면서 ‘저곳에 계신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붋빛이 새여나오고 있었다. 그때가 새벽 두 시 40분 이었다.
닐이 나의 놀란표정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큰스님 방에는 항상 두시에 불이켜져.”
“왜?”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녀서 1천배를 하신대.”
나는 감동과 존경심으로 할말을 잃었다 잠시 큰스님이 계신 곳의 불빛을 바라보고 법당으로 갔다. 법당에는 나말고도 약 20여 명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미국, 폴란드, 캐나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전세계에서 동안거를 하기위해 온 사람들과 10여명의 외국인 스님들이었다.
드디어 숭산스님이 법당안으로 들어오셨다. 우리는 모두 삼배를 올렸다.
큰스님은 늘 그러하시듯 하나하나 우리얼굴을 찬찬히 살피셨다..
오! 하버드 스튜던트. 원더풀 원더풀. 하우 아 유 (Oh Wonderful, Wonderful How are you).”l
와 ! 세상에, 큰스님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단 한번 면담을 하고 두어번 예불시간에 마주쳤을 뿐이었는데 그분이 나를 기억하시고 계셨다.
우리 모두는 같이 염불하고 참선수행하고 발우공양까지 마쳤다.
나는 며칠 뒤부터 있을 계룡산 신원사 동안거를 기다라며 서울구경을 했다 .조계사도 가고 승복도 샀다. 동안거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내일이면 신원사로 향하는 날.
그날 밤 나는 화계사 큰방에서 나처럼 동안거에 참여하기 위해온 10여 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마침내 삭발을 했다.
아마독자 여러분들은 출가하지도 않은 일반신도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깍고 동안거를 하는 전통이 다소 의아할 것이다. 한국 불교의 전통에는 그런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숭산스님의 전통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숭산스님이 그런파격을 하신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서양에서 불교가 점차인기를 얻고있고 동양의 선사들이 존경을 받는다해도 불교의 역사가 아직 짧기 때문에 서양만의 불교전통은 아직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한국불교의 전통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 한국ㆍ중국ㆍ일본 불교에서는 수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승려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불자들이 수행을 통해 불교를 접한다. 절에가서 뭐뭐뭐 해달라고 빌기위해 불교를 접한다는 이야기다.
큰스님은 열린마음을 갖고계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 미국사람들의 상황과 마음을 잘 읽고 그에 맞춰 불교전통을 만들어오셨다. 오히려 선방스님들은 젠센터에서 별도의 일들을 갖고있기 때문에 일단 승려가 되면 안거수행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비해 신도들은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시간을 낼 수도 있고 출가를 하지 않고도 안거수행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또 미국에는 당장에 절을 많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 신도들이나 비구니들 만을 위해 따로 공간을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큰스님은 동안거, 하안거 때 승려와 신도들이 같이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때 신도들은 스님들처럼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
본래 숭산스님이 지도하시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서의 첫 동안기 수행은 1984년경 수덕사에서 이루어졌다. 큰스님이 젊었을 때 수덕사에 살면서 수행하셨기 때문에 그곳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큰스님의 스승이신 고봉대선사, 경허대선사 역시 수덕사에서 살면서 수행하셨다.
그런역사 깊은 사찰에서 비구,비구니, 일반 남녀 신자들이 같은 선방에서 함께수행을 하다는것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혁명적인 일이였다. 많은 한국스님들은 숭산스님의 이런행동이 한국불교를 오엽시킨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부 스님들은 숭산스님에게 대놓고 ’한국불교를 망친다’고 항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별 도리가 없었다. 많은 푸른 눈 제자들이 한국에가서 수행하고 싶었는데 그들을 따로따로 수영할 공간이 없었다. 또 비록 출가는 안 했다 하더라도 진정 수행을 원하는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어하셨다.
결국 숭산스님과 수덕사의 오랜인연으로 당시 수덕사 방장스님이셨던 원담 큰스님은 숭산스님의 푸른 눈 제자들이 수덕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매년 안거에 참여하는 미국사람들이 늘어났다. 큰스님은 ‘한국에 가면 한국 참선불교 전통의 뿌리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숭산스님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미국사람들은 일단 한국에서의 동안거 경험을 필수코스로 여겼다.
사람이 갈수록 늘어 더이상 수덕사 선방에서 수용할수 없는 지경까지 되자 동안거는 1989 계룡산 신원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년 뒤인 1992년 마침내 화계사에 국제선원이 따로 만들어지면서 화계사에서도 안거가 가능 해졌다.
요즈음 매년 1백 명이상의 전세계사람들이 큰스님의 지도아래 하안거, 동안거 수행에 참가한다. 그들중 일부는 출가를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아주 많다.

신원사 동안거
신원사 안거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머리를 깎아야하고 승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록 출가는 하지 않았어도 스님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아주 엄격한 규율이어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내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았어도 출가한 스님은 아니기 때문에 스님들 앞에서는 모든 예를 갖춰야 한다. 안거기간 중 개인 물건은 사과박스 두 개 이외에는 허용이 안 된다. TV, 전화는 물론이고 편지왕래도 안된다. 일체 묵언을 해야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만 빼고는 90일동안 절을 떠나서는 안 된다. 신원사는 아주 오래된 절이다. 공주와 가까운 계룡산 남쪽에 위치해 있다. 선방은 아주 작다.
미국사람들은 넓은 땅에서 공간의 부족함이 없이 살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 대해 유난히 다른나라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여긴다. 처음 경험하는 한국사찰 생활의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것도 많았다. 가장 재미있었던 경험은 화장실 경험이었다. 나는 그렇게 먼 화장실은 처음보았다. 선방에서 60여 미터는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 경험은 나에게 완전히 충격이었다. 볼일(?)을 마치고 일어서면 문짝이 목 부근까지만 닿기 때문에 앞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구멍만 뚫어놓은 것이라 주저앉아서 일을 봐야했다. 냄새도 냄새지만 추운날씨에 볼일을 봐야 했기 때문에 매번 화장실에가고 오는 일이 아주 귀찮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엉덩이가 추워서 오래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볼일을 마치고 버린 휴지가 바람에 밀려 위로 날아가기도 했다. 처음격는 일이라 좀 당혹스러웠다. 그 일을 격고 난 뒤 부터는 휴지가 날릴까봐 손을 좀더 구멍에 깊이 넣는라 애를 쓰고 했다. 화장실에 가는일이 고역이긴 했는데 나는 안거 기간동안 나오는 한국음식이 너무 맛있엇서 매번 과식을 했고 따라서 화장실에 자주갔고 갈 때마다 좀 오래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화장실을 보면서 한국이 후진국이라는 생각보다는 이런 문화 때문에 한국사람들이 아주강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신원사에서 살면서 한국인에 대한 존경심을 개록새록 가지게 되었다. 할 수 있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들, 마음만 먹으면 못해내는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신원사 주변에는 농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화장실을 가기워해 밖에 나왔다가 한 초로의 농부가 지게에 나뭇짐을 가득 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저런 가냘픈 할아버지가 저렇게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가실까. 그 옆에는 아저씨들 몇몇이 힘을 합쳐 바위를 옮기고 계셨다.
안거 생활 1개월이 지났을 때 우리는 쓰레기를 묻기위해 신원사 뒷마당에 큰 구덩이를 팠는데 그날 함께 일을하는 아저씨들이 너무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추운 날인데도 아랑곳없이 하루종일일을 했다. 아저씨들의 몸이 강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의지 하나로 모든 일을 해냈다. 나는 그분들을 만나고 난 뒤 건강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수정해야 했다. 전엔 ‘건강’ 혹은 ‘강하다’는 것이 우선 근육질 몸매에 체구가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아저씨나 농부들이나 다들작고 비쩍마른 체구였는데도 엄청난 힘을 냈다. 몸은 비록 미국인보다 작고 가날펐지만 거기서 나오는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할 수 있다’는 마음에서 나온것이었다. 진정 강한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처음보았다. 거기에 비한다면 미국인들은 몸이크고 강해 보일지 몰라도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이었다. 진정 강한 것이란 무엇인가.
또 신원사의 법당안은 불을 때지않아 완전히 얼음속 같았다.
신원사는 가난한 절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땔감을 때지 못했다. 그런데 신도들은 아침저녁으로 그 추운법당안에 모여 열심히 절을 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 얼음장 같은 법당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을 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나라를 가보았지만 어느나라, 어느민족에게서도 이런 강인한 에너지를 느끼지 못했다. 열심히 일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동안 너무편하게 살아온 게 아니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국사람들이 이런’ 할수있다’는 에너지가 부러웠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지게에 나무를 가득 짊어지고 절안으로 들어왔다. 가마솥에 밥을 지을 때 쓸 땔감인 것 같았다.
그는 나무가 가득 든 지게를 옆에세워두고 잠사 땀을 식혔다. 나는 마침 쉬는 시간이기도 해서 그에게 다가가 그 지게를 한번 져보고 싶다는 몸짓을 했다.
아저씨는 흔쾌히 승낙을 하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지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와 ! 이렇게 무거운 것을 나보다 약해보이는 저 아저씨가 저렇게 잘도 졌단 말인가. 나는 스물다섯의 혈기왕성한, 힘이 넘치는 젊은이였는데도 이 노인에 가까운 아저씨가 지는 지게를 못 지다니, 아저씨는 낑낑 거리는 나를 보고 한참 웃으셨다.
나는 어설프게 배운 한국말로 나이를 여쭈었다. 예순다섯이라고 하셨다. 세상에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였다. 그는 허허 웃으시면서 다시 지게를 지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한 손에 담배대까지 쥐고 말이다. 나는 마치 텔레비전에서 하는 묘기 대행진이라도 보듯 그이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이쯤 되면 쓰레기통 옮기는 것조차도 귀찮아 하는 살찐 미국노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친 김에 부엌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부엌 안에는 더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이었는데도 공양주 보살님들이 부엌에서 장갑하나 끼지않고 일을하고 계신것이 아니가.
아니, 세상에 이렇게 강한 사람들이 있을까, 와 한국사람들 정말 파이팅, 파이팅이다.
그런모습을 볼 때마다 나은 내 마음속에 아주 큰 다짐을 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조금 불편하고 어려운 것쯤은 이겨내야 한다.’
그럴수록 아주 열심히 참선수해에 전념했다.
안거기간 중 매우 인상적인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이었다. 보살님들은 땅콩버터와 빵, 과일, 야채, 케이크, 호박죽, 양말, 속옷 등을 가득싣고 오전 열 시경 신원사에 도착했는데 신원사까지는 버스가 직접 못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내려가서 그 짐을 다 가지고 올라왔다.
그때 일은 한국불자들의 순수한 마음을 경험한 첫번째 경험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뭘 하던 시람인지, 우리가 얼마나 나쁜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를 텐데도 머리 깎은 우리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냈고 뭐 하나라도 도울 것이 없을까 하고 분주했다.더구나 우리는 모두 다른나라 사람들 아니가. 그런데도 그들이 베푸는 사랑과 애정은 민족과 나라를 초월한 것이었다.
보살님들은 새벽 네 시에 서울을 출발해 버스에 시달린 피곤한 몸이었을 텐데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 미역국, 찰밥 등 우리를 위한 점심 음식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선방으로와서 우리에게 삼배를 올렸다. 나는 스님도 아니데 그들에게 스님 대접을 받는것 같아 미안하고 계면쩍었다.
여태껏 살면서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보살님들과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묵언 때문에 많은 얘기를 할 수 없었지만 말 없이도 우리는 너무 좋은 시간을 가졌다.
당시 나는 한국말을 거의 몰랐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면서 들은 말 중에 ‘여보세요’라는 밀이 쉽게 외워졌다. 아마 인사말인 것 같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신원사를 떠나는 그들을 향해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몇몇 보살님들이 내 말을 듣고 좀 이상한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박장대소를 하는 바람에 나는 내가 틀린 말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이 화계사 보살님들의 방문은 나를 더욱 고무시켰다. 그런 순수하고 정이 넘치는 친절한 마음,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한테, 그것도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들에게, 한국말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그들은 마치 어머니 같은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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