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6, 2012

나의 전생 이야기

나의 전생 이야기

사람들은 또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티벳 불교도 있고 중국 불교도 있고 일본 불교도 있는데 왜 한국 불교를 선택했느냐. 그리고 나를 아는 분들은 어쩌면 그렇게 한국 생활에 적응을 잘하느냐고 감탄을 한다.
사실 그분들은 외국인인 내가 한국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에서 그런 말들을 하시지만 실제로 나는 이곳 한국에 살면서 한번도 ‘외국’에 나와 있다거나 ‘고향’을 떠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미국에서 김치와 된장찌개를 처음 맛보았을 때, 케임브리지 젠센터에서 가야금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법수스님 방에서 한국 사찰 사진이 실린 달력을 처음 보았을 때, 그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한국의 모든 것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가금 형제들∙친구들∙ 부모님들이 편지를 보내 “언제 ‘집’에 오느냐”고 재촉하신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미국 집이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안는다. 물론 나는 내가 태어난 미국땅과 가족들을 사랑한다.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미국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살고 자라면서도 한번도 조국에 대한 애톳함이나 가슴 뿌듯함 같은 것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고향에 왔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산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그런 것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다. 그러나 고향 같다고 느낀 아라는 한국이 처음이다. 한국 다음으로 독일이 좀 친근했다고나 할까.
나는 한국인들이 남의 나라 사람 같지가 않다. 참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황병기씨의 가야금 연주 소리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면 조선시대의 최고의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던 정선의 그림을 보시라. 아니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을 들어 보시라.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호떡을 먹어보시라. 인사동 낡은 찻집에서 쌍화차를 마셔보시라. 아니면 〈서편제〉 CD를 사서 들어보시든지. 특히 비 오는 가을 날 듣는 〈서편제〉 소리는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 바로 이런 감정, 이런 느낌, 이런 경험, 이런 의식이 내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것이다.
나와 한국 불교에 대한 인연도 참 묘하다. 미국에서 불교공부를 하고 싶어했을 때 뉴욕의 내 집 옆에는 뉴욕 젠 센터(Zen Community of New York)라는 아주 유명한 젠 센터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정말 수행을 하고 싶어졌을 때 그곳을 찾았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발길을 돌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일본 젠 센터였다.
그리고 몇 달 뒤 숭산스님이 운영하시는 케임브리지 젠 센터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들어갔던 것이다.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가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동양이라면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참선수행에 그렇게 걸신들린 듯했으면서도 일본 젠 센터는 왜 들어가지 못했을까. 또 한국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면서도 케임브리지 젠 센터에 들어갔을 때는 어쩌면 그렇게 친근하게 느껴졌을까.
나는 내가 전생에 한국인이었음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것말고는 나와 한국에 대한 인연을 설명할 수가 없다.
‘나의 전생’에 관해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990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큰스님 밑에서 계룡산 신원사 동안거에 들어갔다. 안거가 끝나고 나는 수유리 삼각산 화계사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점심 공양을 마치고 절 뒤뜰을 거니는데 대웅전 앞을 오르려다 갑자기 어느 스님 방에서 울려 퍼지는 웬 음악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그 음악의 멜로디가 내 발길과 귀를 사로잡은 것이다. 나는 완전히 충격에 사로잡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스님 방 앞으로 발길을 옮겨 방문 앞에 섰다 멜로디를 계속 듣는 동안 내 안에서는 아주 벅찬 느낌이 솟아 올랐다. 슬픈, 아니 슬프다기보다 애잔하다고나 할까. 목구멍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심지어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 동안 살아오면서 노래 한 곡에 그렇게 내 감정이 울렁거린 경험은 처음이었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스님 방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노래가 아마 한국의 오랜 전통 민요이거나 농부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오는 판소리 가락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그 동안 참선수행을 너무 열심히 해서,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한국에 대해 무슨 콩깍지 같은 게 씌워져서 좀 이상해졌나 하는 생각까지 하면서 방으로 돌아왔다.
동 안거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그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없었고 내 기억속에 노랫가락도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다시 그 노래를 만난 게 1995년 여름이었다. 이미 출가를 해 화계사에서 살고 있는데 동국대에서 여름방학 기간 동안 불교경정을 영어로 강의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내 강의 스타일은 좀 독특하다. 가능하면 교실 밖을 벗어나 식당이나 잔디밭에 둘러앉아 노는 것인지 공부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편하게 한다. 어떤 날은 식당에서 떡국이나 라면을 함께 먹으면서 수다를 떨 듯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8월 15일이었다. 그날이 광복절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원래 그날은 공휴일이라 휴강일 이었으나 학생들 중 몇몇이 강의를 원해 우리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는 큰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미침 8 ∙ 15광복절 50주년 기념식이 생방송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한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 퇴역군인들, 광복인사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그런데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어떤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장중하지만 너무 친근하게 다가오는 저 가락,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속에 아주 깊고 무거운 것이 가라앉는 느낌이 생겼다.
한 학생이 내 얼굴을 보더니 “아이고, 현각스님이 우시네, 현각스님 왜 우시는 거예요?” 하며 놀려댔다. 나는 너무 창피해 뛰다시피 화장실로 갔다. 휴지를 집어 들고 눈물을 닦으면서 바로 그 노래가 5년 전 화계사 스님 방 앞에서 들었던 ‘그 노래’ 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노래지? 무슨 노래인데 들을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그해 겨울이 돌아왔다.
나는 경주 남산의 작은 암자인 천룡사에서 혼자 백일 기도를 했다. 작은 토굴에서 매일 2천배를 하고 참선수행을 했다. 하루 네다섯 시간만 잤다. 밤 아홉 시에 다시 일어나 열한 시까지, 그리고 새벽 한 시 반에 일어나 세 시 반까지 새벽수행을 했다. 끼니는 아침과 점심만 먹었다.
천룡사 2백 미터 아래에는 작은 집이 하난 있었는데 그곳에 사는 노 보살님 한 분이 내 아침과 점심공양을 챙겨주셨다. 그 보살님은 천룡사를 관리하는 분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묵언수행을 할 때라 보살님과는 그저 눈인사만 나누었다. 내가 매일 앛침, 점심공양을 먹으러 그곳에 갈 때마다 그 노 보살님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옆방에서 다리미질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셨는데 항상 TV를 켜놓고 계셨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밥을 먹다가 이내 숟가락을 놓고 다시 암자로 향했다. 토굴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 노래에 대한 생각 때문에 참선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노래냐. 유행가냐. 영화 음악이냐. 한국의 전통 노래 같긴 한데 도대체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점심공양을 하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TV소리가 커지더니 보살님이 바깥에서 일하는 할아버지를 큰소리로 불렀다. 빨리 와 텔레비전을 보라고 난리를 치셨다. 나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 보살님 방으로 건너가 TV를 보았다. 북한에서 일가족이 귀순해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또 울려 퍼졌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지만 묵언수행이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백일 기도를 마친 후 나는 남산을 여기저기 오르다 남산의 한 암자에서 소행하는 나이든 스님 한 분을 만났다. 그 스님은 암자에서 수행만 하면서 사셨다. 마침 젊은 스님 한 분이 옆에 계셨는데, 그 스님께 이것저것 전해주기 위해 들렸다고 했다. 그분들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갑자기 젊은 스님이 나이 든. 스님을 가리키며 ‘이 분은 전생을 아주 잘 보시는 스님’아라고 소개했다. 나는 마침 지난 기도 기간 내내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며 그 스님에게 여쭈었다. 걸망에서 영한사전을 들고 한국말을 이어갔다.
“스님, 제가 한국에 와서 어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막 나왔어요. 목과 가슴에서 막 슬퍼요. 이런 일 나에게 한번도 없었어요.”
“무슨 노래야?”
“몰라요.”
“제목이 뭐예요?”
“잘 몰라요..”
“가사가 뭐예요?”
“잘 몰라요……
“멜로디 알아요?”
나는 잠시 멈추었다 노랫가락을 애써 기억해냈다.
“……딴 따아아아따따 따 안…… 따 따딴
내 허밍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스님들이 웃어댔다.
“그거 애국가 아냐, 애국가.”
“애국가? 애국가가 뭐예요?”
“우리나라 국가, 나라 노래 말이에요.”
나는 사전을 뒤졌다.
‘국가 =National anthem.’
“아, 나라 노래! 그런데 저는 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 막 흘러요? 그리고 목. 가슴 막 아파요?”
“전생에 스님은 한국 사람이었어요. 나는 아주 잘 보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평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그 스님에게서 확인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년 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하도 신비한 경험이라 나 혼자만 가슴속에 묻어두고 싶었다. 언젠가 큰스님께 여쭤볼 기회가 있으면 여쭙기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작년 여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하안거를 할 때 드디어 큰스님께 나의 전생에 대해 여쭐 기회가 생겼다. 매일 아침 큰스님은 국제선원에서 아주 짧은 법문을 하셨는데 법문 후 질의 응답이 있었다. 나는 모든 스님들 앞에서 큰스님께 궁금증을 털어 놓았다.
그동안 화계사, 동국대, 남산에서 겪었던 일을 다 얘기했다.
“큰스님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지요? 한국 사람들조차 애국가를 들어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는데 왜 저만 그렇게 유난스러울까요?”
큰스님은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스님의 업을 알고 있어요. 전생에 스님은 한국 독립군이었읍니다.”
“예?”
“전생에 스님은 일본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은 한국인이었다. 이 말입니다. 스님은 한국이 일본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을 때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전쟁에 나가 열심히 싸워 일본군을 많이 무찔렀지요. 그런데 어느 날 일본 군인의 총탄에 맞아 죽게 된 것입니다. 죽을 때 스님은 너무 한이 맺혀 ‘아 나는 다음 생에는 아주 강한 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큰스님은 이 부분에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조국을 위해 살겠다고’’고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미국에서 태어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겁니다. 스님은 한국과 아주 강한 업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다 전생에 나라를 찾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독립군이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한국 사람들보다 애국가를 들을 때 더 강한 느낌을 갖는 게 당연하지요, 하하하.”
큰스님의 웃음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큰스님 말씀을 듣고 놀랐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비로서 가슴속 체증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미 내가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던 내 전생을 큰스님으로부터 확인 받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독립군이라…… 아아!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나…….”
전생 경험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이 한 가지 더 있다.
작년 11월초 나는 지리산이 있는 전남 구례 천은사 위 상선암 옆 토굴에서 백일 기도를 했다. 프라비던스 젠센터 주지를 하느라고 바쁘다는 핑계로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다시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른 스님들 동안거 때에 맞춰 나는 혼자 토굴수행을 한 것이다. 천은사 주지스님과 당시 상선암 주지스님이었던 지인스님(현재 전남 곡성 관음사 주지)의 가르침과 도움이 없었다면 그 수행은 불가능 했다. 그곳에는 전기도 수도도 없고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해야 했다. 1백 일 동안 나는 솔잎가루와 약간의 과일만 먹으면서 묵언수행을 했다. 매일 1천3백 배를 했고 ‘신묘장구 대 다라니’ 염불수행을 했다.
기도르 시작하고 이틀 가량 지났을까. 내 맘은 점점 밝아졌다. 그런데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에 몰두해 기도를 할 때 어느 순간 갑자기 구에서 어떤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서 들리는 환청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환청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환청은 환청이었다. 소리에 놀라 방문을 열어보면 지나가는 바람밖에 없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귀속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크게 들렸다. 이상한 것은 내가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할 때만, 특히 한밤중 염불 때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흘, 나흘이 지나자 그 소리들은 점점 명확해졌다. 울음소리, 비명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들이 들릴 때마다 몇 번이나 목탁치는 것을 멈추고 바깥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휘잉 자나갔다. 그리고 다시 염불을 하면 여지없이 그 비명소리, 외침,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무서웠다. 일단 어둠이 내리면 방안에 촛불 하나 켜놓고 일체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구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쭈삣쭈삣 곤두섰다.
그렇게 정확하게 3주일이 지나 기도 22일째 되는 날이었다. 한 순간에 그 소리들이 사라졌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내 마음도 평화로워졌다. 아무런 두려움도 일지 않았다. 마치 어릴 적 성당에 다닐 때 천사들이 부르는 성가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수행이 끝나고 지인스님께 여쭈었다. 지인스님은 곰곰히 생각을 하시다 뜻밖에 지리산의 빨찌산 역사를 이야기 하셨다. 나는 그때 지리산도 처음이였거니와 지리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리산에 얽힌 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들으면서 너무 놀랐다. 그리고 이념으로 부모와 형제가 나뉘어 이 지리산 자락에서 총구를 겨눴던 슬픈 역사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다.
그때 지인스님 옆에는 화엄사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내 기도 경험을 들으시면서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누군가 아주 열심히 염불을 해주면 그들의 영혼이 자유로워진다면서 아마 나의 염불기도가 빨찌산 영혼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스님의 말씀을 내가 입증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일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와 나와의 강한 인연의 끈을 다시 한번 경험했다.
때때로 나는 ‘인연’이나 ‘전생’이 실제로 있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전생이니 인연이니 업이니 하는 것을 불교만의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기억수행’이라는 독특한 수행을 통해서 각자 ‘이전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른바 ‘회상’(anamnesis)이라는 깊은 기억과정을 사용한다면 그들의 과거 삶의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라면서 환생이 사실이며 우리 존재의 실체라는 것을 인정했다.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에머슨과 휘트먼 같은 전설적인 시인들도 전생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그들은 전생이라는 것을 그저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지어낸 관념이 아니라 자기들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직관이라고 말했으며 그에 대한 증거로서 불교 경전을 자주 인용했다.
현대 과학에서는 신경정신학계를 중심으로 전생 경험에 대한 많은 연구결과들이 있다.
일례로 몇 년 전에 미국에서는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Many Lives Many Masters)라는 책이 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이 책은 1997년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의 저자인 브리이언 와이스 박사는 미국 정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지독한 악몽과 공포증에 시달리던 젊은 여성 캐설린을 치료하면서 의외의 상황에 직면해 혼란에 빠진다.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최면상태에서 유아기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요법을 시행하는 도중 뜻밖에 그녀의 전생과 만난 것이다.
황당하게만 들릴 게 분명한 비정통적인 이야기를 공개한다는 것이 과학자로서의 명성과 경력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잇음을 잘 알고 있었던 브라인언 박사는 그러나 신념과 용기를 갖고 이 책을 펴냈다. 그리고 그 책은 전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생에 관해서 더 깊은 이해를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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