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19, 2012

만행 '현각'으로 대시 태어나다

만행 ‘현각’으로 다시 태어나다
우리가 갈 곳은 남중국 조계산에 있는 ‘남화사’라는 절로서 六祖 혜는대사 638~713가 살고 수행하면서 가르침을 전한 곳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중국의 선종 일조인 達磨大師, ?~528로부터 6대가 되는 선사다. 속세에서 그는 그냥 노씨라고만 불렀다. 지금의 광동성 조경부 신흥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죽고 집이 가난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날마다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다. 그러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장터에서 어느 스님이 자나가면서 외우던 《금강경》소리를 듣고 마음에 열린 바가 있었다. 그는 그 스님을 따라 양자강을 건너 황주부 황매산에 가서 五祖 弘忍大師를 뵙고, 그가 시키는 대로 여덟 달 동안이나 방아만 찧으면서 행자생활을 했다.
오조스님이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할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올렸다. “마음은 밝은 거울이므로 부지런히 닦아 티끌이 묻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글을 본 노행자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묻을까”하고 화답했다.
오조스님은 마침내 그에게 법을 전하고 부처님의 법통을 상징하는 가사와 발우를 전해주었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피해 남쪽으로 돌아가 18년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 비로소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소양의 조계산에서 선법을 크게 일으켜 그 법을 이은 제자만 40여명이나 되었다. 그는 당나라 현종 때 76세로 입적하였다.
남화사는 바로 육조 혜능대사가 살면서 수행하시던 곳이니 중국선종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절인 데다 그곳이 위치한 조계산의 아름을 따 대한불교 조계종이 탄생하게 되니 이만저만 역사가 있는 절이 아니다. 남화사에는 혜능대사의 시신이 대웅전 법당 제단에 참선하며 앉은 자세를 그대로 미라로 보관돼 있다. 그런 유서 깊고 역사적인 절에 숭산 큰스님이 방문한다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문화혁명 이후 중국 정부가 외국 스님의 방문을 허락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당시 국교도 이뤄지지 않은 나라의 사람을 초청 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선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육조 혜능대사가 살고 가르친 곳에서 큰스님이 가르침을 펴니, 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우리의 스승이신 큰스님이 중국 선종의 뿌리가 되는 절에 가셔서 중국 스님들에게 가르침을 펴시다니 정말 기쁜 일이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입국해 마침내 남화사에 도착했다. 남화사는 아주 크고 웅장한 절 이었다. 그렇게 큰 절은 처음 보았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곳에 계신 승려들이 모두 나와 마치 부처가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에 존경을 담아 인사를 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았다. 큰스님이 이렇게까지 존경을 받고 계시다니…….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떤 스님들은 멀리서 큰스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뛰어와 땅바닥에 그대로 앉아 절을 했고 큰스님이 법당으로 들어가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당시 중국은 같은 중국 땅 안에서도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스님들은 숭산 큰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남화사까지 오신 분들도 있었다. 그저 한마디라도 큰스님께 여쭈어 법문을 들을 기회를 가져보기 위해서였다.
남화사 주지는 중국 안에서 가장 존경 받는 스님이라고 했다. 주지스님은 큰스님이 마치 외국의 대통령이라도 되는 듯 예를 다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 승려들이 얼마나 큰스님의 가르침에 목이 말라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셨다. 중국 승려들의 이 같은 환대는 정말 상상 밖이었다.
큰스님을 비롯한 우리 일행들은 즉시 대웅전으로 가 큰절을 올리고 육조 혜능대사 앞에도 큰절을 올렸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육조 혜능대사는 열반하실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래커와 방부제로 보존된 얼굴과 손, 참선하는 모습으로 붉은 가사를 입고 그대로 앉아 계셨다. 우리 모두가 지금 참선수행을 통해 우리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이 위대한 스승 앞에 우리는 천천히 삼배를 올렸다.
물론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단지 한 사람의 몸이다. 방부처리된 미라에 불과하다. 신성하다거나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에 존경과 감사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우리는 삼배를 올리며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해내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우리는 남화사 큰 선방에서 3일간의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중국비구, 비구니∙ 신돋,f까지 우리일행에 동참했다. 다들 아주 열심히 참선수행을 했다. 하루에 열 시간 넘게 안장 있었다. 미국인 스님인 도안스님은 중국 스님들 에게 공안인터뷰를 하시기도 했다. 그 광경은 매우 재미 있었다. 여기 육조 혜능대사의 땅에서, 우리가 현재 수행하는 참선수행의 길을 열어주신 분들 중 위대한 성인 한 분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곳에서 그의 중국인 제자들이 서양에서 온 푸른 눈 스님한테 가르침을 받고 공안수행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재미있고 역사적인 광경인가.
진리를 위해서라면 국적도 자만심도 모두 버리고 배우려 하는 중국 스님들을 보면서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심’下心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3일 용맹정진에 참여해 다른 비구와 비구니들과 함께 선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중국 스님이 나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죽비치는 소리가 세번나고 우리는 참선에 들어갔다.
참선수행 규율이 중국은 약간 독특했다. 선방을 주관하는 입승스님은 죽비를 치면 선방문을 일단 잠가버린다. 따라서 늦으면 선방에 들어올 수 없고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조용히 참선을 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나는 아직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염치고 있었다. 왜 출가를 주저하느냐.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 어깨에는 아직도 바위처럼 너무 큰 짐이 올려져 있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참선에 전진하면 할수록 고통만이 가득 찼다. 우리는 한 시간 참선하고 10분동안 절 주변을 도는 걷기 명상을 하는 식으로 3일동안 수행을 했다.
이튿날이었다
느는 여전히 내 안에 큰 물음을 잡고 늘어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선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걸으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나는 누구인가.’
그날 오후쯤이었다. 나는 참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내 맘이 ‘확’ 하고 열린 것이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길이 내 앞에 열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 잡생각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몸에는 힘이 솟았다. 이것을 생각 이전의 원점인 상태라고 하는가. 더 이상 어떤 고통도 분노도 자책도 없어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감이 차 올랐다.
이 기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종의 깊은 바라봄이라고 할까. 나의 모든 고통은 환상이며 착각이라는 느낌과 함께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 명상이 1초처럼 지나갔다. 입승 스님이 쉬는 시간을 위해 죽비를 쳤는데도 나는 계속 앉아 있었다. 나는 영원히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 다음 한 시간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그 전까지 내가 경험했던 어떤 행복감, 만족감보다 큰 것이었다.
나는 점점 더 깊이 내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시간이 끝나자 옆의 승려 한 분이 나를 톡톡 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런 경험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나와 사물에 대한 깊은 자가, 깊은 완성…… 이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성큼성큼 큰스님 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그때는 스님들이 아무나 큰스님 방문을 두드리지 못하도록 했다. 큰스님께서 빡빡한 일정 때문에 피곤하셔서 굳이 큰스님을 뵈려면 비서스님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똑똑똑.
“누구세요?”
“접니다. 하버드 학생입니다”(그때 우리 일행들은 나를 하버드 학생이라고 불렀다.)
“오, 들어오세요.”
큰스님은 방에 편안하게 앉아 계셨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는 내 얼굴을 잠시 보시더니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신 듯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큰 스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무슨 문제가 있어요?”
큰스님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지만 이미 내 얼굴만 보시고는 뭔가 이해하신 것 같았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짓고 계셨지만 뭔가 내 속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채신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님이 도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다 일고 있으시다는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큰스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오직 그 가르침을 등불 삼아 평생을 살겠습니다.”
“원더풀, 원더풀,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모래 受戒式이 있는데 잘됐네요. 하하하. 아주 잘됐어요.”
그 수계식이란 본래 남화사 중국 스님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계를 받았는데도 숭산 큰스님 밑에서 다시 계를 받고 싶다고 전해와 수계식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선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六祖 慧能大師가 계셨던 절에서 1백 명 중국 스님들과 한 명의 미국인 스님이 계를 받는다니, 아주 재미있어요, 재미있어, 하하하.”
드디어 이틀 뒤 受戒式 날.
수염과 머리를 깨끗하게 깎았다. 나의 사형스님인 도문스님이 도와주셨다. 나는 비로소 스님이 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런데 도문스님은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자신이 처음 삭발할 때의 경험을 들려주셨다. 어찌나 재미있게 말씀해주시는지 스님과 이야기하면서 긴장된 마음이 풀렸다.
마침내 1992년 9월 7일.
조계산 대웅전. 육조대사의 몸 바로 옆에서 나는 숭산 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스님이 되었다. ‘폴 뮌젠’에서 ‘현각’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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