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 2012

불교의 구성

불교의 구성 • 佛敎 構成 The Structure of Buddhism
1.불보佛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Buddhism⇒신앙적信仰的 the object of faith ⇒감정적情的 emotional
이고득락 離苦得樂 Departing from pain and attaining pleasure ⇒깊은명상定 Samadhi ⇒아름다움美 beauty ⇒믿음信 faith
2.법보法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Dharma ⇒哲學的 Philosophical ⇒ 知的 intellectual
전미개오轉迷開悟 Going from ignorance to enlightenment ⇒지혜慧 prajna ⇒진리眞 truth ⇒ 이해解 understanding
3.僧寶 The Precious One which is the sangha ⇒ 倫理的 ethical ⇒의지적 意的 mental
지악수선止惡修善 Putting an end to evil and practicing good ⇒계율 戒 sila ⇒선함善 good ⇒실천行 practice
※.신성함聖 holiness moksha —해탈解脫 liberation

일반적으로 인간의 의식은 지성, 감정, 의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쁨이나 고통은 감정에서 나오고, 사물에 대한 인식은 지성에서 나오고, 행동은 의지에서 나온다. 불교의 목적이란 다름아닌 ‘어떻게 하면 이 세가지를 조화롭게 사용해서 이 세상에 도움을 줄 것인가? 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의식의 균형을 상실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지성, 감정, 의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거나 조화롭게 쓰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의 본성을 발견하는 데 장애가 될 뿐이다. 그리하여 바른 길을 잃어버리고, 내 인생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고통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여기에 세가지 처방을 제시한다. 바로 불 • 법 • 승 (佛,法,僧) 삼보가 그것이다. 이 처방들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종국에는 우리의 본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불보 佛寶 The Treasure od Buddha
보통 불교에 입문할 때, 우리는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만 믿는다. “아! 나는 부처님을 사랑합니다. 부처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불보는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인 경험을 영적인 수행과 연결시켜 깨달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영적인 수행을 계속하면 생각은 더욱 안정되고 맑아져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과 생각이 점점 균형을 찾아가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균형이 잡히면 고통이 사라지고 행복이 찾아온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좀더 분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 맡으며 맛보고 느낄 수 있게 되며,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고 개가 짖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운문雲門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화장실에서 나오던 운문 스님이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스님이 눈은 똥을 치울 때 쓰는 긴 나무막대기와 마주쳤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똥막대기( 乾屎橛)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진리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바로 순간순간의 삶, 이것이 불보이다. 佛寶에서 얘기하는 아름다움이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때, 생각이 끊어질 때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바깥의 모양이나 형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제자 한 사람이 아주 수준 높은 박물관 戱畵展에 나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전시회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유난히 화제가 되는 예술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날 전시회에 구경 왔던 많은 사람들은 그 앞에서 환성을 내지르며 떠날 줄을 몰랐고, 다들 멋있고 아름답다고 이구동성이었다. 박물관 측에서도 그 작품을 걸어놓기 위해 큰돈을 지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에 멀리서 그것을 보았을 때 도대체 무엇을 표현해놓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 작품은 액자 안에 낡고 해어진 양말 한 켤레를 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게 뭐야, 도대체 이 헌 양말 한 켤레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뜻 보면 하잖게 보일 수도 있으련만, 사람들은 왜 저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가.
잠시 후 나는 왜 사람들이 그 작품에서 그토록 큰 감명을 받는지 깨달았다. 다름 아니라 그 양말 속에는 한 인간의 고단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양말의 주인은 저렇게 양말이 헤지고 닳도록 걸어 다녔을 것이다. 한 인간의 수많은 고통의 흔적들이 헤진 양말에 그대로 만아 있는 것이고, 이 양말 작품은 바로 그 점을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작품에는 우리가 소홀히 하는 우리네 일상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액자에 걸린 양말 자체는 낡고 더러웠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아주 아름다웠던 것이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운문 선사는 바로 이 양말이 담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의미를 가르치신 것이다. 아름다움이 이처럼 겉모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스트로 그것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면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이 나타난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나 있거나 슬프거나 기가 죽어 있으면 창밖에 새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한다 해도 단지 시끄러운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외부의 조건은 항상 일정하지 않아서 언제나 변하게 마련이며, 그때마다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추하게 보이며, 아음속이 분노로 가득하면 칭찬조차도 욕으로 들리게 마련이다.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침이 넘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움직이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삼매의 본래 의미이다. 앉아 있든, 서 있든, 누워있든, 운전을 하든, 누군가와 얘기를 하든 단지 ‘그것을 할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다. 그런 때에야 말로 일상에서의 모든 것이 진리이다 온 우주가 이미 그 자체로 진리이다. 그리하여 이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움이다.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으면 믿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을 때 이 세상의 마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시며, 이 세상이 이미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참 自我’를 믿는 것이다. 우리자신이 우리의 본성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부처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믿을 수 있으며, 나무, 하늘, 부처, 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언젠가 누가 나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충격을 받은 듯 “아니, 어떻게 스님이 신을 믿느냐?” 고 되 물었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눈, 귀, 코, 혀, 몸, 마음 이 모든 것을 믿습니다. 파란 하늘, 푸른 나무, 짖는 개, 향냄새 이 모든 것도 믿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신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 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당신과 모든 것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상을 칠 때, “탕!”하고 들리는 소리와 나는 둘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나와 우주는 하나이다.
부부가 서로 함께 각자의 본성을 믿는다고 하자. 그러면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헤어진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각자의 본성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믿게 되므로 나와 모든 것은 이미 하나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바깥의 어떤 대상(예를 들면 신)을 믿는 종교는 일단 그 대상과 내가 분리된다. 여기에 내가 있고 신은 저기에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로부터 분리된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불교는 주체를 믿는 종교다. 아니, 주체도, 객체도 없다. 종교라고 할 수도 없다.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다. (心卽佛佛卽心)”
나타난다. 따라서 불보란 순간순간 어 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부처님을 강하게 믿는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나의 본성을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부처니까 부처가 바로 나이다. 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이미 진리이며 아름다움이다. 똥 조차도 아름다우며,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부처이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진정한 나의 길이 내 앞에

법보 法寶, The Treasure of Dharma
부처님은 모든 고통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서 온다고 가르쳤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지식과 고통은 비례하게 마련이어서 아는 것이 적으면 고통도 적게 된다. 우리가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아무 문제가 없다. ‘오직 모를 뿐’은 우리의 근본적인 곳, 즉 생각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마음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지식이란 엄밀히 따져보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그대로 믿고 따르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 “하늘이 푸르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나무가 파랗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푸르다”거나 “내가 파랗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인간들이 아주 오랜 옛날 누군가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 했을 터이고 이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이 말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을 뿐이다.
개, 고양이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나 고양이 스스로 “나는 개다”. “나는 고양이다”고 말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다음 서로 자기가 만든 것이 옳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색깔, 모양, 시간, 공간, 이름, 원인과 결과, 삶과 죽음, 가고 옴 등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본래 이것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나오며, 그것도 내 생각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다 미국 사람들은 개를 ‘도그(dog)’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개’라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개에게 한번 물어보자.
“너 정말 개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다. 지혜를 갖고 싶다면 우리는 먼저 생각이 일어나기 전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지점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지점을 마음, 본질, 물질, 하나님, 하느님, 자기자신, 부처, 영혼, 의식 등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본래 그 지점은 생각 이전의 상태로, 이름과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 입으로 말하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기 생각에만 집착해 자기만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근원적 이유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집착해 있다. 집착에 사로잡히면 상황을 맑게 볼 수 없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원해.” “담배를 피우면 좀 기분이 나아 질 거야” “딱 한 잔만 마시고 끊어야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이런 습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집착이 일어나면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감정이나 충동이 빚어내는 욕망에 따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면 왜 그때 그러한 감정과 충동이 생겼는지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아, 지금 나는 이것을 하고 싶어하는 구나.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이야, 여기에 휘둘리면 단지 고통만 있을 뿐이야. 내 삶에, 내 수행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우리가 이렇게 욕망과 감정을 맑게 인식할 수 있다면 이 세계와 나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의 욕망이나 감정이 우리를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른 견해라는 의미의 ‘정견定見’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이 고통을 부른다고 했다. 무지와 무명이란 무엇인가.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 무지와 무명을 걷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선 앞서 얘기한 것들을 지식이 아닌 지혜로 만들어야 한다.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아닌 단전으로 씹고 또 씹어야 한다. 그러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파랗다’가 다 내 것이 된다.
마음이 열리면 무명이 걷히고, 지식은 지혜로 바뀐다. 그러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지혜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지적인 측면과 불교의 가르침이 연결되는 접점이다. 이것이 법보이다..

승보 僧寶, The Treasure of Sangha
승보는 불도를 실천해나가는 윤리적 측면이다. 부처님과 법을 통해 순간순간 바른 삶을 갈고 닦는 것이다. 삶이 바르다는 것은 나쁜 습관을 없애고 모든 생명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려면 중심이 잡혀서 마음이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이 맑게 보이는 법이다. 그러면 중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저절로 보이게 되며, 삶의 바른 방향을 얻게 된다. 그것이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순간순간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게 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왜 내가 저것을 원하지?”
“내가 추구하는 이런 삶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냐?”
이렇게 된다면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기본적인 지침이 필요하다. 계율戒律d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지침은 언제나 고통에서부터 중생을 제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산스크리트로 ‘실라sila’라고 부른다. 계율은 바른 길 혹은 ‘법Dharma’을 의미한다. 바른 길은 같은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바른 삶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가 불법 수행에 입문할 때 보통 삼보에 귀의 한다고 한다. 이때 받는 5계五戒는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부처님이 만든 것이다. 살생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음탕한 생활을 하지 말며, 술, 담배나 마약을 하지 말라 등등이다. 이런 계율들은 우리가 깨끗한 마음을 가져서 바른 삶을 살도록 이끈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제자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제자들은 이제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누가 그들을 이끌 것인지 걱정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께서 돌아가시면 누가 우리를 가르치십니까?”
부처님이 대답했다.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이다.
자기 자신과 계율을 등불 삼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계율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열매가 맺힌다. 봄에 꽃이 피지 않으면 가을에 수확을 할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돌고 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봄에 꽃이 피지 않고 가을에 수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여름에 눈이 내리면 큰 문제가 된다. 자연 속에는 스스로 항상 똑 같은 법칙이 있다. 자연은 그 보이지 않는 법칙에 따라 돌고 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계율이란 바로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 법칙에 따라 살지 못한다. 미국 선원에 있을 때 수행을 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우선 술이나 담배를 끊으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나는 자유롭고 싶어 수행을 하는데, 왜 좋아하는 술, 담배를 끊으라고 하십니까?”
나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술이나 담배는 몸에 해롭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마음 공부에 도움이 안 된다.
그렇게 말해도 어떤 사람들은 “상관 없어요. 나는 이미 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에요.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을 쓰지 않아요” 하고 고집을 피운다. 그러면서 건강이 나빠지고 정신상태가 흐려지면 고통스러워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기 맘대로 하겠다는 자유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자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세상에 큰 문제가 생기 듯,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많은 고통을 안겨준다.
숲에 서 있는 나무는 고통을 만들지 않는다. 흐르는 물에게는 고통이 없다. 이 세상 아무것도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것은 없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조차 인간처럼 그렇게 많은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다. 동물들은 오직 그들의 상황,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응하며 살기 때문이다. 아니, 순응해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이면서도 가장 많은 고통에 시달린다. 어떤 이념이나 관념에 집착한 자유만을 부르짖을 뿐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의 감정 ‘나’의 조건,‘나’의 상황에 대해서만 생가하고, 좋은 감정, 좋은 시간, 좋은 조건만 원한다. 오직 욕망뿐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럴 때 계율에 따라 수행을 열심히 하면 우리 마음의 에너지는 점점 더 맑고 강해질 것이다. 좋은 상황이 닥치든, 나쁜 상황이 오든 문제될 것이 없다. 순간 순간 바르게 살면 되는 것이다.
좋은 상황에 집착하지 말라. 나쁜 상황에도 집착하지 말라. 순간순간 이 상황을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 쓴다면 필히 좋은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진정한 좋은 감정과 조건에 마주서게 될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삶’만을 평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계율을 자키는 것이다. 그것이 대자대비의 길이고 대보살의 길이다. 단지 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대자대비심이 과연 무엇인가?
여기, 대자대비심이 과연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얘기가 있다. 옛날중국에 慧忠 스님이란 분이계셨다. 그는 자비심이 많아 하찮은 미물도 소중히 여기는 분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주 가난했지만 신심이 두터워서 절 생활도 마다하고 토굴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어느 늦가을, 혜충 스님은 겨울 동안 먹을 양식과 옷가지들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에 나섰다. 손에 발우를 쥐고 온 발이 부르트도록 며칠 동안 마을을 헤맨 끝에 다가올 겨울에 대비할 양식과 옷가지들을 얻어 어깨에 메고 산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침 강한 비바람이 불어댔고, 혜충 스님은 경사진 언덕을 만나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선적들이 나타나 그를 에워싸고는 칼로 위협했다.스님의 키를 넘는 장정들이 무려 다섯 명이 나 됐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스님을 위협했다.
“이 늙은 중아,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스님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에 먹고 입을 양식과 옷가지라오.”
“아하, 이제 보니 거지 중이로구나, 자, 보아라. 우리도 거지다. 네가 도를 닦는 중이라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라. 가진 것을 몽땅 내놓아라.”
산적들은 엄포를 놓았지만 혜충 스님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나쁜 업에 갇혀 살고 있는 산적들에 대한 안쓰러움만이 가득 찰 뿐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스님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남김없이 빼앗았다.
“자, 이 늙은 거지 중아, 생각 같아선 네 목숨도 빼앗고 싶지만 그냥 살려두겠다. 하지만 네가 입은 옷은 벗어줘야 하겠는걸.”
산적들은 스님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그리고는 스님을 차가운 땅바닥에 눕혀 손목과 발복을 풀로 묶어버린 후 유유히 마을로 사라졌다.
사실 풀로 묶인 몸이야 마음만 먹으면 쉽게 풀 수 있었지만 스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비바람이 치는 차가운 땅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났다. 다음날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운 스님의 귀에 언덕위로 올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마치 군대가 밀려오는 듯 우렁찬 소리였다. 다름아닌 황제와 고관대작들을 수행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사냥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황제가 지나가다가 땅바닥에 누워있는 알몸의 늙은 중을 발견했다. 알몸을 보이는 일이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더구나 황제 앞에서 알몸을 보안 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웬 중놈이 이 아침에 발가벗은 채 누워 있느냐. 여봐라, 당장 내 앞에 있는 저 발칙한 중놈을 죽여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군은 재빨리 스님에게 달려가 장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스님의 눈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자, 황제를 목욕한 죄로 이 칼을 받아라.” 장군이 칼을 겨눠 스님의 가슴에 내리치려는 순간 혜충 스님은 연민에 가득 찬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상관없소만 먼저 내 몸에서 이 풀을 풀어주오. 내가 당신의 칼을 받아 죽는 순간 고통으로 몸부림을 칠 텐데, 그러면 이 풀들이 땅에서 뽑혀져 나와 나와 같이 죽게 되오.”
두 손으로 칼을 겨눠 쥐고 있던 장군은 스님의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장검을 쥐고 있던 손을 거두고 스님을 노려보았다. 장군은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다. 이 노승의 눈은 그야말로 연민의 정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죽음을 앞둔 두려움이나 억울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군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수많은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노승은 목슴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는커녕 한 낱의 풀 한 포기가 다칠까 염려하고 있지 않은가? 혜충 스님의 평온한 얼굴과 연민으로 가득 찬 표정은 장군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마침내 그는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아니, 스님께서는 어찌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도 하찮은 비틀린 풀 한 포기 따위에 마음을 쓰십니까?”
스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은 살아 있는 어떤 미물도 죽이지 말라고 하셨읍니다.”
멀리서 장군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는 영문을 몰라 더욱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너부터 죽이겠다.”
장군은 천천히 황제에게 걸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황제는 놀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저 스님이 정녕 하찮은 풀 한 포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하룻밤을 꼬박 알몸으로 누워 있었던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더라는 말이더냐.?”
황제 역시 충격을 받았다. 황제는 지난 며칠 동안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죽이고 왕궁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나는 수많은 생명들을 단지 심심풀이로 죽였건만, 스님은 자기 녹숨으 위협을 받는데도 하찮은 미물을 죽일까 걱정하는구나.”
혜충 스님 앞으로 다기선 황제는 바깥의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마침내 무릎을 끓고 직접 스님의 몸에 묶인 풀을 조심스럽게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겉옷까지 벗어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스님, 부디 저와 함께 왕궁으로 가시어 죄 많은 저를 인도해주십시요.”
혜충은 황제를 따라 왕궁으로 가서 마침내 國師가 되었다.
계율이란 우리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계율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율이란 바른 방향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계율을 잘 지킨다면 안이든, 바깥이든 점검할 필요가 없다. 순간 순간 그냥 지키기만 하면 된다. 계율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것 저것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우리의 본성을 100퍼센트 믿는다면 어떤 장애나 걸림을 갖지 않고 살 수 있으며, 그럴 때 나오는 행동이야말로 진정 바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불 • 법 • 승 삼보는 여러 측면에서 각각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본래 삼보는 2천 5백 년 전 생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과(佛寶) 그가 행했던 실제 법문(法寶), 그리고 당시 승려와 신도(僧寶), 이것을 합쳐 부처 생존에 존재했던 것들이라고 해 ‘진체삼보(眞體三寶)’라고도 한다. 즉, 초기 형태의 삼보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생존하지 않는 오늘 날 삼보는 이와 다르다..
우선 부처님의 상징인 불상이 제각각이다. 한국과 중국은 금불상이지만 스리랑카와 태국은 석고불상이며, 일본 불상은 한국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이 노랗든, 하얗든, 소박하든, 어쨌든 다 부처님의 형상(佛寶)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오늘날 8만 4천 가지 경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통해, 도서관에 보관된 부처님 경전을 통해 형상을 통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인다. 이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법보이다. 또 승보란 본래 부처님 생존 당시의 승려들과 신도들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 세계에 수많은 불교 공동체가 있다. 캄보디아, 베트남, 스리랑카,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미국, 캐나다, 폴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 스페인, 그리고 리투아니아에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승보이다. 이것을 현재 존재하는 삼보라는 의미에서 ‘현존삼보(現存三寶)’라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본래 형태의 불법승(佛法僧)은 모두 사라졌다. 오늘 날 우리가 만나는 본래 형태의 불법승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절마다, 모두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불법승인가.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불법승은 본래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불(佛)이고, 우리 마음이 순간 순간 맑게 빛난다면 그것이 법(法)이다. 또 우리 마음이 어떤 상황에서도 걸림이 없다면 그것이 승(僧)이다.다시 말해 佛은 순수한 마음이고, 法은 맑은 마음이며, 僧은 순간순간, 걸림 없이 모든 중생들을 돕겠다는 행동이다. 삼보는 이처럼 하나이다. 이를 ‘일체삼보(一切三寶)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걸림 없는 마음 아닌가? 오래 전에 한 스님이 중국의 조주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차나 마셔라.”
“무엇이 법입니까?”
“차나 마셔라.”
말고 깨끗하고 걱정 없는 마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불법승이 된다. 한자로 우리는 이것을 ‘실용삼보(實用三寶)’라고 한다. 즉 삼보를 실천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평상심’이다. 조주 선사는 어떤 종류의 질문이 와도 “차나 마셔라”라고 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당장 차를 마셔라. 차가 싫으면 코카콜라나 밀크쉐이크를 먹어도 좋다.(하하하)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조주 선사의 진정한 가르침, 부처님과 모든 위대한 스승들의 높은 가르침을 깨달으면 된다. 그러면 실용삼보를 얻을 수 있다.
불법승은 진 • 선 • 미(眞•善•美)와 바꿔 설명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진선미는 과연 어떻게 불법승과 관계가 있는가? 또 진선미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아름다움에 대해 살펴보자. 여러분은 누구나 한번쯤 미스코리아니, 미스 유니버스니 하는 미인대회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저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점수를 준다. 여기여 보는 것은 단지 여자들의 얼굴과 몸이다. 그러나 몸과 얼굴이 아름답다고 해서 행동이나 마음까지 아름다울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몸이나 얼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생각은 어떤 모양일까?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어떤 종류일까?
보통 우리의 마음은 무지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좋고 싫음을 만들어 스스로를 추하게 한다.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무지가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진실한 아름다움, 미美가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선善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사람들은 이미 마음속에 선함을 가지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영화관에 가보면 안다. 착한 주인공이 악당과 싸우는 영화를 본다고 하자. 어떤 장면에서 주인공이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맞고 악당이 결국 이길 것 같다. 주인공이 맞는 동안 관객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저 악당을 쳐부숴라.’ 극장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마음이다.
아무도 선한 주인공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결론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영화관을 빠져나온다.
왜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인데, 착한 사람에게 복을 비는 한마음이 되는 것일 까.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거둡 말하지만 ‘참 나’와 우주는 결코 다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 역시 고통 받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종교는 ‘원죄’를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일으키는 ㄱ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업業’ 일 뿐이다. ‘마음의 습관’일 뿐이다. 업은 통제할 수 있고 없앨 수도 있다. 불교는 어떠한 원죄 의식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공空’이므로, 우리의 업고 공하다. ‘原罪란 공이 아니라 ‘어떤 것’ 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타고난 우리의 본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진정한 선의는 옳은 방향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방법은 부처님의 계를 실천함으로서 가능하다.
어느 날 제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언제나 진실과 선행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마냥 착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만 당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선행이란 ‘나, 나의 것, 나를(I, MY, ME)’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성은 하나이므로 나와 남이 다를수 없읍니다. 선을 행하면 우리 자신의 고통도 없어지고 다른 사람의 고통도 없어집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항상 슬프다. 이 세상은 늘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느낀다. 항상 다른이의 괴로움을 경계 없이, 분별없이 받아들인다. 이 슬픔은 결국 다른 사람을 돕는 연민의 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항상 여섯 개의 고리를 가진 긴 막대기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들어간다고 서원 誓願을 세운 분이다. 여타 종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지옥에 간 사람들조차 구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지장보살은 대원본존大願本尊 지장보살이라고도 한다.’대원’은 큰 서원이다. 마지막 중생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될 수 없다면 고통의 바다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 마지막 중생까지 고통에서 건져낼 때까지 몇 번이고 세세생생 다시 태어나 그들을 구원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誓願이다.
‘本尊’이란 본래 우리의 본성,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대원본존 大願本尊’이란 고통에서부터 모든 생명을 구하겠다는 위대한 서원, 즉 우리의 본래 얼굴, 본성, 본체라는 뜻이다. 이 대 서원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큰 약속은 이미 우리 안에 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승 佛法僧 삼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 마음에 자유를 갖게 한다.
불법승 삼보는 특별한 어떤 ‘거’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순간순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 그 자체이며, 진리를 얻어 바른 길을 간다면 법을 얻는 것이다. 그럴 때 무든 중생들이 이 고통의 세계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걸림 없는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승가의 삶이다.
거룩한 삼보에 귀의한다고 할 대 이 거룩함은 사실 거룩한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 순수하고 맑은 것이 진정 거룩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말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단지 아름이 없는 어떤 것을 부르기 위한 ‘말’일 뿐이다. 만물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한 어떤 생각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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