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7,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삼법인

삼법인 . 三法印 The Three Seals of Extenence
제행무상인 . 諸行無常印 All Compounded things are impermanent.
제법무아인 . 諸法無我印 All Dharmas are without self-nature.
열반적정인 . 涅槃寂靜印 Nirvana is perfect stillness
동양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모든 공문서에 붉은 도장을 찍어왔다. 이름이 새겨진 도장에 인주를 묻혀서 서류에 찍는 것이다. 이렇게해야 문서가 진짜라는 것이 공표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하면 우리의 의식에는 세 개의 기본 도장이 찍히는데, 이것을 三法印이라고 한다. 세 개의 도장이되는 법문의 가르침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첫 번째 도장에 대해서는 이미 배웠다. 바로 '만물은 항상 변한다 諸行無常'는 것이다. 우주 만물의 모든것은 변한다. 모든것은 조건으로 부터 나와서 일정기간 머물다가 꿈으로 사라진다. 이것을 깨달으면 모든 일에 쉽게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하여 고통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변하지 않는것, 오고 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본성이다.
그것은 어떤것이 아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사물과 마음의 모든것이 조건에서 나오고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경험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도장처럼 박힐 것이다.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본래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법, 원칙, 아이디어, 믿음, 인간, 개, 고양이, 나무, 산 등 우주의 모든것은 '自性' 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이름과 모양은 끊임없이 변하고 변한다. 모든것은 공에서 나오고 결국 공으로 돌아간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므로 자아인 실체가 없다. 諸法無我' 이런 깨달음이 우리의식에 찍는 두 번째 도장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므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오고 가는 것도, 부처님도, 하느님도, 본질도, 존재도, 마음도 없다.그것들이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당신은 알고 있는가? 불교는 모든 법, 모든 계율이 완전한 정적의 상태에서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반은 단지 완벽한 정적의 상태를 일컫는 이름이다. 모든것은 완벽한 정적과 소멸에서 나와 결국 공과 소멸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것을 알게되면 마지막 도장을 받는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 생사를 윤희하는 고통을 벗어난 피안이다. 성경에서는 '침잠하라. 그러면 신이라는 것을 알리라' 고가르친다. 불교에서는 '모든 법 Dharma은 완벽한 정적에서 나온다. 고 가르쳤다. 신을 찾고싶으면, 또 부처를 찾고 싶으면, '참 나' 혹은 '절대'를 찾고 싶으면 당신은 이 완벽한 정직과 소멸의 상태를 얻어야 한다. 이 정적이란 진정한 공이다. 우리 마음과 우주의 본질이다.
14세기에 지어진 한 기독교 시는 이것을 아주 맑게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은 깨끗하고 텅 빈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모든 모양이 나타난다.
그것이 본성품이 되어
밝음과 어둠, 고요함과 폭풍이 된다.
The God who is pure emptiness 空
Is created as form 色
Becoming substance, light and darkness,
The stillness and the storm.
본래 이 경지에는 아름도 없고 모양色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리다는 분별심을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공空의 상태에는 반대되는 것이 없다. 오고 가눈 것이 없다. 그것이 '참' 나'.
소슴불교는 이 삶도 죽음도 없는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인 열반을 얻기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승불교 가르침의 목적이다.

삼학 . 三學 Three Kind of Practice
계율 . 戒 Sila-Precepts
삼매 . 定 Samadhi-Meditation
지혜 . 慧 Prajna- Wisdom
소승불교의 세 가지 도장을 받고 싶으면 세가지 종류의 수행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 수행을 섞어서 제대로 조화롭게 쓰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계 戒
소승불교 수행은 계율 戒律을 간조한다. 계울이라고 어렵고 딱딱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도로 표지판 아라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차를 몰고 간다고 치자, 길을 가다 보면 어디서 고속도로가 시작하는지, 어디서 돌아 나가야 하느지 알려주는 표지판들이 많이 서 있다. 만약 이 표지판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가면 대전가는 길을 놓쳐버리고 만다. 대전가는 것은 고사하고 아니면 부산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우리 마음속엔 '아, 나는 참 나를 찾고 싶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을 도우며 살고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일상에 매이다보면 이런생각은 쉽게 사라진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수 자신이 아니라 뒷자석에 앉아 있는 손님이 되는 격이다. 손님이 '이리가라, 저리가라'하고 지시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기자신을 다잡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계율은 바른 삶으로 가기위한 명확한 방향을 의미한다. 계율은 법을 의미하고 법은 우주의 바른길을 말한다. 바른 길을 갖는다는 것은 맑은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전도의 정어, 정업, 정명, 수생은 이 계율 수행을 대표한다. 계율을 지키면 자신의 조건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우리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지식도 지배할 수 있다. 반대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으면 지식도 통제할 수 없고 고통이 나타나게 된다.
지식을 지배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우리 욕심이란 것은 결국 지적인 마음에서 나온다. 모든생각은 욕심이며, 욕심은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 우리감정은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지식은 항상 분별하게하고 어떤견해에 집착하게 한다. 지식이 많을수록 복잡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며, 지식이 만들어내는 '좋은것' . '나쁜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마음은 항상 움직이게되고, 끊임없이 내가 가진 강한 감정들, 다른사람과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의해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끌려다니게 된다. 이렇듯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좋고 싫은 감정들에 대해 강한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중심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힘들어진다.
바로 이 때문에 계율이 팔요하다. 계율이란 나의 욕심과 마음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이다. 계울 수행을 하면 단전은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며 다른 사람을 돕는것도 가능해진다.

정 定
바른 참선수행이란 언제 어다서나 항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느낄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참선 수행에 대한 어떤 관념이나 생각에 집착하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은 참선아란 그저 앉아 있으면서 하는 어떤 강한 몰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경우, 참선의 목적이 몰입을 가져오는 좋은 감정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참선이 항상 완벽한 정적과 축복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오, 지금 모든것이 평화로워, 너무 좋아.' 이런종류의 생각은 아주 나쁜 병이다. 그것은 좋은 상황에대한 일종의 집착이므로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수행에 집착하면 지혜는 성장할 수가 없으며, 우리의 지식은 각종 다양한 상황에서 다른사름을 돕는데 제대로 기능할 수가 없다.
팔정도의 정정진, 정정 수행이 참선수행을 대표하는 실천 지침이다. 깊은 수행을 경험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운전할 때나 먹을 때나 얘기할 때나 일할 때나 가족과 같이 있을 때나 언제나 평정한 마음 상태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평상심이라 부른다.
내 외국인 제자 중 한 사람은 항상 깊고 조용한 상태에서의 참선만을 원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시끄럽게 놀면 "조용히 해라, 내가 명상중이라는 것을 모르느냐"면서 화를 내고 참문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집에서도 가족들은 그가 참선중이면 살얼음판을 걷듯 매우 조용히 해야했다. 얼마 뒤 가족들은 참선과 불교를 나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참선은 진정한 참선이 아니다. 참선을 특별하게 만들 뿐이다.매일 매일 일상을 살아가면서 평상심을 갖는것, 그것이 진정한 참선이다. 그것이 수행의 진정한 본질이다.
혜 慧
하늘은 스스로 "하늘이 푸르다"고 한 적이 없다. 우리가 "하늘이 푸르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하늘이 푸르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식이다. 다른사람, 즉 누군가의 생각이다.
한국사람들은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The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이 아오이데스" 라고 한다. 폴란드 사람은 폴란드 말로,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 말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누군가의 생각이다. 하늘이 결코 이런식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우주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말이나 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으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야만 이 세상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이다. 그때서야 나무를 볼 때 오직 푸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설탕을 맛 볼 땐 오직 달콤하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모든 것은 이미 진리이다. 우주는 이미 매 순간 모든 것이 진리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직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면 이러한 진리가 바로 나의 것이다. 산스크리트로는 '반야 般若'라고 한다.
소승불교의 목표는 열반을 얻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공하다는 것을 얻으면 그 자체가 이 세상 우주, 우리모든 마음의 본질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올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진리를 사용하여 이 고통스런 세계를 구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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