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14,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연기

연기 . 緣起 . Dependent Origination

종연생 . 從緣生 . To arise from conditions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종연멸 . 從緣滅 To be extinct from conditions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아유종유 . 我有從有 If I exist, that exists.
내가 존재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아멸종멸 . 我滅從滅 If I cease to exist, that ceases to exist.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뉜다. 마음은 언제 나타나서 어떻게 변해 언제 사라지는가? 이런 생각은 시간에대한 생각이다. 이에 비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여기 책상에 컵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지팡이거 있는 것이가, 없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인가? 대승불교는 바로 이 공간과 관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인간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여기 이 앞에 놓은 이 책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이에 비해 소승불교는 이 책이 언제 나타났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고통이 언제 나타났는가? 마음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무슨일이 있어났는가? 한번 물어보자.
이 세상은 언제 시작 했나? 우리의 이 '마음'이란 것은 언제 비롯되었나.? 모든것은 이미 여러조건이 맞아떨어져 나온결과라고 했다. 어떤조건이 나타나면 어떤결과가 나타난다. 조건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내가 여기 있으면 뭔가가 저기있다. 내가 여기 없으면 뭔가도 저기없다. 다시말하면 이 세게는 내가 만드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개는 개의 세계를, 고양이는 고양이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는 세계는 다르다.
여자들은 쥐를 보면 소리를 지르지만 고양이는 쥐를 보면 좋아한다. "우와! 내 밥이 나타났다."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면 나는 좋은 세상을 가지는 것이고, 나쁜세상을 만들면 나쁜세상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면 이 세상은 내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도 사랒진다.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저기에 뭔가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죽어도 하늘에 있는 태양은 없어지지않는데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태양이 아니다. 누군가의 태양이다. 누군가가 현재 보고있는 태양이다. 본래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면 태양도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 그것이 부처님의 1단계 가르침이다.
LA의 달마 선원 Dharma Zen Center에 어느 날 누가 찾아왔다.
옷도 아주 잘 차려입은 긴 수염을 기른 한국신사였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는 물론 서양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물리학, 과학, 심리학, 문학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책에서 읽은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죽은 언어였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내 컵을 가르키면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어디서 왔읍니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가게에서 사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을까요?"
나는 별 생각없이 이렇게 말했다.
"공장에서요."
"그러면 그전에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공장장이 공장에서 모든것을 지휘해서 컵을 만들었겠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태양, 달, 별, 산, 강, 심지어 인간도 '누군가가 ' 만들었겠네요."
"...... 네."
순간 나는 그가 진리를 찾기위한것이 이니라 어떤 특정한 생각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 그럼 이 세상 만물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신이오."
내가 불쑥 이렇게 말하자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이젠 내가 하나 여쭙겠소. 여기 무지개가 있다고 칩시다. 그건 누가 만든 거지요? 하느님이요? 부처님이요?"
그는 잠간 멈뭇거리더니 "태양빛이 만든것이 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양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둣 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무지개는 태양, 물, 그리고 우리의 눈 이 세가지가 어루러져 만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있으면 무지개는 저기 있읍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읍니다. 여기 다섯사람이 있다면 다섯 개의 무지개가 있는거지요.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를 봅니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무지개는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들의 무지개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무지개는 이처럼 서로 다릅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이 컵은 나한테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열 사람에게는 열 개의 무지개가 있고, 스무 사람에게는 스무 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내 무지개는 내가 만든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고, 이 쪽 방향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다. 서울에 앉아서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라고 해봐야 그가 볼 수 있는 그의 무지개는 없다.
무지개는 어떤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과 함께온다. 물, 수중기, 빛, 사람의 눈과 의식이 합쳐져서 생긴다. 이런 조건들이 있을 때라야만 무지개는 존재하는 것이다. 조건과 분리된 존재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고 말한다.
"야, 여기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까 내가 존재한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무언가가 저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라지면 내 세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세계를 갖게되지만 나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다름아닌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만든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만드는 것들에 휘둘린다.
개미를 통해 한번 설명해보자. 그 수많은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빵부스러기, 나무토막, 잎 부스러기를 옮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작기도 해라. 이처럼 작은 세계도 있구나" 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물 한 방울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물 한 방울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의 미생물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자라고 죽는다. 아주 작은 세계이지만 미생물에게는 그세상이 전부이다.
여러분이 우주비행사가 됐다고 상상해보자. 우주선 창밖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이고 참 작구나." 우주선까지 갈 것도 없이 비행기 창문에서 내려다봐도 같은 생각이 들것이다. 산, 나무, 강, 빌딩...... 땅에 있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들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아울러 나의 삶을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도 만든다. 이 모든것들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현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중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말을 설사 받아들인다 해도 현재가 없다는 말까지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사실은 큰 착각이다. 현재가 어디있는가? 현재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그건 과거이다. 현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 뿐이다.
내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시간은 다른 사람의 것이아닌 바로 나의 시간이다. 맞벌이하는 아내를 가다리는 남편의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은 오후 5시에 민나가로 했다. 그런데 6시 반이 됐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남편은 점점 화가난다. 이때 화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고 6시 반은 '그의' 시간이다. 아내는 같은 시간, 그녀의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라는 남편의 시간은 너무 천천히 지니가서 고통의 시간으로 바뀐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아내와 남편의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왜 다른가?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좋게 혹은 나쁘게, 행복하게 혹은 슬프게 만든다. 오직 우리의 이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삶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저녁 8시에 디스코 장에 간다고 하자. 친한 친구들과 춤을 추는 아주재미있는 파티이다. 모두 줄겁게 놀다보니 훌쩍시간이 흘러벌써 11시 반이 되었다. 집에 갈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한 달이나 못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마구 뛴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그때 한 시간은 한 달이나 1년처럼 느껴질 것이다. 디스코 장에서 춤을출 때 느끼는 시간과 공항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느끼는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다 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ㅇ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은 또한 공간을 만든다. 미국과 한국 모두 동서남북이 있지만 미국에서 보는 동서남북과 한국에서 보는 동서남북은 다르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나의 동서남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나의 동서남북은 어디로갈까? 죽은 사람에게 동서남북이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올려 오른쪽이라고 하면 반대편 사람에겐는 왼쪽이다. 큰방에 1백 명이 들어서 있다면 각자의 오른쪽과 왼쪽이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전쟁과 갈등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들만의 '왼쪽'과 '오른쪽'을 만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간이 조건과 결과를 지배한다면 시간은 원인을 지배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수평선과 수직선에 비유해보면 시간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며 공간은 수직선이다. 원인은 항상 어떤 조건을 가로질러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할 때 그 상황은 공간이다. 나의 상황은 나의 위치, 방, 관계, 집, 경험, 삶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원인은 어떤 조건, 상황을 가로질러 '고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때문에 상황이나 조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황에 집착하면 조건에 집착하고 원인은 사라질 수가 없다. 원인은 언제나 내가 집착하는 조건에 의해 불이붙어 매 순간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원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시간과 공간, 원인과 조건은 항상 같이 작용한다. 생각을 놓지 않으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이 경험에 집착하면 일종의 원인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기 때ㅜ네 상처받았다. 남자가 싫다.' 그리고 그것은 조건이 되고, 이런 원인과 조건에 집착하면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자로 인해 고통으로 얼룩진다. 그녀의 원인은 항상 조건을 가로지른다. 그녀가 어딜 가든, 이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수백권의 책도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정신과 병원 치료도 소용없다.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시간과 공간을 만들지 말라. 원인과 결과도 만들지말고 집착하지 말아라. 생각, 조건, 상황, 시간 이 모든것을 천천히 내려놓아라. 순간순간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면 원인도 점점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으로 산다면 시간과 공간을 이미 뛰어 넘은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의 삶에 다가오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만 쓰여진다. 그것이 자유이다. 불교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각자의 세계 혹은 사고방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구와 달은 태양주위를 돈다. 이것은 작은 세계로, 소천小天이라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태양계에 닿아 있다. 한 개의 태양계도 매우크다. 그런데 3천 개의 태양계가 중간 크기의 은하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3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인 우주는 광대하다. 그레 비하면 인간 세계란 아주 작다. 불교는 우리가 이런 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좁은 세게에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개미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도 그런식으로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세상에 안주하며 산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우주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언제나 남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내가 어떻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아는 것은 쉽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 또 신은 모든것을 알고있고, 천국과 에덴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악과도 안들어 "이 열매를 먹으면 죄를 받아 죽는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신 역시 어떤것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나무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부모라고 생각해봐라. 독을 만든뒤 아이들에게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이가 그것을 먹었다고 탓할 수 있는가? 인과와 연기가 주는 가르침은 재미있다. 선악과를 만든 신은 어디서 왔으며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신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힌트 하나를 주겠다.
'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이다. 입을 열면 원인이 나타나고 입을 닫으면 사라진다. 신을 만들지 말라. 부처님도 만들디 말라. 순간순간 그 어느것도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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