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7, 2012

숭산 개선사의 가르침 12 연기

십이연기 . 十二緣起 The Twelve link's the chain of Dependent Origination

무명 無名 Ignorance 감정 受 Sensation
정신구조 行 Mental formations(karma) 욕망 愛 Desire
의식 識 Consciousness 집착 取 Clinging
이름과 모양 名色 Name and form 존재 有 Existence
여섯가지 감각기관 六入 The six senses 태어남 生 Life
접촉 觸 Contact 늙고 병들어 죽음 老死 憂悲苦惱 Old age, Suffering,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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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아주 포착하기 어려운 정신 활동에서 고통을 만드는 고리를 단순화해 보여주었다. 각 고리는 이전 고리의 결과이며 그것은 조건으로 변하여 다시 다음고리를 만든다. 열심히 수행하면 순간 순간 내 마음에 사라졌다 나타나는 이 고리를 잘 볼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연기의 고리는 나타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연기의 고리는 무지무명 無知無明에서 시작한다. 무지 無知란 이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아주 간단 하다. 이 세계가 무상하다는 것을 모를 때, 즉 이새상은 항상 변한다는 것을 모를 때 우리는 모든것이 영원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무명 無明은 우리 앞에 펼쳐진 현상을 실체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 욕망, 감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명은 우리를 어떤 사고 혹은 정신구조로 이끈다. 이 정신구조란 이생에서 혹은 전생에서 길러진 강한 습관의 힘, 즉 업 (行, karma, mental formation) 이다. 습관의 힘을 통해 의식(識, consciousness 이 나타나는데, 이 의식이란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게 하는 씨와같은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생각과 의식은 이름과 모양 (名色, name and form)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일단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면 '나'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낸다. 여섯가지 감각(六入, six senses;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촉감(觸, contact)의 세계 혹은 이름과 모양의 세계와 접촉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受, sensation) 습관적 경험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다. 거기서 욕망(愛. desire)이 나와 감각에 달라붙게(取, clinging)되는 것이다.
'나는 저것을 좋아해, 나는 이것 아니면 안 돼, 나는 더 많이 원해, 더 많이 필요해.' 이런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이제 '나'라는 것이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서 여섯가지 감각을 통해 이 새상에 집착하게 한다. 그러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有, exisitence)한다'. '나는 듣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생각이 삶(生, life)를 만들고 새로병사(生老病死, old age, suffering, death)를 민든다. 그것이 고통의 세계이다. 그것이 12연기이다. 부처님은 고통을 버린다는 것은 이들 각각의 고리를 만드는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단순 명쾌하다. 12연기는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모두 극도의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마음속에 무지가 나타나면 삶과 죽음이 나타난다. 내가 나의 고통을 만든다. 무지가 어디서 오는가? 무지를 민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래전 스리랑카의 한 유명한 스님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 선원에 와서 소승불교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2주일 동안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얘기했고, 12연기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강의 했다. 강의 후에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무지가 생로병사를 비롯해 모든것의 원인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과연 무지는 언제 그리고 왜 나타납니까?"
그러자 스님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무지는 저절로 나타난다고 하셨읍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학생은 만족스럽지 않은지 다시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저절로 나타납니까? 왜 저절로 나타납니까? 모든것이 모든것의 원인이 된다고 했는데, 무엇이 무지의 원인인가요?"
그러자 스님의 말문이 막혔다. 스님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듯 했지만 그동안 그가 읽었던 경정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내지 못하는 듯 했다.(하하하)
언제 왜 무지가 나타나느냐? 마음을 굳게먹고 참선수행을 열심히하면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답을 낼 수 있는가.?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무지가 나타난다. "왜 무지가 나타나느냐?" 하고 묻는 순간 나타난다. 의심을 내고 생각을 가지면 무지가 나타난다. 질문이 없으면 그것은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아직은 이해가 잘 안갈 것이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여기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성제 . 四聖諦 The Four Noble Truths
고 苦 Suffering ㅡㅡ 일체가 모두 고통이다. 一切皆苦 All things are suffering.
집 集 Origination ㅡㅡ 십이연기순환 十二緣起順觀 The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 in order
멸 滅 Stopping ㅡㅡ 십이연기의 순환을 끊음 十二緣起 逆觀 The twelve links of dependent origination, in reverse order.
도 道 The Pathㅡㅡ 팔정도(여덟가지 바른수행 방법) 八正道 The Eightfold Path
부처님은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가르쳤다.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므로 인간도 결국 변하고 사라져서 空으로 돌아갈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들은 왜 우리 삶이 많은 고통으로 채워지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고 苦, 집 集, 멸 滅, 도 道라는 사성제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물론 많은 종교에서도 삶이 고통스럽다고 가르친다.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통이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본성을 찾는 순간 그 고통이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부처님 한 분 뿐이다.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가지고 있으면 여기 내놓아보아라. 이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외부조건들 때문에 끊임없ㅇ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부처님은 고통이 어떻게 '무지'에서 비롯되는지를 가르쳤다. 무지가 나타나면 우리마음에 '나'라는 것이 나타나고 그다음 생로병사, 행과 뷸행, 태양, 달, 별 등 모든 것이 나타난다. 모든 것은 순전히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부처님의 큰 의문이었다. 아름다운 왕궁에서 온갖 화려함으로 둘러싸여 있던 이 젊은 왕자는 인간의 고통을 보았고, 스스로 이 큰 질문에 대답하기로 맹세했다. 그는 부와 권력, 가족을 버리고 6년간 고행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는 결국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그의 본성에 눈을 떴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모든 존재가 아주 많은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이 우리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고통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지가 사라지면 삶과 죽음, 늙음, 병......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다.
부처님은 이런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깨닫고 나서야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향해 가는 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우리 삶의 모든면에 적용가능한 아주쉬운 수행을 가지고 어떻게 고통을 벗어버릴수 있는지를 보았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팔정도 . 八正道 The Eightfold Path
정견(바른견해) 正見 Right View 정명(바른 삶) 正命 Right Livelihood
정사(바른생각) 正思 Right Thought 정정진(바른노력) 正精進 Right Effort
정어(바른말) 正語 Right Speech 정념(깨어있는 상태) 正念 Right Mindfulness
정업(바른 행위) 正業 Right Action 정정(바른 수행) 正定 Right Meditation

부처님은 욕망, 분노, 무지를 버리고 '참 나'로 돌아오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가르쳤다. 팔정도는 우리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병을 고치기 위한 여덟가지 각각 다른 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견 正見, 바른견해
첫 번째 약은 '정견', 즉 바른 견해이다. '바르다'고 해서 무슨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견이란 '어떤 관점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보면 수십억 중생들이 고통의 수레바퀴를 타고 돌고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모든 중생은 오직 그들의 분노, 무지, 욕망만 을 따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정견이란 욕심, 분노, 무지에 기반한 행동들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결국 고통으로 이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 마음을 휙휙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감정과 욕심을 쫓아야만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 분노, 무지에 기반한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을 때 즉각적으로 이 행동이 결국 어디로 귀착될지 깨닫게 된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해서?' 이런 질문이 우리 행동에 방향을 만들어준다. 방향이 명확하면 우리 삶 전체가 명확해지고 어떤 종류의 행동도 다른 중생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오로지 나 자신의 욕망, 분노, 무지를 쫓아 나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면 나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이 세상에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이런 질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 내가 이것을 하지?' 이것이 바로 정견이다.

정사 正思, 바른 생각
바르게 생각한다는 '정사'도 이와 매우 비슷하다. 우리 모두는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종종 그것들에 집착한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고, 조건과 상황에 매달린다. '나는 여자다.' '나는 남자다.' '나는 승려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나는 미국인이다.' '나는 일본인이다.' 이런 조건들에 집착하면 이 세상과 또 중생과 온전히 연결될 수 없다. 우리가 오직 이 '나, 나의, 나를' 이라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작은 틀로만 사물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정사란 어떤 관점, 어떤 견해,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도 집착하지 않고 오직 생각 이전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다. 禪院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의견에 집착하지말아라. 개인적으로 옳다고 생각한 것을 가지고 다른사람과 언쟁하지 말아라. 의견에 집착하고 방어하는 것은 옳은 수행이 아니다. 모든 의견을 놓아버려라. 이것이 진정한 불교다."
우리가 생각을 시작하면 분리가 일어난다. 분별심이 생긴다.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생각 이전의 마음이 실체이고 나의 실체이다. 그렇게 되면 너의 실체, 나의 실체, 전 우주의 실체가 모두 하나이다. 생각이전의 마음을 얻는다면 마음은 우주와같이 맑게된다. 거울처럼 맑아 진다.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비추고 힌것이 오면 횐것을 비춘다. 그렇게 되면 모든 실체와 하나가 되고 진정한 생각이 저절로 나타난다. 더 이상 이기심, 악의, 적의에 머물지 않게 된다. 이것이 지혜이자 바른 생각이다.
'정어 正語, 바른 말
많은 사람들이 혀에 집착해 있다. 혀는 아주 재미있다. 우리는 두 개의 눈, 귀 , 콧 구멍을 갖고 있다. 그런데 왜 입과 혀는 아나일까? 이 입이란 것은 아주 큰 일을 한다. 먹는 일과 얘기하는 일을 끊입없이 한다. 입은 언제나 음식에서부터 술, 그리고 얘기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우리의 강렬한 집착들의 대부분이 이 혀의 욕망에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나 콧구멍이나 눈에서 오는 집착은 별로없다. 한 개의 입과 혀는 이미 하나로도 충분히 이 세상에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한 개에 그친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는 눈, 귀, 코, 혀, 촉감이라는 다섯가지 감각 중에서 혀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선불교에서는 종종 "혀에는 뼈가 없다"고 얘기한다. 한번 밷어놓은 말도 마음 순간에 완전히 다른말로 바꿀수 있기 때문이다. 혀는 어떤 것이든 만들 수 있다. 모든 거짓말의 원천이다. 한 위대한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죄악의 혀가 파멸로 이끌 것이다. 병마개를 가지고 필요할 때만 열어라."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고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이세상에 고통을 가져다 준다고 했다. '정어' 란 이처럼 순간순간 혀가 하는 일에대해 주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고 따뜻한 말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혀를 사용하라는 얘기이다. 견해와 조건을 내려놓고 마음에 어떤 것도 만들지 않으면 정어는 저절로 나타난다.
정업 正業, 바른 행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우리 생각의 반영이다. 무처님께서는 우리가 바른 행동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돠와줄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다.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탕한 관계나 술, 담배를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그런 행동을 통해 어떤 정신적인 습관을 만들어낸다. 악행은 나쁜 업을 만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착한 일만 하면 우리는 대보살의 업을 쌓는 것이다. 착한 일이란 오직 다른 중생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정업'은 언제나 우리의 행위가 다른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업을 '바른 업' 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명 正命, 바른 삶
이는 우리의 생계, 직업, 일과 관계되는 부분이다. 모든 사람은 안과 밖 두가지 일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는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고, 밖으로는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도와주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어떤 일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에나가 돈을 벌고, 또 어떤 사람은 절에 살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 그러나 겉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이 일들이 오직 나만을 혹은 나의 가족만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모든 중생을 위한 일인가? 이런 의문들이 중요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일정 정도의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중 어떤 사람들은 동물을 죽이고 공기와 물을 더럽히는 일로 돈을 번다. 또 어떤 이들은 술과 마약, 폭탄, 총 등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오직 나쁜 업만을 쌓을 뿐 이세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않는다. 비록 가족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이 세상에 고통만을 배가할 뿐이다. 단지 돈을 벌기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조심해라. 이 세상의 원인과 결과는 언제나 명확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고통을 부는 직업은 갖지 말아야 하다고 가르친 것이다. 누차 얘기하지만 가장 중여한 것은 '이 일을 내가 왜 하는가?' 라고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면 바른 삶, 즉 '정명'은 저절로 명확해진다
정정진 正精進, 바른 노력
팔정도 중 '정정진'이라는 것이 있다. 정정ㅈ3진이란 참선 수행을 열심히 하라는 얘기이다.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시간이 있거나 없거나, 또 피곤하건 안 하건 수천, 수만 년 동안 쉬지 말고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정념 正念, 깨어있는 상태
한 줄기 빛이 한 지점에서 나와 다른 지점으로 갈 때 똑바로 직선을 만들듯, 바로 이 순간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우리 인생을 만든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들의 생각, 분노, 욕심, 무지만을 좇는다. 그리하여 매 상황마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바로 지금 깨어 있다면 행복을 얻는다.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이 깨어있는 상태를 불교에서는 '정념'이라고 한다.
정정 正定, 바른 수행
부처님은 또 바른 수행, 즉 '정정'이 우리가 깨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 가르쳤다. 바른수행이란 순간순간 움직이지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 조건에서도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을 유지하지만 항상 바늘 끝처럼 깨어있는 것이다.
어떤사람들은 수행을 단지 '마음의 평화'만을 경험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러비던스 선원을 세운지 얼마 안 돼,, 한 로큰롤 밴드가 우리 선방 바로 아래층에 이사를 왔다. 너무 시끄러워 많은 핵생들이 수행을 할 수 없다며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선사님, 밖이 너무 시끄러워 수행을 할 수 없어요. 그들에게 멈추라고 하면 어떨까요."
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햇다.
"조용한 상태에서 찾아오는 정적은 정적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음속에서 찾는 침묵이 진짜 정적이다. 이 로큰롤 밴드 음악가들이야말로 여러분들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부처님들이다."
물론 조용한 곳에서 참선수행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수행을 할때 목적이 단지 정적이라는 경험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 삶은 항상 조용한 것이 나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남대문 시장도, 심지어 감옥조차 훌륭한 선원이 된다.
사람들은 참선 수행이란 아주 힘들게 앉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것은 완정한 수행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집착하는 것이다. 진정한 참선은 조건이나 상황에 관계없는 '마음'의 수행이다. 어떤 마음 자세로 앉아 있는가. 그것이 핵심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나의 삶을 만든다. 마음이 맑으면 우주가 맑아진다. 열심히 참선하는 것도 좋은 자세로 앉아 있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생각의 집착을 끊고 생각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오직 모를 뿐...... . '
선방에 앉아있지 않고도 모든 조건,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운정할 때도, 먹을 때도, 청소할 때도 참선할 수 있는가.그것이 살아있는 참선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어떤 일정한 수행 방법이 필요하다. 앉아서 다리를 꼬고 등을 꼿꼿이 세워라. 이런 앉은 자세를 유지할 수 없으면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수년 전 프러비던스 선원에 등과 다리가 아파 누운채로 90일 동안 수행한 학생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수행했다. 식사할 때나 염불할 때, 나와 얘기할 때정도 앉아 있는 것이 가능했다. 나머지는 오로지 누워 있어야 했다.
한 선사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걸을 때나 서 있을 때, 앉아잇거나 누워있을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항상 언제 어디서건 방해받지 않는 것, 이것이 무엇인가?"
진정한 참선은 얼마나 오랜시간 앉아있었는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안에 큰 물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호흡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하다. 천천히 내쉬고 천천히 들이마셔라. 내 쉬는게 적어도 들이마시는 속도의 2배는 되어야 한다. 천천히 호흡하면 좀더 쉽게 생각을 끊을 수 있고 마음에서 오고 가는것에 집착하지 않게된다. 에너지는 차츰차츰 단전으로 모여서 감정과 느낌들을 더 잘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또다시 강조하고 싶은것은 참된수행, 다시말해 정정이란 어떤 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순간순간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나의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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