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0, 2012

무상관

무상관 • 無常觀 Insight into Impermanence
인생8고 • 人生八苦 The Eight Sufferings
生Birth 老Old age 病 Sickness 死Death 四苦The Four Sufferings
애 별 리 고 愛 別 離 苦 Being separated from those you love
원 증 회 고 怨 憎 會 苦 being in the presence of those you dislike
구 불 득 고 求 不 得 苦 Not getting what you desire
오 음 성 고 五 陰 盛 苦 The imbalance of the five skandhas 四苦 The Four Sufferings and + 四苦The Four Sufferings = 八苦 The Eight Sufferings

보리수나무 아래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우리삶의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살면서 여덟가지 고통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생로병사 生老病死,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이 격는 고통이다.
우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아앙……”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으로서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아앙’ 하는 소리로 우는데, “구’란 ‘求’한다’는 뜻이고 ‘아 我’란 ‘나’를 말한다. 즉 구아란 “나를 구해주세요” 하는 말이다. (하하하)
태어나면서 “아,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 기쁘다” 하면서 웃고 태어나는 아기가 있는가?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서 고통과 추위에 떨면서 양수로 뒤범벅된 몸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의사들은 아기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탯줄을 끊는다. 사방천지가 피로 얼룩져있다. 이처럼 인간은 나면서부터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태어남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부모들은 이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자식들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오직 투쟁만을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것을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겪을 고통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한 모든 걱정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하면서 아이들의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자라면 늙은 나를 보호해주겠지, 내 지팡이가 돼주겠지’ 하는 마음, 혹은 이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가 계속 이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부모들은 이이들을 잘 먹이고 일히고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한다고 밀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열정과 기대는 결국 집착을 불러일으켜 고통을 만든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마국에 이민와서 열심히 일하며 산다. 남들보다 덜먹고 덜입고 덜 자면서 쉬지 않고 일해 큰돈을 모은다. 그러다 몸이 망가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국 무엇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거지? 하며 허무해 한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나와 절친한 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벌린 사업이 크게 성공해 돈을 많이 벌었다. 아이들도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했고, 다들 결혼해 아이낳고 잘 살고 있다. 그는 여행도 여기저기 많이 다녀 안목도 넓었다. 어느 날 그와 차를 마시다가 내가 물었다.
“이선생, 당신은 아주 많은 일을 성취했고 경험했읍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성공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은 결국 무엇을 얻었읍니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읍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의 마음은 텅 비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보통의 삶이다. 가지려고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지만 늙는것도 고통이다. 왜 늙는 것이 고통인가 우선 나이들면 힘이 없어져 사람들이 무시한다. 노인들이 가끔 실수라도 하면 젊은이들은 깔깔대고 웃어댄다. 노인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젊은이도 있다. 늙는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젊었을 때 잘하던 일도 나이들면 서툴어진다. 모습도 추하게 변해서 얼굴엔 주름이 생기고, 시력은 흐려지며 귀도 잘 안들린다. 또 제대로 걷지를 못해 지팡이가 필요해지기도 한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치아도 빠진다. 젊음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슬픈일이 아닐 수없다. 늙는것을 고통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있다
늙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30여년 전 동경에 있을 때 친구의 딸이 찾아왔다. 그녀는 이제 자기나이가 마흔을 넘기니 늙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돼 너무나 슬프다고 불평했다. 주름진 자기얼굴을 보기싫고 그것이 늘 신경이 쓰여 절에와도 염불이 안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녀보다 늙은 사람들도 절에와서 열심히 염불을 하는데 그녀는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거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예 절에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후6개월쯤 지난 뒤 웬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와 아는 체를 했는데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간신히 살펴보니 아! 이 여자가 바로 ‘늙음’을 한탄하며 발길을 끊었던 친구의 딸이 아닌가? 나는 깜짝놀랐다. 그녀는 성형수술로 주름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그러나 수술로 얼굴의 주름을 없앴다고 해서 나이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그 여자는 수술로 잠시 행복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결국 주름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그때는 아마 처음보다 더 큰 슬픔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고통이며, 늙고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의 고통앞에 놓여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슬프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100살 먹은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기도 한다. 언젠가 120살 먹은 사람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타리 필름을 본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며 죽음과 싸워 이기고 있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TV에서 본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으며 늙은 원숭이 같았다. 눈믈, 콧물을 계속 흘려대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 두려움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퇴화하기만 할 뿐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오는 병마도 또한 고통이다. 젊었을 때라면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병의 고통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들이 아니다. 똥, 오줌도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소화도 잘 안되고, 숨을 쉬기도 힘들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걸어 다니기 조차 힘들어져 그저 누워있기만 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만 큰 병이 드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나 약물중독을 가지고 있거나 불치병을 않는 어린이들도 많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큰 병이 나면 수술해야 하고 병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본인 부주의가 아닌데도 에이즈AIDS에 감염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 귀, 코, 폐의 질환에서 오는 신체의 고통에 시달린다.
가끔 병원에 가보면 모든 사람이 다 환자같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도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자들이나 가족들 모두 얼굴이 굳어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거야.” 그들은 원망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아니, 병원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봐도 도처에서 우리는 육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종 불치병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또 한편에선 이를 치유하기 위한 각종약과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왜 부처님께서 그렇게 좋은 환경을 버리고 출가를 했는지 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왜 인간들이 이런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부처님께서 이 모든고통이 근원을 캐내기 위해 수행을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살았는가? 아니다. 그 역시 죽었다. 아니, 삶도, 죽음도, 병도, 늙음도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참 나’란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일시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생로병사가 없는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 몸 역시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드는 것, 그리하여 결국 죽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몸은 단지 렌터카일 뿐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때가 되면 다른 렌터카로 바꿔 타야 한다. 나는 한국산 렌터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미국, 프랑스 제를 가지고 있다. 내 렌터카는 별로 좋지않아 언젠가는 독일제로 바꿔야 할 것 같다.(하하하) 그러나 렌터카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렌터카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에만 집착해있지, 운전기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처를 입을까. 잃어버릴까. 차에만 정신을 쏟을 뿐 기사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기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차를 바꿀때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물, 땅, 공기, 불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우리 렌터카는 생로병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운전기사에게는 생로병사가 따로 없다. 운전기사, 즉 우리의 ‘참, 자아’를 알아야 한다. 이것만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최선의 처방이다.

애별리고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생로병사의 四苦는 대부분 육체가 느끼는 물리적 고통을 말한다. 그러나 마음의 四苦도 있다. 어쩌면 육체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클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고통은 우리의 끊임없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이겨내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은 ‘나’라는 에고가 만들어낸 욕망이며, 욕망은 곧 고통이다. 생각하는 마음 그 자체가 이미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낸다.
오래 전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한국에 약혼자가 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해 박사학위를 딴 다음 교수가 돼서 미국으로 너를 불러들여 결혼하겠다’고’ 약혼자한테 약속해놓은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세월은 흘러 그는 대학, 대학원을 무사히 마치고 결국 교수가 됐고, 고국의 약혼녀와 같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같은 학교 교수이면서 부자인 한 미국 여자를 만나 사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1년이가고 2년이 갔다. 그 남자는 새 애인과 동거를 하면서도 들키지 않으려고 고국의 약혼녀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 한국의 약혼녀는 이제나저제나 미국에 있는 약혼자로부터 ‘미국에서 살 준비가 끝났으니 들어오라’는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약혼녀 친구가 정부에서 해외취업 비자를 내주기 시작했으니 그것을 받아 일단 미국으로 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약혼녀는 ‘그래’ 그 사람은 돈이없어 못 올 테니 내가 가보자’고 생각했다.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혼자를 놀라게 하려고 알리지도 않고 떠났다. ‘아마 나를 보는 순간, 너무놀라워 반가워 하겠지.’ 그녀의 마음은 두근거렸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리만리 길을 멀다 않고 달려온 그녀는 마침내 편지 봉투에 적혀있던 주소대로 약혼자의 집을 찾는데 성공했다. 친절한 택시기사의 도움을 받아 약혼자의 집 문 앞에 당도한 시각이 아침8시였다. 그녀는 힘껏문을 두드렸다. 탕탕탕.
“나예요, 문 열어요.” 그녀는 약혼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마침내 aans이 열렸다. 아뿔사, 잠결에 뛰어나온 약혼자는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고, 기쁘기는커녕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색하고 놀란 남자의 얼굴에는 아랑곳없이 여자는 내 집인양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이곳저곳 둘러보는 여자의 귀를 따라다니던 남편의 태도에는 이상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숨긴 것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침실 앞, 남자는 침실만큼은 한사코 약혼녀를 데리고 가려하지 않았다. 결국 약혼녀가 그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침대 위에는 벌거벗은 미국여자가 누워있는 것이아닌가.
눈이 뒤집힌 약혼녀는 부엌으로 뛰어가서 식칼을 들고 나와 두 사람을 죽여버릴 기세였다. 방 안에선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약혼자와 미국 여자는 무릎을 끓고 손이 발이되다시피 싹싹 빌었다. 하지만 약혼녀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소동에 놀란 이웃사람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세 사람은 경찰에 구속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을 우리는 ‘애별리고’라고 한다. 욕심과 집착이 빚어낸 정신적 고통이다. 아마 믾은 사람들이 경험했을텐데, 이런 고통은 사람뿐 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 때문에도 생길 수 있다.
내 제자중에 12캐럿짜리 다이야몬드를 가지고 있었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병에 걸려 수술을 받는 바람에 장기간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는데, 병원에서도 오직 다이야몬드 생각뿐이었다. ‘다이야몬드는 잘 있을까? 누가 훔쳐가지나 않았을까? 몸이 그렇게 아팠음에도 그녀는 오로지 다이야몬드 걱정만 했다. 그후 퇴원해 집에 돌아와 보니 정말 도둑이 들어 다이야몬드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너무 슬퍼서 미칠 지경이 되었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슬픔을 달래려고 술까지 먹기 시작해 건강은 엉망이 되었다.
이것은 옳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안다면 다이야몬드에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는 않으리라. 건강과 맛바꿀 만한 물건이란 없다. 우리는 이 덧없는 물질에 매달려 생각하고 집착하면서 고통스러워 한다. 궁극적으로는 없어질 그것들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수없이 목격한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 서로 죽고 못 산다고 한다. 그러다 둘 중 한 사람의 맘이 변해 헤어지자고 한다. 상대방은 고통에 빠져 먹지도, 잠을 이루지도 못해 병이 들고 만다. 그토록 서로가 죽지 못해 사랑했을 때는 언제인가 싶게 상대방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까지 생긴다. 따지고보면 애욕만큼 큰 고통을 불러오는 것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애욕에 눈이멀어 고통을 스스로 만든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다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동성동본이었다. 부모님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결사반대 했다. 지금은 동성동본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때만 해도 당사자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실의에 빠진 남녀는 마침내 동반 자살을 결심했다. 이승에서 같이 못 할 바에야 차라리 함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들과 가족들이 겪었던 괴로움은 엄청나게 컸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변하고 또 사라진다. 이것을 깨닫기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영원히 쥘 수 없는 무상한 것들 것 손에 쥐고 싶어 안달하며 괴로워하다 죽고 만다 보통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원증회고 怨憎會苦, 싫어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 이 ‘좋다’, ‘싫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다. 아래는 깊은 낭떠러지에고 하루빨리 서둘러가야 하는 길인데, 막상 다리 한가운데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원수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라.좋고 싫다는 마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이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좋다 혹은 싫다라는 감정을 갖게 되면 고통이 찾아온다. 그 인과관계는 아주 명확하다.
미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이 매우 간단하다. 싫은 사람이 있으면 총으로 쏴 죽이면 된다. (하하하)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싫은 사람이 있어도 겉으로는 좋은 척한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오직 싫은 사람에 대한 나쁜 생각만 하기대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기회닿는대로 그에 대해 헐뜯는다. 이 모든 것은 고통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러한 고통은 어떤 견해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긴다. 싫다. 좋다. 하는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다.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교회나 절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뭔가를 구하는 마음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명예, 돈, 아이들 장례, 도 좋은 연인, 집, 직업…… . 하자만 실제 이런 것들은 기도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주가 그런식으로 운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총선거는 한 선거구에 적게는 2, 3명, 많게는 7, 8명씩나온다. 그중 당선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후보자들은 몇 년동안 열심히 벌어서 모은 돈을 한꺼번에 투자하고 가족들까지 선거운동에 동원하지만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된다. 원하는 것을 얻지못하면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돈 한푼 없으면서도 높은 이자의 돈을 빌려 친인척까지 동원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는 그만 1등과 다섯표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채무자들과 친인척들이 몰려와 그에게 빚 갚으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는 자살하고 싶었지만 약을 살 돈조차 없었고, 결국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렸다. 돈 들이지 안고 죽고싶다는 소원(?)을 실현한 셈이었다. 시험에 떨어진 사람, 경기에 진 사람, 상업에 실패한 사람의 고통이 어찌 이보다 못할 것인가. 자살할 용기가 없으니 죽지못해 사는 것이다.
고통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것도 아니다. 고통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어떤 고통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강하게 노력하는 마음이 있으면 도움을 주는 고통이있다.
언젠가 한 미국학생이 나에게 상담을 해왔다.
“선사님, 괴로움이 있는데요.”
“무엇입니까?”
“저는 멋있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직업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참선한다고 앉아 있으면 저는 계속 이런 생각만 들어요. 여자 친구, 돈, 직장, 여자 친구, 돈 직장……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불경을 외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여자 친구, 돈, 직장만을 되뇌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크게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집니다.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참선 수행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마음속에 집착이 보물처럼 들어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오히려 이렇게 조언했다.
“지금보다 더한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학생은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더 고통을 겪으라니요. 저는 이미 무척 힘듭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더 고통을 겪으면 여자 친구도 생기고 돈도 벌고 좋은 직장도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매일 1천 배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5천번씩 외세요.”
“과연 그렇게 하면 제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까요?”
“중국 속담에 이열치열 이한 치한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통은 고통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지금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고통은 깨끗하지 않은 것입니다. 1천 배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외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끗한 고통입니다. 고통을 다른 고통으로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 당신의 고통은 사라지고 지혜가 생길 것입니다.”
ㄱ그 학생은 내 말을 따라 1백 일 동안 열심히 절과 염불 수행을 했다. 결국 그는 나중에 거짓말처럼 훌륭한 여자친구와 새로운 일자리가 나타났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
그 학생은 뭔가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수행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행의 본질, 생각의 본질, 고통에 신음하는 마음을 본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일단 수행이라는 약을 먹으면 올바른 수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의 병을 ‘이영한’ 것이다. 이것을 ‘법사탕 Dharma candy’이라고 부르고 싶다. 1 백일 수행이 끝난 귀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수행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읍니다. 하지만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일단 그가 수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 단계 높은 가르침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이 학생에게 준 가르침은 그다지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8만 4천 가지 각각의 고통마다 모두 다른 약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들 중에도 뭔가 얻거나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열심히 절을 하고 염불을 하고 참선 수행하라. 그렇게 하면 다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면 상심한다. 그러나 실제로 무엇을 얻기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없다. 그저 바라기만 할 뿐이고, 언제나 현실을 고통스러워하면서 정처 없이 방황하기만 한다.그러나 참선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참 자아를 발견해 완벽하게 다른 생명들과 일치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참 자아를 얻는다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자!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만든 작은 세계에 갇혀 산다. 마치 모기가 작은 병속에 들어가 ‘앵앵’거리며 탈출구를 찾듯, 모든 사람들은 이 고통의 연옥에서 헤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들이 자유로운 인생을 사는 데 방해가 된다. 연옥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감각에 더욱 집착한다. 무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고통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늙는 게 싫어.” “그와 관계는 끝났어. 너무 비참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니 믿어지지 않아.” 이 세상이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알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지만 모르면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계속 고통을 만들어가면서 살 뿐이다.
오온五蘊
‘나’라는 것은 본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 혹은 ‘마음’ 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일시적인 물질적요소[色], 느낌[受], 표상[想], 의지[行], 의식[識]이라는 다섯가지 에너지가 뭉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산스크리트로는 이것들을 다섯 가지 ‘스칸다스 skandhas’라고 한다. 무더기라는 뜻이다. 본래 이 다섯 가지는 조화를 이루어 고통을 만들지 않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균형을 잃으면 당연히 고통이 발생한다.
때로 우리는 아주 기형적으로 살찐 사람을 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서양에 이런 체형의 사람들이 많다. 손, 발, 머리는 작은데 몸집만 큰 사람들이다.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일도 못한다. 이런 사람들의 ‘혀’는 언제나 먹을 것만, 즉 물질적 요소만을 원한다. 그런데 ‘몸’은 실제로 원하지 않으므로 혀와 몸은 언제나 갈등을 빚게 된다. 혀가 이기면 계속 먹는 것이다. 당연히 고통이 따라온다. 業이 몸을 만들고 몸이 業을 만드는 것이다.
느낌이라는 것도 결국 육체적, 정신적 감각이 합쳐져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먼저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때 느낌이란 예를 들어 오줌누고 싶을 때 그냥 오줌을 누어버리는 간단한 것을 말한다. 아기들은 기저귀가 젖으면 느낌이 좋지 않으니까 그냥 울어버리고, 갈아주면 다시 좋아져서 웃곤 한다. 배고파도 그저 울면 그만이다. 아주 단순하다.
어떤 사람들은 커서도 이런 단순한 감각에만 집착해 산다. 오직 입과 혀의 감각에만 의존해 사는 사람들이다. 섹스하고 싶으면 사랑도 없이 섹스를 하나다. 쇼핑하고 싶으면 그냥 나가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마구 사댄다. 오죽하면 섹스 중독, 쇼핑 중독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런 의식 상태는 맑지 않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어떤 고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감각만을 따라서 사는 강한 습관과 충동을 만들어내 우리 삶을 뒤흔들어댄다.
습관이나 충동이라는 것도 엄의 일종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마음이 나의 행동으로 표현된다.
6 • 25 때 나는 부산의 모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송씨 성을 가진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아주 친했다. 나는 돈이 조금만 생기면 그를 식당으로 데리고 나가 음식을 사주었고, 틈만 나면 절에도 갔다. 매일 나는 뭔가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한턱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평소에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좀 의아했다. 그래도 어쨌든, 그가 가자는 대로 대구 기차역으로 나갔다. 역에 멈춰 선 그가 휘파람을 세 번 부니 10대로 보이는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잠시 뒤에는 신사복을 잘 차려 입은 젊은이 두 사람도 나타났다. 그들은 송군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형님,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송군이 나를 그들에게 소개하면서 “아주 귀한 손님이니 잘 모셔라”고 했다. 그러자 젊은이 두 사람은 내게도 깍듯이 절을 하더니 우리를 차에 태우고 고급 식당으로 안내했다. 전쟁 중이라 제대로 못먹던 시절이었는데, 그날은 어찌나 대접을 잘 받았는지 황송할 따름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나에게 지난 삶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군대에 오기 전 그는 소매치기 두목이었다고 한다. 아까 그 청년과 이이들은 이른바 그이 똘마니들이었다. 어느 날 송군은 소매치기 세계에서 손을 씻을 것을 결심하고 군대에 지원 입대했다. 그리고 나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친형제처럼 살갑게 대하면서 자꾸 무엇을 사주니까 미안해서 옛날 친구들에게 연락해 융숭히 대접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생활도 아주 잘해서 나와 함께 장교가 되었다. 매사에 신중하고 성실했다. 범죄자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러나 습관이란 지독한 것이어서 업은 단순히 결심 하나 가지고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이 같은 나의 생각을 확인시켜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모처럼 휴가를 내 설악산에 갔다. 그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 사람들로 붐볐고, 버스 정류장은 사람들로 긴 줄을 이루었다. 우리 앞에는 한 중년 신사가 서 있었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송군의 손이 중년신사의 호주머니로 가더니 지갑을 재빨리 낚아채는 것이 아닌가.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그 옆에 서 있던 나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를 데리고 뒷줄로 다가섰다. 그리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그의 손을 때리면서 야단을 쳤다. 그 역시 무척 놀란 눈치였다. 갑자기 지갑을 보는 순간 오랜 습관이 튀어나와 자신도 모르게 소매치기 행동을 한 것이라며 부끄러워했다. 정말 지갑을 탐낸 것도 아니었다며 진심으로 미안해 했다. 이 오래된 습관, 이것이 바로 업이다.
습관은 너무 강해 이처럼 때때로 저절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이다. 송군은 주인에게 지갑을 돌려주었다.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웠노라고 둘러댔다. 그 지갑 주인은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소를 사려 갈 돈이었는데 잃어버렸으면 큰일날 뻔했다”며 송군에게 군이 사례를 하고 싶어했다. 자꾸 안 받겠다고 하는 송군에게 나는 “이런 경우에는 돈을 받는 것이 좋다”고 권유했다. 그는 소매치기한 대가로 사례비까지 챙긴 것이다.(하하하).
머릿속으로는 나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어 균형을 잃게 되고 그러면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오온의 다섯 가지 에너지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아홉 가지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이는 대승불교 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여섯 가지 의식[六識]을 갖는다. 그리고 두 살 정도 되면 분별하는 능력이 생기는데, 좋고 나쁜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일곱 번째 의식[第七識]이다.
여덟 번째 의식[第八識]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과 경험을 기억하는 창고이다. 행동, 사고, 경험 모두를 기억하는 창고라서 흔히 ‘의식의 저장창고’라고도 불린다. 보통 우리가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의 뇌는 성능 좋은 컴퓨터와 같아서 이생에서뿐 아니라 전생의 일까지도 모두, 즉 전생에 행하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저장되어 있다. 밤에 꿈을 꿀 때는 여덟 번째 의식이 작용한다.
아홉 번째 의식[第九識]이 바로 불성이다. 이것의 또 다른 이름은 ‘법신[法身]이다. 참 자아, 진아, 실상 등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이름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다.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은 앞서 지칭한 여덟 가지 의식들이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가끔씩 거리에서 혼자 마구 웃고 떠드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허공에다 대고 손을 흔들고 화를 내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몸과 의식이 분리된 사람들이다. 그것이 불균형이다.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불균형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서도 의식은 뉴욕으로, 폴란드로 그러면 아이쿠 내가 무슨 망상에 사로잡혀 있나.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선방으로 돌아오지만 머릿속은 다시 어제일, 친구 생각, 일 생각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이것은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불균형이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서 의식들 중의 하나가 이야기한다. “지금은 염불하는 시간이야, 어디를 돌아다니는 거야.” 이 돌아다니는 마음은 세 가지 의식 작용의 결과이다. 염불하는 데 사용되는 입과 귀는 여섯 번째 의식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마음은 여덟 번째 의식, 즉 기억의 결과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서 빨리 수행해야지’ 하는 분별은 일곱 번째 의식이다. 그것들은 안에서 서로 싸우는데, 이것 역시 불균형이다. 때로는 어떤 것도 결정할 수 가 없어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걸 해야 돼, 저걸 해야 돼, 아니야 이걸 해야지, 아아…… 정말 모르겠다.” 마음속에 혼란이 생기고, 혼란이 심해지면 미치게 된다.
그러나 수행을 열심히 해 의식의 균형이 생기면 그때 행하는 행동이 도[道]이다. 순간순간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의식의 불균형 상태에서는 혼란만 있을 뿐이다. 이것저것 잡생각에 시달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의식의 균형이 잡히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순간순간 그냥 행동해도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의 길이며, 보살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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