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14, 2012

부정관 무아관 연기

부정관 . 不淨觀 Insight into Impurity

인생5욕 . 人生五慾 The Five Human Desires
재물욕 . 財慾 Desire for materal wealth
색욕 . 色慾 Desire for sex
명욕 . 名慾 Desire for fame
음식욕 . 食慾 Desire for food
수면욕 . 睡慾 Desire for sleep

어떤 사람들은 몸이 더럽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이 더럽다고 하다. 소승불교 수행은 몸의 더러움을 바라본 뒤 마음의 더러움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 몸의 살 속에는 피가 흐른다.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각종 몸의 내장기관과 똥, 오줌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뼈가 지탱한다. 우리 몸이 정말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몸속이란 결국, 어떻게 말하면 피와 똥과 오줌의 뒤범벅이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의 아홉개의 구멍에서 매일 시시각각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온다고 표현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예쁘다면서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거나 비단옷을 감고 다닌다. 그러나 일단 죽으면 아무리 사랑했던 친구들도 당신의 시체를 멀리할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죽은 육체를 아홉가지 불결한 양상으로 관찰한다. 바람과 햇빛에 쏘인 시신은 먼저 부풀어 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검푸른 모습으로 변한다. 결국 그것은 문드러지고, 살이 풀어져 피고름이나오고, 썩어 허물어진다. 새나 짐승, 벌레들이 와서 뜯어먹고, 뼈와 살과 머리와 손등은 부서져 흩어지고, 해골만 훤히 드러난다. 이것마져도 화장하고나면 한줌의 재가 되어 날아가버린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몸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더럽다. 왜냐하면 어머니 배 속 역시 피와 고름투성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을 애지중지하여 온갖 비싼것을 사다가 닦고, 바르고, 털고 해대니 이 정도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개, 돼지의 몸이나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소승불교의 세 번째 통찰인 부정관에서는 이 같은 몸에 대한 통찰을 넘어 인간의 욕심을 만들어내는 다섯가지 더러움을 강조한다.
재물욕, 색욕, 명예욕,, 음식욕, 수면욕
가만히 보면 인간의 고통이란 것이 전부 다 이 다섯가지 욕심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니치게 재물을 탐한다든지, 명예를 좇는다든지. 색을 즐긴다든지, 또 먹는 것을 지니치게 탐한다든지, 잠만 잔다든지, 일은 하지않고 놀 생각만 하는 게으른 사람은 추잡하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돈은 중요하지만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마음은 금세 욕망으로 뒤덮이게 된다. 모두들 백만장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기도 한다.
내 제자 중에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한국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돈 욕심이 많아 탐욕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절제하고 검약하는 생활은 미덕이지만 넘치면 탐욕이 된다. 내 제자의 아버지는 자식 키우면 돈 모으기 힘들다며 내 제자를 낳은 뒤로는 자식도 더 이상 낳자 않았으며, 직장에서 월급을 타오면 마누라에게 생활비만 떼어준 뒤 장롱속에 고스란히 넣어두렀다. 돈 세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마누리를 데리고 외식하는 것은 물론 밖에 나가 차 한잔 마시는 일도 없었다. 참다 못한 마누라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야단을 했다. 부부싸움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대뜸 마누라엑게 "나하고 못 살겠으면 차라리 갈라서자"고 선언했고 결국 그의 부모는 60세 나이에 이혼을 하게 됐다. 이를 보다 못한 내 제자가 아버지에게 따졌다.
"한평생을 돈 버는 재미 하나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죽은 뒤에는 내 알바 아니다. 나는 살면서 오로지 돈 모으는 재미밖에 없다. 아들도, 마누라도 다 소용없다."
그러나 그렇게 큰소리치던 그의 아버지도 이혼 후 얼마 지니지 않아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산을 정리하던 아들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아버지가 목숨처럼 중히 여기던 금고를 열어보니 수십만 달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은행금고처럼 돈다발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결국 이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가막히고 화가나서 금고를 부수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물론 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아니, 살기위해 돈이 없으면 안 된다 문제는 돈에 집착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돈이주는 진짜 즐거움은 그것을 바르게 썼을 때뿐이다. 죽을 때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돈을 좇는다면 이런 생각의 에너지가 우리 마음의 독이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을 더러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는 나쁘다,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음양의 법칙에 따라 태어나서 또 그 법칙대로 산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혼자 살기도 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에 내가 제일 처음세운 미국절인 프러비던스 선원 Providence Zen Center 에 있을 때 웬 여자가 나를 만나러 왔다.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다. 그녀는 현재 일흔일곱 번째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앞으로 남자 친구들을 더 사귀어본 뒤 장차 1백 번째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알다시피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사귄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성관계를 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무려 일흔일곱 명의 남자와 섹스를 했으니 섹스에대한

집착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는 얘기이다.
나는 그녀에게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위대한 보살 바수밀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엄경]에는 모두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이 등장하는데 바수밀녀는 그중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이다.
바수밀녀는 부처님 생전에 창녀로 살았던 여자이다. 용모가 넘무 아름다워 그녀를 보기만 하면 모든 남자가 그녀와 자고 싶어했다. 바수밀녀는 어떤 때는 돈을 받고 몸을 팔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녀와 한 번 잠자리를 한 남자는 다시는 여자 생각이 안 나고 결국 수행자가 돼 깨달음을 얻어 큰 스승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바수밀녀는 성[性]을 그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몸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주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들의 색욕[色慾]을 없애 종국에는 깨달음을 얻도록 그녀의 몸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섹스가 때로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 사용될 수 있읍을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행동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이다. 섹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는 것이다. 바수밀녀는 그 자체로 보살이었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 섹스를 하는가?"
"그냥...... 나와 그를 위해서요."
"여전히 그대는 '나'를 갖고 있군, 그것이 문제라네, '나'라는 것을 철저히 버리게 그러면 그대의 섹스는 보살행이 될 수 있을 것이네."
1년 뒤 나는 그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녀가 결국 일흔여덟 번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해서 좋은 아내와 엄마노릇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였다.
남녀의 관계는 도반[道伴]의 관계여야 한다. 도의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라는 뜻이다. 서로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의 섹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섹스를 단지 즐기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얘기지만 그럴때의 섹스는 더러운 것이 된다. 중요한것은 섹스를 어떻게 생각하는냐 하는 것인데, 이에 따라 더러워지기도 하고 깨끗해 지기도 하는 것이다.
명예욕[名譽慾]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색욕이상으로 마음을 더럽힌다.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착각이다. 이름과 모양은 본래 없으며 '나'라는 것도 없다. 모두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항상 '나는 이렇다'는 착각을 키워가기만 하고잇다. '나는 훌륭한 교수다.' '나는 유명한 배우다.' '나는 이런이런 친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면 좋아하고 거기에 휘둘리기도 한다. 아마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나는 이렇다'는 믿음을 없애라고 한다면 차라리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기막힌 노릇이지만 매일매일 우리는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다. 이 욕망이 만들어낸 고통은 단지 독재자나 법죄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나' 라는 사람을 생대방에게 각인시키기위해, '나'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무자비하게 경쟁한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싸우고 험담한다. 사람들은 또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유지하기위해 혼신을 다한다. 이 완벽하게 공허한 것들을 부여잡으려고 온갖 부끄러운 짓을 하고 다닌다.
어느 한 고관대작의 부인이 제비족에게 걸려들었다. 그녀는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제비족의 위협에 시간은 물론 돈과 보석까지 갖다 바쳤다. 그러나 결국 이사실을 만천하에 공개되였고, 그녀는 완전히 망가져 여러번 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례야말로 다른사람에게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명예욕이란 것은 단순히 내가 훌륭하게 보이고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모두가 욕심이다. 다른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리는 불평하며,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욕하고 질투한다. 집은 가난해도 겉으로 옷은 잘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아는 어떤 사람은 집에 생활비도 제대로 갖다주지 못하면서 좋은 차를 몰고 다니고 매일 비싼 옷만 입고 다니다.
일본이난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낳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안달을 한다.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기실 마음속에는 다른 부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껏이다. 자식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입시에 떨어진 아이들은 부모들이 창피해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라는 기본적인 착각에서 오는 것들이다.
참선 수행을 하면 '나'라는 것이 실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안달할 필요도 없고, 남들이 나보다 잘 나간다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질투의 감정도 사라진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참선 수행을 열심히해서 명예욕이라는 더러움을 씻어내야한다.
식욕[食慾]도 마찬가지인데, 혀가 가진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동네에 사돈의 8촌까지 제삿날과 생일날, 잔칫날을 일일이 공책에 다 적어놓고 그런 곳만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음식점에가면 제 것 가만 놓아두고 남의 것부터 먹었다. 아내의 음식솜씨가 아주좋았음에도 매일 식당을 찾아다녔다. 오늘은 일본 식당, 내일은 중국식당...... 이런사람을 불교에서는 '아귀[餓鬼]'라고 한다.
이 모든것은 지나친 욕심에서 나온다. 이것이 오히려 동물보다 못하다. 동물은 배부르면 더 이상 먹지않고 음식에 대한 집착도 없는데 비해 사람은 과식으로 고통을 겪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맛이 있으면 계속 먹기 때문이다. 음식이란 단지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몸을 잘 유지해서 깨닫토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부과하다. 식욕에 끌려다니면 노예나 동물과 다름이 없다.
수면욕[睡眠慾]은 또 어떠한가, 보통 잠은 하루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정도자면 충분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무실에서, 도서관에서 '잠'과 싸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참선 수행을 하면서 조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난밤 충분히 잤는데도 죽비만 치면 조는 사람들이 있다. 잠은 자면 잘수록 더 자고싶은 것으로, 그 역시 업이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한다. '부처'란 말 자체가 '깨운다'는 의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선원에서 며칠씩 참선 수행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수행때처럼 매일 아침 3시에 일어나겠다고 다짐을 한다. 알람 시계까지 맞춰놓고 잠이 들지만 막상 아침에 시계가 울리면 버튼을 눌러놓고 다시 잠들기 일수다. 부처님은 이 세상 모두가 꿈이라고 가르쳤다. 언제 깨어있을 것인가? 잠이 너무 많아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오래전 한국에는 오히려 잠 때문에 깨달은 스님이 한 분 있다. 나중에 맷돌선사라고 알려진 이 스님은 앉거나 일하거나 걷거나 먹거나 계속 졸았다. 수행을 하려고 선방에 들어와 앉으면 죽비를 치자마자 잠에 빠져들어 더 이상 참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사는 졸면서 걷다가 큰 나무에 부딪쳣다. 마침 그걸 보고 있던 한 여인이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선사는 너무 부끄러웠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버릇을 고치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등허리에 맷돌을 짊어진 채 넘어지지 않도록 걷다가 드디어 도를 깨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맷돌선사가 됐다.(하하하)
대부분의 사람들은 5욕에 휘둘려 살지만 깨달으면 이런 것들이 우리를 묶지않아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욕심 그 자체는 나쁜것이 아니다. 다만 이 욕심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 어떻게 쓸것이가 하는 것이다.


무아관 無我觀 .Insight into Nonself
萬相, The charateristics of all external phenomena
成, Arising 住, Stabilty 壞, Decline 空, Dissolution
삼라만상은 생겨나 머물고 변하다 사라진다.
心相, Aspects of the mind
生, Arising 住, Stabilty 異, Defferentiation 滅, Extinction
사람의 마음도 생겨나 머물고 변하다 사라진다.
인 因, Cause 과 果, Effect 윤회輪廻, Samsara
원인 原因, Primary cause
연기 緣起. Dependent origination
결과 結果, Result
선인 善人 ㅡ 선과 善果
A good cause leads to a good result.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는다.
악인 惡因 ㅡ 악과 惡果
A bad cause leads toa bad result.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만상은 성주괴공 萬相成住壞空
삼라만상은 생겨나서 머물고 변화를 거듭하다 결국 사라진다.
비나 눈을 보라. 처음에는 어떤 형태를 띠고 내리다가 끝내는 녹거나 증발해서 결국 없어지고 만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산, 바위, 나무, 동물, 태양, 달, 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랜시간이 지나면 태양도 사라질 것이고, 모든 별은 빛을 잃고 지구와 달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空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다만 순간이냐, 억겁이 걸리는냐의 시간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물리학이다.
드러나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게, 그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한 제자가 '스페이스space'라고 답했다. 또 다른 제자는 '유니버스universe'라고 했다. 그러나 스페이스든, 유니버스든, 결국 시작이 있다. 이 우주도 빅뱅에서 시작됐따. 따라서 사라질 수 있다. 우주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 우리는 그 영원한 것을 찾아야 한다.

마음도 생주이멸 心相生住異滅
우리의 마음 역시 우주의 삼라만상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마음은 끊임없이 오고 가는데, 그것이 걸리는 시간을 재본다면 1초도 채 안 걸릴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한국 속담에 '여자 마음이 부엌에서 거실까지 오가는동안 열두 번도 더 변한다'라는 게 있다. 남편이나 부모에게 상을차려 갖다주면서 온갖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맛이 없으면 어쩌지, 너무 많이 준비한 것은 아닐까. 남기면 안 되는데...... .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여자 마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이와같다. 마음이 변하면 얼굴색도 변한다. 마음이 변함에 따라 얼굴이 빨갛다가 노랗다가 창백해지기도 한다. 마음도 우주와 같아서 에너지를 얻으면 얼굴이 붉어졌다가 에너지를 잃으면 노랗게 변하거나 나무 많은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히면 어두워진다. 얼굴색이 이렇게 변하듯 우리 마음도 변한다. 이름과 모양이라는 것이 본질이 아니므로 이름과 모양을 가진 모든 것은 변한다. 마음이란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바로 무아관이다.
거듭 말하지만 몸이란 것은 렌터카이다. 갑이라는 사람의 렌터카가 미국산이면 을은 한국산이고 병은 일본산이다. 이 몸이 렌처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열반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아, 나의 육신은 늘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나의 손이고 이것이 나의 머리고 이것이 나의 가슴이다. 그러나 이 육신의 나는 참 나가 아니다." 이 몸이 덧없기 때문이다. 이 렌터카는 계속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 이 마음이란 것 역시 변하고 변한다. 그러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본성 true-self이 바로 무아 non-self인 것이다.

원인 . 결과 . 연기 . 윤회 原因 . 結果 . 緣起 . 輪廻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어떤 원인에 따른 결과이며, 이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된다. 이 가르침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이다. 서양 사람들이 묘즘 불교의 가르침에 심취하는 이유도 이처럼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불교철학은 현대과학적인 관점과 많이 닮아 있다. 절대자나 신을 믿는 종교들은 이 세상이 절대자나 신이 만든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신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우리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가 열심히 기도한다해도 우리가 바라는대로만 이루워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 아난다와 함께 걷고 있었다. 무처님은 길가에 떨어진 짚을 발견하고 아난다에게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아난다는 "생선 냄새가 납니다"고 했다.
부처님은 "왜 생선 냄새가 날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아난다는 "생선을 쌋던 짚인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했다.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또 얼마쯤 가다 보니 길에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그것을 주며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향냄새가 납니다. 아주 고급의 향을 쌌던 종이 같읍니다."
아난다가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 새상 모든 이치가 이와같다. 생선을 싸면 생선냄새가 나고 향을 싸면 향냄새가 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이다. 크든 작든 다 끊임없이 인과관계에 얽혀있다."
인과 법칙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고 나는 왜 한국에서 태어났나?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가? 왜 어떤 사람의 머리는 검고 어떤 사람은 노란색인가? 왜 누구는 가톨릭이고, 누구는 이슬람교도인가? 왜 누구는 머리가 좋고, 누구는 예술에 재능이 있는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봐서 결혼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애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전생에서 어떤 조건과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세상에 우연히 이루엊진 것은 하나도 없다.모든것은 이미 우리가 전생에 행한 행동들 때문에 결정되었다. 부처님은 길을 가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수천 번 만났던 인연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니 사랑하는 사람이나 결혼하는 사람과는 얼마나 많은 인연이 쌓여 있었겠는가.
이 세상일은 어떤 조건 아래있는 원인 때문에 결과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업karma이라 부른다. 업은 단지 우리의 습관의 에너지habit-mind가 뭉친 것이다. 어떤 것을 여러 번 하거나 생각하면 정신적 습관이 되어 똑같은 것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업을 만든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반복했던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스스로 만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이다.
전생에 나는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한 어떤 업을 갖고 있으므로 내가 다시 한국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내게 만약 미국, 독일, 폴란드의 업이 있다면 그 나라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다. 죽으면 몸은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타 사라지지만 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 이업이 어떤 조건과 맞아떨어져 미국 사람, 독일 사람, 폴란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전생의 업과 현생에서 만나는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신동이었던 모차르트를 생각해보라.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악보 보는 법, 악기 다루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는 분명히 전생에 악기를 아주 잘 연주하는 사람아었을 것이고 그것이 정신적 습관, 즉 업을 만들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실제로 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음악을 좋아했다. 모차르트의 전생의 의식은 이런 조건과 만나서 어떤결과를 맺은 것이다. 아이는 이미 음악에대한 강한 업이 있는 것이고 새로운 조건과 몸을 찾으면 이 정신적 습관의 힘 mental habit force은 계속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업과 운명은 어떻게 다를까. 흔히 말하는 '팔자'와 업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과나무 밑에 앉아 사고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결국 사과는 무릎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예 나무를 흔들거나 나무위에 올라가 사과를 딴다고 하자. 아때도 마찬가지로 사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방법, 즉 나무 밑에 앉아 사과가 떨어지기를 가다라는 것이 바로 운명이다.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언젠가 사과는 떨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나무를 흔들면 우리가 직접 인과관계에 개입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내 다른 행동, 혹은 사고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 모든것은 수 없는 생에서 만들어놓은 습관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생에서 우리는 인과관계를 조절할 수도 있고 총제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그것은 바로 마음 공부를 통해서 가능하다. 매일 참선 수행하고 염불 수행해야 한다. 절하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본성으로 돌아오면 우리 업을 조종할 수 있으며, 나쁜 업도 막을 수 있다. 나쁜 업을 받고 태어났다고 불평하지말라. 그저 열심히 수행하라. 계으른 마음을 버리고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한 길로 나아가라. 그러면 당신은 원인, 조건, 결과를 조율할 수 있다.
성냥을 예를 들어보자. 성냥은 각 사람속에 들어있는 원인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그것은 불꽃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는 타오르지 못한다. 이때 성냥갑은 어떤 조건이다. 원인이 조건을 만나면 '불' 이라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성냥으로 성냥갑을 그으면 불꽃이 인다. 성냥갑에 종이를 그어대 봐야 불꽃은 일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우리인간의 의식속에 다양한 원인이 있다고 가르친다. 즉, 생각이 원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원인이 어떤 조건과 만나면 장시간에 걸쳐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조건을 만나게 하지않으면 당연히 원인도 소멸한다. 원인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라진다. 이 조건을 만들지 않는 것, 아니, 통제할 수있다는 것이야말로 수행을 통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오직 모를 뿐.'
술을 예로 들어보자. 술 먹고 싶다는 욕망은 근본 원인이고 술은 조건이다. 따라서 술이 일단 손에 들어오면 마시게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습관이 된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술을 피하겠다고 생각하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욕망은 조금씩 사라진다. 술,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근원이 이런 조건을 만나면 결과적으로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파란 콩을 심으면 파란 콩이나오고 노란 콩을 심으면 노란 콩이 나온다. 노란 콩을 심은 데서 파란콩이 나올수는 없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르 낳는다. 불교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업과 삶을 이해하고 싶으면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바로 지금 이순간의 마음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좋은 일을 하면 행복해 지고, 나쁜일을 하면 고통이 찾아온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들까? 탄식한다. 하지만 인과법칙은 간단하다. 우리는 어떤 마음의 습관을 계속 만들어온 다음, 그것을 바꾸려 하거나 원인을 제가하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온 것이다. 이생에서뿐 아니라 수많은 전생에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결과를 경험해왔다. 습관이 수없는 다시 태어남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움직일 수 없기 대문에 이 습관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아주 많이 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아주 좋다. 그런데 어떤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공한 사람들은 전생에 이미 노력을 많아 해서 그 습관이 이생의 조건과 만나 별다른 노력없이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전생의 행동과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동시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되는 사람들은 전생에 만들어놓은 나쁜 업들 때문이다. 부지런히 일해도 전생에 쌓아놓은 업이 장애로 작용해서 이생에서 무르익어 노력이 열매맺기 힘들기 때문이다. 착한 마음을 가져라. 그것이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만약 사는게 힘들면 이렇게 생각하라.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내 잘못이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아니면 전생에서 이런 고통이 나올 원인이 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금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원인을 버릴 수 있으니 행복해 진다. 열심히 수행해서 중심이 흔들리지않으면 어떤것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것은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업은 이미 전생의 생각과 행동, 즉 오랜 시간이 만들어온 마음의 습관에의해 결정된 것이다. 이생에서 순간순간 이 습관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칙으로서 참선 수행을 열심히하면 원인이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결과도 변하는 것이다.
사는 게 힘들면 사람들은 외부조건만 탓한다. "저 사람이 나빠 지금 상황은 나에게 좋지않아. 그가 나에게 잘못하기 때문에 내가 힘든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원인을 부모 탓, 배우자 탓 혹은 사회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수많은 생을 통해 만들어온 내 안의 생각과 사고에 있고,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열심히 수행해서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근본 원인이 제거돼 아무리 나쁜 조건을 만나더라도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원인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지는 법이다.

연기 . 緣起 . Dependent Origination
종연생 . 從緣生 . To arise from conditions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종연멸 . 從緣滅 To be extinct from conditions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아유종유 . 我有從有 If I exist, that exists.
내가 존재하면 저것이 존재한다.
아멸종멸 . 我滅從滅 If I cease to exist, that ceases to exist.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뉜다. 마음은 언제 나타나서 어떻게 변해 언제 사라지는가? 이런 생각은 시간에대한 생각이다. 이에 비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여기 책상에 컵이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지팡이거 있는 것이가, 없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어떤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인가? 대승불교는 바로 이 공간과 관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인간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여기 이 앞에 놓은 이 책은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이에 비해 소승불교는 이 책이 언제 나타났는지에 대한 통찰이다. 고통이 언제 나타났는가? 마음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무슨일이 있어났는가? 한번 물어보자.
이 세상은 언제 시작 했나? 우리의 이 '마음'이란 것은 언제 비롯되었나.? 모든것은 이미 여러조건이 맞아떨어져 나온결과라고 했다. 어떤조건이 나타나면 어떤결과가 나타난다. 조건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내가 여기 있으면 뭔가가 저기있다. 내가 여기 없으면 뭔가도 저기없다. 다시말하면 이 세게는 내가 만드는 세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세계를 만들었다. 개는 개의 세계를, 고양이는 고양이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서로가 보는 세계는 다르다.
여자들은 쥐를 보면 소리를 지르지만 고양이는 쥐를 보면 좋아한다. "우와! 내 밥이 나타났다."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면 나는 좋은 세상을 가지는 것이고, 나쁜세상을 만들면 나쁜세상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여기 존재하면 이 세상은 내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도 사랒진다.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저기에 뭔가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죽어도 하늘에 있는 태양은 없어지지않는데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태양이 아니다. 누군가의 태양이다. 누군가가 현재 보고있는 태양이다. 본래 태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태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라지면 태양도 사라진다. 내가 사라지면 모든것이 사라진다. 그것이 부처님의 1단계 가르침이다.
LA의 달마 선원 Dharma Zen Center에 어느 날 누가 찾아왔다.
옷도 아주 잘 차려입은 긴 수염을 기른 한국신사였다. 그는 유교, 도교, 불교는 물론 서양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물리학, 과학, 심리학, 문학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책에서 읽은 단어와 개념들로 가득차 있었다. 죽은 언어였던 것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그가 내 컵을 가르키면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어디서 왔읍니까?"
내가 아무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스님, 이 컵이 가게에서 사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을까요?"
나는 별 생각없이 이렇게 말했다.
"공장에서요."
"그러면 그전에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공장장이 공장에서 모든것을 지휘해서 컵을 만들었겠지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태양, 달, 별, 산, 강, 심지어 인간도 '누군가가 ' 만들었겠네요."
"...... 네."
순간 나는 그가 진리를 찾기위한것이 이니라 어떤 특정한 생각으로 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다시 물었다.
"스님, 그럼 이 세상 만물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당신이오."
내가 불쑥 이렇게 말하자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이젠 내가 하나 여쭙겠소. 여기 무지개가 있다고 칩시다. 그건 누가 만든 거지요? 하느님이요? 부처님이요?"
그는 잠간 멈뭇거리더니 "태양빛이 만든것이 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양은 누가 만들었지요?"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둣 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무지개는 태양, 물, 그리고 우리의 눈 이 세가지가 어루러져 만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있으면 무지개는 저기 있읍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무지개도 없읍니다. 여기 다섯사람이 있다면 다섯 개의 무지개가 있는거지요.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를 봅니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 무지개는 여기에 있는 것이고 그들의 무지개는 거기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무지개는 이처럼 서로 다릅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이 컵은 나한테는 여기에 있는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열 사람에게는 열 개의 무지개가 있고, 스무 사람에게는 스무 개의 무지개가 있는 것이다. 내 무지개는 내가 만든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으면 무지개는 없는 것이고, 이 쪽 방향에서는 보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다. 서울에 앉아서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보라고 해봐야 그가 볼 수 있는 그의 무지개는 없다.
무지개는 어떤 시간과 장소라는 조건과 함께온다. 물, 수중기, 빛, 사람의 눈과 의식이 합쳐져서 생긴다. 이런 조건들이 있을 때라야만 무지개는 존재하는 것이다. 조건과 분리된 존재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보고 말한다.
"야, 여기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니까 내가 존재한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무언가가 저기에 있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라지면 내 세계도 사라지는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세계를 갖게되지만 나의 세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다름아닌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만든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원인과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만드는 것들에 휘둘린다.
개미를 통해 한번 설명해보자. 그 수많은 개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빵부스러기, 나무토막, 잎 부스러기를 옮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작기도 해라. 이처럼 작은 세계도 있구나" 한다. 하지만 개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들 세계의 전부이다. 물 한 방울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물 한 방울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수만의 미생물들이 그 속에서 살고 자라고 죽는다. 아주 작은 세계이지만 미생물에게는 그세상이 전부이다.
여러분이 우주비행사가 됐다고 상상해보자. 우주선 창밖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이고 참 작구나." 우주선까지 갈 것도 없이 비행기 창문에서 내려다봐도 같은 생각이 들것이다. 산, 나무, 강, 빌딩...... 땅에 있을 때는 그렇게 커 보였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의 세계를 만들고 나의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아울러 나의 삶을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도 만든다. 이 모든것들은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어디에 있으며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현재도 마찬가지다.
여러분 중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말을 설사 받아들인다 해도 현재가 없다는 말까지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현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사실은 큰 착각이다. 현재가 어디있는가? 현재가 존재한다고 하면 이미 그건 과거이다. 현재라는 단어를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들 뿐이다.
내가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만드는 시간은 다른 사람의 것이아닌 바로 나의 시간이다. 맞벌이하는 아내를 가다리는 남편의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은 오후 5시에 민나가로 했다. 그런데 6시 반이 됐는데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는다. 남편은 점점 화가난다. 이때 화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고 6시 반은 '그의' 시간이다. 아내는 같은 시간, 그녀의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 하지만 차 안에서 아내를 기다라는 남편의 시간은 너무 천천히 지니가서 고통의 시간으로 바뀐다. 똑같은 시간인데도 아내와 남편의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왜 다른가?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좋게 혹은 나쁘게, 행복하게 혹은 슬프게 만든다. 오직 우리의 이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삶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저녁 8시에 디스코 장에 간다고 하자. 친한 친구들과 춤을 추는 아주재미있는 파티이다. 모두 줄겁게 놀다보니 훌쩍시간이 흘러벌써 11시 반이 되었다. 집에 갈 시간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다. 하지만 여자친구를 마중하러 공항에 간다고 생각해 보자. 한 달이나 못 보았기 때문에 가슴이 마구 뛴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그때 한 시간은 한 달이나 1년처럼 느껴질 것이다. 디스코 장에서 춤을출 때 느끼는 시간과 공항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느끼는 시간은 이렇게 다르다. 다 생각에서 오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 나의 마음ㅇ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생각은 또한 공간을 만든다. 미국과 한국 모두 동서남북이 있지만 미국에서 보는 동서남북과 한국에서 보는 동서남북은 다르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나의 동서남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나의 동서남북은 어디로갈까? 죽은 사람에게 동서남북이 있을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 사람이 오른손을 들어올려 오른쪽이라고 하면 반대편 사람에겐는 왼쪽이다. 큰방에 1백 명이 들어서 있다면 각자의 오른쪽과 왼쪽이 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전쟁과 갈등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들만의 '왼쪽'과 '오른쪽'을 만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간이 조건과 결과를 지배한다면 시간은 원인을 지배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인은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수평선과 수직선에 비유해보면 시간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며 공간은 수직선이다. 원인은 항상 어떤 조건을 가로질러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져 있다고 할 때 그 상황은 공간이다. 나의 상황은 나의 위치, 방, 관계, 집, 경험, 삶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원인은 어떤 조건, 상황을 가로질러 '고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 때문에 상황이나 조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상황에 집착하면 조건에 집착하고 원인은 사라질 수가 없다. 원인은 언제나 내가 집착하는 조건에 의해 불이붙어 매 순간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원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시간과 공간, 원인과 조건은 항상 같이 작용한다. 생각을 놓지 않으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한 여자가 있다. 그녀가 이 경험에 집착하면 일종의 원인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여자이기 때ㅜ네 상처받았다. 남자가 싫다.' 그리고 그것은 조건이 되고, 이런 원인과 조건에 집착하면 그녀의 삶은 언제나 남자로 인해 고통으로 얼룩진다. 그녀의 원인은 항상 조건을 가로지른다. 그녀가 어딜 가든, 이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수백권의 책도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정신과 병원 치료도 소용없다.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시간과 공간을 만들지 말라. 원인과 결과도 만들지말고 집착하지 말아라. 생각, 조건, 상황, 시간 이 모든것을 천천히 내려놓아라. 순간순간 오직 모를 뿐......이다. 그러면 원인도 점점 사라진다.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으로 산다면 시간과 공간을 이미 뛰어 넘은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의 삶에 다가오는 어떤 조건이나 상황도 오직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만 쓰여진다. 그것이 자유이다. 불교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각자의 세계 혹은 사고방식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지구와 달은 태양주위를 돈다. 이것은 작은 세계로, 소천小天이라고 한다.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태양계에 닿아 있다. 한 개의 태양계도 매우크다. 그런데 3천 개의 태양계가 중간 크기의 은하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3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수백만 개의 은하계가 모인 우주는 광대하다. 그레 비하면 인간 세계란 아주 작다. 불교는 우리가 이런 큰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생각이 만들어내는 좁은 세게에 머물지 않게 될 것이다. 개미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도 그런식으로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좁은 소견으로 만들어놓은 아주 작은 세상에 안주하며 산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리가 우주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면 언제나 남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내가 어떻게 나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지를 아는 것은 쉽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 또 신은 모든것을 알고있고, 천국과 에덴과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악과도 안들어 "이 열매를 먹으면 죄를 받아 죽는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신 역시 어떤것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나무를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부모라고 생각해봐라. 독을 만든뒤 아이들에게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이가 그것을 먹었다고 탓할 수 있는가? 인과와 연기가 주는 가르침은 재미있다. 선악과를 만든 신은 어디서 왔으며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신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힌트 하나를 주겠다.
'신'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실수이다. 입을 열면 원인이 나타나고 입을 닫으면 사라진다. 신을 만들지 말라. 부처님도 만들디 말라. 순간순간 그 어느것도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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