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8, 2012

숭산대선사의 가르침 반야심경

반야심경 . 般若心經 The Maha Prajna Paramita Heart Sutra

照見 五溫皆空 度一切 苦厄
Perrceiving that all five skandhas are empty saves all begins from suffering.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괴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No appearing, no disappearing, no taint, no purity, no increase, no decrease.
나타나는것도, 사라지는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涅槃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No cognition, no attainment, Nivana

正等正覺
Unexcelled perfect enlightenment---anuttara samyak sambodhi.
정등정각, 아뇩다라삼약삼보리
Gate,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반야심경*, 정확히 말해 (마하바라밀다심경)은 260자 밖에 되지않는 짧은 경전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야심경*안에는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8만 4천 경전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전 세계 모든 절에서 읊어진다. 서울 화계사와 계룡산 무상사의 국제선원 에서도 매일 아침 한국말로 한번, 영어로 한 번, 저녁에는 한국 말 한번, 영어로 한번해서 두번씩,
그리고 결제기간 동안에는 더 많이 암송된다. 때때로 마음이 맑지않거나 참선수행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을 읽어라. 그러면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마하(Maha)라는 말은 위대하다는 뜻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 Prejna Paramita)'이라는 말은 지혜의 완성을 뜻하며, '심셩 Heart Sutra'은 마음에 길 이라는 뜻 이다. 따라서 이것을 '지혜로 가는 위대한 길'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에서 진정으로 무한한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땅이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고. 어떤이에게는 바다가 가장 큰것으로 보일지도 무른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가장 클까? 어쩌면 우주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고 무한대의 세계를 담고 있으니까. 한 위대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는 나의 몸을 덮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온 우주를 덮을 수 있다." ㅇ우주는 내가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사실상 아주 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주라고하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으로 전 우주를
덮고 있는 것이데,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무한대적 시공간보다 훨씬 큰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반야심경*은 이 가장 큰 것, 큰 마음을 지적한다. 이 작은 경전의 제목에 '가장 크다'는 의미인 마하를 붙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과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照見五溫皆空 度一切苦厄

이 세상 도처에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어떤 물질적인 것을 얻기위한 욕심을 쫓는다. 자신들이 느끼는 것들이 삶을 완성시켜줄 것이라 믿고 있으며,다른 사람들에의해 인정받고 싶다는 야망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투쟁하는지와 상관없이, 설사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들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영원히 지켜낼 수는 없다. 이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고통 역시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진짜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다 죽게되면 고통는 사라진다. 고통은 단지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ㅇ을 깨달으면 어떠한
고통이나 재앙도 존재하지 않게되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도 참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배웠다. 부처님은 먼저 우리가 '마음' 혹은 '나'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가지가 뭉쳐만들어진 무더기(五溫, skandhas)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무더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정신적 에너지의 집전물(五溫)일 뿐이다. 인간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변할 때 불가피하게 고통에 빠진다. 이것들이 실제이고 '나'라고 믿기 때문에 결코 고통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이 에너지의 집적물들 역시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무엇이 고통을 만드는가?
이 앞에 지금 컵이있다. 여기에 주스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컵이 깨지먄 주스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무터 고통이 오는가? 우리가 오온이라는 정신적 에너지 무더기에 집착한다면 고통은 머물 곳(컵)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으ㅢ 말대로 이 에너지의 무더기가 공허하다면 고통은 그것이 머물 컵을 잃는다.
따라서 '공'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여하다. 열심히 수행하여 *반야심경* 오온의 핵심을 통찰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욕심으로부터 구해준다. 그러나 거둡 말하지만,
단지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은 '모양 色이 공이고 공이 모양 色이다'라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오래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이상 생활에서 이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다.
예를 들어 여기에 갈색나무의자가 있다고 치자. 딱딱하고 무겁지만 앉을 수도 있고 물건을 놓을 수도 있다. 의자에 불을 붙여보자. 잠시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보면 의자는 이미 불에 타고 없어져버린 뒤다.
딱딱하고 강한 것으로 보였던 그것이 찌꺼기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의자라는 물체는 이처럼 공하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한다. 다시말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든 짧은 시간이 걸리든 의자는 결국 변한다.
그러므로 이 갈색의자는 완벽히 공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앉으면 우리 몸무게를 지탱한다.
우리들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이것이 모든 고총의 원인이다. 이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고 싶으면 '이름과 모양이 실체가 아니며 무상하다.'는 약을 먹어야 한다. 그것들은 엊제나 변하고 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부나 명예,
다른사람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조차 공허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들은 몸을 소중히여긴다. 또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곧 죽고 몸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생전에 얼마나 몸을 소중히 다뤘느냐에 관계없이 죽을 때는
이 공한 몸을 가져갈 수 없으며 돈도, 명예도 섹스도 그 어떤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런것들에 집착해 있다. 그들은 이름과 이공허한 것들을 위해, 단지 그것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그들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그들은 오로지 돈과 명성,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높은 지위를 얻기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이 공헐하고 무상한 것들을 얻기위해 때로는 온갖 모욕과 고통도 감수한다.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섹스에 집착한다. 소용없는 일이다. 모든 형태는 공하기 때문에 뭔가가지거나 지킬 수 잇다.
고 하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가장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나는 애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이다.바로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아의 삶을 만든다. 그것이 지금과 다음 생을 결정한다. 모든것이 본래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우리은 이 무상한 것들을 놓아버리고 고통없이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젹한 자유이다.
이와 관련해 아주 뉴명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아테네에 디오게네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최고의 철학자였음에도 집없이 방황하는 한 마리 개와 같은 생활을 했다. 늘 밖에서 노숙을 했으며 옷은 늘 헐벗었다.
그날그날 먹을 거리도 걱정하지않고 지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옷도 입지않은 채 지내는 등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자연주의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역시 거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깁자기 서늘하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그의 눈앞에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알렉산더대왕이 서 있는것이 아닌가.
알렉산더는 돵대한 군사력과 지적인 우수함으로 세계를 정복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있는 영웅이었다. 그날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로부터 몇가지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화려한 군복을 입고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과시하며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누운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알렉산더 대왕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요, 디오게네스. 당신을 돕고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나는 이미 세계를 정복했소. 셀 수 없는 왕궁과 부가 내게있소. 당신이 원한다면 다 드리리다. 땅이든, 돈이든, 지위이든 말만하면 모두 당신것이요. 소원을 말하시요."
"고맙습니다. 원하는 것이 하나 있긴 하지요." "말씀만 하십시요. 다 드리겠읍니다." "좀 비켜서 주시겠읍니까?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좀 춥군요."
"오, 미안 합니다. 알렉산더가 사과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소원 입니다. 하하하하.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모양과 공함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지 햇빛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세상 모든것을 다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디오게네스는 단지
"햇빛을 가리지 마시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오직 그것 뿐이다. 디오게네스는 이미 온 진리를 다 얻었다. 그는 실제가 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과 모양 역시 공해서 부나 명예, 사람, 가족, 높은 지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모든것은 공하다. 왜 이 공한 것들을 갈망하는가. 그것들은 진정으로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지금 나는 단지 햇빛을 원할 뿐이다.' 이것이 다다. 디오게네스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라는 것을 완벽히 깨달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자유였다. 더 이상 붙잡을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것을 깨달으면 수행이 필요없다. 법문 또한 필요없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수행이 필요하다. '모양이 공하고 공한 것이 모양이다'라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참선 수행은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가령 여기 3밀리리터의 물이 담긴 병인 있다고 하자 이병에 100도의 열을 가하면 물은 모두 수증기로 변한다.
0도 이하로 얼리면 얼음이 된다. 물은 이처럼 모양과 온도에 따라 변하지만 물 그자체인 H2O는 변하지 않는다. 부증불감 不增不減 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을 통해 이같은 에너지 불멸의 법칙을 고안해 냈고,
후쿠는 화학을 통해 질량불변이라는 진리를 창출해냈다. 이처럼 불교는 현대 물리학이나 화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은 더럽고 깨끗한것도 없다. 깨ㅔ끗한 물을 마셔도 조금있다가 더러운 오줌으로 나온다. 물은 또 개울에 있다해서 적고 바다에들어간다고 해서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이 따로있지 않다.
*반야심경*은 우리의 본성을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반야심경*에는 '아니다' 不라는 말이 여러번 나온다. 진정한 공함을 깨달으면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말이나 단어는 우리본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과 단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말과 단어라는 약이 필요하다.
*반야심경*은 이 두가지를 모두 인식하고 있다. 즉 우리의 본성이 아닌것을 설명함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드러낸다. 딱히 무엇인지 얘기할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닌것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우리 본성은 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다. *반야심경*은 오직 '아니다'라고만 말한다. 아마 이것이 말과 단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완벽하게 정지해 있으며 그리고 공하다. 그것은 모든것을 구성하는 우주적 실체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타나거나 사라짐이 있겠는가.
어떻게 더러움과 순수함이 있겠는가 이모든 것은 결국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반야심경*은 생각이전의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법은 공하다. 깨달음도 깨달을 바도 없다. 그것이 열반의 세계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반야심경*은 '모든법은 공하다'라고 한다. 따라서 법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조차 큰 실수다. '진정한 공' 의 경지에서는 말도, 단어도, 법도 없다. '보든 법이 공하다'고 입을 여는 순간 이미 '공'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 '공'이 아닌 것이다.
말과 단어를 단순히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이 지적하고 있는것을 실제로 얻어야 한다. 모든것이 공한 경지에는 인식도, 깨달음도 없다. 공이야말로 절대이다. 그러나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탕!"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반야심경*에 나온 이말은 그저 그럴듯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도 머리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진리를 찾는데 도움이 안 된다. 뭔가를 얻어야한다. 아니,
사실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한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공'이라는 소승적 경험에서 한 다계 더 나아간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거기에는 말도, 단어도 없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절대, 즉 열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해 얘기했다. 모든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고통을 멈추게하고 삶과 죽음을 멈추게 한다. 이것이 열반이며, 거기에ㅔ는 분별이없다. 가고 오는것도, 높고 낮음도, 좋고 나쁜것도 없으며, 죽고 태아남도 없다.
존재하지조차 않는것을 어떻게 멈추게 할수 있는가 이미 고통이 없는데 어떻게 고통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가. 바로 그 때문에*반야심경* 에서는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소멸도, 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정등정각 正等正覺,

야뇩다라삼약삼보리 '아뇩다라삼약삼보리 anuttara samyak sambodhi' 눈 산수크라수트로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깨달음' 다시말해 '일체만상을 두루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바로 진리를 일컫는 다른이름인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그것이 열반일 뿐이다.완벽한 정적과 축복의 경험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다. 어을 것 또한 없다. 그러나 우리의 수행은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열반의 실천에 대해 알아야한다. 이름하여 그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정한 깨달음이다. 집착이 없으면 진리를 얻는다. 우리마음은 공허해서 우주와 같이 맑다. 즉,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거울 앞에 산을 비추면 오직 산이 있을 뿐이다. 물을 비추면 오직 물이, 붉은것을 비추면 붉은것이 있고, 흰것을 비추면 흰것이 있다.
열반는 공함을 얻는 것이고 긍극적으로는 얻는것도 업ㄱ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약삼보리는 진리를 얻기위해 공의 경험을 실천하는것을 의미한다. 공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라 그것이 대승불교이고 대자대비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magate, bodhi svha!


한단계 더 나가보자. '공'을 얻으면 그다음 진리를 얻는다. 그러나 단순히 진리를 발견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이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곧 진리를 얻었다는 말이다.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정말미에 우리는 아주 뛰어난 진언 眞言, 위대하고 밝은 진언,
최상의 진언인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마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를 읊는다 그것은 '간다 간다 간다. 고해를 넘어 고통이없는 곳으로간다' 고 번역된다.
*방야심경*말미에 나오는 이 진언은 '실천'을 의미한다. 이 진언전까자 모든것은 공함과 진리를 얻는것에 대한것이다. 이 진언은 우리가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대보살의 행동이다.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깨달음을 실천해야한다ㅏ. 그것은 우리가 바로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순간순간 고통을 바라보면서 오직 중생을 돕는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반야심경*은 정말 흥미롭다. 그것은 이분법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절대의 세계로 나가고,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로 이끈다. 이분법적 세계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다'라는 세계이다. 절대의 세계는 空, 즉 열반이다.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 이어서 완벽한 세계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즉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진리 그자체를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를 경험한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사ㅛㅇ해야 한다. *반야심경*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아제아제 파라아제 파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것은 위대한 사랑과 대자대비심이 잇는 순간의 세계를 계속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대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중생과함께 실천을 할 때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위대한 사랑은 저절로 나타난다.
실천이라고 해서 어려운것이 아닌다. 순산순간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이 이미 세계평화이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주고, 배가 고프다고하면 빵을 주면된다.
단지'......할 뿐'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있으면 아무생각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야심경* 앞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지시없이 단지 깨달음과 깨닫지 않음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가면 우리가 뭔가 깨달았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자.
이것이 아제아제 파라아제 아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의미이다.
한단계, 한 단계 순간순간 즉각적으로 우리는 대자대비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사용해서 어떻게 살아애 할지를 얻어야 한다. 순간순간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오직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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