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3, 2012

소승불교

소승불교, 小僧佛敎, HINAYANA BUDDHISM
무상관, 無常觀, Insight into impermanence. 영원한 것은 없다는 통찰
부정관, 不淨觀, Insight into impurity 깨끗한 것이 없다는 통찰
무아관, 無我觀, Insight into nonself '나'는 없다는 통찰
소승불교
보리수나무 아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었고, 처음 펴신 가르침이 바로 소승불교이다. 부처님은 우리네 삶은 고통 그 자체이며,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파하셨다. 부처님이 설하신 소승불교는 세 가지 통찰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데, 무상관, 부정관, 무아관이 그것이다.
'무상관'은 우리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고통조차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다. 이것이 우주의 기본 성질이다.
아침 8시쯤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한강 다리를 건넌다고 하자.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강남에서 강북으로 건넌다고 하자. 그때 바라보는 강은 한 시간 전의 그 강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다. 8시와 9시에 바라보는 물은 똑같은 물이 아니다. 물은 계속 흘러간다. 물론 한강은 여전히 같은 한강이지만 아침 8시에 보았던 강물은 이미 바다로 흘러갔다. 따라서 아침 8시에 우리가 불렀던 '한강'은 아침 9시에 부르는 '한강'과는 다르다. 순간순간 강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떳을 때 우리 몸은 달라져 있다. 아주 미묘한 변화가 잠자고 있는 동안 일어난 것이다. 전날 먹은 음식이 소화되어 있을 테고, 얼굴이나 치아나 피부생태도 전날과 다를 것이다. 음식물은 끊임없이 대변과 소변으로 변하고 있을 것이며, 얼굴은 이미 어제보다 늙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눈치채지 못할 지라도.
사람의 몸은 매 세포가 매일매일 교체되어 7년마다 완전히 탈바꿈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알지 못한다. 순간마다 몸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다. 누군가 "10년 전 나는 파리에 갔었다"고 얘기한다고 하자. 사실 그건 완전히 엉터리같은 소리다. 바로 이 순간 말하는 몸과는 다른 육신인 것이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한다.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오래 전 이 지구는 태양에서 나왔고 달은 지구에서 나왔다고 한다. 미래의 어느 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태양에너지는 완전히 소진해서 점점 차가워질 것이다. 태양 에너지가 멈추면 지구 역시 점점 차가워진다. 모든 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며, 우리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텅 빈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깡그리 사라질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 영원하다고 믿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 마음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세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지 못하게 덮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현상세계를 제대로 보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은 곧 시라 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쥐고 흔들어대지 못할 것이다. 고통이란 바로 이렇게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내 삶은 아무 문제없어,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아마 이런 사람들은 현재 사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결국 죽는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무상한 것들을 붙잡고 욕심을 내고 언제나 자기마음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간다. ‘좋고 싫은 것’을 엄밀히 구분해놓고 이것을 진리처럼 껴안고 산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제대로 바라본다면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며, 외부 상황이 변해도 별로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곧 사라지는데 왜 집착하는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 하더라도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두 남녀가 결혼을 한다. 신혼초기에는 “아! 나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어. 너무 행복해”라며 좋아할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경험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얼마나 계속될까? 1년, 2년? 아마 3년 이상 이런 느낌을 가지고 산다면 아주 특별한 커풀일 것이다. 보통 3년 정도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변한다.
“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들은 급기야 갈라서고 고통 받는다.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계속 유지해 나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선 이 세상이 무상함을 먼저 알고 아무것도 붙잡지 말고 다 내려놓아라. 다 놓아버려라.
일부 소승불교와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승려들이 몸의 무상함을 경험하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참선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몸이 집착하는 욕망을 놓아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무상관이다
소승불교의 두 번째 통찰은 ‘부정관不淨觀’ 이다.
일체가 깨끗하지 않다고 보는 생각이다.육체 그 자체를 더럽다고 보는 경우도 있고 마음의 욕망을 더럽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더러움이란 무엇인가.
우리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고 하자. 아주 유명한 모델이나 배우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녀는 예쁘게 화장을 하고 멋있는 머리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비싼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목에는 10캐럿짜리 다이야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다. 하지만 그녀의 몸안에는 여느사람과 마찬가지로 똥이 들어있다. 화려한 겉모습만 보면 안에 들어 있는 똥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을지 모른다. 일시적인 외양이나 몸, 화장, 옷, 다이야몬드에 현혹돼 ‘똥’ 생각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우리 삶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갈망하도록 만든다.
매일 샤워를 하던 사람이 하루, 이틀 샤워를 안 한다고 치자. 이런 상태에서 사무실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이 금방 알아챌 것이다. 좋은 냄새가 안 날 터이고 몸에 더러움이 묻어 있을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은 좋지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더러우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나쁜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이야기는 사람 몸이 본래 더럽다는 말이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에 문제가 아니라 원래 우리의 상태가 그렇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것이 깨끗하지 않다는 의미의 ‘부정不淨’ 이다.
그러나 본래 ‘더러움’도 더러움이 아니다. 깨끗하고 더럽다는 것도 다 우리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은 똥을 싫어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똥을 먹는다. 인간이 싼 똥을 먹는 구더기, 새, 개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동물들은 서로의 똥을 먹기도 한다. 말은 자기네 똥이 널려있는 풀 위에 산다. 양은 똥으로 더렵혀진 풀을 먹는다. 그리고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는 사람 똥으로 돼지를 키워 아주 비싸게 팔기도 한다.
이런 동물이나 곤충들의 의식에는 인간이 생각하듯 똥이 더럽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박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더럽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똥은 더러워서 싫다.”
“이러이러한 것은 더럽다.”
“나는 저런 사람은 싫어, 이런 사람이 좋아.”
그러한 생각들이 더럽고 깨끗한 것을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고통을 만들기 싫다면 더럽고 깨끗한 것을 만들어내지 말라. 생각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천이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을 만드는 더러움이란 결국 우리마음이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용심이 많으면 마음은 더러워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돈이나 권력, 성性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럽다’고 하는 것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순수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어떤 집착이나 열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더러워지고 오염된다. 하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면 마음을 더럽히는 것들을 바로 볼 수 있어서 욕심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
소승불교의 세 번째 통찰인 ‘無我觀은 내가 없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항상 ‘나’만을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좋아, 나는 저 사람이 싫어.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그러나 본래 이 ‘나’라는 것은 없다.’나’라는 것 역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나’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의 말을 뒤집어보자. 자, 그렇다면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無我觀 수행은 우리 마음을 아주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습관, 버릇의 결합일 뿐이다. ‘나’라는 것은 생각, 감정, 인식, 충동, 의식들이 끊임 없이 서로 반응해서 일시적으로 모인 결과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다섯 개가 뭉친 무더기라는 뜻이다.
당신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는가? 당신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내 얼굴, 내 부모, 내 나라 이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택한 것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진정 이 같은 물음에 답을 찾고 싶다면, 이 고해의 세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참선 수행을 하라.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고통스런 상황을 그저 받아드릴 뿐이다. 아니,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지 모르며,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단지 사회적 상황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나온 ‘생각’들일 뿐이다.
내 주변에는 아주 훌륭한 교육을 받고 바쁘게 사시는 스님 한 분 계셨다. 그는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에 많은 절을 세우기도 했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큰 소망이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절을 짓고 불교대학도 세워 학장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포교에 열심인 그 스님을 존경하고 따랐다. 스님은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느라 참선 수행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스님을 마날 때마다 “큰절과 불교대학을 짓는 일도 좋지만 수행하는 일만이 우리자신을 찾게 해줍니다. 수행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예, 예, 일이 끝나는 대로 참선 수행할 겁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지 한달 뒤 그는 뇌졸중으로 입원해 반신불수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진정 그가 원하는 것이었는가? 박사학위? 불교 재학? 훌륭한 절? 이 모든 것들이 정녕 우리의 삶을 고해에서 건져준다는 것인가? 이 짧은 인생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죽으면 무엇을 가져갈 수 있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空手來 空手去)’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독교 속담에는 ‘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도 있다.이 세상에 나서 무엇을 얼마나 성취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몸조차 가져갈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극도의 허무주의자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삶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그렇다면 자살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이 아니다.
내 말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의미나 이유 혹은 선택이란 결국 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탬이 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이유이다. 이것을 얻으려면 우선 참선수행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無我觀이다.
흔히 ‘나’ 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나’란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큰가? 어떻게 생겼나? 무슨 색깔인가? 어디에 놓고 다니는가? 우리 내면을 깊이 바라본다면 실제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께달음이 바로 소승불교의 목적인 ‘열반’을 의미한다. 완벽한 정적과 소멸의 상태이다. 마음과 마음이 만드는 고통이 완벽하게 空 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기쁨을 얻게 된다. 그 경지에서는 오고 가는 것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으며, 행복도 슬픔도 없다.
소승불교의 세가지 통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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