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4, 2012

숭산 대선사 가르침 무상관

무상관 • 無常觀 Insight into Impermanence

인생8고 • 人生八苦 The Eight Sufferings
生Birth 老Old age 病 Sickness 死Death 四苦The Four Sufferings
애 별 리 고 愛 別 離 苦 Being separated from those you love
원 증 회 고 怨 憎 會 苦 being in the presence of those you dislike
구 불 득 고 求 不 得 苦 Not getting what you desire
오 음 성 고 五 陰 盛 苦 The imbalance of the five skandhas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이 격는 고통이다.
우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 아앙……”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으로서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아앙’ 하는 소리로 우는데, “구’란 ‘求’한다’는 뜻이고 ‘아 我’란 ‘나’를 말한다. 즉 구아란 “나를 구해주세요” 하는 말이다. (하하하)
태어나면서 “아,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 기쁘다” 하면서 웃고 태어나는 아기가 있는가?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서 고통과 추위에 떨면서 양수로 뒤범벅된 몸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의사들은 아기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탯줄을 끊는다. 사방천지가 피로 얼룩져있다. 이처럼 인간은 나면서부터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태어남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부모들은 이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자식들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오직 투쟁만을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것을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겪을 고통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한 모든 걱정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하면서 아이들의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자라면 늙은 나를 보호해주겠지, 내 지팡이가 돼주겠지’ 하는 마음, 혹은 이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가 계속 이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부모들은 이이들을 잘 먹이고 일히고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한다고 밀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열정과 기대는 결국 집착을 불러일으켜 고통을 만든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마국에 이민와서 열심히 일하며 산다. 남들보다 덜먹고 덜입고 덜 자면서 쉬지않고 일해 큰돈을 모은다. 그러다 몸이 망가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국 무엇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거지? 하며 허무해 한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나와 절친한 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벌린 사업이 크게 성공해 돈을 많이 벌었다. 아이들도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했고, 다들 결혼해 아이낳고 잘 살고 있다. 그는 여행도 여기저기 많이다녀 안목도 넓었다. 어느 날 그와 차를 마시다가 내가 물었다.
“이선생, 당신은 아주 많은 일을 성취했고 경험했읍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성공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은 결국 무엇을 얻었읍니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읍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의마음은 텅 비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보통의 삶이다. 가지려고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지만 늙는것도 고통이다. 왜 늙는 것이 고통인가 우선 나이들면 힘이 없어져 사람들이 무시한다. 노인들이 가끔 실수라도 하면 젊은이들은 깔깔대고 웃어댄다. 노인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젊은이도 있다. 늙는다는것은 슬픈일이다. 젊었을 때 잘하던 일도 아니들면 서툴어진다. 모습도 추하게 변해서 얼굴엔 주름이 생기고, 시력은 흐려지며 귀도 잘 안들린다. 또 제대로 걷지를 못해 지팡이가 필요해지기도 한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치아도 빠진다. 젊음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슬픈일이 아닐 수없다. 늙는것을 고통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있다
늙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30여년 전 동경에 있을 때 친구의 딸이 찾아왔다. 그녀는 이제 자기나이가 마흔을 넘기니 늙는다는 것을 실가마게 돼 너무나 슬프다고 불평했다. 주름진 자기얼굴을 보기싫고 그것이 늘 신경이 쓰여 절에와도 염불이 안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녀보다 늙은 사람들도 절에와서 열심히 염불을 하는데 그녀는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거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에 절에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후6개월쯤 지난 뒤 웬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와 아는체를 했는데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햇다. 간신히 살펴보니 아! 이 여자가 마로 ‘늙음’을 한탄하며 발길을 끊었던 친구의 딸이 아닌가? 나는 깜짝놀랐다. 그녀는 성형수술로 주름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그러나 수술로 얼굴의 주름을 없앴다고 해서 나이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그여자는 수술로 잠시 행복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결국 주름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그때는 아마 처음보다 더 큰 슬픔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고통이며, 늙고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의 고통앞에 놓여있다. 나이가 든다는것이 슬프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100살 먹은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기도 한다. 언젠가 120살 먹은 사람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타리 필름을 본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며 죽음과 싸워 이기고 있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TV에서 본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으며 늙은 원숭이 같았다. 눈믈, 콧물을 계속 흘려대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 두려움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퇴화하기만 할 뿐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오는 병마도 또한 고통이다. 젊었을 때라면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병의 고통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들이 아니다. 똥, 오줌도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소화도 잘 안되고, 숨을 쉬기도 힘들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걸어다니기조차 힘들어져 그저 누워있기만 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만 큰 병이 드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나 약물중독을 가지고 있거나 불치병을 않는 어린이들도 많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큰병이나면 수술해야 하고 병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본인 부주의가 아닌데도 에이즈AIDS에 감염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 귀, 코, 폐의 질환에서 오는 신체의 고통에 시달린다.
가끔 병원에 가보면 모든사람이 다 환자같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도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자들이나 가족들 모두 얼굴이 굳어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거야.” 그들은 원망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아니, 병원까지 갈것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봐도 도처에서 우리는 육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종 불치병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또 한편에선 이를 치유하기위한 각종약과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왜 부처님께서 그렇게 좋은 환경을 버리고 출가를 했는지 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왜 인간들이 이런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부처님께서 이 모든고통이 근원을 캐내기 위해 수행을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살았는가? 아니다. 그 역시 죽었다. 아니, 삶도, 죽음도, 병도, 늙음도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참 나’란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일시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생로병사가 없는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 몸 역시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드는 것, 그리하여 결국 죽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몸은 단지 렌터카일 뿐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때가되면 다른 렌터카로 바꿔타야 한다. 나는 한국산 렌터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미국, 프랑스 제를 가지고 있다. 내 렌터카는 별로 좋지않아 언젠가는 독일제로 바꿔야 할 것 같다.(하하하) 그러나 렌터카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것은 렌터카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에만 집착해있지, 운전기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처를 입을까. 잃어버릴까. 차에만 정신을 쏟을 뿐 기사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기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차를 바꿀때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물, 땅, 공기, 불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우리 렌터카는 생로병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운전기사에게는 생로병사가 따로없다. 운전기사, 즉 우리의 ‘참, 자아’를 알아야 한다. 이것만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최선의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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