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22, 2012

선의 나침판 대승불교







THE COMPASS of ZEN
대승 불교 大乘佛敎 MAHAYANA BUDDHISM

법체유공관 法體有空觀
INSIGHT INTO the existence and nonexistence of DHARMAS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무상개공관 無相皆空觀
Insight into the fact that there are no external tangible charateristics and that all is emptiness
(이름과 모양이 공하다는 통찰)
유공중도관 有空中道觀
Insight into existence, emptiness, and the MIddle Way
(존재와 공함, 중도에 대한 통찰)
제법실상관 諸法實相觀
Insight into the true aspect of all phenomena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사사무애관 事事無碍觀
Insight into the mutual interpenetration of all phenomena
(모든현상의 상호침투)
직사이진관 卽事而眞觀
Insight which sees that phenomena themselves are the Absolute (실제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대승불교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 세상 중생들에게 행한 첫 번째 가르침이 소승불교라고 믿었다. 알다시피 부처님은 6년 고행끝에 보리수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시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그래서 심지어 부처님은 처음엔 아예 가르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에는 브라만교, 요가 등 많은 가르침들이 있었고, 스승들도 많았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당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신 혹은 구루(영적 지도자)에 의존하지않고 얻은 자신의 깊은 통찰을 누가 과연 믿고 따라줄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때 한 브라마 신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두루 찾아보시면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도 있읍니다. 그들은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 먼저 가르치는 것이 어떠실지요."
그리하여 부처님은 보리수를 내려와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먼저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의 통찰은 너무깊고 심오하여 당시 풍미했던 가르침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위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부처님은 우선 무지와 욕망,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 뒤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쳤다.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관과 이 세계는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부정관, 그리고 종국에는 나와 너가 없다는 무아관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은 이 같은 기본 깨달음을 얻는 길을 가르친 뒤 열반을 얻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착한일을 많이하고 나쁜행동을 하지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계율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맑고 순수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고통을 벗어 던져서 완벽한 축복의 세계로 가는 열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으로서 이름하여 소승불교라 한다. 사람들이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소승불교 사상을 먼저 가르친 것이다. 소승불교는 먼저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완벽한 공 또는 열반으로 가는 것이다. 제자들이 이 같은 가르침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대승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는 '고통'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 즉 '空'에서 시작한다. 즉, 이 세계가 완벽히 공하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삶이 단지 고해'라는 것은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바깥 실체가 순수하든 순수하지않든, 좋든 나쁘든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모든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는 바깥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변해서 본래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고통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고통 역시 본래 없는 것이니까.
대승불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을 향한 모든 수행이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낼 것인가?" 대승불교의 수행은 마지막 한 생명이라도 고통에서 구해내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 무한한 축복의 세계인 극락으로 가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大慈大悲이다. 내 삶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모든 중생을 위해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자전거에 비유할 수 있다면 대승불교는 버스나 기차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소승불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대승불교는 나쁜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도 함께 가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처음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지만 수준이 너무 높아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숙해질 때까지 소승불교 사상을 펴신 것이다. 자,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대승불교는 크게 여섯가지 통찰로 나뉜다.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먼저 모든 실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다. 나의 실체와 우주의 실체는 똑같기 때문에 자성(自性, SELF-NATURE)이 따로 없다. 모든 법의 실체는 空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각자자신의 몸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이 깨달음을 얻기가 쉽지않다. 중국에서는 수행의 일종으로 '자기 몸을 시체로 보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나는 송장이다. 송장이다. 송장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방식으로 수행하면 몸이 우리 마음에 불어넣는 모든 욕심과 집착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이 몸이란 실제로 '나'가 아니다. 몸은 완벽하게 空한 것이다. 변하고 변해서 결국 사라진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몸이 空하고 결국 모든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이몸조차 언젠가 시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시체라고 생각하면 그다음 모든 것은 아무문제가 안 된다. 죽은 시체에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모든것을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실체가 이와같다. 우주의 모든것은 똑같이 하나의 실체이며, 실체는 긍극적으로 空하다. 이것이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로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이름과 모양이 空하다는 통찰
이 깨달음은 실재하는 모든 이름과 모양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空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놓은 뒤 이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름과 모양이 바뀔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 태양, 별, 산, 강, 나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일시적인 이름과 모양일 뿐이다. 앞에서 모든 법의 실체가 '공空'이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법의 이름과 모양 역시 '공空'하다.
중도 中道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미 중도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중도란 좋고 나쁜 것이 없는 것이다. 높고 낮음도, 가고 옴도,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중도는 단지 '空'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空은 이 우주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절대'로 향하는 길이다. 절대는 완벽하다. 좋고 나쁨, 높고 낮음, 오고 감, 삶과 죽음은 우리의 생각이 만든 것들이다.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만든다. 이것이 근본적인 망상이다.
생각은 '나'를 만든다. 또한 '나' 아닌 것'을 만든다. 우리가 이처럼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불완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통이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고통을 다른 중생들에게도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가고 오는 것도 없다. 모든것은 이미 완벽하다.
중도란 空이라는 깨달음으로가는 또 다른길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空은 완벽한 길이다. 만물이 공하며 공은 절대 그 자체이다.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공함은 절대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공함은 전 우주의 기본적 진리이다. 여기에는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이 없다. 분별심이란 오로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이원성이 사라지면 '절대'가 우리 앞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것은 '완벽한 실체의 세계' 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모든것은 空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절대이다. 따라서 모든것은 완벽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眞理, 실상實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모든것이 진리 아닌것이 없다. 해, 달, 별, 산, 강, 나무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 존재가 가지고있는 이름과 모양 또한 진리이다. 과연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소승불교는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진리는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만약 우리가 완벽하게 이 전 우주의 공함을 깨닫는다면 여기서 한 단계더 나아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옆에 벽을 가르키며) 여기 이 벽 색갈은 하얗다. 그것이 진리이다. 저 창밖에 나무는 푸르다. 그것도 진리이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 역시 진리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인다. 이것도 진리이다. (시계를 보며) 지금은 저녁 7시 15분이다. 이 모든것들이 진리이다. 이 일상의 모든것들의 진리인데도 이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들은 좋고 싫음을 스스로 만들고 좋고 나쁨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대승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인 대자대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실상에 대해 바로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핵심만 다시 짚어보자. 소승불교의 핵심은 모든것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맞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고통이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한단계 넘어오면 사실 모든것이 본질은 공하다. 고통조차도 본래없으며, 모든것은 절대이고 완벽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누군가 바로 당신 앞에서 괴로움을 겪고있다. 그것 역시 진리이다. 그렇다면 진리 아닌것이 있는가? 이건 박사급 수준이다. 실체와 이름과 모양은 완벽하게 공하다.
그것이 절대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이런 깨달음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생을 돕기 위해서이다.
모든 현상의 상호침투
만물은 이미 진리이여서 경계없이 상호공존한다. 예를들어 내 앞에 우주가 있다고 치자. 구름은 끊임없이 오고가고 가끔 비도 내린다. 빛도 오고간다. 바람도 앞뒤로 불고, 폭풍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모든 것들이 우주공간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함에도 우주는 그것들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또 그 여러가지것들은 서로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는 완벽하게 공하기 때문이다.
마음도 이와같다. 열심히 참선수행을 함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연후엔 감정이 오고가든, 생각이 오고가든, 좋은 상황이 오고 가든, 나쁜상황이 나타났다 사라지든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생기게되고, 내가처한 모든상황을 오직 다른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행복한 때이든, 고통을 겪을 때이든 오직 다른 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우리 앞에 닥친 모든상황,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을 오직 다른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데 쓸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본래가지고 있는 심성, 즉 대자대비大慈大悲이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무언가 집착해 있다는 얘기이다. 마음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떤감정, 어떤생각, 어떤문제도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생긱하는 모든것이 진리이다. 우리의 행복도 진리이며 슬픔도 진리이다. 나쁜상황도 진리이며 좋은상황 역시 진리이다. 모든것은 똑같이 공하며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있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실체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우리는 이미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만물은 공하므로 모든것이 이미 완벽한 길이다. 이것을 지적知的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실제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이고 경계가 없으며, 나의 모든행동이 순간순간 중생을 향한 큰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 본래 '나'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중생을 위한다는 말조차 틀린 말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 길에는 생각도 없고 고통도 없다. 아무것도 방해하는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순간순간의 할일이 명확해 진다. 순간순간의 모든행동은 진리이며 완벽하게 다른중생의 고통과 닿아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 완벽한 길이며 진리의 길이다.
이런 자비어린 행동은 어떤 관념이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이며,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나 I' 라는 것은 본래없기 때문에 중생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나의고통이며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심'. 위대한 사랑과 자비를 가진마음, 즉 절대의 길이다.
지금까지 얘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먼저 우리는 모든것이 똑같이 우주의 실체이며 기본적으로 空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 이 우주만물의 수많은 이름과 모양이 공하므로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이며 진리의 길, 바른 길이다.
여기서 부터는 어떤법칙, 어떤이름, 어떤 모양이든지 모두 진리여서 우리를 방해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무애無碍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며 부처의 행동이다. 순간순간의 행동이 모든 존재와 사물과 함께 나누는 우주적 본질에 닿아있다. 더 이상 '너'와 분리된 '나'는 없디. 이미 우리의 행동은 大慈大悲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대승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과 모든것이 그대로 진리라는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모든것이 空한데 그게 眞理란 말입니까?"
아주좋은 질문이다. 답은 쉽다. 집에가서 거울을 한번봐라. 거울속엔 아무것도 없다. 완벽하게 공하다. 거울앞에 붉은 공을 갖다대면 붉은공이 나타나고, 하얀공을 갖다대면 하얀공이 나타난다. 산을 갖다대면 산이나타난다. 있는 그대로 모든것을 비출 뿐이다. 붉은공을 치우면 더 이상 붉은 공이 없다. 오로지 그것을 비출때만 상像이 나타난다. 맑은 거울은 언제마 완벽히 공해서 어떤 것이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것도 아무런 장애없이 비춘다. 모든것은 이 空한 우주라는 거울앞에 서있는 그대로 왔다 갔다 하며 비춘다. 아무것도 덧붙이지도, 빼지고 않는다. 모든것을 비추는 거울이나, 거울에 비친 傷 역시 '空'하므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인간의 마음은 이렇지 못하다 마음의 거울에 붉은 것을 갖다대면 우리역시 붉은것을 비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붉은 것을 치운뒤 하얀것을 갖다대면 우리마음의 거울은 여전히 '붉은것'을 '생각'하고 있다. '붉은 것보다는 하얀것이 낫지 않을까?' 혹은 '다음에 다시 붉은것이 나타날까?' 혹은 '지금앞에있는 하얀것은 좋지않아, 붉은것이 더 좋아, 아니야, 하얀것이 더 좋아...... 아, 잘모르겠다' 하고 '생각'한다.하얀것이 앞에있지만 우리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혹은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아주강한 욕심이나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다른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행동하는 대신 이 세상의 좋고 나쁨에 집착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모든것이 空해서 결국 모든것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사는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심은 저절로 나온다.
대보살의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만물이 '空'해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삶은 모두 중생을 위한 삶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자비심은 절로 나온다. '나'가 있으면 욕심이 나오고 모든것과 내가 분리된다. 그러나 '나'가 사라지면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참선 수행을 통해 이런 진리을 깨달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자비로운 대보살의 행동은 저절로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나오듯 '얻을바도 없으며, 얻을것도 없다.'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일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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