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10,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부정관

부정관 . 不淨觀 Insight into Impurity

인생5욕 . 人生五慾 The Five Human Desires
재물욕 . 財慾 Desire for materal wealth
색욕 . 色慾 Desire for sex
명욕 . 名慾 Desire for fame
음식욕 . 食慾 Desire for food
수면욕 . 睡慾 Desire for sleep

어떤 사람들은 몸이 더럽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이 더럽다고 하다. 소승불교 수행은 몸의 더러움을 바라본 뒤 마음의 더러움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 몸의 살 속에는 피가 흐른다.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각종 몸의 내장기관과 똥, 오줌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뼈가 지탱한다. 우리 몸이 정말 깨끗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몸속이란 결국, 어떻게 말하면 피와 똥과 오줌의 뒤범벅이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의 아홉개의 구멍에서 매일 시시각각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온다고 표현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예쁘다면서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거나 비단옷을 감고 다닌다. 그러나 일단 죽으면 아무리 사랑했던 친구들도 당신의 시체를 멀리할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죽은 육체를 아홉가지 불결한 양상으로 관찰한다. 바람과 햇빛에 쏘인 시신은 먼저 부풀어 오르고, 시간이 지나면 검푸른 모습으로 변한다. 결국 그것은 문드러지고, 살이 풀어져 피고름이나오고, 썩어 허물어진다. 새나 짐승, 벌레들이 와서 뜯어먹고, 뼈와 살과 머리와 손등은 부서져 흩어지고, 해골만 훤히 드러난다. 이것마져도 화장하고나면 한줌의 재가 되어 날아가버린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몸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더럽다. 왜냐하면 어머니 배 속 역시 피와 고름투성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것을 애지중지하여 온갖 비싼것을 사다가 닦고, 바르고, 털고 해대니 이 정도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개, 돼지의 몸이나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소승불교의 세 번째 통찰인 부정관에서는 이 같은 몸에 대한 통찰을 넘어 인간의 욕심을 만들어내는 다섯가지 더러움을 강조한다.
재물욕, 색욕, 명예욕,, 음식욕, 수면욕
가만히 보면 인간의 고통이란 것이 전부 다 이 다섯가지 욕심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니치게 재물을 탐한다든지, 명예를 좇는다든지. 색을 즐긴다든지, 또 먹는 것을 지니치게 탐한다든지, 잠만 잔다든지, 일은 하지않고 놀 생각만 하는 게으른 사람은 추잡하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돈은 중요하지만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마음은 금세 욕망으로 뒤덮이게 된다. 모두들 백만장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기도 한다.
내 제자 중에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한국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돈 욕심이 많아 탐욕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절제하고 검약하는 생활은 미덕이지만 넘치면 탐욕이 된다. 내 제자의 아버지는 자식 키우면 돈 모으기 힘들다며 내 제자를 낳은 뒤로는 자식도 더 이상 낳자 않았으며, 직장에서 월급을 타오면 마누라에게 생활비만 떼어준 뒤 장롱속에 고스란히 넣어두렀다. 돈 세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마누리를 데리고 외식하는 것은 물론 밖에 나가 차 한잔 마시는 일도 없었다. 참다 못한 마누라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고 야단을 했다. 부부싸움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대뜸 마누라엑게 "나하고 못 살겠으면 차라리 갈라서자"고 선언했고 결국 그의 부모는 60세 나이에 이혼을 하게 됐다. 이를 보다 못한 내 제자가 아버지에게 따졌다.
"한평생을 돈 버는 재미 하나로 살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죽은 뒤에는 내 알바 아니다. 나는 살면서 오로지 돈 모으는 재미밖에 없다. 아들도, 마누라도 다 소용없다."
그러나 그렇게 큰소리치던 그의 아버지도 이혼 후 얼마 지니지 않아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산을 정리하던 아들은 깜짝 놀랐다. 그렇게 아버지가 목숨처럼 중히 여기던 금고를 열어보니 수십만 달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은행금고처럼 돈다발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결국 이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가막히고 화가나서 금고를 부수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물론 돈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아니, 살기위해 돈이 없으면 안 된다 문제는 돈에 집착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돈이주는 진짜 즐거움은 그것을 바르게 썼을 때뿐이다. 죽을 때 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돈을 좇는다면 이런 생각의 에너지가 우리 마음의 독이 될 뿐만 아니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을 더러움이라고 하는 것이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는 나쁘다,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음양의 법칙에 따라 태어나서 또 그 법칙대로 산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혼자 살기도 한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에 내가 제일 처음세운 미국절인 프러비던스 선원 Providence Zen Center 에 있을 때 웬 여자가 나를 만나러 왔다.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했다. 그녀는 현재 일흔일곱 번째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앞으로 남자 친구들을 더 사귀어본 뒤 장차 1백 번째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알다시피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사귄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성관계를 한다는 뜻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무려 일흔일곱 명의 남자와 섹스를 했으니 섹스에대한

집착이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는 얘기이다.
나는 그녀에게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위대한 보살 바수밀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화엄경]에는 모두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이 등장하는데 바수밀녀는 그중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이다.
바수밀녀는 부처님 생전에 창녀로 살았던 여자이다. 용모가 넘무 아름다워 그녀를 보기만 하면 모든 남자가 그녀와 자고 싶어했다. 바수밀녀는 어떤 때는 돈을 받고 몸을 팔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녀와 한 번 잠자리를 한 남자는 다시는 여자 생각이 안 나고 결국 수행자가 돼 깨달음을 얻어 큰 스승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바수밀녀는 성[性]을 그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몸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주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남자들의 색욕[色慾]을 없애 종국에는 깨달음을 얻도록 그녀의 몸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섹스가 때로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 사용될 수 있읍을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행동이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이다. 섹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디에 쓰느냐는 것이다. 바수밀녀는 그 자체로 보살이었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 섹스를 하는가?"
"그냥...... 나와 그를 위해서요."
"여전히 그대는 '나'를 갖고 있군, 그것이 문제라네, '나'라는 것을 철저히 버리게 그러면 그대의 섹스는 보살행이 될 수 있을 것이네."
1년 뒤 나는 그녀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녀가 결국 일흔여덟 번째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해서 좋은 아내와 엄마노릇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였다.
남녀의 관계는 도반[道伴]의 관계여야 한다. 도의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라는 뜻이다. 서로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데 도움을 주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의 섹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섹스를 단지 즐기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얘기지만 그럴때의 섹스는 더러운 것이 된다. 중요한것은 섹스를 어떻게 생각하는냐 하는 것인데, 이에 따라 더러워지기도 하고 깨끗해 지기도 하는 것이다.
명예욕[名譽慾]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색욕이상으로 마음을 더럽힌다. 우리는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착각이다. 이름과 모양은 본래 없으며 '나'라는 것도 없다. 모두 생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항상 '나는 이렇다'는 착각을 키워가기만 하고잇다. '나는 훌륭한 교수다.' '나는 유명한 배우다.' '나는 이런이런 친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면 좋아하고 거기에 휘둘리기도 한다. 아마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에게 '나는 이렇다'는 믿음을 없애라고 한다면 차라리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기막힌 노릇이지만 매일매일 우리는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다. 이 욕망이 만들어낸 고통은 단지 독재자나 법죄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나' 라는 사람을 생대방에게 각인시키기위해, '나'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무자비하게 경쟁한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싸우고 험담한다. 사람들은 또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유지하기위해 혼신을 다한다. 이 완벽하게 공허한 것들을 부여잡으려고 온갖 부끄러운 짓을 하고 다닌다.
어느 한 고관대작의 부인이 제비족에게 걸려들었다. 그녀는 관계를 폭로하겠다는 제비족의 위협에 시간은 물론 돈과 보석까지 갖다 바쳤다. 그러나 결국 이사실을 만천하에 공개되였고, 그녀는 완전히 망가져 여러번 자살을 기도했다. 이 사례야말로 다른사람에게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명예욕이란 것은 단순히 내가 훌륭하게 보이고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모두가 욕심이다. 다른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리는 불평하며,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욕하고 질투한다. 집은 가난해도 겉으로 옷은 잘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아는 어떤 사람은 집에 생활비도 제대로 갖다주지 못하면서 좋은 차를 몰고 다니고 매일 비싼 옷만 입고 다니다.
일본이난 한국의 부모들은 자식을 낳으면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안달을 한다. 자식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기실 마음속에는 다른 부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껏이다. 자식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입시에 떨어진 아이들은 부모들이 창피해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나는 이런사람이다.'라는 기본적인 착각에서 오는 것들이다.
참선 수행을 하면 '나'라는 것이 실제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 안달할 필요도 없고, 남들이 나보다 잘 나간다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질투의 감정도 사라진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참선 수행을 열심히해서 명예욕이라는 더러움을 씻어내야한다.
식욕[食慾]도 마찬가지인데, 혀가 가진 습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옛날 우리 동네에 사돈의 8촌까지 제삿날과 생일날, 잔칫날을 일일이 공책에 다 적어놓고 그런 곳만 찾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음식점에가면 제 것 가만 놓아두고 남의 것부터 먹었다. 아내의 음식솜씨가 아주좋았음에도 매일 식당을 찾아다녔다. 오늘은 일본 식당, 내일은 중국식당...... 이런사람을 불교에서는 '아귀[餓鬼]'라고 한다.
이 모든것은 지나친 욕심에서 나온다. 이것이 오히려 동물보다 못하다. 동물은 배부르면 더 이상 먹지않고 음식에 대한 집착도 없는데 비해 사람은 과식으로 고통을 겪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맛이 있으면 계속 먹기 때문이다. 음식이란 단지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의 몸을 잘 유지해서 깨닫토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부과하다. 식욕에 끌려다니면 노예나 동물과 다름이 없다.
수면욕[睡眠慾]은 또 어떠한가, 보통 잠은 하루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정도자면 충분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무실에서, 도서관에서 '잠'과 싸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참선 수행을 하면서 조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난밤 충분히 잤는데도 죽비만 치면 조는 사람들이 있다. 잠은 자면 잘수록 더 자고싶은 것으로, 그 역시 업이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한다. '부처'란 말 자체가 '깨운다'는 의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선원에서 며칠씩 참선 수행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수행때처럼 매일 아침 3시에 일어나겠다고 다짐을 한다. 알람 시계까지 맞춰놓고 잠이 들지만 막상 아침에 시계가 울리면 버튼을 눌러놓고 다시 잠들기 일수다. 부처님은 이 세상 모두가 꿈이라고 가르쳤다. 언제 깨어있을 것인가? 잠이 너무 많아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오래전 한국에는 오히려 잠 때문에 깨달은 스님이 한 분 있다. 나중에 맷돌선사라고 알려진 이 스님은 앉거나 일하거나 걷거나 먹거나 계속 졸았다. 수행을 하려고 선방에 들어와 앉으면 죽비를 치자마자 잠에 빠져들어 더 이상 참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사는 졸면서 걷다가 큰 나무에 부딪쳣다. 마침 그걸 보고 있던 한 여인이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선사는 너무 부끄러웠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버릇을 고치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등허리에 맷돌을 짊어진 채 넘어지지 않도록 걷다가 드디어 도를 깨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맷돌선사가 됐다.(하하하)
대부분의 사람들은 5욕에 휘둘려 살지만 깨달으면 이런 것들이 우리를 묶지않아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욕심 그 자체는 나쁜것이 아니다. 다만 이 욕심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 어떻게 쓸것이가 하는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