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6, 2012

서서평 선교사와 다미안 신부

서서평 선교사와 다미안 신부

삶의 향기 허종욱 한동대 교수


한센병은 1980년 다종약물치료법(MDT)이 개발되기 전까지많해도 완치가 쉽지않은 전염병으로 여겨졌다. 문둥병 또는 나병으로 불렀다. 기독교 선교사 중에는 한센환자들을 위해 생애를 헌신한 분들이 많다. 서서평(미국명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도 그중 한 명이다.
지난 17일 광주기독간호대학 오원기념관에서 서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 및 평전출전기념회가 열렸다. 1880년에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 서 선교사는 1912년 32세 미혼의 간호사로 미국 남장로교의 파송를 받아 광주등 전남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최초의 간호교육과 여성교육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공중보건과 복지분야교육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서 선교사는 한센 환자 수용소 여수 애향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여수 애양원은 ‘한센 환자의 아버지’라고 불린는 최홍중 목사와 손양원 목사를 배출한 곳이다. 자신은 어린 환센 환자를 아들로 삼아 요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다른 선교사들이 한센 환자를 양자로 삼을 것을 권장했다. 서 선교사는 14명의 양자를 두었다.
서 선교사는 1934년 6월 26일 영양실조와 만성 풍토병으로 54세의 삶을 광주에서 마치고 소천했다. 그가남긴 유물은 입던 옷 한벌과 고무신 한 켤레뿐이었다. 사회장으로 광주시가 주최한 서 선교사의 장례식에는 그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기독교인들, 그의 돌봄을 받은 수 백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행렬에서 눈물바다를 이룽었다.
한센 환자를 돌보다 일생ㅇ을 마친 선교사가운데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 (Damien de Veuster 1840~1889) 도 잊을 수 없다.
다미안 신분는 하와이 섬 중 하나인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 환자를 동보다가 자신도 한셉병에 걸려 49세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다미안 신부는 1873년 33세에 당시 하와이 왕조가 건립한 한센 환자 격리 수용소인 몰로카이 섬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았다. 하와이 왕조의 카메하메하 5세는 하와이 여러 섬에 흩어져있던 한센 환자들을 이 섬으로 이주시켜 방치해 두었다. 다미안 신부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집을 짓고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는 일들을 감당했다.
다미안 신부가 몇 년 동안 이곳 한센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한센 환자들이 해변에 모여 나느는 이야기를 다미안 신부는 엿듣게 됐다.“자신이 한센 환자가 이니면서 우리 마음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이 말을 들은 다미안 신부는 스스로 환센 환자가 되어 그들과 함계 딩굴면서 희생적으로 그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다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그가 태어난 벨기에 루뱅에 안장되었다. 하와이 주민들의‘항의’로 그의 유품 등이 몰로카이로 옮겨져 ‘다미안 신부기념관’ 앞뜰에 안장되었다. 하와이주는 4월 15일을 ‘사랑의 순교자 다미안 신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의 동상은 워싱턴 연방의사당 로탄다에 하와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있으며 하와이 주의회 의사당 앞에도 똑같은 동상이 서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두 선교사의 고귀한 정신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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