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4, 2012

KARMA 업

카르마 · 業 Karma
보살업 菩薩業 Bodhisattva ㅡ> 대자대비 大慈大悲 Complete Cpmpassion
선업 先業 Good karma ㅡ> 행복 福 Happiness
악업 惡業 Bad karma ㅡ> 고통 苦 Suffering
적업 積業 Accumulated karma ㅡ>소질 素質 Predispositions
동업 同業 Same karma ㅡ> 동행 同行
만상 萬相 종연생 從緣生 종연멸 從緣滅 모든것은 업을 통해 나타나고 업을 통해 사라진다.
Everything appears through karma, and disppears through karma.
心生卽法生 法生卽相生 相生卽苦生
마음이 나오면 법이나오고, 법이나오면 모양이 나오고, 모양이 나오면 고통이 나온다.
Mind appears then Dharma appears, Dharma appears then form appears,
form appears then suffering appears.
心滅卽法滅 法滅卽相滅 相滅卽苦滅
마음이 사라지면 법이 사라지고, 법이 사라지면 모양이 사라지고, 모양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진다.
Mind disappears then Dharma disappears, Dharma disappears then form disappears,
form disappears then suffering disappears.
一切唯心造 우리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All things are created by the mind alone.
원인 原因 Primary Cause ㅡ> 연기 緣起 Dependent Origination ㅡ> 결과 結果 Result

우리가 지금하는 모든말과 행동은 현생과 다음 생, 다음 생에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업이라고 햇다. 우리는 요즘 세계도처에서, 특히 아프리카나 인디아같은 곳에서 기아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한쪽 나라에서는 음식이 넘쳐나느데 그들은 먹을것이 없어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간다. 전쟁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도무지 나쁜 업을 지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어린이들까지 에이증에 걸리고 살해당하고 극심한 기아와 가난에 사달린다. 왜 이런일이 일어날까. 그러나 인과관계는 언제나 명확하다.
우리가 하는, 우리가 겪는 모든일들은 우연이 아니다. 바로 전생에 지은 습관의 에너지에서 온다. 우리가 품었던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이것이 업을 만들어 어떤 결과로 열매를 맺는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어떤 마음 생태를 갖는가 이다. 아마 우리는 이생에서 많은 복과 돈을 가질지도 모른다. 좋은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상황에만 오직 복을 비는 것에만 집착하면 그것은 좋지 못한 상황, 불행의 씨앗이된다. 왜냐하면 모든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線은 점에서 시작한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순간의 마음이 다음 순간, 다음 未來를 만드는 것이다. 다음 生을 만든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의 상태이다.
마음의 중심인 단전이 강하지 않으면 바깥조건과 상황은 언제나 우리를 쥐고 흔들어 댈 것이다. ㅇ이것이 바로 업이 우리를 재배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죽는 순간, 우리 영혼은 육신이라는 그릇을 떠나 어딘가로 향한다. 악마가 이끄는 지옥으로 갈 지도 모른다. 돈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힌 나쁜 짓을 했다면 아귀가 되어 방황할 지도 모른다. 동물의 몸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다시 인간이되어 불법을 만나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중생을 위한 생을 살았다면 천국의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이 세상의 법은 아주 맑다. 순간순간 지금행동이 중생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나만을 위한 것이냐. 우리의 망음이 욕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는가, 아니면 평화로 가득차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 좋고 나쁜것을 만들지 말아라. 그래야 윤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를 얻어 아무곳이나 오갈 수 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한 삶을 산다면 천국과 지옥도 마음대로 아무 걸림없이 오갈 수 있다.
아무것도 우연히 생기는 것은 없다. 우리 인생은 이미 이전 생에서 만들어진 습관의 힘에의해 상당량 결정된다. 우리의 이 업을 다른 중생을 돕는 데 쓸 것이냐. 아니면 우리 자신만을 위해 쓸 것이냐, 이것이중요하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보살업 菩薩業 ㅡ> 대자대비 大慈大悲
선업 善業 ㅡ> 행복 幸福
악업 惡業 ㅡ> 고통 苦痛
적업 積業 ㅡ > 소질 素質
동업 同業 ㅡ> 동행 同行
원인 原因, ㅡ> 연기 緣起, ㅡ> 결과 結果

부처님은 업이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마음이 사라지면 업 또한 사라진다. 업은 생각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우리는 업을 만들지 않는 공허한 미음을 갖는다. 제 8식이 공할 때 긍정의 업과 부정의 업이 모두 사라진다. 공한 마음은 업이없는 마음이다. 우리가 얼마나 중생을 도우며 살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음 생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 본성을 찾으면 우리삶의 방향도 찾아진다.
우리는 이미 긍정적인 업과 부정적인 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러분이 매일 중생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업을 만들어 행복을 이룬다. 나쁜일을 하면 악업이 되어 고통을 낳는다.
예날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아렇게 말씀하셨다.
"매일 한 가지씩 착한일을 해라."
말하고 듣는것은 쉽지만 행하는 것은 어렵다. 시미어 하루 24시간ㅁ만 돌이켜보아도 남에게 착한일한 기억을 더듬는다면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세상 인과관계는 넌제나 명확하다. '나는 무엇인가.' 우리 본성을 찾고자 갈구하는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 중생을 도와라.
'업' 에대해 좀더 설명해보자. 업, 즉 카르마란 마음의 습習(익힐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아이들은 별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렸을때부터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잘 친다. 혹은 어떤 운동을 잘하거나 그림을 잘그리는 아이들도 있다. 모차르ㅡ트의 이약기를 잘 알 것이다. 그는 부모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교향곡을 쓰고 연주했다. 그런 행동은 그가 전생에 만들었던 강한 습관에서 나온다.
예날에 스님 한 분이 돌아가셨다. 관습에 따르면 장례를 마치고 스님의 몸은 돌아가신 지 일주일 안에 와장을 해야한다. 스님의 몸은 훌륭한 수의에 덮여서 관에 넣어졌다. 5일째 되던 날, 승려와 신도들은 관 주위에 모여 긴 염불 의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안에서 고함소리가 나는 게 아니가.
"문을 열어라. 나 좀 나가게 해다오, 나좀나가게 해다오."
사람들이 뒤로 나자빠졌고, 여자들은 무서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마침내 관을 열어보았더니, 아니 그 스님이 일어나 앉는것이 아닌가.
"아니, 스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람들이 놀라 묻자 스님이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 물었다.
"왜 나를 관 속에 넣었느냐?"
"스님은 나흘전에 돌아가셔서 지금 장례식을 치르는 중입니다."
"아니야, 나는 꿈을 꾸고 있었어."
"꿈이요, 무슨 꿈이요?"
"아주 재미있는 곳에 갔었지."
스님은 하숨 돌리더니 꿈 이야기을 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그는 큰 나무아래 있었다. 나무 옆 높은 언덕엔 큰 집이 있었고, 문 앞에는 긴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마당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너무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마치 빨려들듯 집 안으로 들어깄다. 마치 날아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큰 사자가 나타나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왜 여기 왔느냐. 돌아가라."
사자는 그 스님을 들어올려서 땅에 내리쳤다. 그는 '쿵' 하고 떨어지면서 잠을 깬 것이었다. 깨어나 보니 좁은 관안에 갇혀있었고, 자신의 머리가 부딛친 곳은 다름아닌 관 뚜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관 문짝을 두둘겨댄 것이다. 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게 정말 꿈이였나요?"
바로그때 큰스님이 들어왔다. 큰 스님은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밖에 나가 마당에 있는 나무를 보아라."
사람들이 밖에나가 나무를 보니 죽었던 스님 꿈에 본 그 나무가 아닌가. 죽었다가 돌아온 스님은 "바로 저 나무입니다. 나무 위에 새집까지 똑같아요."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큰스님은 그 스님에게 나무위로 올라가 새집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새집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스님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갓 태어난 새가 몸을 웅크린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큰스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다른사람들도 모두 의아해했다. 그러자 큰스님이 살아 돌아온 스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죽었다. 그런데 너는 사는동안 나쁜 업이 많아 새로 환생했다. 네가 들었다는 음악과 노랫소리는 네가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스님들과 신도들이 염불을 하는 소리였다. 그들의마음이 아주 간절해서 너는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들의 강한 에너지가 너의 의식을 끌어 잡아당긴 것이다. 그래서 너는 다행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저 새집속에 있는 갓 태어난 죽은 새는 바로 인간으로 환생하기 전 너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큰스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였다.
"이제 너는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지고 똑바로 수행 하거라. 그러면 너는 본성을 찾아 중생을 돕게 될 것이다. 살아돌아온 스님은 깊이 절을올렸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적어도 5백번 이상의 인연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한 부모아래 형, 동생으로 태아난 인연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지 한번 상상 해 보라. 사랑에 빠진 남녀, 결혼한 부부, 절친한 친구, 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전생의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다. 이 모든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전생에서 서로 함께한 어떤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법문을 듣기 위해 절에가면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다들 처음보는 얼굴이다. 그러나 법문을 듣는 똑같은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중국 사람들은 전생에 대부분 중국인이였을 것이다. 한국, 미국,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 또한 다른 업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개라도 어떤 개는 아주 영리하고 어떤 개는 아주 포악하다. 절에 가보면 법당 안팎을 서성이는 개나 고양이가 있다. 어떤 것들은 아예 법당 안에 들어가고싶어 안달을 한다. 내쫓기를 여러번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절이란 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못된다. 가난하기 때문에 배를 곯기가 십상이고 맛있는 고기 반찬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절을 떠나지 못한다. 이것들은 전생에 佛緣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생에 인간이었고, 또 불연이 있었건만 나쁜 업 때문에 동물로 환생한 것이다. 그러나 전생의 습관은 계속 이어져 부처님의 가르침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애완 고양이에 집착해있는 제자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가족들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엄마가 병원에서 숨이 넘어간다는 연락을 받고도 고양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며 병문안 조차 가지않았다. 인간과 동물사이의, 특히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의 업과 관련해서는 두기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전생에서도 주인과 애완동물로 만났을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생에 둘 다 인간이었으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해서 동물로 태어나 한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경우이다. 그러니 조심하라.(하하하)

모든것은 업을 통해 태어나고 업을 통해 사라진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업에서 나오고 업은 생각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업이 몸을 만들고 몸이 업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모양, 개의모양, 고양이 모양, 그리고 천국의 상태, 지옥의 상태 이 모든 것이 업에서 부터 나온다. 전생에 만들어진 업은 이생에 우리가 받을 몸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업'이 몸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몸에 집착한다. 몸이요구하는 업을 되풀이하고 심지어 그것을 더 깊고 강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몸이 업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 순환은 돌고돌아 우리 삶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한다. 이름하여 윤회, 생로병사의 끝없는 순환이다.
만물이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마음을 가지면 업을 가지게되고 업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고통을 ㅁ만든다. 그러나 마음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으로 돌아올 때 더 이상 이름도, 모양도 없다. 업도 없고 고통도 없는 것이다.
엄은 아주 단순하다. 마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런 마음이 다음순간, 다음순간, 또 다음순간을 만든다. 이 모든것이 우리의 다음생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구슬이 하나씩 모여 목걸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주의 자연법칙이다. 비가오면 꽃이피고 비가오지않으면 꽃이피지않는다. 태양이 나오면 따뜻해지고 구름이 가리면 추워진다. 인생도 비슷하다. 업을 벗어던지고 싶다면 강한 수행이필요하다. 그래야만 중생을 돕는 데 우리 업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생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업에만 집착한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어도 완벽히 잠든 상태에서 다른사람ㅇ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생각과 욕심을 끊는다면 여러분은 지혜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에 집착하여 안간힘을 다해 무엇인가를 쥐려고해도 우리의 일상이란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정말 잠들어 꾸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눈을 떠라.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라. 그럴 때에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업을 통제해 중생을 돕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5백 년 전 공부도 많이하고 돈도 많은 유명한 학승이 한 분 게셨다. 그 당시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스님들은 재산을 무려받아 제자들이 講院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래서 돈이많은 스님에게는 제자가 많았으나, 가난한 스님에게는 제자가 거의 없었다. 돈이많은 이 학승에게는 1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중 마지막 제자기 '돌음' 아었다. 돌음은 스님께 학비를 받아 3년동안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경전은 아무 필요가 없어. 경전이란 우리의 마음을 구하기 위한 것일 분이니 이미 내 마음이 비어 있다면 경전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참선도량으로 들어가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스승에게 말했다.
"스님, 오로지 경전만을 읽는것은 옳은 공부가 아닙니다. 이제는 선방으로 들어가야겠읍니다. 스님은 연로하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그때 스님은 어디로 가시겠읍니까?"
스님은 잠자코 돌음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말이 맞다. 그럼 우리 함께 가자꾸나. 그런데 내 땅과 곡식창고, 그리고 재산은 누가 지켜줄까?"
"스님에게는 유능한 제자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모든것을 맡기고 떠나시지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럼 결정되였다. 내일 바로 떠나자꾸나."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렇게 생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난 부자가 되고 싶어. 유명한 스승이 되고 싶어' 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돌음이라는 제자만 공부를 제대로 했던 셈이다. 스승은 돌음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아 ! 내가 백 번째 제자까지만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더니 부처님께서 이토록 영특한 제자를 보내주셨구나.'
스승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돌음과 함께 길을 떠날 것이라고 알렸다. 그 스님은 자신의 논과 커다란 곡식창고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고는 제자들에게 각각 할 일을 정해 주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두살마은 짐을 꾸려 작별인사를 한 뒤 함께 공부하기로 한 절로 향했다. 산으로 올라가던 그들이 잠시 멈춰섰을 때였다. 계곡사이에 있는 절을 내려다보던 돌음이 놀라 외쳤다.
"스님, 절에 불이 났어요!"
"무라고? 이런! 내 창고에 불이 났구나. 안 되겠다. 너 혼자서 가거라. 나는 절로 돌아가야겠다.!"
"안됩니다. 스님 저까짓 절과 곡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죽을 때 과연 어디로 가는지 , 이물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돌음의 만류에도 스승은 돌아가고 말았다. 돌음은 재산에 집칙하는 스승의 마음을 ㅂ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혼자 떠났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 돌음은 스승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뒤 그 스님의 49제가 다가왔다. 수많은 조문객과 제자들이 모여들어 먹고마사며 스승의 재산을 나누어갖기위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 돌음도 49제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맏사형을 만났다. 맏사형은 3년 만에 돌아온 돌음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 입적하실 땐 꼼짝도 않더니 이제야 왔어? 그러고도 재산을 나누어 갖겠다구?"
"아닙니다. 제게는 땅이나 돈은 필요 없어요. 주실 수 있다면 죽 두 그릇만 주세요, 부탁입니다."
"고작 그게 다냐?"
"예"
"좋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에는 제사같은 의식을 치르는 곳에서 마을의 혼령들에게 음식물을 바쳐 악령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돌음은 죽 두그릇을 받아들고 큰 맷돌이 있는 넓은 법당으로 들어가 가장안쪽의 가둥을 세 번 쳤다. 그러자 큰 뱀이 나타나 그 맷돌 쪽으로 기어가더니 돌음이 가져다 둔 죽을 모두 마셨다.
돌음이 뱀에게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뱀의 몸을 빌리셨읍니까?"
"미안하다. 진작 네 말을 듣지않아 뱀의 몸을 빌리게 되었구나."
그 뱀은 다름아닌 그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 스승은 왜 뱀으로 태아났을까? 그토록 성대한 49제를 치렀는데도 고작 뱀으로 태아난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의 마음이 바로 뱁과 같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부와 명성만을 좇아 의식과 영혼이 경쟁적이고 욕심으로 가득하게되어 다음생에서 뱀의 몸을 받은 것이었다. 뱁은 눈물을 흘렸다. 돌음은 이렇게 말했다.
' "스님께서는 욕심이 많았읍니다. 그런데 뱀으로 환생하여 그 죽을 다 드셨는데도 족하지 않으십니까? 어서 맷돌에 머리를 찧으셔서 그 몸을 버리십시요!"
"이 몸이 어때서 그러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뱀이된 스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정 그리못하시겠읍니까?"
돌음은 눈물을 머금고 막대기를 세번 내리쳐 뱀을 죽였다. 그러자 뱁의 시체에서 시퍼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 허공으로 몰라갔다. 돌음은 그 연기를 따라갔다. 연기는 새의 형상을 빌리기 위해 근처를 날던 새를 쫓아갔다.
"안돼요!"
돌음이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었을까. 그연기는 다시 황소의 몸속에 깃들이려고 하였다.
"안돼요!"
돌음이 다시소리쳤다. 그러자 연기는 더 멀리 날아 깊은 산속 한 중년부부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가량 지난 뒤 돌음은 그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중년 남자가 나왔다.
"무슨 일이신지요?"
"당신 부부가 곧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려드리려 왔읍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가없어 항상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마 스님께서 잘못아신 것일 겁니다. 내 아내는 지금 마흔 다섯입니다. 아기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요."
"어쨋든 만약 아기를 가지면 당신 부부는 나에게 그 아기를 주어야만 합니다."
"아기를 갖기만 한다면야 드리지요."
` "좋아요. 1년 후에 다시 오겠읍니다."
그로부터 얼마후 정말 늙은 아내가 임신을 했다. 그 붑부는 스님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이어 아주 예쁜 아기가 태아났다. 그들은 너무 행복했다. 1년후 돌음 스님이 다시 나타났다.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약속한 대로 아기를 나에게 주십시요."
그러나 그 부부는 완강히 거절했다. 돌음 스님이 꾸짖으며 말했다.
"1년 전 저와의 약속을 잊으셨읍니까?"
"하지만 우리 아기예요. 20년동안 기도를 드려 겨우 얻은 자식입니다."
"이 아기를 제게 돌려주지 않으면 아기는 앞으로 3년을 채 살지 못합니다."
돌음은 이렇게말한 뒤 돌아갔다. 아기는 3년동안 아무 탈 없이 잘 자랐다. 부부는 스님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햇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 부부는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때 돌음이 다시나타났다. 부부는 사정을 했다.
"아이가 곧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아이를 나한테 달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저한테 주시면 제가 돌보겠읍니다."
할수없이 부부는 아이를 돌음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아이가 스님의 손으로 넘어가자마자 끓던 열이 내리고 금방 미소를 지으면서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에도 금세화기가 돌았다. 부부는 이 아기가 돌음 스님과 아주 강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하느 마음으로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잘 자랐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돌음이 참선을 하는데, 소년이 부엌으로가서 칼을들고 오더니 돌음을 내리치려는게 아닌가. 순간 돌음이 뒤돌아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의 팔목을 잡았다.
"칼을 내려놓고 이리오너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한다.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이 싫어요. 그래서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왜?"
그소년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그러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돌음은 그를 창문으로 데리고 가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앉아 이 구멍에 큰 소가 올 때깢지 처다보아라. 오직 이것 뿐이다. 어떤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이 구멍만 보아라."
소년은 하루종일 먹고자는 시간만 빼고 창호지 구엉을 쳐다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지나고 1백일이 지나자 어느 날 구멍이 아주 커졌다. 그러자 정말 큰 소가 나타났다.
"음매."
아이가 "와 아아아" 소리를 지르던니 돌음을 불렀다.
"스승님 소가가요."
돌음이 뛰어오더니 갑자기 소년의 빰을 때렸다.
"지금 어디 소가 있다는 말이냐?"
순간 소년은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이해해 깨달음을 얻었다. 소년은 정신을 차려 돌음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당신은 전에 나의 제자가 아니었읍니까?"
소년의 말이 끝나자 돌음이 소년앞에 삼배를 올렸다.
전생에 소년은 바로 뱀으로 환생했던 돌음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욕심이 많아 지혜가 모자랐던 것이다. 그런 부족한 스승을 돌음은 사랑으로 잘 보살폈던 것이다. 돌음은 업을 잘 볼수 있어서 스승이 뱀에이어 노부부의 아이로 다시 몸을 받아 태아난 것을 알고 푸른연기를 따라갔던 것이다. 돌음과 스승은 서로 아주 좋은 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생에서도 그들은 스승과 제자가 된것이다.
똑같은 업을 갖는다는것은 중요하다. 강하고 맑은 방향을 갖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하다. 돌음이 선방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스승과 그의 업을 이해할수 없었다. 그러나 선방에서 수행을 통해 그 자신을 이해하게 됐고 스승의 마음까지 아주 잘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니 우선 진정한 우리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자신의 업을 먼저 이해하고 우리가 가진 업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해야 한다. 오직 이 길만이 고통에서부터 중생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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