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21, 2012

태아남의 네가지 유형

태어남의 네가지 유형
태생 胎生 . 난생 卵生 . 습생 濕生 . 화생 化生
만물은 각자 만들어내는 업에 따라 태어나고 살아간다고 했다. 무엇보다 우선 태어나는 방식이 다르다. 인간과 소와 돼지들은 포유동물이라는 업을 가지고 있어서 어미의 자궁을 통해 태어난다. 조류, 파충류, 어류는 알을 통해 태어난다.. 정신은 마치 나의 촛불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변형을 통해 나타난다.
중생은 생과 사를 만들어서 모태, 알, 습기, 변화라는 네 개의 문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다. 이것을 태생 胎生, 난생 卵生, 습생 濕生, 화생 化生이라한다. 부처님은 태어남 자체가 이미 큰 실수라고 했다. 어떻게 실수를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는데 쓸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당신이 좋아하는 문은 어느 문이냐? (하하하) 우리 의식의 저장고는 일종의 에너지라 부를 수 있다. 몸이 죽으면 에너지는 모태, 알, 습기, 변화로부터 다른 것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는 순간 의식의 저장고에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 업이냐,음악 업이냐, 싸움 업이냐,섹스 업이냐, 아니면 보살 업이냐, 이 업들은 다음 생의 씨와 같다. 인과관계는 언제나 매우 밝다. 초록색씨는 초록 콩을 만든다. 노란색 콩씨는 노란 콩을 만든다.
육도윤회 六道輪廻,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모든 중생은 끊임없이 생과 죽음의 사슬을 돈다. 이것이 바로 윤회(고통의 수례바퀴)이다. 본성을 깨닫지 못하면 이 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천상과 지옥은 우리가 죽은 뒤에 얻을 어떤 세계가 아니다. 부처님은 모든것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가르쳤다.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지금 이 순간 내마음이 어디에 머무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업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죽을 때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가지 세계에서 다시 태너난다. 이 여섯가지길은 업에 의해 만들어지고 업은 전적으로 생각에 의해 만들어 진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오직모를 뿐'을 가져서 어떤것도 만들지 않으면 윤회의 여섯가지 길은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고통의 수례바퀴에서 자유로워진다.
앞에서 얘기한 여섯가지 길 중'천상'은 성경에서 얘기하는 '천국'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신이 만드는 세계가 아니라 더없는 행복의 업을 만든 사람에 의해 창조된 마음의 영역 혹은 상태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있다. 천국이라는 축복의 열매를 단지 즐기기만 한다면 좋은 업은 사라진다. 마치 은행의 예금잔고가 소멸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현실이 천상의 상태라고 해서 단지 그것을 즐기기만 한다면 다음 生에 지금보다 더 낮은 영역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휴양지와도 같은 아주좋은 상황이여서 사실 수행하기가 더 힘들며, 오히려 수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변한다. 아무리 좋은 업을 갖는다 하더라도 이 업은 결국 변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 어떤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곳이 천상이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지옥조차도 천상계가 될 수 있다.
모든인간은 좋은곳에 가고싶어한다. 그러나 업이 변하면 우리는 떠나야한다. 만약 천국에 집착하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다른 사름을 돕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천상조차도 그러면 우리는 자유롭다.
부처님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 아주 소중한 길이라고 했다. 오직 인간만이 법문을 듣고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들 세계 사이에서 삶과 죽음, 윤회를 끊을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면 다시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기까지 억겹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이 소중한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동물은 '도'를 도저히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보다 낮은 세계이다. 수행할 수도 없고 깨달음 을 얻을 수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어야한다. 동물로 태어나는 것이 단지 잡혀먹히기 때문에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동물이 되면 끊암없이 먹을 걱정, 잠자리걱정, 또 맹수의 위협에 사달려야 하므로 수행할 시간이 없다. 동물은 그저 동물의 업만을 좇아야 한다. 아주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동물은 그들의 업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아수라의 영역은 오로지 투쟁의 영역이다. 분노, 질투를 가지고 있으면 아수라가 된다. 영혼이 싸우는 것이다.
아귀의 세계는 오직 강한 욕망만을 따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아구 영역에 사는 존재들을 '큰 입을 가졌지만 목구멍은 작은 것들'이라고 표현한다. 상상 해보라, 무척배가고픈데도 한 알의 쌀, 작은 빵부스러기조차 넘길수 없는 상황을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결코 만족을 모르는 영역이다. 때로 욕심이 많은 사람을 아귀의 마음을 가졌다고 부른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원한다. 하지만 어떤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많은 고통에 시달린다. 요즘 이런 마음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조심해야 한다.
가장낮은 영역은 지옥의 영역이다. 이것은 완벽한 고통의 영역이다. 극도의 고통의 상황이 억겁의 시간동안 계속된다.
거듭말하지만 모든 세계중에서도 인간 세상이 가장 중요하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천상의 세계가 좋으리라 생각되겠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느 마음이 일어나자 않는다. 따라서 수행도 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더 낮은 세계로 환생할 것이므로 결코 좋은 것이 아나디. 축생, 아귀, 지옥으로 환생하면 법문도 들을 수 없고 수행도 할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근본원인과 조건을 변화시킬 기회를 갖는다. 변화시킬 수 없는 다른세계의 삶에서는 할상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섯가지 길로의 윤회는 꼭 죽어야 경험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 지금 이 순간에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더없는 기쁨의 경지에 있을 수도 있고 갑자기 극도의 분노, 갈한 욕심 혹은 나쁜 감정에 사로 잡힐 수도 있다. 이는 가만히 앉아 참선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머릿속은 온갖생각들이 가득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아...... 밖에 나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싶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1초가 한 시간 혹은 하루같다. 곧이여 머릿속에는 미운 사람이 떠오를 지도 모르고 마음속에서 그와 싸울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생각이 가고오고, 가고 오고, 쉼이 없다. 행복, 분노, 질투, 욕심, 권태, 두려움이 다가온다.
우리가 생각에 집착하면 언제나 이들 영역에서 오고 간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아귀 혹은 아수라 세계에서 오고가고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욕심과 증오라는 동물의 마음에 집착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면 이런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면 죽을 때 비록 육체의 몸이 떨어져 나갈지라도 이런 마음은 계속될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동물의 영역이나 지옥의 세계에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육도 윤회를 벗어나고 싶다면 100퍼센트 '오직 모를 뿐'을 지녀야 한다. 마음에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그러면 육도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집착을 통해 육도를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겪는 것이다.

현생. 내생 . 내내생에 맞는 업 (順現業 . 順生業 . 順後業)

이 세상의 인과관계는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란 산스크리트로 '카르마 karma'라고 하는데,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업은 어떤 특별한 개념이 아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얻으면 그 무언가가 우리를 가린다.
업의 결과는 이생에서 그리고 다음 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마 당신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당신을 싫어할 것이다. 아미 그들의 친구들 역시 당신이 그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핮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고통을 격을 것이다. 당신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어떤생각, 말, 행동을 통해 뿌려진 어떤 업의 씨앗이 열매로 익어가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잘못했는지 기억을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삶이 무엇때문에 고통스러운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처음 만난사람인데도 아주 친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 만났는데도 늘 스쳐지나가듯 어색한 사람도 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따지고보면 원인이 있다. 길 가다가 다른 차와 부딪혀서 다리가 부러질지도 모르는데,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런것들은 모두가 그냥 우연히 생기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당신과 그 사람사이에 있었던 어떤 전생의 업의 결과이다. 물론 이생에 뿌려진것일 수도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 갑,을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갑이라는 사람은 현생에서 열개의 좋은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스님들에게도 좋은일을 많이했다. 이 같은 행동은 아주좋은 업을 만든다. 아마 그는 이생에서 혹은 다음생에서 그런 열개의 좋은 행동들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약 현생에서 다섯 개의 보상만을 받았다고 치자. 그리고 또 한편으로 현생에서 다섯개의 나쁜행동을 했다하자. 그리고 세 개의 불행을 겪는다고 하자. 나쁜 병에 걸리거나 아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것 말이다.
열 개의 좋은 행동을 행하여 받을 열 개의 복이 다섯 개의 나쁜행동으로 이제 다섯개의 복으로 줄었다. 그런데 세 개의 불행은 이미 겪었으므로 그는 두 개의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럼면 그가 죽을 때 이 두 개의 복이 그의 삶을 좀더 환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아까 말한 윤회의 여섯가지 형태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을 0에서 +10까지라고 가정할 때 그는 현생에서 +2이므로 비록 그가 인간으로 환생한다 해도 그리좋은 조건은 아닐 것이다. 가난하게 '업'이라는 것 , 삶에서 행한 인과관계라는 것이 어떻게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업을 만드는 한 계속된다.
이제 을이라는 사람을 보자. 을은 현생에서 아주 착한일을 많이해서 살아있는동안 열다섯 개나 복을 지었다. 그러나 전생에 이미 삼십개의 나쁜 업을 지었던 터라 그가 현생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도 그의 나쁜 '카르마'는 언제나 강력하게 그를 끌어당겨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낸다든지 사람들과 자주 자툰다든지 한다. 우리는 주뱐에서 이런유형의 사람들을 쉽게 발견한다. 성격도 나쁘고 별로 착한일도 하지않는 사람들이 아무걱정없이 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씨 곱고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겪는 경우도 본다. 그것은 모두 이전생의 결과이다.
어떤 사람들은 별로 착하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덷도 항상 좋은직업, 좋은 집에 많은 돈을 번다. 그는 한동안 늘 좋은 상황에만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가 전생에 지었던 좋은 업이 무르익어 현생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가 현생에서 짓는 나쁜 업은 아직 무르익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쉽게 설명해보자.
가령 어떤사람이 좋은 일을 몇가지 하였는데 지금 생애 다섯가지를 받고 다섯가지가 남아있다고 가정하자. 또 나쁜 일을 다섯가지 한 가운데 세 가지를 받고 두 가지가 남아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겐 다음과같은 업보의 계산이 나온다.
(+10)-(+5)=(+5)
(-5)-(-3)=(-2)
(+5)-(-2)=(+3)
또 착한 일을 15개 한 사람이 5개만 받았다면 10개가 남는다. 그런데 악한일을 30개 하여 5개만 받았다면 25개가 남는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업보계산은 다음과 같이 결정된다.
(+15)-(-5)=(+10)
(-30)-(_5)=(-25)
(_25)-(+10)=(-15)
앞서 이야기 했지만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어귀, 지옥 등 육도 중에서 천상은 성행이 20이상 되는 자가 나는 세계이고, 아수라는 선행이 10이상 되는 자가 나는 세계이며, 인간은 선악의 중간, 즉 0 지대이고, 축생은 악의 10, 아귀는 악의 20, 지옥은 악의 30 이하 되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앞사람은 겨우 사람으로 태어나되 하류층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은 축생으로 나되 하류층의 축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이 분명하여 눈썹하나 속일 수 없는 것이 인과이다.
인간이나 소, 돼지 같은 것은 태어날 때 그의 습관을 따라 태를 빌려나고[胎生], 새나 뱀 같은것은 알로 태어나며[卵生], 박테리아 같은 것은 습으로 나고[濕生], 도깨비 같은 것은 변화하여 난다[化生].
그로므로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무엇보다도 업이 중요하다. 대자대비의 보살업을 지으면 보살로 태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복옵을 받고, 악업을 지으면 고통을 받되 계속 같은 업을 반복하여 쌓으면 하나의 素質이 형성되어 습관을 이룬다. 나면서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다 전생의 소질에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소질이 바탕이되어 연습을 거듭하면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이고 천재가 되는 것이다. 적업[積業]으로 소질을 쌓아가면서도 같은 업을 지은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면 동업[同業]이 되어가고 오는 길을 같이하게 되므로 같은 가족, 형제, 보모, 일가친척, 고향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주 낯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외국에 와서도 금방 사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깝게 있으면서도 잘 사귀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나의 씨앗의 연을 따라 일어나면 결과는 그 가풍을 따라 저절로 수확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상[萬相]은 인연따라 나서 인연따라 멸한다. 마음이나면 곧 법이생기고 법이나면 곧 모양이 생기며, 모양이 생기면 고생을 자초한다. 미음이 멸하면 법이 멸하고 법이 멸하면 모양 또한 멸한다. 모양이 멸하면 고통 또한 멸하는 것이니 일체의 모든것은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본래 업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며, 단지 아해를 좁기위한, 가르치기 위한수단일 뿐이다. 업이란 오로지 생각과 욕심에서 비롯된다. 생각하면 업을 만들고 업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끊으면 어떤 업도 생겨나지 않는다. 한 위대한 선사가 말했다.
"업은 마음에서 나온다. 만약 마음이 사라지면 업도 사라진다. 불이 마른 나뭇가지를 태우듯 말이디."
이 윤회의 사슬을 끊기위한 길은 바로 이 순간 마음에 어떤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 한 제자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항상 착한일만하면 다음생에 우리의 업을 변화시킬 수 있읍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좋은 행동과 업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다른 얘기이다. 결론은 좋은 행동은 우리 업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착한 행동은 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이 복 역시 업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것을 좋은 업이라 부른다. 하지만 좋은 업도 업은 업이다. 업은 여전히 생각에의해 만들어진다.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것은 언제나 변한다. 그래서 좋은업은 결국 기한이 다 돼서 나쁜 업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업을 바꾸지를 원한다면 좋거나 나쁜것을 만들지 말라. 그것이 올바른 수행이다. 우리 업을 어떻게하면 다른 중생을 위하는 것으로 쓸 것인가가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업을 '바꾸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미 큰 실수 이다. 우리는 업의 올바른 실천과 기능을 찾아야만 한다. 이것이 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들에 집착하지 말라. 업을 바꾸고 업을 벗어버리는 것 역시 똑같다. 단지 말이 다를 뿐이다.
수행을 바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제8식, 즉 의식의 저장고에 대해 얘기했다. 의식의 창고 뒤에는 제9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 본질, 순순한 본성이다. 이 본성을 얻으면 우리는 우리의 업을 바꿀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강한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업은 생각' 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완벽하게 공허하다.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서 밝고 참된 본성을 찾게 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좋고 나쁨을 만들지 않으면 곧 맑아질 것이다. 우리의 본래 면목이 무엇이냐. 본래 실체가 무엇이냐? 부처님도, 하나님도 대신 대답해줄 수 없다. 오직 참선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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