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8, 2012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법성게

법성계 · 法性偈 The Song of Dharma Nature

법 성 원 융 무 이 상 法 性 圓 融 無 二 相
The nature of the Dharmas is perfect. It does not have two differeent aspects.
일체법은 두루 걸림없이 하나이며
제 법 부 동 본 래 적 諸 法 不 動 本 來 寂
All the various Dharma are unmoving and fundamentally still.
본래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다.
무 명 무 상 절 일 체 無 名 無 相 絶 一 切
They are without name amd form, cut off from all things.
이른과 모양이 없는 일체가 끊어진 자리다.
증 지 소 지 여 경 證 智 所 知 非餘境
This is understood by enlightened wisdom, and not by any other sphere.
아는 주체도 알 대상도 일체 경계가 없다.
일 중 일 체 다 중 일 一 中 一 切 多 中 一
The one is in the many, the many are within the one.
하나 속에 만물이 있고 만물에 하나가 있다.
일 죽 일 체 다 즉 일 一 卽 一 切 多 卽 一
The One is many, the manyare One.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것이 하나다.
무 량 원 겁 즉 일 념 無 量 遠 怯 卽 一 念
Numberless kalpas are the same as one moment.
억겁은 한순간과 같고.
일 념 즉 시 무 량 겁 一 念 卽 是 無 量 劫
One moment is the same as numberless kalpas.
한 순간은 억겁과 같다.

«법성게» 는 신라 때 의상 대사가 화엄사상을 압축해놓은 詩이다.
32구의 시로 대승 화엄사상을 통째로 담은 철학이다. 이 시들은 대부분의 절에서 요즘에도 매일 암송되고 있다. 여기에는 道의 본질이 담겨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법이란 이것이다. 법이란 저것이다." 그러나 법이란 무엇인가? 본래 진정한 법에는 이름도, 모양도 없다. 심지어 어떤것을 '법'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큰 실수이다. 법은 법이 아니다. '법'이란 말은 절대적인 실체를 일컫는 임시 이름이다.
실체는 둘이아니다. 그렇다고 어떤하나의 모양을 띠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실상이란 이 우주안에 이미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미완벽하게 공하기 때문에 사실상 어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치 전기와 같다. 때때로 전기는 선풍기를 돌리고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오게 한다. 에어컨도 작동시키고 물도 얼리고 방안도 덥게 한다. 기차도 움직이게하고 우리 몸 속에도 돌아다니다. 이때, 전기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전기는 언제나 전기이되 그 작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전기의 본질이 두 모습이아니기 때문이다. 비,눈, 안개, 수증기. 물, 바다, 진눈개비, 얼음 모두 똑같은 물질에서 나온 다른형태에 불과하다.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그것의 본질은 H2O이다.
'법'도 이와같다 여러가지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산, 강, 태양, 달, 별, 컵, 소리, 우리의 마음처럼 조건에 따라 이름과 모양이 달라질 뿐이다. 다시말해 조건이 사라지면 이름과 모양도 모두 사라진다. 법의 본질은 우리의 본성과 똑같다. 사람도 착한사람, 악한사람이 따로있는 것이 아니라 착한 마음을 내면 착한것이고 악한 마음을 내면 악한 것이다. 마음의 '꼴'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실체는 변함이없다. 지식은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가져다 줄수 없다. 1백개의 박사학위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도 모든것 속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것이 하나다.
억겹은 한 순간과 같고 한순간은 억겁과 같다.
티끌이 산이요. 산이 티끌이다. 티끌을 모으고 모으면 태산이되고 태산을 낱낱이 부스러뜨리면 티끌이된다. 물방울도 보이면 강물이 된다. 강물은 물방울이 모여서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바보같은 생각이다. 우리의 생각이 시간과 공간을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갸우뚱한다. 언뜻 이해를 못한다. 또한 하나가 아니라고 한다. 사실 이 하나라는 것도 완벽하게 공한 것이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것이 하나다.' 이 대목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것은 하나이며, 하나는 모든 것이다. 두 개의 분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공허한 공간은 나눌 수 없는 오직 하나이지만 공간 안에는 산, 강, 인간, 나무, 개, 고양이, 태양, 달 , 별, 많은 것들이 있다. 니 모든 것들이 공간을 구성한다. 모든것이 우주의 일부이지만 우주란 둘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것이 그 안에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과 밖이 없는 것이다.
이 詩는 또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도 아주 재미있는 가르침을 주고있다. '억겁은 한 순간과 같고 한 순간은 억겁과 같다.'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다. 생가하는 마음이 시간을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길거나 짧아진다. 그러나 참선수행을 하면 실제로 한 순간안에 무한대의 시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순간안에 무한대의 공간이 있다. 한 순간 안에 모든것이 있다. 한 순간은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말이 어떤 특별한 영역이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채 한 순간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언뜻 1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라 샐각할수 있다. 카메라고 한번 설명해보자. 아주 빠른 셔터 스피드를 가진 특별한 카메라가 있다고 하자. 이런종류의 가메라는 튀어 나가는 총알도 잡을수 있다. 움직이는 총알은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다. 캄메라 셔터가 아주 빨리 열리고 닫히면서 필름위에 총알을 잡아낸다.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서 공중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는 총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총알은 사실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 마음도 똑 같다. 우리가 '오직 모를 뿐' (즉, 생각이 일어나기전의 상태)이라는 카메라를 가지고 한 순간을 깊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움직이지않는 총알을 잡아낼 수 있다. 움직이지않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체 세계는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과 우주가 똑같은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본래 모든것은 완벽하게 멈춰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순간의 마음(moment mind)'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따로 없음을 의미한다.
«법성계»는 '법'의 본질과 우주의 실체에 관해 매우 재미있는 詩的인 언어를 담고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말에 불과 하다. 부처님의 말 조차 완벽하게 우리것이 되지않으면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우주의 실체는 어디서 오는가? 우주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완벽한 정적에서 온다. '만물이 하나 속에 있으며 하나속에 만물이있다.' 모든것이 이와같다. "탕!" 모든것은 하나에서 나온다. "탕!" 때때로 우리는 이것을 우주적 실체, 에너지, 부처님, 하느님(하나님), 의식, 신성함, 마음, 절대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이름은 생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본래 이 완벽한 정적은 생각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이름과 모양이 없다.
선불교에는 아주 유명한 공안이 하나 있다. '만물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서 왔는가? (萬法歸一 歸一何處)'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를 얻고 모든것을 얻는다. "탕!" 그러나 단지 머릿속으로 아는것은 도움이되지않는다. 오직 참선 수행만이 완벽하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 "탕!" 이 경험이 온전히 여러분의 것이 될때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법성계»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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