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30, 2012

불입문자 교외별전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 문자 밖에서 가르치는 진리, 마음만을 전한다. 不立文字 敎外別傳

부처님께서는 48년 섧법 후 열반에 드시면서 ' 나는 한마디도 한 바가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不立文字 敎外別傳'이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 문자에서 가르치는 진리, 즉 마음만을 전할 뿐이다. 그러면 바로 자기를 알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기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成成佛]이다

"나는 누구인가?" 선 수행으로 가는 문으로 들어가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생각에도 집착을 하지 말아라.선 수행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래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그것을 참 자아. 본성품, 부처님, 하느님, 하나님, 에너지, 마음, 의식, 신성, 절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래 이것은 이름과 모양이 없는 것이다. "탕!"

그래서 생각이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개념적인 생각으로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을 어떤 것이라고 부르거나 어떤 종류의 이름을 붙여주면 단지 생각과 이해에 그치는 것이다
위대한 중국 선사이신 남천[南泉] 스님은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은 이해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요. 이해가 아닌것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깨달음이란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세계와 우리자신의 관계는 생각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어떤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선불교의 문을 통과하고 싶으면 먼저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오직 모를 뿐'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을 깨닫는 길은 아주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아주 깊이 물어보면 된다. '나는 누구인가' .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맑은 대답이 나타나면 이미 그것이 본성품이다. 말에 좌우되지 않는, 경전밖에 있는 특별한 전달, 바로 마음을 가리켜 견성하는 것이 부처되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부처님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경전 밖에 있는 특별한 전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전은 단지 설명하기만 한다. 본성을 설명하는 말만 하더라도 1백개를 써도 모자란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모두 안다 하더라도 우리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의 본성은 말이나 단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자기의 본성을 찾는 사람에게 경전이나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단지 비빔밥이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아무리봐도 허기는 채워지지않는다. 그러나 참선의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여기 비빔밥이있다. 한입떠서 먹어라." 아무리 불경 전문가가 된다 해도 '자기자신'을 모르면 소용이없다.

오래전 중국에는 덕산[德山]이라는 아주 유명한 조사스님이 계셨다. 그는 스무 살에 출가하여 이미 여러 경전을 꿰뚫었으며, 특히 «금강경» 의 전문가로 잘 알려진 분이었다. 그는 또 «금강경»에 대한 많은 해설서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주 금강[周金剛]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찍이 학승들에게 말하기를 "한 터럭이 바다를 삼켜도 성품의 바다에는 이그러짐이 없고, 겨자씨를 마늘 끝에 던져도 바늘끝의 예리함에는 변함이 없다. 배움과 배움 없음이 어떤 것인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했다.

그는 전국의 산사를 돌아다니며 스님들이 이 중요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제대로 잘알고 있는지 테스트하곤 했다. 아무도 그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덕산 스님은 모든 논쟁에서 이겼다.

어느 날 덕산은 남중국에 있는 어떤 절의 승려들이 먹고자면서 하루종일 면벽수행을 통해 부처가 됐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겁 동안 경전을 배웓도 성불할까 말까 한데 남방의 마구나 무리들이 감히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이야기한다고? 어떻게 경전 한번 읽지않고 부처가 될 수 있나. 내 마땅히 이들의 소굴을 쓸어내버려서 이들을 소멸시키고 부처님의 은혜를 갚겠노라."

덕산 스님은 마침내 직접 남중국에 가보기로 하고 «금강경» 과 그가 지은 해설설를 짐 속에 챙겨 떠났다.
"내가 이 책으로 무지로 잠들어 있는 그들을 깨우리라."

스님은 여러 날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속을 걷던 중 작은 주막을 발견했다. 마침 점심 때라 시장하기도 해서 그곳에서 밥도 먹고 잠간 쉬기로 했다. 주인은 마침 불자로 매일 열심히 수행하는 나이 든 할머니 였다. 그 할머니는 덕산을 금방 알아봤다.

"아니, 그유명한 덕산 큰스님 아니세요.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 그리고 그 걸망에 짊어진 큰 짐은 무엇이고요?"
덕산 스님이 대답했다.

"스님들이 먹고자고 하루종일 벽만 처다보면서 수행하는 절이 남쪽에 있다고 들었읍니다. 그곳 스님들 중에 그런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된 이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읍니다. 아시다시피 내가 «금강경» 전문가 이닙니까. (걸망을 가리키며) 내가 이 «금강경» 으로 무지몽매한 그들을 깨워주려 가는 길입니다."

"아이고, 역시 훌륭하신 스님이십니다. 저는 스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읍니다. 부처님 말씀을 다 이해하시고 가르침도 훌륭하시다고 들었읍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되까요?"
"물론이지요."

"만약 대답을 제대로 하시면 제가 점심을 공짜로 드리고, 제대로 못하시면 스님께서 돈을 내셔야 합니다."
덕산 스님은 순간 화가 났다.

"아니 어찌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금강경»전문가요."
그러나 할머니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내처 물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했는데, 스님은 점심을 드시면서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시겠읍니까?"

순간, 덕산 스님은 입이 탁 막혀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릿속에서 «금강경» 의 처음부터 끝을 재빨리 흝어 내려가고 있었지만 도무지 답이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하에졌다가 노래졌다가 정신이 없었다. 입은 완전히 굳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할머니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계시군요. 단지 부처님의 말만을 이해할 뿐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계시는 것 같읍니다. 제 질문에도 답하지 못하면서 남쪽 절에 수행하신다는 스님들을 어떻게 가르치실 겁니까?"

덕산 스님은 너무 부끄러웠다.
"아니, 보살님은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읍니까?
"어디서 배운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마음 안에 다 가지고 있읍니다. 보려고만 하면 보입니다."
"내 얘기는 누가 당신을 지도했느냐 이 말입니다."

"저기 높은 산에 용담[龍潭]이라는 큰스님이 계십니다. 큰스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덕산 스님은 남쪽 절에 가는것을 포기하고 그 길로 바로 용담 큰 스님을 찾아나섰다. 이윽고 스님은 법당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다.

"오래전부터 용담에 관한 말을 듣고 이제 와보니 연못{潭]은 보이지 않고 용[龍]도 나타나지 않는구나."
마침내 용담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가 직접 용담에 왔구려" 하셨다.
덕산 스님은 한동안 절에 머물렀다. 어느 날 저녁 용담 스님을 모시고 섰는데 용담스님이 "벌써 밤이 깊었는데 왜 들어가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덕산스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너무 깜깜합니다."

그러자 용담스님은 촛불을 스님에게 건네 주었다. 덕산 스님이 그것을 받는 찰라, 용담스님은 도로 혹 불어 꺼버렸다. 덕산스님은 다시 '완벽한' 어둠속에 빠저버렸다. 순간, 덕산 스님의 마음이 확 열렸다. 마침내 대오각성 한 것이다. 그는 용담 스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용담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덕산 스님은 "이제부터 천하 노화상의 혀를 의심하지 않겠읍니다. 지금부터 저는 모든 선 수행자들의 가르침을 믿겠읍니다."라고 했다.

그 다음 날, 여러 스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용담 큰 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나이가 있는데, 이빨은 검수[劍樹.칼숲]와 같고 입은 혈분[血盆. 피쟁반]과 같다. 그는 몽둥이로 때려도 돌아보지 않는다 훗날 고봉정상[高峰頂上]에서 내 도[道]를 드날리고 있을 것이다."

이어 덕산 스님이 법상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갖고 온 «금강경» 과 해설서에 불을 붙이며 이렇게 말했다.
현묘한 말씀들을 다 공부해도 허공에 터럭 하나 놓는 격이요. 세간의 중요한 것을 다 알았다 해도 큰 골짜기에 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이 덕산 스님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무가치가 없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마른 지식[dry cognition]은 도움이 되지않는다. 8만 4천 경정을 읽고 열심히 법회에 참석해도 한 순간 맑은 마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도움이 안 된다. 우리가 죽을 때 머릿 속에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도대체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죽는다. 몸 조차 가져가지 못한다. 그때 학문적 지식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지식이란 결국 누군가로부터 받은 생각이다. 지식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참선수행을 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 물론 지식을 잘 소화하면 지혜가 된다.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중국에 구지[俱脂]라는 아주 유명한 큰스님이 한 분 계셨다. 구지 큰스님은 당시 중국에서 제일가는 강사스님으로 요새 말로 하면 대학교 총장쯤 되었다. 그는 20대 후반 무렵부터 8만 4천 경전에 통달해 일찍이 위대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절에는 많을 때는 7백명의 승려가 함께살면서 경전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스님들과 학자들이 중국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논쟁에서 그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전에서 아무리 모호한 대목이 튀어나와도 뛰어난 해삭을 내리곤 했다.
어느날 그는 경정공부를 하다가 머물고 있던 암자 뒤 작은 뜰에나가 쉬고 있었다. 그때 감자기 키 큰 비구니 한 명이 큰 삿갓을 쓴채 나타났다. 오른손에는 여섯 개 방울이 달린 긴 막대기를 들도 있었다.

육환장[六丸杖]이라고하는 그런 막대긴는 높은 큰스님이나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거기다 더 가관인 일이 일어났다.

구지같은 큰스님을 만날때는 누구나 삼배를 올려야만 한다. 게다가 비구니는 법랍이 많더라도 반드시 비구스님에게 먼저 인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키큰 비구니는 큰스님에게 인사는 커녕 모자도 벗지 않았다. 이것은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다. 비구니는 구지 스님에게 다가가더니 세 번 원을 돌았다. 발자국 소리까지 찌렁찌렁 크게 내면서 말이다. 계속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판' 현각 엮음 허문명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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