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28, 2012

선불교

선불교 • 禪佛敎

숭산 행원 대선사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제의 압제아래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렸다. 동국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불안한 사회를 보며 자신의 정치적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참된진리를 구하기 위해 1947년, 충남 마곡사로 출가하여 행원[行願]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49년 예산 수덕사에서 당시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지식이었던 고봉 대선사로부터 전법계[傳法偈]와 숭산[崇山]이라는 당호[幢號]를 받아 이 법맥의 78대 조사[祖師]가 되었다. 당시 고봉스님은 '너의 법[法]이 이 세계에 크게 퍼질 것' 이라고 예견했다.
1966년 일본으로 건너가 해외포교에 앞장서 1972년 미국에 홍법원을 개설을 시작으로, 32개국에 120여개 선원Zen Center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수많은 외국인의 제자들을 길러냈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추앙받은 숭산스님은 만년까지 세계를 누비다 2004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到此門來 莫存知解
To pass through this gate,
do not attach to any thinking that arises in the mind
.선 수행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이는 어떤생각도 붙잡지 말아라.

不立文字 敎外別位
Not depending on words, a special transmission outside the sutras.
문자를 세우지않고 그문자 밖에서 가르치는 진리, 마음만을 전한다.

直指人心 見性成佛
Pointing directly to Mind, see your true nature, become Buddha.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고 자신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

佛說一切法 着度一切心
The Buddha taught all the Dharmas in order to save all minds.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을 구하기 위해 법을 가르쳤다.

者無一切心 何用一切法
When you do not keep all these minds, what use is there for the Dharmas?
마음이 없다면 법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선불교

선[禪]은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엇무엇이다."
뎈카르트는 "나는 생가한다. 그러나 이 '나'란 무엇인가? 이 "나'란 어디서 왔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이것들은 우리 존재의 처음과 끝을 꿰뚫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만약 오로분이 니 '나'를 얻으면 여러분은 모든것을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란 결국 이 우주 실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존재, 이 책상의 존재, 이 지팡이의 존재, 태양의 존재, 달의 존재, 별의 존재 모든것의 존재가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라는 실체를 얻으면 우주를 얻는 것이고 모든것의 본질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본질은 절대이다. 절대의 세계에서는 이분법적인 것이 없다. 말이나 언어가 되어 나오는 순간 분별이 나온다. 절대가 아닌 상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절대'라고 말하는 순간에서 조차 더 이상 그것은 절대가 아니다. '실체'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실체가 아니다.
한 유명한 선사가 말했다.

"부처님을 언급하는 것조차 어리에 똥을 넣는 것과 같다."
우리의 본성품은 이미 말과 단어를 넘어선 것이다. 실체를 설명하는 데에는 말이필요 없다. 입을 연다면 말과 단어와 언어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진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말과 단어로는 우리의 보성품을 설명할 수 없다. 보여줄 수도 없다. 그래서 '침묵은 신성[神聖]보다 낫다'고 한다. 이 세상 모든 것 ㅡ 태양, 달, 별, 산, 강, 나무 ㅡ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런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찾는다면 본성을 깨닫고 우주적 실체를 얻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1백개의 박사학위도 참다운 본성품을 찾아주지는 못한다. 8만 4천 개의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유명한 선사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했다 하더라도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피나게 공부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본성품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도움을 줄 수 없다. 본성품은 말과 단어 이전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이나 배움에서 찾아질 수 없는 것이다. 생각 이전의 지점에 있을 때랴야 가능하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이 말은 마른지식(dry cognition)적인 철학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보면, 생각하지 않을 때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러한 의문이 참선수행의 시작이다.

선의 가르침은 말이나 단어없이 우리가 이 지점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으리는 이미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를 살펴보았다. 이들 전통보두 우리가 여행하려는 곳의 지도와 차량을 제공하지만 그 방법이 각각다르다.
소승불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혼자 가는 것과 같다.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목적지에는 도달할 것이다. 그것은 우선 이 고통의 세계에대해 가르친다.

우리는 고통을 만드러내는 이분법적 세계인 이름과 모양이라는 영역에 산다. 이분법적 세계를 벗어 던지면 열반이라는 절대의 세계로 갈 수 있다. 그 세계에서는 오고 가는 것, 삶과 죽음, 행복이나 슬픔이 없다. 모든 것은 그대로 정적이며 소멸이다. 모든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신[神]이나 마음 바깥에 있는 어떤 종류의 믿음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이 세상에 나타났던 아주 드물고 훌륭한 가르침이다.

이에 비해 대승불교 수행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일체 중생들과 같이 가는 것이다. 소승불교가 먼저 삶의 고통에대해 가르치는 것에 비해 대승불교는 본래 아무것도 없음을 가르친다. 본래 고통도 없고 열반도 없다. 우리가 고통을 만들면 고통이 생긴다. 대승불교적 관점에서보면 고통조차 본래 헛되고 공허한 것이다.

육체는 공하여 실제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것을 깨달음으로서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과로움도 없으며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니, 괴로움에ㅔ서 빠져나오려 할 필요도 없고, 얻어야 할 열반도 없다. 모든것이 임미 진리이다.

벽은 하얗다. 그것이 진리이다. 하늘이 푸르다. 그것 또한 진리이다. 바로 지금 바깥에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이것 역시 진리이다. 모든것이 이미 순간순간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위해 말게 살아갈 수 있다. 우리와 다른 존재들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삶은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언제나 다른 중생들과 함께 행동한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우리 수행이 모든중생들과 함께 자유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한 얘기이므로 마치 버스나 가차를 타고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는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이길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본성이 무엇이냐?" "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열반이냐?"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무리 그것을 깨닫고 있다 하더러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너무 활홀한 꿈을 꾸어 입조차 열 수 없는 벙어리처럼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아주깊고 명확한 것을 이해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전이기 때문에 입을 열 수 없는 것이다. 말과 언어 이상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다. 깨닫고 느낀것을 다른사람애개 보여주고 가르치는 일이 필요하다. "탕!" (책상을 치며) 이것은 깨달음과는 또 다른 범주이기 때문이다. "탕!"

원래 선에는 길이없다. 자전거를 타거나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갈 때는 절대적으로 길이 필요하지만 비행기나 로켓을 타고가게 되면 길이 따로 필요없다. 단지 그 앞이 허공과 같이 툭 터져야 걸림이 없이 끌고가게된다. 이를 당정기여허공[當情其如虛空]이라한다. 마땅히 그 뜻을 허공과같이 맑게 하라는 말이다.

항로는 육로와 같은 길이없다. 지도없이 우리의 본성을 완벽하게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또 부처님께 의존하지 않는다. 심지어 선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싶으면 순간순간 어떤것도 만들지 말라. 그러면 우리는 이미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선의 마음이다.

앞에서는 대승불교에 대한 얘기를 했다. 무상, 무아를 깨닫고 실상을 깨달아 바라밀행을 해야된다고 했다. 그러나 선 불교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백 번 좋은일을 하더라도 자기를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므로 자기자신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불교가 어떻다느니, 참과 거짓이 어떻다느니, 육도 만행이 어떻다느니, 업과 윤회가 어떻다느니, «아함경», «화엄경», «열반경»,« 법화경», «금강경»이 어떻다느니, 백 번 이야기 해봐야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마음만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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