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0, 2012

첫째 질문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一 問 조주[趙州]의 개[狗]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조주 선사께서 어떤 스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 큰스님은 "무[無]"라고 말했다.

질문

1. 부처님은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조주 대선사는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하셨다. 어느것이 옳은가?

2. 조주 대선사께서 '무[無]"라고 말한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그러면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디.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이것은 아주 유명한 '무'자공안이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태양, 달, 별, 산, 너, 나, 우리 모두 똑같은 실체라고 했으며, 너의 본성, 나의 본성, 개의 본성이 모두 하나라고 했다. 불성을 일컫는 이름이 '실체'이다 만물이 비록 제각각 이름과 모양이 다르다 할지라도 우주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조주 대선사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원래 모든것은 공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부처님도 불성이 없는가? 부처님도 공하기 때문에?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만물의 본성을 굳이 표현하고 싶으면 어떤 구체적인 표현을 하는것이 중요하다.

예를들어 여기 시계가 있다. 내가 이렇게 묻겠다. 이 시계에는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크다' '무겁다' 도금이 되었다' 등등으로 대답 한다면 충분하지않다.
뭐, 한 면만 본다면 그런대답이 어떤 설명이 될수는 있겠다. 그러나 한쪽 면에서먼 사실이라면 그것은 완벽한 대답이 아니다. 또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라고 대답 할 수도 있다. 유효한 진리를 얘기한 것이지만 그것도 충분하지않다. 그런 대답은 형이상학적인 대답이다.

그렇다면 이 시계의 본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낮 1시다. 시계와 관련한 바른 실천은 무엇인가.이 시계의 바른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기계라는 것이다. 모든 공안이 그와같다. 아주 쉽다.

참선은 이처럼 우리가 바로 이 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조주스님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신 것은 어쩌면 틀린말일 것이다. 하지만 선사들은 참선이모든 생각에 대한집착을 끊는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종종 제자들에게 틀린 말을 하기도 한다. 말과 단어에 대한 의존을 끊는 것이다. 맞다, 틀리다에 집착ㅎ하지 않고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은 언제나 바뀐다.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생각은 (그전엔는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것도) 완전히 다른 생각으로 바뀐다. 옳고 그름도 마찬가지이다.

조주 큰스님의 무'자 공안도 이와 비슷하다. 조주 큰스님에게 질문을 했던 스님은 개가 정말 불성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언지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만물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개에게도 있을까? 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스님은 머릿속으로 아주 많은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어떻게 이 스님의 생각을 끊게 할 수 있을까. 조주 큰스님은 이런 상황에서 '틀린' 대답을 함으로서 그 스님의 생각을 끊으려 한 것이다. 이것이 '무'자 공안의 핵심이다. 조주 큰스님은 맞다. 틀리다는 개념적인 답이 아니라 제자의 마음속에 똑바로 들어가서 제자에게 큰 의문을 안겨준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후 조주스님이 본래 가르치고자 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오직 참선할 때 '무'자 화두를 사용하는 수행법이 등장했다. 이는 조주 큰스님이 내민 약에 집착하는 경우이다. 특히 일본불교에서 많은 사람들은 제자들에게 이 '무'를 강하게 잡아서 '삼매'에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수행자는 소리를 지른다. "무------" 그러면 스승ㅇ은 이렇게 말한다. "더 강하게" 학생이 "무우우------"하면 스승은 만족해 한다.

이것은 옳은 수행이 아니다. 진정한 삼매도 아니다. 선은 순간순간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無] 삼매는 마음속 만물이 단지 무가 되는 것이다. 붉은 것이 와도 '무' 이고, 흰것이 와도 '무'이다. 오직 '무'이다. 이것은 집착이다. 배고픈 사람이 와도 '무'이고, 목마른 사람이 와도 '무'이다. 이것은 집착이다. 아주 나쁜 선병이다. 실제로 참선수행은 삼매와 관련이 없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선은 언제나 맑은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심리치료와 참선 수행을 연결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선이나 명상을 하면 편안한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순간적이라 할 지라도 괴로움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편과 같다. 수행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려 하지않고 다만 참선만 하려한다. 그러면 수행과 삶은 분리된다. 참선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서쪽으로 가고 싶은데, 동쪽으로 가는 셈이다. 선은 특별한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평상심, 이것이 진정한 선의 마음이다. 단지 '무'의 삼매 수행에만 집착하다면 중생이 가지고있 는 각각의 요구, 각자의 다른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줄 수가 없다. 단지 '무'만을 볼 뿐이다.

이 공안에서 첫 번째 질문은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주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했다. 어느것이 옳은가?" 였다.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있는가,없는가? 있는가 , 없는가? 이것은 오직 생각이다. 불성이 있든 없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조주 스님은 '없다'라고 대답함으로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생각을 놓아버리고 말과 단어에 집착하지 말라. 그것이 이 첫 번째 질문의 핵심이다.

두 번째 질문 "조주 큰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무'라고 하셨다. 이것은 무슨뜻인가? 질문도 마음속에 완벽히 생각을 끊으면 명확해진다. '무[無]'란 특별한 의미가 아니다. 어떤사람들은 '무'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지만 본래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만공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조주의 '무'자 공안에서 '무'란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만공은 "절 앞 밭을 보아라. 거기에(먹는)무가 많을 것이다."라고 했다. 바로 지금 이순간, 것이 진리이다.

세 번째 질문인 "그러면 내가 너에게 묻겠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가 묻는 의미도 아주 명쾌하다. 실체와 진리를 깨달아 바른 실천을 하는것, 그것이 조주 큰스님의 '무'자 공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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