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ly 9, 2012

선원 2

선원 2

묘향산에 가면 보현사[普賢寺]라는 절이있다. 보현사에서 인호대[引虎臺]를 거쳐 싱원사까지 가는 길에 이름난 폭포수가 있다. 규모와 아름다움이 손꼽히는 폭포이다.
서산 대사가 어느 날 제자인 사명 대사와 함께 묘향산의 이 폭포를 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폭포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폭포수를 바라본 뒤 발길을 돌렸다.

서산대사는 키가작고 여자처럼 곱게 생겼다. 누가 보아도 타입이 단정한 선승이었다. 그러나 사명 대사는 군인 출신으로 몸이 장대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키도크고 어깨도 넓었다. 사명 대사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들을 보면 삶에 의문을 가져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 것이다. 이후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니다 서산 대사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두사람은 상원사로 향했다. 그런데 사명대사의 마음속에 이상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앞서 걷는 스승의 모습이 너무도 왜소해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스승의 얼굴과 몸이 작긴 정말 작구나, 여자처럼 걷고 있잖아, 저런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니, 나도 참 한심하다. 한심해, 아까 본 목포는 장대하기 이를 데 없는데, 내 스승의 모습은 저토록 초라하기 짝이 없다니------. 저런 사람이 과연 나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사명 대사의 귀에 갑자기 뒤에서 굉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수직으로 내리꽂히던 폭포가 거꾸로 치솟고 있는 게 아닌가. 물이 땅에서 부터 솟아올라 하늘 끝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명대사는 너무 놀랐다.
"스승님, 스승님, 저것 좀 보십시요."
사명 대사는 앞서걷는 스승을 불렀다. 그러나 서산 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걷기만 했다.
"스승님, 어떻게 물이 거꾸로 올라갑니까?"
서산 대사가 툭 한마디 던졌다.
"네 마음을 닮았나 보구나."

순간 사명 대사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스승님이 나의 생각을 읽으신 게로구나.'
폭포수를 솟구치게 한 이는 다름아닌 스승인 서산 대사였던 것이다. 사명 대사는 스승에게 참희의 절을 했다.
"스승님, 이 나쁜 제자를 용서해주십시요."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면 그것은 더이상 실수가 아니다. 마음을 비워라. 그러면 너의 업도 비워진다.
"예, 만물이 처음으로 제 마음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읍니다. 이제 저의 진정한 길을 찾기시작했읍니다."

사명대사가 말을 마치자마자 폭포수는 다시 예전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서산 대사는 제자의 마음을 꿰 뚫ㅇ어본 것이다. 제자가 '나'라는 이상[我相]에 가려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말과 단어로는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도력을 사용 함으로서 제자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맑은 가르침을 열어준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는 스승을 밎게되고 자신의 견해와 생각이 바보 같았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의 닫힌 생각을 열게 하기 위해선는 때로 이처럼 초능력이라는 사탕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면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스승을 존경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능력만을 보여준다면 그 스승은 단지 도를 부리는 사람일 뿐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제자들의 업이 벗겨지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신비와 기적으로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에 집착하게 되면 '자유'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에 집착하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신도없고, 부처도 없고, 인간을 통제하는 어떤것도 없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에 대한 집착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어느 날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내 옆좌석 남자가 '금연'표지를 보고도 태연스레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그러자 뒷자석의 남자가 넌지시 한마디했다.
"차안에서는 금연입니다. 저기 금연 표지가 안 보입니까?"
그러나 담배를 피워 문 남자는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담배피는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며 계속 피워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갑자기 뒷자석의 남자가 그의 빰을 갈겼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반격을 가할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니, 왜 때리는 거야."
그러자 뒷자석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때릴 자유가 있으니까요."
180도의 영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공함에 집착하게 된다. 270도의 영역에 멈추면 '자유'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다음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지막 360도의 영역은 만물이 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만물은 진리이다. 진리는 바로 이와 같다. 여여[如如, truth like this] 이다. 이 점은 0도의 ㅇ우치와 같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출발 지점이 종착지가 된 것이다. 0도와 360도의 차이점은 0도는 집착하는 생각인 반면 360도는 집착하지 않는 생각, 즉 무애[無碍]인 것이다.

360도의 영역에서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다. 안과 밖이 하니가 된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가 된다. 나무를 볼때 나무와 하나가 된다. 볼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과 우주가 완벽히 하나가 된다. 이것을 순간의 세계(moment world)라고 부른다. 한 순간에 무한의 시간이 있고 무한의 공간이 있다. 한 순간에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이 있다. 이때 행하는 실천이 대보살행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생각에 집착하면서 차를 운전하면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졌어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맑다. 운전할 때는 그냥 운전할 '뿐' 이다. 진리도 이와 같다.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고 파란불이 켜지면 가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인 행동이다. 본능적인 행동이란 욕심이나 집착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다. 빨간것이 나오면 빨간 것을 비추고 흰 것이 나오면 흰 것을 비추는 것이다. 보살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내 행동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욕심이 없다. 내 행동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완벽한 삶이다.

0도는 '작은 나(Small I)'이다. 90도는 '업을 가진 나( Karma I)' 이다. 180도는 '나가 없는 나(Nothing I)'이고 , 270도는 '자유로운 나(Freedom I)'이다. 그리고 360도는 '큰 나(Big I)'이다. '큰 나' 란 시공을 초월 한 것이다. 삶도, 죽음도 없다. 단지 모든 중생을 구하고 돕고 싶을 뿐이다. 나와 너는 하니이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다른사람들이 슬프면 나도 슬프다.

禪 修行은 바로 이 360도에 도달하는 것이다. 360도에 도달하면 실제로 원도 사라진다. 원이란 단지 선을 가르치는 도구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여기 책과 연필이 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른가, 같은가.
0도 에서는 책은 책이고 연필은 연필이다. 90도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에 책은 연필이고 연필은 책이다.

180도에서는 모든 생각이 끊어져 말도 단어도 없다. 따라서 가장좋은 대답은 (책상을 "탕!"치며) "탕!" 바로 이것이다. 270도 에서는 완벽한 자우의 상태이므로, 책이 화나고 연필이 웃는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 360도에서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진리의 영역이므로, 안은 밝고 밖은 어둡다. 3 곱하기 3은 9이다.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이다. 책은 책이고 연필은 연필이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처럼 각 영역에서 대답은 다 다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정답인가? 여러분은 대담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 답을 주겠다. 앞서 말한 다섯개의 답은 다 틀렸다. 왜? (잠시 침묵한 뒤) '할!'
책은 푸르다. 연필은 노란색이다. 만약 이말을 알아듣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안다고 말하면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 때릴 것이다. 모른다고 말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왜? (잠시 침묵한 뒤) 오늘 바깥 날씨가 아주 춥다.

일단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를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실용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360도에서 우리 마음은 우주처럼 맑다. 거울처럼 맑다. 빨간것이 오면 빨간것을 비추고 하얀것이 오면 하얀것을 비춘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이 나타나면 무엇이 우리의 할 일인가. 나 또한 배가 고프다고 해야 하는가. 목마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목이 마르다고 해야 하는가. 과연 그것이 진정한 대자대비심이러고 할 수 있는가.

禪과 명상 수행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은 단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깨달음, 즉 실체와 실상만을 강조한다. 순간순간 진리의 올바른 실천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같이 배고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주는 게 돕는 것이다. 목마른 삶에게는 같이 갈증이 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돕는 것이다. 그것이 실용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선불교의 가르침도 그와 똑같다.

우리는 올바른 길[實體]을 찾아 진리[實相]를 얻으며 일체 중생을 제도하며 순간순간 올바른 삶[實用]을 살아야 한다.
'나'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 만물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다. 360도에 오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꽃은 붉고 벽은 하얗다. 나와 이 세계가 언제나 하나가 된다. 그러면 순간순간 오직 다른사람을 위해 살게 된다. 큰 사랑과 큰 자비로 오로지 중생을 돕는 것, 그것이 바른 삶이다. 자, 그럼 옛 스님들의 공안을 몇가지 인용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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