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5, 2011

할머니 옛날얘기 해줘 잉~~~

경봉鏡峰 스님 말씀

일편편화 一片片話

영축산靈鷲山이여 유시有時에는 구름도 일고 유시에는 안개도 끼고 有時에는 비도 내리고 하여도, 구름이 일어도 머무름이 없고 유시에는 만화萬花가 방창方暢하고 새들도 지저귀지만은 이것도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靈鷲山의 진상이다. 도 이러한데 어떤 글이나 말을 남겨 둘 것도 없는 것이다. 말과 글을 남겨 둔다는 것은 망정妄情이지 靈鷲山眞相이 아니다. 靈鷲山眞相이 아닌 것을 두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비가 와도 물은 고여 있지 않고 구름이 일어도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바람이 불고 새가 노래하더라도 그 자취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상萬像이 모두 이러한데 무엇을 두려고 할 것이 있겠는가. 두려고 하여도 둘 것이 없고 감출려 해도 감출 곳이 없다.

만물이 다 이러하니 두려고 하는 것도 망상이요 영원永遠히 전하려 하는 것도 망상이다. 산은 높고 물은 흘러가고 새는 지저귀고……

이러한 속에서 다만 가가소呵呵笑 가가소呵呵笑로다.

1979 7 15 靈鷲山 三笑庵 圓光 鏡峰

봉두유안捧頭有眼

법좌에 올라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 치고 이르시기를

봉두유안명여일 捧頭有眼明如日

주장자 머리에 눈이 있는데 밝기가 태양과 같고

요직진금화리간 要職眞金火裡看

순금은 불에 넣어 봐야 알 수 있도다.

예전에 말이 있기를, 길에서 도를 통달한 삶을 만나면 말과 묵묵한 것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고 하니, 여러 대중은 무엇으로 이 도인을 대하겠는가? 지혜가 밝은 사람은 한 번 보는데 다 안다.

예전에 임금을 시종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찌나 영리하던지,「선타파仙陀婆」하고 부르기만 하면 무엇을 가져 오라고 하지않아도 밥 가져오고 또 부르면 차 가져오고, 무엇이든지 임금이 생긱하는데로 가져오는 영민한 사람이 있었듯이 이 도리는 번갯불에 바늘귀 꿰듯해도 오히려 느린 것이다.

이 도는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부처를 이룰 인연을 심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人天의 복보다 더 수승한 것이다. 금강쇠를 머금은 것과 같아서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음밭에 심으면 보리의 꽃이 피어 열매를 맺게 마련인 것이다.

이 마음이 본래로 맑은 것이건마는 망상의 미한 구름에 가려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고로 황벽조사黃檗祖師께서 이르되 「분주하고 어지러운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니 요긴하게 식심을 잡아 한바탕 공부를 지을 지어다. 이 한번 뒤쳐서 찬 것이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의 향기가 코를 찌름을 얻으리요,」하니 이말이 참으로 간절하고 애를 써야 되는 것이다.

매화가 찬 눈속에 피면 그 향기가 그윽하게 짙고 수행인이 신고辛苦끝에 도를 알면 마음의 광명이 온 누리를 비춘다.

진리는 말로서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도를 말로서 표현할 수 있겠는가 ?

어약천강수 漁躍千江水 고기는 천 강물에 뛰놀고

용등만리운 龍騰萬里雲 용은 만리 구름 위를 오르네

이렇게 멋들어진 말을 해도 대중이 아무말이 없어서 내가 대신 한 마디 한다.

참 멋 있다. 할 일할 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장미의 향기소리

설법을 하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진리는 마음 행할 곳이 멸하고 알 길이 끊어져서 일체 이름과 형상이 없다. 이러한 현현玄玄하고도 묘묘妙妙한 이치를 입으로 아무리 말을 많이 하더라도 말 뿐이요 글로서 수 없이 쓰더라도 다만 글 뿐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매일밥을 먹지만 밥의 참 맛을 말로서 형용하기 어렵고, 장미의 향기를 맡고 그 향성香聲을 글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사십구년(49)동안 설법하시고 최후에는 다자탑多子塔앞에서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좌를 나누어 앉아 있었을 뿐이요, 또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 보이시ㅣ니 가섭존자는 미소하였을 뿐이요, 열반涅槃하실 때에는 니련하측尼蓮河側에서 곽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셨을 뿐이었다.

그리고 유마거사維摩居士도 삼십 이명의 대보살과 더불어 말로서 문답을 하고 설법도 하다가 구경의 불이법不二法을 설하게 될 때에는 묵언하였을 뿐이었다.

이 법은 입을 열면 그릇치고, 열지않으면 잃어버리고, 열지도 닫지도 않는다면 십만 팔천리十萬八千里나 어긴다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참상參詳해 봐야한다.

이 법은 일념一念 미생초未生初에 있고, 눈과 눈이 서로 마주쳐 보는데 있고, 삼라만상에 다 법이 있고, 삼라만상에 다 법이있고, 중생의 일상생활에 다 법문이 있다. 우리가 가고 오는데 도가있고, 물건을 잡고 놓는 것이 곧 선이다. 또 이렇게만 집착하여 알아도 안된다. 설사 현현한 것을 말하고 묘묘한 것을 말하더라도 똥물을 흩고 오줌을 흩는 것이요, 방망이로 치고 큰 소리로 할 할지라도 소금을 가지고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금도 불에 넣어서 단련하고 단련하여 잡철이 다 제거되어야 순금이되어 세계에 통용되는 보배가 되듯이 사람의 마음도 수련하고 수련하여 탐욕과 중오와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으로부터 팔만 사천 진뇌망상이 전부 보라菩提로 화 하여 아 그 마음이 밝고밝아 불매不昧하고 요료了了하여 산지常知하니니, 밝은 거울이 허공에 달린 것과 같으며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도 빛의 거울처럼 비추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없지않는 것도 아니요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모든 사람이 알려고 하는 바이다. 만약 이것을 알면 저 법에 자재하고 사리에 달통하는 출격出格대장부가 되는 것이다.

퇴보삼삼 退步三三하여 동정철안 銅睛銕眼으로 잘보라

행인 노상 行人 路上에 망석두 望石頭로다

망석두 망석두여

궁상宮商의 맑은 노래를 이 세상에

몇이나 알고 듣는고

부상해활난장월 扶桑海闊難藏月 동해가 넓으니 달을 감추기 어렵고

영취산심분외한 靈鷲山深分外寒 영축산이 깊으니 몹시 춥도다

미소할 뿐……,

법좌에 오르기 전 소식

법좌에 올라 대중을 한 번 둘러보고 이르시기를, 설법은 밀과 글을 의지해서 하는 것도 있고 말과 글을 떠나서 하는 것이 있는데 참으로 적실한 설법은 종사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두 걸음 걸어나와 여러분 앞에서 눈으로 한 번 둘러보고, 여러분들은 종사의 얼굴을 한 번보는데 다 들어있고, 눈과 눈이 마주치는데 도가 있는 것이다.

말과 글로서 법문을 듣는 것을 다문多聞이라하고, 말과 글을 떠나서 여래의 비밀장秘密藏을 아는 것을 구족다문具足多聞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비밀은 남이모르게 몰래 숨기는 것이지만 부처님의 비밀장은 화반탁출花盤託出로 여러사람 앞에 드러내 보여도 모른다.

종사가 자리에 오르기 전에 좋은소식이 있고 종사가 무슨 일을 하려는고 하는 여러분의 그 한 생각일어나기 전에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 자리가 곧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곳이요 모든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는 곳이다.

오늘은 석가탑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날인데 부처님은 모시지 않았다.

오늘 이 종사는 여러분들에게 각자 자기를 찾아 자성自性 부처님을 발견하여 봉불식奉佛式을 해야하고 사람마다 사리가 있으니 이것을 봉안하라고 한다. 석가탑에는 무처님의 사리만 봉안했지만 여러분에게는 산 부처가 들어있어 오고가는데 아주 편리하고 자유자재한 것이다.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할 일할하고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홍일동승紅日東昇

법문은 아무말도 하지않는 가운데 있고, 종사宗師가 법좌에 오르기 전에 법문이 있고 법문듣는 사람이 자리에 앉기전에있고, 종사기 무엇을 말하려는가 하는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있는 것이다.

이 도리를 바로알면 되는데 그것을 모르니 부득이해서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하게되고 들어야 하는데, 교가敎家에서 경을 보고 말하는 것과, 선가禪家에서 조사종풍 祖師宗風을 드날리는 선리적禪理的인 법문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백운소상 홍일동승 白雲消散 紅日東昇

흰 구름은 모두 흩어지고 붉은 해 동녁에서 솟아 오르니

앙면간천 仰面看天 저두처지 低頭覷地

낯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또 머리를 낮추어 땅을 엿 보고

동서남북 東西南北 일임간광 一任看光

동서남북을 임의대로 맡기니 마음대로 볼 지어다

누구든지 산을 볼 때에 산이 푸르고, 물을 볼 때에 물이 푸르게 흘러 내려가자만, 수행이 그 어느 경지에 올라가면 산을 봐도 상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양을 해야 이 말이 통하지, 자기심리를 닦지않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귀에 담아 놓으면 금강 쇳덩어리를 머금은 것과 같아서 이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말에 계합契合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라 물이 곧 산이요 산이 곧 물이더니 한층 더 나아가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이 또한 오묘한 도리인 것이다.

천경만론千經萬論을 봐도 내 자성自性자리를 닦아 견신성불見性成佛해서, 중생교화衆生敎化를 하라는 말 뿐이다.

우리가 이 몸을 애지중지 하지만,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생리적으로 따져 봐도 부모님 물건이지 내 물건은 아닌 것이다. 참으로 나眞我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그 자리가 곧 나의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운전수요, 나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모르는 것은 흡사 남의 집에 하룻밤을 자도 주인을 안 찾아보면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몇 십년을 끌고 다녀도 자기 주인공을 안 찾아 보고 또 설사 찾으려 해도 힘드는 것이다.

석사여래釋迦如來께서도 왕위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이자리 하나 밝혔다.

여러분이 먹고 입고 주하는 의식주衣食住, 세 가지 일에 날마다 노력하는 24시간가운데, 9시간 일하고 5시간놀고 6시간 잠자고도 4시간이 남이 있으니, 다만 한 시간이라도 내 주인공을 찾는 여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앉아서 자성自性자리를 찾고 있지만, 마음은 서울로 쫓아갔다가 대구나 부산으로 갔다 오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나간 일 현재 일 미래 일이 생각키워서 그 망상도적이 들어 앉아 있으니, 집안에 도적이 들어 앉아있으면 주인이 방에 들어가기도 무섭고, 겁이나서 밖으로 쫓겨나가듯이 망상 이것이 앞을 가리면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순일하지 못하다. 즉 화두話頭가 일념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을 순일하게 하려면 수련을하고 닦아 나가서 그 분주한 마음이 가라앉아야 한다.

아주 탁한 구정믈을 가만히 놓아두면 맑게 가라앉듯이 이 마음자리가 본래 고여한 자리지만 자기가 흔들어서 구정물을 일으켜 놓는 것이다.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가 보아라. 들어가려해도 안된다. 망상 이놈이 앞을가려 주인 노릇을 하니 도무지 그렇게 안된다. 안되지만 오래하면 그런마음이 다 쉬어져서 쉬고 쉬는 거기서 해야 한다.

여러분이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 틈엔지 걱정이 생겨서 내보내려해도 안나가고 언제 들어와서는 가슴을치고 머리를 친다. 그래 가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게 된다.

내가 늘 말하기를 이 사바세계에 우리가 나왔는데 이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한바탕 멋들어지게 하고 가자는 말이 그런 까닭이다.

늘 근심 걱정만 하고 살 바에야 무었하려 어머님으로부터 나오기는 나왔느냐 말이다. 좀 근심스럽고 걱적이 되는 일이 있더라도 다 털어버리고, 우리인생이 기껏 살아봐야 백년을 더 사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늘 쾌활하고 낙관적이고 활기찬 생활을 해야한다.

근심걱정은 물질 아니면 사람에 관한 것 외엔 없는데, 설사 좀 근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불타의 그 초월한 정신에 계합하여 인생의 노선路線과 인생관人生觀을 확립해야 한다.

여지껏 생활해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영 비워 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인데 참선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다.

선을 선이라 하면 선이 아니요, 법을 법이라 하면 법이 아니요, 부처를 부처라하면 부처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이나 법이나 도, 이 전부가 일체 명과 상이 끊어졌다. 여러분의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이 혹 마음이다 혹 정신이다 하지만, 어디 마음이라고 쓰여져 있나 일체 이름과 모양이 떨어진 자라다.

여러분이 눈을감고 가만히 소소령령昭昭靈靈한 자리를 반조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음이 어디 있으며 법이 어디있나. 일체 명상名相이 뚝 떨어지 자리이다.

진리 그 자리, 여러분이 그 진리 한마디 들어야 한다. 그 법문을 듣고 다만 하루에 반 시간이라도 돌이켜 반조를 해봐야 한다.

을 선나禪那라 하기도 하고 정려靜慮라고도 하는데 생각을 고요히 해서 분주한 생각을 쉬고 고요한 데 들어가야 한다. 들어간다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들어가고 나올 것이 이디있나. 본래 고요한 자리지. 또 기악棄惡이라 하는데 악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악한 생각을 가지고는 선을 못한다. 또 정수 正受라고 한다. 바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데 들어갈수록, 눈으로 어떤 경계를 보거나, 귀로 소리를 듣거나, 보고 듣는데 바로 받아 들인다,

그러나 이 마음이 고요하지못하고 탁하거나 마음속에 하찮은 생각이 있으면, 모든 보고 듣는 것을 바로 못 받아들인다.

그러닌 이 자리는 지극히 닦으면 바로 받아들여진다. 듣는 것도 바로듣고 보는 것도 바로보고 모든일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처님의 바른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속이지 말아야하는데, 내 자성 自性을 속이지 않고 남도 속이지 않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수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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