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9, 2011

나라의 명운 가른 만남

나라의 명운 가른 만남
정진흥의 소프트파워
# 박태준과 박정히의 만남은 대한민국의 洪福이었다. 그 만남은 대한민국을 희망 없는 음지에서 활기 넘치는 양지로 이끈 결정적 계기였다.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가 육사 6기가 된 박태준 생도는 생도대 제1중대장 겸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위와 처음 만났다. 어느 날 교관 박정희는 미분과 삼각함수 등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탄도궤적 측정의 문제를 강의실 칠판에 적었다. 모두가 난감해 할 때 그 문제를 풀어낸 이가 다름아닌 박태준 생도였다. 그 일로 박태준이란 이름 석자는 젊은 박정희에게 각인됐다. 정말이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구 후 박종희는 48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전개된 肅軍과정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살아 남았고, 포천 1연대 중대장이었던 박태준은 6ㆍ25전쟁의 최전선에서 끝내 생환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57년 10월이었다. 1군 참모장이었던 박정희가 박태준을 1군 산하 25사단 참모장으로 부른 것이다.
그 후 박정희 소장이 60년 2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이 된 후 박태준 대령역시 사령부 인사참모로 부임했다. 하지만 이듬해 5ㆍ16이 감행됐을 때 거사명단에는 박태준의 이름이 빠져있었다. 거사 이틀 듸 박정회는 박태준을 불러 혁명거사 명단에서 그를 뺀 이유를 밝혔다.
“하나는 거사가 실패하더라도 살아남아 군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고 다른하나는 내 처자의 뒷일을 부탁하려 했기 때문이라네!” 결국 거사가 성공한 후 박태준은 최고희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됐다.
#박태준이 아내 장옥자여사로부터 받은 신혼 첫 선물은 반지도 시계도 아니었다. 『경제학 원론』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정살림경제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64년 새해 첫날 박태준은 박정희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는 육영수 여사가 손수 따라주는 따끈한 정종을 마시며 이제 곧 유학 길에 오른다는 것을 알려 드렸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를 한ㆍ일국교정상화를 위한 대일특사로 파견할 뜻을 밝힌 후 봉투하나를 내밀었다. “자네 여태 집도 없더구먼, 집이나 장만하게.” 첫딸을 낳은 후 열다섯 번씩이나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박태준은 박정희의 금일봉과 셋방 전세금을 합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64년 10월 박정희는 다시 박태준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대한중석을 맡아 달라고 했다. 텅스텐을 캐내 해외수출하던 대한중석은 60년대 초만 당시 연간 국가 총수출액 약 3000만 달러 중 500만!600만 달러를 점유할 만큼 막중한 기업이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대한중석에서 시험해보고 종합제철소 건설의 임무를 맡길 요량이었다. 65년 6월 박태준은 다시 박정희와 독대했다. 박정희가 입을 떼었다. “제철소 건설을 맡아주게.아무리 둘러봐도 이 일을 맡길사람은 임자밖에 없어,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거야. 자넨 제철소를 맡아!” 국토의 대동맥을 잇는 일은 대통령이 맡고, 산업의 쌀인 철을 만드는 일은 박태준의 손에 달렸던 것이다.
# 69년 7월 박태준은 박정희의 3선개헌 지지서명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 대통령 주변은 분개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달랐다.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 열심히 하게 건드리지마.” 3선 개헌이 관철되고 난 다음인 70년 2월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설비구매와 관련된 애로사항을 건의토록 한 후 그 서류에 곧장 사인해서 되돌려 줬다. 전권을 위임한 이른바 ‘종이마패’였다. 그러나 박태준은 이것을 한 번도 세상에 내밀지 않았다. 그것은 박정희 사후에 공개됐을 뿐이다. 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웅변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 두사나이의 만남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한 사람은 오래 전에 고인이 됐고, 이제 남은 한 사람마져 우리는 떠나보낸다. 이 흔들리는 시절에 “애국심 갖고 일해달라”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 귓전을 때린다.
논설위원 atombit @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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