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8, 2011

아우라지 뱃사공아 내 한마져건너주게

아우라지 뱃사공아, 내 한마저 건너주게

아리랑과 정선

김병종의 화첩기행

우리땅 곳곳에 들꽃처럼 피어 있는 恨의 노래 아리랑,

그러나 아리랑은 결코 슬픔의 노래나 한의 가락만은 아니다.

특히 정선아리랑은 단장의 설음마저도

가라앉히고 곰삭여내여 마지막에는 마알갛게

우러나오는 화사한 민족의 노래이다.

질펀한 해학이나 가락의 격한 높낮이도 없이

독백처럼 자기 심정을 노래말로 털어놓는

그러한 순한 가락들이다.

그 정선에 오늘도 아리랑은 살아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내 한恨마저 건너주게

아리랑과 정선

정선아리랑의 탯줄 아우라지 가는 길, 기차는 간이역 여랑餘糧에 선다. 도회질로 가는 딸을 배웅나온 듯한 어머니가 서 있다. 어여 그만 들어가라고, 딸은 몇 번씩아나 손짓을 보내건만 어머니는 개찰구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그러다가 기어이 옷고름을 눈으로 가져간다.

증산甑山을 떠난 기차가 잠시 머물렀던 또다른 간이역은 그 이름이 별어곡別於谷 . 얼머나 이런 이별이 있어왔기에 역이름마저 이별의 골짜기였을까.

나를 내려 놓은 두 량輛짜리 기차는 제법 벌판을 흔들며 떠나가고, 떠나간 자리 따라 억새풀이 일렁인다.포플러 숲 건너편으로 반짝 물길의 한 자락이 보인다.

역 앞 청원식당에서 콧등치기한 그릇으로 늦은 점심을 때운다.후루룩 먹다보면 국수 가닥이 사정없이 콧등을 후려친데서 콧등치기란다.겨울엔 따뜻한 국물에 말아서 느름국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메밀로 얼기설기 반죽하여 굵게 썰어나오는 토속음식 콧등치기는 다른 말로 꼴뚜 국수라고도 부르는데, 정선에는 유독 후다닥 해치우는 이런식의 치기음식이 많다. 강냉이밥인 사절치기도 옥수수 한 알을 네 개로 만들어 밥을 지었데서 나온 말. 어차피 논 농사 짧은 궁벽한 산살림에 걸판진 음식 호사는 어려웠을 터이다. 오죽하면 딸 낳거든 평창에 시집보내 이팝(쌀밥) 실컷 맥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정선은 원래 신선 사는 깊은 산 속 도원경 같다하여 그 옛이름이 桃源이었다.는 곳이다. 산 많아 경치좋고 풍광은 좋지만 평야가 적어

가난은 숙명처럼 이어졌다. 호젓한 고개 하나를 넘어서자 발 아래로 반짝이여 흘러가는 물길이 나타난다. 이 간물은 언제부터 저기에 흐르고 있었던 걸까. 들국화가 싱그러운 길섭에 앉아 강을 내려다본다.물길은 제가 떠나온 계곡을 잊어버린 듯 가을 햇볕 속을 무심히 사행으로 굽돌아 흘러간다.

태산 죽령 험한 고개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굽이 돌아

이 먼길을 왜 가는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 떨치고

청려를 의지없이 나 혼자 떠나가네

십오야 뜬 달은 왜 이리 밝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 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몰려오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사시장철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아리랑 아라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겨울 때마다 그렇게도 나를 좀 보내달라고 넘겨달라고 절규처럼 애원하던 그 이상향 아리랑은 대체 어디일까. 넘고 강 건너 아득히 찾고 또 찾아가야 할 그 아리랑은 이승에는 없는 것일까.

고갯마루를 내려올 때 문득 아리랑 한 가락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다. 방금 넘어온 고갯길에 햇빛이 쏟아지고 있을 뿐이다. 유난히 고개가 많은 정선, 태백산맥 첩첩 산중 고개도 많아 비행기 재’, ‘섬마령고개다 넘어와도 백봉령 아홉고개넘다가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산이많으니 자연 고개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비단 산길 오르내리는 현실의 고개만이 고개는 아닐 터이다. 변변한 땅뙈기 하나 없이 도란도란 세끼 식사마저 자유로지 않은 가난 속에서 삶의 무게를 지고 오르내려야 할 인생의 고갯길인들 오즉 많았을까.

정선아리랑은 그 태반이 여성들의 口傳 노동요, 천여 수에 육박한다는 가시들 중에는 독백처럼 자기 심정을 노랫말로 털어놓은 것이 유독 많다. 지금은 구절리九切理 깊은 산 속까지 도로가 뚫려 있지만 옛날의 정선은 한번 시집오면 평생 외지로 나가기조차 어려웠던 곳이다. 삶이 너무도 고단하고 힘겨울 때 마다 나를 좀 보내달라도, 아리랑 고개로 넘겨 달라고 노래로나마 애원했던 것이다.

흔히들 우리를 한 많은 민족이라 한다. 그래서 한의 노래인 아리랑이 우리땅 곳곳을 적시며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라고, 하긴 우리 나라 아리랑은 우리 나라 산천의 토종꽃 가짓수 만큼이나 많다. 백 가지 넘는 아리랑 중 아직 살아 있는 것만도 서른개가 넘고 정선 아리랑만 해도 채집된 것만 천여 수에 육박한다 하니, 이 나라는 가히 아리랑의 땅이요 우리는 아리랑의 민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리랑은 징징 짜는 슬픔의 노래나 한의 가락만은 아니다. 단장의 설음마저도 한사코 가라앉히고 곰삭여내 마지막에는 마알갛게 우러나오게 하는 그런 화사한 민족의 노래이다. 사랑과 그리움과 슬픔과 이별과 놀이가 뒤섞여 있지만 거기 미음과 증오는 없다. 갈등은 있어도 원망과 비탄은 없다. 끌어앉고 감쌀 뿐이다. 하물며 이데오르기 따위의 셈법이 있을 리 없다. 여기에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위대성이 있다. 정선아리랑은 더욱 그렇다. 그냥 자연스럽고 순한 가락이다. 박지원이 『양반전』에서 순하고 무던한 정선사람을 말했지만, 정선사람처럼 노래도 순하다.

같은 아리랑이면서도 정선아리랑은 진도아리랑 같은 질펀한 해학이나 가락의 격한 높낮이가 없다. 논보다 밭이, 그것도 비탈밭이 많은 정선에서 힘겹게 일하며 빠르고 현란한 가락은 어려웠을 터이다.

일하다 허리를 펴고 산 넘어 몰려오는 구름을 보며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 자려나…” 무심중에 중얼거리다 가락이 되곤 했을 것이다.

상념에 젖어 걷는 사이에 정선아리랑의 유적지 아우라지라는 돌비가 나타난다. 논길을 가로질러 강과 만난다. 열 겹 산을 열 가지 색으로 내 비치며 아픈 사랑과 이별의 전설을 안고 강물은 흐른다.

아우라지란 골지천과 송천이 서로 어우러져강이 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두 물이 만나 아루워졌다 해서 두물머리라는 예뿐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강에는 정선아리랑에 설음 하나를 더 보태는 사연이 흐른다. 어느해 혼례식을 앞두고 건너편 마을 사람들이 신부와 함께 나릇배를 타고 강을 건너오다가 그만 배가 뒤집혀 버린다. 가마에 갇혀 나오지 못한 신부는 그예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죽은 목슴으로 떠올랐다. 그 원혼을 달래느라 강 언덕에는 처녀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른다.

아우리지강에서는 흐르는 강물에 눈길을 보태지 말라 했던가.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랑도 인연도 우리네 인생마저도 결국엔 저렇게 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쓸쓸해지기 때문이라 했다.

수려한 풍광 속에 엎드려 있는 아픈 삶의 흔적들은 아우라지강말고도 곳곳에 있었다. 폐광되어 을씨년스럽게 남은 석탄만이 쌓여 있는 구절리 역부근은 오래된 흑백영화 화면처럼 쓸쓸하기만 했고,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居七賢洞의 칠현비七賢碑는 숨어 살다 죽어간 일곱 선비의 나라 사랑의 의로움과 고달품이 처절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선아리랑은 그 갈가이 멀리 왕조를 비키어 의로운 사연을 안고 칠현동으로 들어왔던 고려말 선비들의 의가義歌로 부터 시작하여 숱한 민초들의 애원성哀怨聲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그 사연의 폭이 넓고 깊다.

저녁 짓는 연기 호르는 산골 마을을 돌아 숙암천 앞 아라리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다. 잔잔하던 숙암천은 장마로 하진부쪽 물길을 보태 양자강처럼 도도하게 흘러내린다.

밤이 이른 산골에 성근 별이 떠오른다 마당의 매캐한 모깃불을 사이에두고 안주인은 당귀, 천궁, 오미자 같은 약초에 구렁이까지 나온다는 정선장 구경이 볼만하다고 일러준다. 저앞 숙암천에 어항 몇 개만 넣어두면 밤새 메기, 쏘가리, 가물치가 가득 들어온다는 말도.

강 건너 山家에 불빛이 깜박인다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본다. 어느새 와르르 쏟아질듯한 별무리, 한을 노래로 바꾸어 불러온 이름없는 얼굴들이 별되어 떠 있다. 서늘한 한줄기 바람이 자나간다. 정선에누워 나는 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마람이된다.

정선아리랑 碑와 藝人들과 아리랑학교

정선에는 아리랑 碑와 도원가곡비 등 아리랑과 관련된 노래비가 많다. 거칠현동의 칠현비七賢碑도 그중에 하나, 정선아리랑을 원산, 회령 등지까지 전파시킨 전설적 인물 사돌이 박순태四乭伊 朴順泰를 비롯, 수많은 아리랑 명인들이 가락을 이어왔다. 끊어질듯 이어지던 정선아리랑은 근자에 정선아라리 문화연구소 진용선소장에 의해 새로이 힘을 받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흡사 정선아리랑을 위해 태어난 아리랑 전도사처럼 귀향하여 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1993년 이후 여름마다 아리랑학교를 열어 정선일대 아리랑 유적지 답사와 아리랑 배우기를 통해 정선아리랑을 보급해 왔다.

http://blog.koreadaily.com/pabblestone/396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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