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5, 2011

3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3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禪의 나침판 The Compass of Zen

현재 서양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적인 지도자 중의 사람인 嵩山 스님이

지난 삼십여 동안 미국에서 설법해온 가르침을 집대성항 책이다.

소승, 대승, 선불교의 가르침과 참선수행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깊이있고

알기 쉬운 公安공부와 선문답을 담고 있는 책은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도

매우 혁명적인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삼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불교 서적 중의 하나로, 서양 지식인들에게 영양을 책이다.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푸른눈제자들과의

격정적인 대화를 통해 따뜻하고 자애로우면서도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숭산 스님의 파굑적인 법문 방법이 어렵고 딱딱한 불교가 아닌

재미있고 쉬운 불교로 안내하는 여과장치가 되고 있다.

현각스님과 허문명 씨가 공동 번역했다.

家風

초등학교 다닐 나는 말썽꾸러기였다.그렇다고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장난을 많이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에게 곤혹스런 질문을 자꾸 해대 버릇없는 아이로 찍힌 것이다. 쑥스러운 고백이깅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좋다 예길 많이 듣고 자랐다. 유치원 가기 전부터 형과 누나들 어깨 너머로 말과 글을 익혀 책을 줄줄 읽었다. 형제들 모두 머리가 좋았지만 그중에서 유독 빨랐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집안에 천재 났다고 자랑이 대단하셨다.초등학교들어가면서 부터는〈뉴욕타임스〉를 매일 매일 탐독해 어른들 대화에도 곧잘 끼어들어 한마디씩 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누나나 형들에게 받은 영향ㅇ이 아주 컸던 것 같다. 간혹 형제 많은 집 막내들이 또래보다 성숙한 경우가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형이나 누나들이 읽은 책을 물려받아 읽는다든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형제들의 대화를 엎에서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아 또래보다 일찍 세상에 눈을 뜨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가 바로 그랬다. 아홉 형제들 중 일곱째인 나는 똑똑한형과 누나들이 보던 책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읽게되었다.

또 부모님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식사만큼은 가족들이 함께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매일 저녁식사를 함께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크게는 베트남 전쟁, 워터게이트 사건 같은 국제 정치적인 문제에서부터 작게는 학교생활 이야기까지 매일 평균 두 시간 정도는 함께 얘기를 나눴다. 역사, 문화, 사회 등등 우리 식탁에 오르지 않는 이야기라곤 없었다. 부모님들은 보수적인 미국의 상류층이긴 했지만 우리들의 자유로운 대화에 늘 귀를 쫑긋 기울이셨다. 정히 필요할 때 가끔 한마디씩 던지시는 게 전부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반 나는 유치원에 다녔는데 그 무렵 신문과 방송은 온통 베트남 전쟁 이야기와 이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의 반전시위 일색이었다. 이는 전쟁이 사실상 막을 내리는 1975년까지 계속됐다. 그즈음 우리들의 저녁식사도 자연스럽게 베트남 전쟁 얘기를 필두로 한 정치적인 토론장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베트남 전쟁을 둘러싸고 부모님들을 비롯한 형 누나들 대부분이 미국 입장을 옹호하는 편이었는데 유독 셋째형 패트릭만큼은 좀 다른 견해를 보였다.

패트릭 형은 미국이 어서 빨리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랬동안 프랑스의 식민 통치 아래 살아논 베트남은 서양인들을 좋아하지도 않을 뿐더러 서양 사람들의 도움도 필요없다고 생각 한다는 것이다. 만약 베트남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 스스로 풀어야지 다른나라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것은 큰 실수이며 따라서 하루 빨리 베트남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었다.

패트릭 형은 물론 빨갱이가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경멸에 가까운 바나을 퍼부어댔으며 구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 국가 통치자들에 대해서도 입에 침을 튀겨가며 비판을 해댔다. 그는 뉴욕 월가에서 잘나가는중권맨으로 일하고 있는 미국 자본주의의 일꾼이다.

패트릭 형은 미국의 명문인 컬럼비야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는데 머리도 좋은 데다 형제들 중에서도 창의적이고 자유분망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물을 보고 분석하는 눈이 남달랐다. 더구나 나는 패트릭 형과 어렸을 때부터 같은 방을 썼기 때문에 형제들 중에서도 그와의 대화가 제일 많았다. 그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내 견해를 존중해줬고 친구처럼 동등하게 대해주었다. 나는 무엇이든 그에게 물어보았다. 특히 신문을 읽다가 모르는 것이 나올 때는 항상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부터 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진 것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 크다.

이같은 문위기에다 종교적 전통을 강하게 고수해온 집안에서 자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진리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늘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이면에 감춰진 진짜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갖고 사물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어릴 적 성경에서 읽은 예수님의 말씀은 철이 들 무렵부터 내 머릿속에 새겨져 나의 인생관이 되었다.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리를 찾으려면 가족을 떠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어렸을 때부터 왠지 그런 글귀를 성경에서 읽을 때마다 강한 신념이 생기곤 했다.

그럼, 진리를 찾고 진리를 향한 삶을 살려면 그 정도 독한미음을 먹어야지 그렇다면 진리란 과연 무었일까. 무엇이 옳은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나를 경험주의자로 만들었다.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갖지 말고 부딛쳐보자, 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니 나의 학교생활은 어느 모범생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산한 아이,

한국도 사립학교와 공립학교가 있자만 미국과는 약간 다르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등록금이 전액 면재다. 대신 사립하교 등록금은 아주 비싸다. 그렇다고 공립학교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립학교는 상류층 부모들이 비싼 돈을 들여 자식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교육의 질이 아무래도 ㅊ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거기다 카톨릭계 사립학교는 등록금이 더 비싸고 교육의 잘도 훨씬 높다.

평생을 독신을로 지내야 하는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생계수단의 차원을 넘어 사명김ㅇ으로 똘똘 뭉쳐 이이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여느 학교와는 다르다. 그들은 수업시간이 끝난 뒤에도 학생들과 대화해려 노력하고 밤이고 낮이고 옆에서 상담자가 되어준다. 게다가 규율도 아주엄해 조금이라도 일탈행동을 하면 바로 퇴학ㅇ이다. 그러나 공립학교에서는 아이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퇴학시킬 수가없다. 사립학교는 또한 부모님들이 교육비를 부담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ㅇ을 함께 가져 수업 분위기도 좀더 진지하다.

내 위의 형, 누나들은 모두 카톨릭계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나는 공립학교에 들어갔다. 다름 아닌 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다. 당시 형, 누나들은 모두 사립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교육비를 대는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부모님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신다 해도 한계가 있는 법. 중고등학교는 사립으로 보내줄 테니 초등학교는 공립을 가라는 것이 단시 부모님들의 부탁(?)이었다.

물론 나는 상관없었다. 그저 이제부터는 학교에 나가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이 났다. 당시 우리집 거실에는 백과사전 시리즈로 가득한 책장이 있었는데, 나는 심심하면 몇 시간씩이고 앉아 백과사전을 A부터 Z까지 읽어대곤 했다. 늘 책으로만 대하던 가르침들을 이제 학교에 들어가 선생님들에게 배울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던 것들이었고, 알파벧부터 시작해 받아쓰기와 읽기로 일관하는 학교 수업에 나는 처음엔 당혹감을 느끼다 나중엔 싫증을 내다못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수업이 재미있을 리 만무했다. 더 큰 문제는 학년이 높아질 수록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내용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4학년 1학기 때, 초기 미국 역사를 배우면서 완전히 극에 달했다. 나는 패트릭 형에게서 초기 미국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형으로부터 들은 얘기는 미국의 초기 역사는 인디언을 속이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살육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라는 것이었다. 패트릭 형은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처음 이땅의 주인들은 우리같은 백인들이 아니라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땅을 빌려 달라’ ‘곡식을 빌려 달라며 접근했다. 그리고 영어를 모르는 인디언들을 으르고 협박해 가제적으로 계약서에 사이하게 했다. 또 술과 총으로 인디언들을 유혹했다. 처음보는 신기한 물건에 관심을 보인 인디언들은 결국 그것들이 자신들의 삶을 파멸로 이끄리라는 것을 모르고 무조건 백인들이 가져온 물건에 호기심을 보였다. 술과 총은 인디언 문화와 정신을 더럽혔고 종국에는 자신들끼리 서로 총을 들고 싸우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 백인들이 완전히 이 땅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디언들이 죽었다. 심지어 미국군인들은 인디언이 살고있던 땅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그들을 격리시키는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한편으로는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주겠다 유혹한 뒤 늪지대인 미국남부로 끌고갔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에 살게 해주겠다고 속인 뒤 플로리다에 그들을 격리했다. 수많은 인디언들이 난민의 신새로 전락했다. 특히 겨울에는 헐벗고 굶주린 인디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릴 정도였다. 미국군인들은 심지어 부녀자 강간, 강도, 약탈을 서슴치 않았으며, 인디언들의 정신과 문화를 송두리채 파괴했다.

그런데 4학년 초 역사시간에 만난 선생님의 설명은 그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었다.

벡인들은 우매한 인디언들에게 문화와 문명을 전해준 등불이자 벗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너무 무식해서 우리의 우수한 문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지핞았다. 백인들은 빛과 진리가 없는 어두운 땅에 발달된 사회 시스템을 가르쳐준 등대가 된 것이다.

의혹에 싸인 나는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렇지만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많이 죽였다고 들었는데요.”

드때 죽은 인디언들은 나쁜 인디언들이었단다. 그들은 우매한데다 본능적ㅇㅇ으로 싸움을 좋아해서 자기들을 도와주려고 한 서양 사람들에게 적의를 갖고 먼저 싸움을 걸어오기도 했지, 그 과정에서 인디언들이 죽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니?”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날 밤 패트리ㅣㄱ 형ㅇ을 만나자 마자 따져물었다. 형은 이렇게 말했다.

판단은 네가 하는거야, 나는 단지 좀 다른 시각에서, 그리고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너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뿐이야, 어느것이 옳은지는 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인디언을 왜 그렇게 많이 죽였어요.?”

그건 여러가자 측면이 있긴 하지만 안디언들이 백인들이 믿는 을 안 믿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고 생각해, 백인들은 신을 믿지않는 그들이 우매하다고 생각했고 노예나 동물과 다름없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졌지만 선생님 얘기보다는 패트릭 형 얘기가 더 믿음이 갔다. 패트릭 형은 마음씨가 착한데다 정직했기 때문에 나는 형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 이야기보다 우리집 저녁 식탁에서 배우고 듣는 것들이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고 수업시간에 장난만 치는 문제아로 변하게 되엿다. 선생님들에게 수없이 질문을 퍼부어댔고 마음에들지 않은 선생님 수업시간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집에서 갖고 온 누나, 영들이 읽던 소설책이나 수필책을 책상밑에 놓고 수업시간에 몰래 읽지를 않나, 선생님이 한눈 파는 사이에 멀리앉아 있는 친구들에게 공을 던지든지 하는 대담한 장난을 하질 않나. 이도저도 않되면 멍하니 앞을 처다보고 손가락으로 따다닥 따다닥 손장난을 하며 머릿속으로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곤했다.

그 덕에 고생은 나의 부모님이 하셨다, 나는 선생님들께 꾸중을 들을 때마다 벌로 반성문을 써야 했고 그대마다 우리 부모님들은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와 대신 꾸중을 들으셔야했다.

결국 4학년 1학기말, 담임선생님은 우리부모님을 부르시더니 폴이 선생님들 말을 안 듣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폴이 이미 교과서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학교공부에 흥미를 잃었다는 것도 압니다. 폴은 더이상 배울 것이 없읍니다. 그러니 시험날만 사험을 보게하고 수업시간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읍니다. 대신 매일 등교는 하되, 학교2층 도서관에서 책을 읽도록 시키겠읍니다. 도서관안에는 학교공부가 어려워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교실이 있습니다. 폴에게 그 아이들의 과외선생 노릇을 시킬 작정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아침 등교해 교실이 아닌 도서관에 올라가서 내또래, 혹은 나보다 나이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받아쓰기와 읽기를 시키고 가르치는 과외선생노릇을 하게되었다.(그 학교 창립이래 처음있는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고는 시험날이되면 내 교실 책상에 앉아 시험을 봤다. 물론 그래도 항상 성적은 모두 A었다. 그렇다고 내가 왕따는 아니었다. 오히려 친구가 너무 많았다. 워낙 싸우는 것을 싫어했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컸기 때문에 다른아이들이 날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특히 흑인 친구들이 많았고 매사에 옳은 것은 옳다고 주장하는 강한 성격 때문에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4학년이 끝나갈부렵, 드디어 교장 선생님이 우리 부모님을 호출하셨다.

이 아이는 더이상 우리가 가르칠 능력이 없습니다. 학칙상 퇴학처리는 할 수 없으니 다른 공립학교를 보내시든지 사립학교로 전학을 시키십시요.”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형과 누나들이 졸업한 성마리아 카톨릭 사립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된다.자식들 교육비대는 데 허리가 휘는 부모님 입장에서보면 불효를 했음에 틀림이없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나는 등교 첫날부터 이전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우선 학생들이 모두교복을 입고있었다. 푸른색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푸른넥타이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아침마다 호랑이 수녀님이 교문 앞에 서서 우리들 복장 체크하셨고, 지긱이나 무단결석등은 용납되지 않았다. 거기다 성마리아 초등학교는 우리식구들인 다니던 바로 옆이었다. 그 성당의 신부님과 수녀님들 중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겸하고 계신 분들도 많았는데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그분들이 나를알아 봐주어 마주 기분이 좋았다.

오 폴 뮌젠이로구나, 그래, 오늘부터 우리학교 학생이 되었다고? 너무 반갑구나 잘 지내자.”

내가 뮌젠 박사님네 일곱째 아이로구나, 우리는 너회 가족들에대한 기대가 아주 크단다. 네 누나와 형들은 우리학교의 자랑이야.”

누나와 형들이 모두 그 학교를 다녔고 또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우리형제들을 한한 기억하고 계셨다. 복도나 운동장을 지나찰 때마다 마주치는 선생님들이 네가 패트릭 동생이로구나” “크리스 동생이 바로너냐?” 하는 인시를 자주 받았다.

나는 부모님께 부담을 드린다는 미안한 심정에다 누나 형들에게 뒤지지 말아야 한다는 경쟁심까지 겹쳐 학교생활에 전념하기로 했다. 마음 한편에서는 이제 내 맘대로 장난치고 놀 수 없다는 아쉬움도 물론 있었다.

천당 끝 지옥 시작! 나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종교적 신심도 더욱 깊어져서 주일날 성당에서 미사를 돕는 복사(服事, alter boy)직까지 맡게 되었다. 복사는 미사가 시작하기 전에 일찍 성당에 도착해 청소는 물론 마이크점검에서 부터 촛불켜기 등 미사준비를 하고미사가 시작되면 신부님에게 포도주를 건네주거나 책을 들어주는 일도한다. 힘든 일이긴 하지만 어린나이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예복을입고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여간 자랑스러운 게 아니다. 더구나 선생님으로 모시고 있는 신부, 수녀님들을 보다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많은 어린이들이 서로 하려고 덤비는 일이라 신부, 수녀님들이 특별히 심사를 하셔서 뽑는다.

그런데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나는 기뻤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 밤에는 다음날 미사 준비에대한 설렘으로 잠을 설친 적도 있었다.

나는 학교생활도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공부도 아주 열심히했고 선생님들 말씀에도 순종했다. 야구경기등 스포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 나를 좋아했다.

미국 속담에뉴 키드 온 더 부록’(New kid on the block)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속담에서 이름딴 그룹이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적이있다. 한국에도 내한공연을 해 열광 팬이 숨지는 사고까지 났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알고있다. “뉴 키드 온 더 부록이란 말은 최근에 이사온 이웃집 사람이라는 뜻의 미국 구어인데 아주 특별한 이웃이 새로 이사를 와 눈길을 끌 때 그 사람을 일컬어 사용한다.

나는 완전히 뉴 키드 온 더 부록이었다. 중간에 전학온 친구가 너무 튀니까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특히 여자친구들한테 러브레터를 많이받자 기존의 스타(?)들이 노골적으로 내게 도전장을 던져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평생의 친구하나를 사귀게 되었느데 그의 이름은 스티브 엔젠버그이다. 그는 내가 전학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학교 최고의 스타였다. 공부잘하지, 운동잘하지, 얼굴까지 잘생겼다. 우리는 묘하게도 또 같은 반이었다. 본능적으로 서로 적수임을 가파한 우리는 처음에는 누도 잘 안 마주쳤다. 그러던 어느 날, 야구를 같이 하게되었는데 그가 룰을 어기는 바람에 내가 정면으로 대들었다. 논리로는 나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생각한 스티브는 많은 이이들이 모는 앞에서 내 코앞에 주먹을 들이밀며 좋다,두고보자, 가만두지 않겠다고 을렀다.

그는 터프가이 그 자체였다, 머리도 좋아서 재치있는 농담도 곧잘 했는데 동네 미식축구 선수까지 할 정도로 운동을 너무좋아해 학교성적은 나보다 못했다. 그 일 이후 물론 본격적인 격투(?)는 없었지만 스티브와 나는 서로에 대해 관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야구와 클래식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우리는 완벽한 파트너였다. 내가다소 머리지향적이라면 그는 행동 지향적이었다. 그는 나에게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새로운 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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