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7, 2011

홀로사는 줄거움


홀로사는 줄거움 법정 스님

봄에 책을 내며

꽃이 지나간 자리에 초록이 눈부시다.

온천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으로 생명의 물감을 마음껏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실은 글들은 (( 오두막 편지 )) 이후

내 생각과 삶의 모습을 담은 것들이다.

2004 5월 법정

산방에 지친 달빛에 잠이 깨어

요즘 자다가 몇 차례씩 깬다. 쌓인 눈에 비친 달빛이 대낯처럼 밝다.

달빛이 방 안에까지 훤히 스며들어 자주 눈을 뜬다.

내 방 안에 들어온 손님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자리에 일어나 마주앉는다.

천지간에 아무 소리도 없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다.

이 적막 강산에 어쩌다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흩날리는 소리가 들릴 뿐.

그리고 때로는 내 기침소리에 잠에서 깰 때가 있다.머리맡에 벗어 놓은

누더기를 걸치고 앉는다. 가침이 한밤중에 나를 깨운 까닭을 헤아린다.

한낮의 좌정보다 자다가 깬 한밤중의 이 좌정을 나는 즐기고자 한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면 기침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다.

맑은 정신이 든다. 중천에 떠 있는 달처럼 내 둘레를 두루두루 비춰주고 싶다.

이 겨울 아침나절, 산중에 피어난 눈꽃은 환상적이다.

언뜻 달밤에 피어있는 벗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는 이렇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조화를 간직하고있다.

그 어떤 화가일지라도 이처럼 완벽한 설경산수는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자연은 어떤 분별도 사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무심히 드러낼 뿐이다.

산중에 있는 어떤 절에 갔더니 한 스님 방에 니름 있는

화가의 산수화가 걸려있었다.

아주 뛰어난 그림이였다. 그러나 주인과 벽을 잘못 만나 그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연 산수가 있는 산중이기 때문에 그 산수를 모방한

그림이 기를 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산수화는 자연과 떨어진 도시에 있어야 어울리고

그런 곳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살아서 숨쉰다.

이런 일이있었다.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이 백만 불에 팔렸다.

그림을 갖고 싶은 한 귀부인은 그 그림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인다. 한 미술평론가가 그녀에게 말한다.

"이 그림은 진품이 틀림없읍니다. 이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의 말을 듣고 귀부인은 그림을 산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림을 들고 직접 피카소를 찾아간다.

"선생님, 저는 이미 이 그림을 화상에게서 샀으므로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그림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

피카소는 그 그림을 보더니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 미술평론가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와 동거하던 애인도 그곳에 있었는데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부인, 이 그림은 진품이 아님니다." 그러자 피카소의 젊은 애인이 말한다.

"아니 여보,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이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평론가 선생도

그자리에 있었구요.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어요?"

피카소는 말한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리지날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전에도 그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읍니다.

그 시절에는 달리 할 일이없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오리지널은 지금 파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피카소의 참 면목이 있다. 누가 만들었느냐는 주요하지 않다.

설사 화가 자신이 그린 그린이라 할지라도

진짜가 아니고 모조품일 수 있다는 겄이다.

그에겐 맨 처음에 그린 그림이 오리진날이었다.

그 그림은 자기 존재의 내면에서

탄생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그림을 그릴 때 아무 잡념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

그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위대한 창조는 무심에서 나온다.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고텅 빈 충만인 공( )의 경지다.

오늘 ((금강경 오가해 ((五家解 ))를 펼쳐 야보신사의 시를 디시 읽었다.

오두막 이숙한 밤

홀로 앉아 있으니

고요하고 적적해

본래의 자연

무슨 일로 서녘 바람

슾을 흔드는고

외기러기

먼 하늘에 울고 간다.

아보선사의 노래처럼 고요하고 적적한 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달맞이 산방에 들어와 잠든 나를 깨운 것도, 소리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달의 숨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도 이 모두가 무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였다가 지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강물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도 또한 자연의 무심이다.

이런 일을 그 누가 참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 앞에 무심히 귀를 기울일 뿐이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받아드리려면 입 다물고

그저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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