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3, 2011

2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2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내가 하버드와 예일에서 공부했을 때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님들로부터 배웠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꿈은 그런 교수님들처럼 사는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소크라데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니체, 하이데거 등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말과 생애를 공부했다. 아예 독일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는 생각에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일년 동안 독일어를 배우면서 쇼펜하우어를 탐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같은 가르침은 완전한 진리가 아니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베리타스(진리: VERITAS)가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베리타스(진리)를 하버드 대학원에서 발견했다. 그가 바로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서 온 한국의 숭산 큰스님이었다.

이책에는 내가 어떻게 숭산 큰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리의 도정을 걸어왔는가 하는 이야기다.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진리를 찾아 걸어온 이야기인 것이다.

나의 가족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수행자가 되고 싶었다. 카톨릭 전통이 강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부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세상 태어난 뒤 내 머릿속에 처음 박힌 이미지들은 성당과 신부와 수녀님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가까운 친척들 중에도 신부와 수녀님들이 많았다. 지금은 돌아가신 큰아버님은 우리가 살던 뉴저지에서 아주 존경받는 신부님이었고 고모 한 분도 수녀님이시다. 외삼촌 두 분은 결혼 전에 신부님이셨다.

집안 곳곳에는 예수님 사진과 그림, 십자가가 가득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쓰던 열네 개 방 모두에 예수님과 마리아의 그림과 사진, 십자가가 있었다.

부모님은 나를 포함한 9형제 모두에게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게했다. 우리 형제들 이름은 세례명을 그대로 따 붙이셨다. 나의 出家전 미국 이름인 역시 세례명이다.

이렇듯 완벽한 종교적 환경에서 자라난 나는 너렸을 때부터 앞으로 내 삶이 영적인 생활과 뗄래야 뗄 수없을 것이라는 강한 느낌을 가지며 살았다. 한번도 그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으며 학교 공부를 마칠 때쯤 되면 수행자로서 출가의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물설고 낯선 한국 절에서 그것도 한국인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할 줄 누가 알았으랴.

1964년 나는 미국 뉴저지에서 생화학 박사인 어머니 페트리샤 뮌젠과 아버지 조지프 뮌젠 사이의 일곱째 아이로 태어났다.아버지성에서 알 수 있듯 친할아버지 할머니는 독일에서 태어나셨다. 외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일랜드 태생이다. 그들은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해올 때 가졌던 꿈처럼 좀더 나은 삶을 위해 1900년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왔다. 양가 조부모님들 모두 열신히 일하신 덕택에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됐다..

우리 부모님은 이른바 캠퍼스 커풀이었다. 뉴욕 명문 카톨릭 대학인 포덤 대학을 함께 다니셨다. 두 분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입학하셔서 생화학을 전공했다. 동갑내기 클래스메이트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비행기 조종사로 전쟁에 자원했으나 훈련받고 있는 도중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학교로 돌아와 다시공부를 전념하고 있을 때 어머니를 만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우리에게 어머니 자랑은 늘어놓고 하셨다. “너회들 어머니가 학교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얼굴도 아주 예뻐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내 열렬한 구애에 어머니가 감동을 받았다며 어께를 으쓱해 보이셔서 우리 형제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실제로 어머니는 재능이 많은 분이다. 고등학교에서도 늘 수석을 놓치지 않아 미국의 모든학교에 입학신청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부모님 곁을 떠나기 싫어 그냥 뉴욕에 머믈기로 하고 뉴욕의 명문 카톨릭 대학교에 가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는 종종 우리들에게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수녀님이 되려고 했었다면서 활달하고 잘 생긴 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결국 결혼을 하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너무 자랑을 늘어놓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정말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모델들처럼 잘생겼다. 그들은 1953 9 13일 뉴욕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님인 큰아버지께서 결혼식을 주도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양가 조부모님들이 모두 살고 계시는 뉴저지에 아름다운 살림집을 차렸다.

아버지는 뉴저지의 큰 제약회사인 머크사에 연구원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결혼전에 모교인 포덤 대학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셨다.

나는 두 분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생화학뿐 아니라 역사,. 문학, , 교회사 등 모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어머니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신 분이셨다. 어렸을 때 우리 형제들이 서로 싸우거나 실수를 하거나 학교에서 슬픈일이 생겨 울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고대 그리스 로마 아야기나 시, 세익스피어 이야기, 라틴과 프랑스 문학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우리를 위로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넋을 잃고 어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늘 학교 일과 직장 일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셨지만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러던 그녀에게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있었는데 토요일 오전에 피아노를 치면서 아일랜드 민요를 부를 때였다. 나는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 목이 말라 집에 들어와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와 노랫소리를 엿듣곤 했다. 비록 태어난 고향은 아니었지만 외조부모님 손을 잡고 어릴 때 자주 갔던 마음의 고향 아일랜드, 오랫동안 이어졌던 영국의 식민지를 청산 했지만 아직도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아일랜드, 어머니는 마치 향수병을 앓는 유학생처럼 슬픈 아일랜드 민요를 부르곤 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열린 문 앞에 가만히 앉아 그 노래를 들으면서 엄마도 슬플 때가 있구나하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사람들의 한恨의 정서에 대해 내가 그토록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어머니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오랜 식민지와 분단, 아일랜드는 한국과 비슷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나라다.

아이랜드 민요를 부르며 슬퍼했던 내 어머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어머니처럼 영리하고 지혜롭고 따뜻한 여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만일 결혼을 안 하고 당신이 원하기만 했다면 아주 후륭한 교수님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적 욕심을 버리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헌신했다.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을 바쳤다.

나의 아버지는 뭐랄까, 매사에 힘이 넘쳐흐르고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은 분이다. 점점 식구가 많아지면서 연구원 생활로는 생계가 어려워지자 직장에 사표를 쓰고 독립을 했다. 뉴저지에 컴푸터와 과학기자재를 파는 사업체를 연 것이다. 겨우 1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꾸러가는 소규모 사업체였지만 아버지는 아주 열심히 일하는 분이어서 주변에선 알짜배기 사업가로 통했다. 그의 삶 역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가족에 대한 헌신이 전부였다. 술을 전혀 못하셔서 심지어 여행중에도 술집에 가는 일이 없었고, 저녁식사는 항상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하셨다.

제일 큰형이 대학 때문에 기숙사로 들어가 뉴저지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리 열한 명의 식구들은 저녁시간이면 항상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 친구들 이야기로 재잘거렸고 부모님은 따뜻한 웃음으로 우리들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거의 경이에 가까운 일이다.

두 분의 결혼생활은 완벽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각별했다. 어머니를 정말 여왕처럼 대접했다. 어머니의 일을전적으로 존중하고 지원해 주셨다. 시장 보는 일은 항상 당신 몫이었고 집안 청소, 빨래, 설거지도 틈만 나면 우리 형제들을 지휘(?)하시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스셨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어머니가 설거지라도 하려 들면 그녀를 힘으로 밀어내면서 나가하고 큰소리를 치시는 바람에 우리 형제들이 배꼽을 잡고 웃곤 했다.

어머나는 학교 일 때문에 아주 바빠 어떤 날은 학생들 과제 검토하랴 강의 준비하랴 새벽 한두 시까지 책상에 앉아 계시곤 하셨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항상 아침 일찍 살금살금 어머니 곁을 빠져나와 주방으로 달려가셨다. 그리고는 아침준비는 물론 종이봉투에 샌드위치, 과일, 주스, 쿠키 등을 담아 우리 형제들 것을 포함한 열한개의 도시락을 만드시는 거였다. 늦잠에서 깬 우리들이 후다닥 세수를 마치고 올 때면 식탁위에는 우리들 각자의 이름표가 붙은 도시락들이 열병하듯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 , 크리스, 패트릭, 매리, 바바라, 컬랫, , 피터, 그래고리 그리고 식탁 한 켠에는 어머니를 위한 특별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재잘대는 통에 주방 안이 시장바닥이 될 때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깰까봐 노심초사하셨다.

어제 엄마가 밤늗게까지 일하다 주무셨으니까 아침에 일찍 깨시면 안 된다. 재발 좀 조용, 조용히들 해.”

아버지는 또 어머니가 정년퇴임할 때까지 당신이 출장 때문에 집을 비우는 경우를 제외하고 어머니를 위해 빠뜨리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매일 아침 어머니를 학교까지 바래다주는 일이었다.

나는 여자와 남자가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함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가정이란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녀가 사랑으로 만나 존경과 헌신으로 꾸려가는 세계라는 것을 배우며 자랐다. 과연 완정한 결혼이란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혹 누군가가 나에게 완전한 카풀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선뜻 우리 부모님을 얘기하고 싶다. 아무리 결혼과 이혼이 자유로운 미국이라하지만 부모의 이혼이 아이들에게 가져다주는 상처는 너무나 크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에 겪는 부모의 이혼과 새 엄마 아빠와의 만남은 그들을 너무도 쉽게 술, 마약, 섹스로 유혹한다.

우리 형제들은 정말 부모님들이 서로 싸운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가끔 어떤 사안에 대해 이견을 모이신 적은 있었지만 감정적인 싸움으로 번진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부모님의 삶은 우리 형제들이 전부였다. 그들은 자식들을 키우는동안 단 한번도 당신들만을 위해 옷을 산다거나 외식을 한다거나 여행을 하신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한번도 얼굴에 화장을 하신적이없다. 그 흔한 립스틱도 안 바르시고 손톱에 메니큐어 한번 칠하지 않으신다. 결혼반지 외에는 목걸이나 귀고리 조차도 안 하신다. 부모님의 삶은 나에게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그분들은 우리에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가르쳐준 스승들이었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을 키우면서 단 두 가지 정도 주문을 하셨다. 성당에 가는 것과 열심히 공부하는 것, 부모님과 형제들의 손을잡고 아홉 명의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주일마다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것은 뉴저지 우리 동네에서는 큰 구경거리였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성당 바닥에 무릅 끓고 앉아 오랫동안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두 분의 모습이 새긴 듯 선명하다.

부모님은 종교적 생활과 함께 배움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하시며 우리를 키우셨다. 덕분에 나르 비롯한 모든 형제들이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해 주의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말은 별로 없지만 생각이 깊은 큰형 조는 뉴저지 리트러스 대학을 나와 현재 미국에서 손꼽히는 증권회사인 피텔리티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조사분석가로 활약하고 있다. 활달하고 명석한 둘째 형 크리스토퍼는 당초 코넬 대학에 입학해 예일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땃지만, 나중에 전공을 바꿔 컬럼비야 대학에 다시 입학해 뉴저지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색적인 학력의 소유자다. 지금은 내과의사로 뉴저지에 큰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마음씨가 고운 세째형 패트릭은 컬럼비야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월가의 한 증권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내 귀여운 남동생들 피터와 그레고리는 쌍둥이다. 둘 다 아직 미혼이다.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 그들은 쌍둥이지만 생김새나 성격이나 사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피터는 갈색 눈과 갈색 머리칼을 갖고 있지만 그레고리는 파란눈에 빨강 머리칼을 가졌다.

피터는 예일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나의 대학 1년 후배이며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펜실베니아의 왓튼 스쿨에서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받았다. 지금은 뉴욕에 본사를 둔 시티뱅크에서 중견간부로 일하고 있는데 그의 연봉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얼굴도 잘생겨서 여자친구가 끊이지 않느다. 외모와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고 신차가 나왔다 하면 바꿔대는 전형적인 뉴욕의 여피족이다.

동생 그레고리는 환전히 딴판이다. 우리집안에서 예술적 재능이 가장 뛰어난 그레고리는 미국 예술대학 중 가장 명문인 로드아일랜드 대학을 나왔다. 그곳에서 희화와 조각을 전공한 후 이태리에서 몇 년 살기도 한 그레고리는 배고픈 예술가가 다 그렇듯 뉴욕에 허름한 아파트를 빌려 혼자 살고 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예술가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그림과 조각품을 팔아 아파트 임대료 내는 데 급급하고 의료보험도 없이 옷도 허름한 것을 입고 다니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이다. 돈을 많이 버는 다른 어느 형제들보다 낙천적이며 건강하다. 그레고리는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가장 친하다. 내가 걷고 있는 구도의 길을 제일 잘 이해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바로 그다. 큰누나 매리는 뉴욕에 있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다. 통이 큰 여장부 스타일이다. 강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씨에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가족 모임에선 늘 분위기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둘째누나 바바라는 전형적 커리어 우먼, 뉴저지에 있는 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해 지금은 성공한 기술자다. 그녀는 전자회사 같은 대규모 공장의 정화 시스템 전문가로 일한다. 먼지 하나 없어야 물량품이 생기지 않는 전자회사, 공장 등에서 쓰는 공기 정화기나 먼지정화기 등을 만든다. 어떤 때는 정부 주문도 받아 전부가 제시한 환경 규제에 맞는 정화 시스템을 만들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데가 많아 늘 일에 푹 빠져 살다보니 아직 미혼이다. 뉴욕의 모든 공사뿐 아니라 폴란드, 베네수엘라, 튀니지의 전자회사와 영국, 중국 정부 일까지 도맡아 해 1년에 반은 해외에서 지낸다. 카리스마가 있고 독립적인 성격, 금발머리에 날씬한 몸매로 모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있어 항상 따르는 남자 친구들이 많다. 재규어스포츠카와 일본차인 렉서스를 몰고 다니며 맛있는 식당만 골라 찾아다니는 스타일리스트다. 휴가때면 멕시코 해안이나 캐나다 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세째누나 컬랫은 변호사다, 퍼스트레이디인 힐러리 틀린턴이 졸업한 보스턴에 있는 웨슬리 여대 생화학과를 졸업한 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지금은 유전자 관련 특허에 관한 변호 업무를 맡고 있다. 바바라 누나와 달리 컬랫 누나는 어머니를 닮아 아주 소박하다. 화장도 하지 않고 액서사리도 질색을 해 바바라 누나로부터 늘 촌스럽다는 핀잔을 듣는다. 그렇지만 마음은 완전히 천사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하버드 대학원을 다니다 불현듯 출가를 해버린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길을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홉 형제 중에서 유난히 영적으로 성숙했다며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신 어머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아버지로서는 종교가 다른 것은 고사하고 듣도 보도 못한 한국인 스님에 이끌려 아예 한국에 눌러 살고 있는 아들을 이해하기란 힌든 일임이 틀림없다.

머리를 깎고 삭발한 채로 한국 슈퍼에서 김치를 사들고 출가 후 처음 집에 들렸던 날, 어머니는 그래도 내 입장을 우선 들어보시겠다며 내 생각을 존중해주셨지만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아예 나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셨다. 몇 년 지난 뒤에는 그래도 식탁에 마주앉긴 하셨는데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말씀 하셔서 마음이 저밀 듯 아팟다.

두 분의 마음이 겨우 가라앉고 나를 받아들이신 것은 아주 최근 일이다. 수행자의 길이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 주셨고 출가 후 두분께 더 따뜻하게 마음을 쓰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불교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불교책도 열심히 읽으신다. 지난해에는 숭산스님의 법문을 내가 영어로 엮은《선의 나침판》(The Compass of Zen)이 나오자마자 보내드렸더니 아주 감명 깊었다고 답장을 보내오셨다.

요즘도 가끔 집에 전화를 한다. 아무리 지구 반바퀴나 돌아가야 하는 곳에 살고 있는 불효자이긴 하지만 크리스마스 명절날엔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한국에 와 살면서부터는 12월이 항상 동안거*철이기 때문에 미국에 가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화로 대신 하는데 그때마다 여기는 편안하니 걱정하지 말고 네 건강에 각별히 신경써라라며 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시는 두 분이다.

여든이 넘은 오늘날까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해로하시는 우리 부모님.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신 분들, 나는 부모님을 정말 존경한다. 그리고 항상 자랑스럽다. 무엇보다 두 분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행자가 되고 싶다.

*동안거: 승려들이 겨울 90, 곧 음력 10 16일 부터 이듬해 전월 15일까지 한곳에 머물면서 수행 하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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