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9, 2011

화두란 무엇인가?

2.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화두는 자성을 깨쳐 들어가는 법칙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법령이라는 뜻에서 공안公案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스님이 동산수초洞山守初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하고 물으니 동산스님이 『삼 세 근이니라.마삼근麻三斤』고 대답하였다.

또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雲門禪師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마른 똥 막대기니라. 』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한 도리는 팔만 대장경을 다 보아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 알 수 없는 것을 참구하는 것이 화두를 보는 공부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쁜 사건과 분별심이 많으므로 그것을 없애려고 이런 말과 생각, 길이 끊인『본분의 말』을 드러내어 악지악각惡知惡覺을 깨뜨리게 된 것이다. 화두는 생사生死를 깨뜨리고 곧 바로 대도大道를 성취하는 길이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본분 종사宗師를 만나 배워야 한다. 대해스님이 무자화두無子話頭 하는데 있어 열가지 잘못된 것을 가려 말한 것이 있다. 이것은 무자화두에만 관한 것이 아니다. 참선 공부하는 데는 모두가 이를 알아야 한다.

참선하는데 화두를 가져 탐구하는 방법과 화두가 없이 공부하는 법이 있어 이를 간화선看話禪 및 묵조선默照禪이라 일러온 것은 앞서 말했다. 그런데 어느 쪽이 더 우월한 방법이냐고 물을 때가 있지만, 우열은 없는 것이다. 근기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육조스님 법을 이은 5종 가운게 4종이 간화선이고 조동종만이 묵조선이다. 간화선 측에서는 묵조선이 옅은 공부라고 말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동종에서도 많은 조사가 나왔고, 그 겨세도 일본에서 보면 당당 하다. 방법을 가지고 힐난할 것이 아니다.몸 바쳐서 착실하게 참구하는 것이 요긴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 필경 이르는 문이 깨달음한 문이다. 예전에 어떤 학인이 『조사선祖師禪』을 알았다고 하니까 조사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느냐?」하니 자기가 안 경계를 대담하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 해의 가난한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금년에 가난한것이 비로소 가난한 것이다. 지나 해는 송곳 꽂을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까지도 없다.」하였다.

그러니까 그의 사형되는 스님이「여래선如來禪 정도는 보았다 하겠지만 아직 견해가 붙어있기 때문에 확실히 깨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말을 듣자 그 사람이 분발심을 내어 3년을 공부 하였다. 3년이 지나 자기의 허물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한 고동이 있다」하고는 눈을 껌뻑하며 「알겠느냐?」한다.「만약 모르겠다 하면 사미야하고 어린동자를 부를 것이다.

이 스님은 이제 비로소 조사선을 안 것이었다

참선에서 오도悟道한 예를 들어본다.

육조스님의 제자인 남악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처음 왔을 때다.

육조스님에게 나와 인사를 하니 스님이 물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 물음에 회양스님이 꽉 막혔다. 그리고서 그 뜻을 참구하였는데 이것이 화두다. 8년만에야 깨치고 육조스님을 찾아갔다.

이제 알았읍니다.

어떻게 알았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하여도 맞지 않습니다.

도리어 닦아 중득할 것이 있느냐?

닦아 중득하는 도리는 없지 않사오나 물들고 더럽히는 것은 없읍니다.

망상에 사로잡히는 일은 결코 없지만 힘을 키우는 도리가 없지 않다는 말이다. 이때 육조스님이 말씀하셨다. 물들일래야 물 들 수없는 이 자라가 모든 부처님의 호념하시는 바이다. 네가 이와 같고 나도 또한 이와 같다. 이렇게 되어 육조스님의 인가를 받은 것이다.

처음 참선하는 분에게

비유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산골의 험한 길에서 삼麻을 허리가 부러지게 잔뜩지고 몇 천리를 걸어갔다. 길을 가다가 금항아리를 만났다.그 값어치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가는 보물이었다. 그 사람은 밤새도록 망설였다. 삼짐을 지고 가자니 금항아리는 버려야하고, 금항아리를 지고 가자니 삼짐을 버려야 했다. 어떻게 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금항아리도 중요하지만 삼짐을 먼저 지고 온 공이 아까워 그대로 삼을 지고 가기로 하였다.

이것은 비유지만 이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진짜 보배를 만났으면 아무리 공들여 얻은 것이라도 가짜는 버려야 한다. 참선문에 들어오려면 묵은 지식, 묵은 알음알이 선입지견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이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마라. 하는 것이다. 오직 귀한 것은 진정한 선지식을 의지하여 종전 악지견을 모두 버리고 순직한 마음으로 법문을 받아들고 오직 실답게 참구하여야한다.

참선법문에 비하면 모든 교리는 삼짐에 불고하고, 참선은 금항아리와 갘은 것임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인생의 가장 귀한 것은 정법을 만나는 일이다. 정법을 만나으면 결코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금생에 해탈문 중 큰 보배를 꼭 잡도록 해야할 것이다.

마음은 우주의 본체

흔히들 불교의 교리는 너무 방대하고 심오하다고 말한다. 물론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신 내용이 담긴 8 4천여권, 5천부질에 이르는 불교경전을 적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교의 철학은 한마디로 우주의 몬체는 마음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와 불가의 모든 종교적인 자훈은 이 한마디의 진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원래 석가모니께서는 처음 화엄경을 설하셨으나 이를 못 알아들어 결국은 기초과정이라고 할 아함경에서부터 시작해 올라갔던 것이다. 즉 불교경전들을 현대 교육과정에 비유하면 방등경부方等經部가 중학, 반야경부般若經部가 고교, 법화경부法華經部 가 대학 과정에 속한다.

수학의 한 공식을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정도를 높여 이해하듯이 불가의 진리도 정도를 달리해 강화講話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팔만대장경이라는 엄청난 불교경전도 하나로 꿰뚫어 이해하고 나면 아주 간단 명료한 것이 된다. 불교 교리가 어렵고 방대하다는 얘기는 중학 과정이나 고등학교 과정 한부분만을 보았을 때 하는 말이다.

불가에선 우주의 생성을 업의 인因으로부터 인과 업보의 원리에 따른 세계世界가 생겨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범어늬 「칼마」를 번역한 업이란 말은 「만든다」「짓는다」 「한다」 등의 활동을 의미한다.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착한 생각도 하나의 업으로 보고 이를 선업善業이라 고 본다.

업은 그 인因에 대한 어떤 결과가 올 때까지 소멸하지 않는 업력불멸業力不滅의 원리를 같는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십악업十惡業을 금하고 십선업十善業을 행하라고 한다. 십악업이란 살생, 사음, 사기, 아첨, 이간질, 욕설, 탐욕, 화냄,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에 반대가 십선업이다.

악업을 금함은 소극적인 수도방법이며 십선十善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방법이다.

십악十惡을 줄인 오계〔불살생不殺生-불룬도不倫盜-불사음不邪淫-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만 지키면 인도人道에 태어나고 십선十善을 행하면 천계天界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방생이나 보시, 범행梵行등은 살생, 도둑질, 음행을 금하는 데서 더 나아간 적극적인 선행인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들은 불교교리로 보면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오늘의 「사회악」이란 것이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악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다시한번 되 씹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업은 마음이 미迷 한데서 비롯된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청정한게 본성이지만 번뇌煩惱나 망상妄想의 객진이 들려 붙어 업을 짓게 한다.

망상이 붙지 않은 마음의 본체를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세태가 각박하다느니 인심이 각박하다느니 하는 말들을 들을때마다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청정한 자기 마음의 본체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야 할 때라는 것을 새삼 절감하곤 한다.

화신불

불佛에는 삼신불이 있다. 첫째는 법신法身이요, 둘째는 보신報身이요, 셌째는 화신化身이다.

이와같이 삼신불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은 다만 표현 방법일 뿐이지 불타의 몸이 셋 있는 것은 아니다. 법신은 사람사람이 마음 본체를 지적한 것으로 석가의 본신을 나타낸 말이다. 즉 시간, 공간이 끊어진『우주가 생기기 전 면목』이 우주의 핵심체를 법신이라고 한다.

보신은 개개인의 뚜렸이 밝은 마음 광명이다 다시 말해서 법신자리가 시공時-空이 끊어진 마음의 본체라면 그 마음의 본체가 드러날 때면 우주를 삼키고 남는 태양 광명보다 더 밝은 마음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보신아라고 한다.

화신은 마음의 그림자다. 불타를 역사적인 인물로 볼 때 그 불타는 화신불을 뜻하며 흔히 석가의 대명사로 쓴다.

부처님의 탄신은 지금부터 2533년 전이니, 3002년 전이니, 4000년 전이니 하는 등은 모두 화신의 영상에 집착해서 나온 말이다.

법신이 석가의 본체라면 석가는 법신의 영상이다.

앞에 든 삼신불을 달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천상에 달이 하나라면 백천가지의 물그릇에는 백천가지의 달이 나타난다. 그 물그릇에 비친 달의 영상이 화신이라면 우주에 가득찬 달 광명은 보신이요, 천상에 본래 있는 달은 법신이다.

불경의 내용으로 볼 때 8만대장경 전체가 화신의 소설所說이고 범망경梵網經만이 법신의 소설이다.그러므로 우주관에 있어서도 삼천대천세계가 화신의 우주관이며 이십중장장엄二十重華藏莊嚴 세계가 법신의 우주관이다.

이상이 삼신불을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연상해 보면 성부는 법신이고 성신은 보신이요, 성자는 화신이 된다. 따라서 불타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물그릇에 비친 달을 보고 하는 말이다.백천기지 물 그릇에 비친 달을 보면 참으로 달이 온것이지만, 법신의 본래달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는것도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없기 때무에 생사가 없다. 진리면에서 볼 때 불타가 이 세상에 왔다고 보는 사람은 물그릇에 비친 그림자 달을 보고서 진짜 달로 잘못 인식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중생이다.

3천년전 불타가 세상에 출현하여 설산에서 6년간 고행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49년간 횡야설수야설橫也說竪也說로 설법하신 후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처음 설법을 시작한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최후로 설법을 끝마친 발제하跋提何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에 일찌기 한 글자도 설한게 없다고 하신 뜻을 49년간으ㅢ 설법요지가 시공이 끊어진 사람사람의 본래 가춘 천진 면목을 가르치신 것이다.

만일 불탄佛誕의 본지를 삼천만 대중이 낱낱이 이해하고 체득한다면 정신무장은 이보다 더 강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공이 없는데 피아와 생사가 있을 수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양명선생은 출장입상出將入相을 했는데 전쟁때마다 한번도 패배해본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은 무아의 경지에서 하기 때문에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저서전에서 했다.

나아가서 전세계가 부처님의 정신에 계합한다면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그대로가 천국일 것이며, 극락을 따로 갈것없이 이 세상 그대로가 극락화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苦가 곧 도道니 고를 싫어 할 것이 없으며 집集이 곧 무생無生이니 무슨 망상이 따로 끊을게 있으랴 한화엄학의 중중무애법계해重重無碍法界海에 유의할 것이다. 결국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신 의으ㅢ는 불타가 어는 처소든지 어는 시간이든지 출현하지 않음이 없는 진정한 세계가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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