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8, 2011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 고승법어집

고승법어집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祖師西來意

탄허呑虛 탁성鐸聲 대종사大宗師

탄허呑虛스님의 행장行狀

탄허스님은 1913 1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김율제金栗齋선생의 차남을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 김씨이며 속명은 김탁, 법명은 탄허呑虛이다. 6세부터 14세까지 부친으로부터 한문학 전과정을 수학 하였고 15~22세까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토정土亭선생 후예인 이극종선생의 문하에서 유학 잋 도교학을 수학하였다.

1934 9 5일 오대산 상원사 방한암스님과 우주 및 인생의 근본 이치에 대한 빈번한 서신 문답을 하다가 출가, 한암漢岩선사를 은사로 득도得道하다

스님은 3년간 묵언默言을 하시면서 참선 정진하였고 15년간 한암스님을 모시고 불교내전佛敎內典 및 선학禪學일체를 수학하다.

1953~1963년까지 한암스님의 유촉을 받아 역경작업에 전념하시는 한편 월정사조실과 오대산 수도원 원장으로 계셨다.

1964~197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과 대한불교조계종 중앙 역경 연수원 초대원장을 역임하다.

1972~1983년 화엄학 연구소 소장으로 계시면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전17권을 비롯한 수만은 저서와 역서를 남기셨다

1983년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에서 중생계의 그 숱한 법열과 고뇌의 실상을 보내시고 열반의 저 세계로 가시려 하였다.

그 때 스님의 제자가 스님께 물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그럼 여여如如하지, 멍청이

다시 대규大圭스님이 묻기를

스님, 사람이 세상에 머무는 것은 인연법인데 지금 스님께선 세상인연을 다하신 것 같습니다. 저회들에게 좋은 말씀을 내려주십시요했더니

일체 말이 없어,”라 하시고 이어 유시酉時냐,”고 물으시자, 시자가 예 유시酉時입니다.”라고 답하니 스님께서 곧 열반에 드셨다. 때는 1983 6 5 18 15분이었다.

스님의 세수世壽는 71세요, 법람은 49세였다.

삶과 죽음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자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삶과 죽음일 것이다. 즉 생사生死믄제야말로 그 무엇보다 기필코 풀어야 할 중심문제이다. 인간의 생사문제를 해결하기위하여 종교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생사문제를 쉽게 말해서 이렇게 해결한다. 즉 마음에 생사가 없다고 부연하면 마음이란 그것이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다. 본래 마음이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다. 본래 마음이 나온 곳이 없음을 확연히 갈파한 것은 도통「道通」했다고 알한다. 우리 자신의 어디든지 찾아보라. 마음이 나온「生」곳이 있는지, 따라서 나온 곳이 없으므로 죽는 곳도 없다.

그러니까 도道가 철저히 깊은 사람은 이 조그만 몸뚱아리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가 있다. 그렇지만 어린 중생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 만년 살고 싶어하지, 도인道人-성인聖人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헌옷 벗는 것이나 한가지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굳이 때묻은 옷을 오래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래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오직 중생들의 우견愚見일 따름이다.

도를 통한 사람은 몸뚱아리를 그림자로 밖에 보지 않는다. 다시 말해면 우리의 삶은 간밤에 꿈꾸고 다닌 것이나 같이 생각한다고 할까. 간밤에 꿈꾸고 다닌 사람이 꿈을 깨고나면 꿈속에선 무언가 분명히 있었긴 있었으나 헛것이듯 그렇게 삶을 본다. 이와같은 것이여서 이 육신을 굳이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지 않는다. 벗으려고 들면 향 한대 피워놓고 향 타기 전에 마음대로 갈죽을수도있다.

일반적으로 중생에겐 나서 멸함이있고생주이멸生住異滅. 몸뚱이엔 나고 죽음생노병사生老病死이 있으며, 일년엔 봄-여름-가을 겨울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세계엔 일었다가 없어짐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으나 앞서 말한대로 도인道人에겐 생사가 붙지 않는다. 흑자는 그 도인도 죽는데 어찌 생사가 없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걸을 보고 하는 소리일 따름니다. 옷 벗는 것 보고 죽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을 자기으로 안다. 그러니까 죽는다. 그러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몸 밖에 몸, 육신 밖에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좀 어렵게 말하면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 그걸 자기 몸으로 안다.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란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이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우주 생기기 전의 시공時空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란 뜻이다.

부처란 바로 이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온 것이다. 덥고 춥고 괴로운 경험을 꿈속에서 했을 것이다. 꿈을 만든 이 육신이 일점도 안되는 공간에 누워 10분도 안되는 시간의 꿈속에서 몇백년을 산다. 그러고 보면 우주의 주체가「나我」라는 것을 알 것이다. 곧 내가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우주 속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다. 세간世間의 어리석은 이들은 꿈만 꿈인 줄 안다. 현실 이것도 꿈인 줄 모르고, 다시 말하거니와 성인이 도통했다는 것은 이 현실을 간밤의 꿈으로 보아버린 걸 말한다.

우리는 간밤의 꿈만 꿈을로 보고, 현실을 현실로 보니까 몇백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싶다며 아둥바둥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눈엔 현실이 꿈, 즉 환상이니까 집착이 없다. 그러니까 천당 지옥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

이 정도로 말해 놓고나서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면 영원하고 찰나로보면 찰나일 수 있다고 말하면 좀 수긍이 될지 모르겠다. 요컨데, 우주 창조주 즉 하나님이라는건 우주 생기기 전의 몀목面目을 타파한 걸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하늘 어느 한구석에 담요를 깔고 앉아 있는 어떤 실재인물이 아니란 말도 이해가 될 것이다.

, 그럼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할까? 내말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 태어난 사람이면 3천만, 5천만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즉 나 하나의잘못은 3천만, 5천만명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무슨 문제에 부딪치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준비를 갗추며 살 일이다.

선禪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인도 고대말인 범어’Dhyana’에서 따온 말인데 우리말 로는 「생각하여 닦는다」.사유수思惟修 또는 「고요히 생각한다」정려靜慮 는 뜻이다 고요히 생각한다는 것을 정定과 혜慧의 등지等持라고 말한다. 이와같이 선禪이 고요히 생각하고 생각하여 닦는다는 뜻이므로 이런 공부는 불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는 성질의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불교의 선禪은 좀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고요히 생각한다고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닦느냐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분류하면 네 가지를 말 할 수 있는데 욱단심肉團心, 연려심緣慮心, 집기심集起心, 견실심堅實心,이다. 육단심은 우리의 육체적 생각에서 우러나는 마음이고, 연려심은 보고 듣는데서 분별하여 내는 미음이고, 집기심은 소위 제 7식과 제 8식이다.

이것은 망상을 내는 깊은 속 마음이다. 견실심은 본성으로서 이것이 부처님 마음자리이다. 참선은 보처님 마음자리의 근본이 되고 불교의 핵심이 된다. 부처님의 요법도 필경 이 선禪의 겅지를 깨우처 주려는데 근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8 4천 법문과 교리는 보처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선禪이 추구하는 부처님 마음자리를 깨치면 생사가 없고 일체에 뛰어난 대해탈인이 되며, 완전한 진리의 지혜와 덕성을 갖춘 큰 성인이라고 일 컫게 되는 것이니 그 까닭은 우주 만유의 근원의 실상진라를 주체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선법禪法은 어떻게 깨달아 들어깄는가를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 당시 한 오도가 와서 물었다.’ 말이있는 세간법도 묻지않고 말이 이를 수 없는 것도 묻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십시오.’

이때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이 없이 잠잠히 있었다. 이에 외도가 일어나서 절하면서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저의 미흑한 마음을 열어 주시어 저로 하여금 도에 들게 하셨읍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부처님 옆에서 이를 지텨보던 아난존자가 이상히 생각했다. 부처님은 한 말씀도 안하셨는데 무엇을 알고 무엇이 고마운가 생각되었다. 그래서 부처님께 「부처님께서는 한 말씀도 안 하셨는데, 지금 외도는 알아들었다고 하니 무엇을 알아들었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부처님 께서는 아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하루에 천리가는 준마는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바람처럼 뛰어가자만 둔한 말은 궁둥이에서 피가나도록 때려도 가지 않느니라.’

다시 말하면 영리한 사람은 말로 이르기 전에 다 알아차린다는 말씀이며,지금 외도가 그렇다는 뜻이다 브초님 당시에는 수행인이 근기 수승해서 여러말 하지 않아도 이렇게 알아 버렸다. 원래 도는 분별이 붙으면 외도라 하고, 분별심이 끊어져야 비로소 도道에 든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와같이 항상 산법을 드러내 주셨으니 이것은 눈 밝은 사람만이 아는 것이다.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여러 말이 있게 되고 여러 벙법이 있게 된다. 선禪의 방법은 후대에 와서 이렇게 해서 발달된 것이다.

선禪의 목적과 방법

선禪은 근본자성을 요달하여 생사를 끊는다. 우리들은 아무리 힘이 있고, 건강하고 권세가 있다 하더라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음에 나고, 머믈고, 변하고, 없어지는 이런 번뇌망상煩惱妄想에 휘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노병사生老病死도 생기다. 선禪은 마음 속의 生滅을 없애는 것이 첫째의 목적이며 생멸生滅없는 본성本性을 크게 희롱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된다. 마음의 생멸生滅을 잡아 없애려 하면 더 일어난다. 오히려 이 나我라는 상想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관觀하게 되면 필경 나라는 놈이 없는 줄을 알게 된다. 그때에 그만 그만 생멸生滅상이 사라지게 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부처님 당시에는 모든 근기가 수승하여 선禪의 방법론이 조직화 되지 않았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닦아가야 할 사람을 위해서는 세가지 기본 방법이 있었다. 이것이 관법觀法이다. 세가지 관법이란 정관靜觀, 환관幻觀, 적관寂觀인데 천태선사는 공空, 가假, 中 삼관이라 하였다.

정관靜觀이란 한 생각이 일어나는 데서 고요히 관하기를 「이 한 생각이 어디서 일어났는가」하는 것이다. 일어나는 자리가 없는 것을 보면, 고요해 지니, 고요한 것이 극치에 이르면 마침내 밝아진다.

환관幻觀이란 밖의 경계를 보는 공부인데 보고 듣는 그 모두를 헛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꿈은 실實이 아니라고 앎으로 우리는 꿈에 집착하지 않는다.우주 만상이 환임을 보게되면 집착에서 여의고 자성이 밝아온다. 거기서 온갖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적관寂觀이란 정관靜觀과 환관幻觀이 한 덩어라가 된 것이다 안으로 일어나는 것도 없고, 밖으로 모든 물상이 다 빈 것이다. 객관이 한덩어리가 되어 닦는 방법인 것이다.

부처님 때로부터 천여년이 지나니 사람들 근기가 약해져서 여러가지 분별심과 나쁜 지건을 일으키므로 깨달아 들어가는 법에도 많은 방법을 더해갔다. 참선법이 가장 체계화 조직화된 것은 중국 당나라 때인 대혜大慧스님당시라고 보겠다. 대혜스님은 참선에 가장 착실한 방법으로 화두를 보라고 가르쳤다. 화두는 온갖 분별과 知見이 끊긴 알맹이 법이다. 조사들은 이 화두를 뚫어내고 깨친 것이다,

화두를 보는 간화선看話禪 밖에 화두를 보지 않고 참선하는 묵조선默照禪도 있다. 교리쪽으로 들어가는 관법은 묵조선과 일맥 상통한다.

참선은 반드시 화두를 보는 간화선이라야만 한다고 고집할 것은 없다고 본다 교법에 의한 관법으로도 깊은 도리를 깨칠 수 있으며, 묵조선법으로도 깨친 조사가 실로 많다.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화두란 무엇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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