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8, 2011

33 영원한 자유 맺는 말

33 맺는 말

이제 지금까지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결론을 이야기 하겠읍니다. 종교의 목표는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고一切苦에서 벗어나 구경락究境樂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개의 종교는 초월신을 전재로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세계에 둡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우주과학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초월신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읍니다. 따라서 초월신을 전제로한 종교는 새롱운 활로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그러지 않으면 다만 역사의 한면을 장식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불교는 본래부터 초월신을 부정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현실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이며, 이 세계를 벗어나 따로 절대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불교의 근본태도입니다. 그것을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일진법계一塵法界라고 했읍니다.현실 이대로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중도세계中道世界인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나 물질과학에서도 현실 이대로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읍니다.’

그런데 중생은 현실의 차별만 보고 한계만 보려고 합니다. 한계없는 절대의 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에 대한 한계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읍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다 해도 눈 감은 봉사는 이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 전체, 삼천세계, 미진수법계 이대로가 불국토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읍니다. 그런데 중생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려서 눈 뜬 봉사가 되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그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광명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볼 때는 암흑이고, 눈응 뜬 사람이 볼 때는 광명인 것처럼, 눈만 뜨면 이 처소處所 이대로가 모두 절대입니다. 또 동시에 사람 사람이 부처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함은 중생이 진리의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체眞金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읍니다.

그러면 본래 정신 자체가 영구불멸永遠不滅이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불멸은 그대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읍니다.

물론 공부를 하든 않든 간에 정신의 불멸은 그대로이나 그 쓰는 작용은 다르니, 공부를 않는 사람은 진흙 속에 싸인 옥玉과 같아서 그 옥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항상 생전에 지은 선악善惡의 업력業力에 따라 생사로상生死路上에 돌아다니며 무한한 윤회를 거둡하는 업보를 받게 되어, 조금도 자유가 엇는, 고苦가 연속하는 생사의불멸不滅입니다. 비유하면 공부를 성취하기 전에는 눈 감은 장님의 생활과 같고 공부를 성취한 후에는 눈 뜬 사람의 생활과 같으니, 사람의 생활은 같으나 눈 뜨고 안 뜬 생활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진리의 눈을 뜰 수 있는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해서 삼매三昧를 얻으면 모든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이 현실 또한 바로 볼 수 있읍니다. 만약 이 현실 자체가 틀린 것이라면 이 현실을 떠나야하겠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보면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결국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바세계를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만드는것도 아닙니다. 원래 娑婆세계 이대로가 極樂세계입니다.

불교에서 현실이 곧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 근본을 中道에 두고 있읍니다. 양변을 여의고 또 양변을 서로 합해서 원융무애한 원리가 바로 중도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만물의 근본원리인 중도를 바로 깨쳐서 영원토록 무애자재無涯自在한 생활을 하셨읍니다 그와 동시에 일체 중생에게 각자가 본래 지닌 부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셨읍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루 품팔이하고 마는 정신으로는 대법大法을 절대 성취할 수 없읍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지속되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에서 무한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큰 세계를 바로 보려는 큰 결심을 가지고 생활 방침을 세워야 합니다 눈을 감고 밖으로 찾아 헤매다닌다면 끝내 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밖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황금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돈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읍니다. 현실 이대로가 눈만 뜨면 영원토록 무한으로 쓸 수 있는 보물입니다. 자기 속이 광산이요,자기 자신이 순금덩어리요, 자기가 앉은 자리, 선 자리가 전부 순금덩어리 입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는 도구가 바로 화두話頭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아무리 깊은 잠이들어도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성취해서 화두를 깨쳐야 합니다. 이렇게하여 화두를 깨칠 것 같으면 본래의 광산을 내눈으로 분명히 보고 미래겁이 다하도롣 자우자재로 쓸 수 있읍니다. 이 절대세계, 진금세계, 제법실상의 세계를 중생에게 소개하려면 여러 억천만 부처님이 출세하시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해도 터럭만큼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도 결국 금덩어리에 똥칠하는 격입니다. 그렇지만 금던어리를 가진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 뜬 사람은 적고, 눈 감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이 금덩어리를 던져주면 눈 감은 사람은 흙덩어리라고 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때리고 주먹질 힙니다.

만일 어느 집에가서 마당에 금덩어리가 있으니 파서 쓰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믿는다면 아무리 땅이 깊어도 그것을 파서 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래 지닌 무한하고 절대적인 보배는 마당안의 금덩어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보배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보배산에서 살고 있음을 바로알아 보배를 바로 찾아 써야 하겠읍니다.

역은이의 말

이 법어집은 성철 큰스님께서 일찌기,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삶에 대하여, 대학생 밑 대중에게 몇차례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하여 엮은 책입니다.

큰 스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스무 해 전인 1967년 가을에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시고서, 그해 겨울 동안거의 백여 일 동안 대중들을 위해 선-교禪-敎에 걸친 부처님의 일관된 사상은 중도사상中道思想임을 밝히는 설법을 하셨던 바, 산문山門에서는 큰 스님의 백일법문百日法門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의 하안거에서는, 전국대학생불교 연합회 하기수련대회가 해인사에서 개최되어, 큰 스님께서 불교의 현대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하루 두 시간씩 한 주일 동안 설법하셨읍니다. 1980년 하아거, 동안거 동안에 인과因果에 대한 확실한 신심信心을 갖지 못하는 대중들을 위하여 보름에 한번씩 윤회법문을 하셨읍니다.

이 법아집은 1968년의 대학생수련법회에서 하신 설법을 큰 줄기로 삼고, 백일법문의 일부와 윤회법문 등의 부분을 첨가하여 엮었읍니다.

그런데 이 책 「영원한자유」를 펴냄에 있어, 이미 발간된 큰 스님 법어집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그 내용이 더러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 책에서는 큰 스님 법문 내용을 단편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하게 다 닦으면서 그 내용의 줄기를 일관되게 꾸미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불교를 좀더 현실적으로 이해시키고 인과의 원리를 합리적으로 납득시키어 중생들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게 하여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삶의 길을 깨우치고자 하여 고구정녕하게 설법하신 큰 스님의 뜻을 얼마나 잘 정리 하였는지 모르겠읍니다. 정리와 편집이 큰 스님 뜻에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누를 끼치는 일을 저지르지나 않았나 하는 두려운 마음 뿐입니다.

이 책을 가까이 하여 부처님의 뜻을 깨닫고 불타는 집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의 길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다면 그 얼마나 기쁜 일이겠읍니까. 1968 하안거 결제일 圓澤 和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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