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February 26, 2011

32 영원한 자유인 유안


32 영원한 自由人 十四 유안劉晏

유안劉晏은 당나라의 大宗 763~779 때의 유명한 재상인데, 어릴 적부터 이인異人 만나기를 소원하여 많은 애를 써 왔읍니다. 한 번은 서울의 어느 술집에서 웬 이상한 사람들이 서너명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한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왕십팔王十八이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 깊이 간직하였읍니다.

그 후 자사刺史가 되어 남중南中으로 가서 형산현衡山縣을 지날 때 그 현청縣廳에서 쉬었읍니다. 때는 봄철인데 좋은 채소들을 내어오는데, 하도 이상한 것들이 많기에 물었읍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것들을 구하여 왔느냐?”

여기 왕십팔王十八이라는 채소 가꾸는 사람이 있는데 솜씨가 참으로 묘합니다.” 그 말에 문득 이전에 이름을 들은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한번 가서 만나보자하였읍니다. 관인들이 그를 불러오려는 것을 말리고 자기가 직접 가서 보았읍니다.

왕십팔은 떨어진 의복에 그 모양이 대단히 흉하였는데, 유안을 보더니 겁을 내며 벌벌 떨면서 절하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그를 데리고 가서 술을 권하니 겨우 조금만 먹었읍니다.

무엇을 물어도 도무지 모른다고만 하는 것이었읍니다 더 기이하게 여겨 같이 가자하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못 이겨 같이 갔읍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배 안에서 유안은 자기 가족에게 왕십팔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모두 예배하도록 하였읍니다.

며칠을 가다가 그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 하더니 계속하여 똥을 싸서 배 안의 사람들이 크게 곤란해하였읍니다. 모두가 그를 원망하는데 유안만은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읍니다. 그러나 며칠 앓더니 그만 죽어버렸읍니다. 유안은 크게 슬퍼하며 정성을 다하여 장사지내 주었읍니다.

뒤에 유안이 벼슬이 바뀌어 딴 곳으로 갈 때 또 형산현에 들렸더니, 군수가 나와 반겨 맞으며 그때에 데리고 갔던 왕십팔이 얼마후 돌아와서 도로 가라하기에 그만 돌아왔다고 말하더라고 하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크게 놀라 지금도 있는가?’ 하고 확인한 뒤에 그 처소에 가 보니,빈 집뿐이었읍니다. 이웃 사람 말이 어제 저녁에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울며 여러번 절하고 나서 사람을 보내어 예날에 그를 장사지낸 묘를 파보니 과연 의복뿐이요 아무것도 없었읍니다.그 말을 전해 듣고 그 때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합니다.

몇 해 뒤에 유안이 큰 병이 들어 정신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였읍니다. 왕십팔이 찾아와서 유안에게 약 세알을 먹이자 배 속에서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유안이 일어나 앉는데 병이 씻은듯이 나았읍니다. 가족들로부터 왕십팔이 병을 낫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유안이 일어나 울며 절하자, 왕십팔이 말하였읍니다.

옛정을 생각하여 와서 구하였는데 앞으로 삼십년은 더 살것이다. 삼십 년 뒤에 만나자.”

그러고는 나가버리는 것이었읍니다. 유안이 아무리 붙들어도 소용없고 많은 보물을 주어도 허허 크게 웃기만하고는 받지않고 가버렸읍니다.

그 후 유안은 재상宰相이 되어 천하의 정사를 잘 다스리다가 못된 사람의 중상으로 대종岱宗황제의 마움을 받아 충주忠州땅에 귀양을 갔읍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왕십팔이 또 찾아와서는 웬 약을 주어 받아먹으니, 삼십 년 전에 먹은 약이 그대로 다시 나오는 것이었읍니다. 왕십팔은 그것을 물에 씻어 지니고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읍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유안이 죽자, 이 신기한 사실이 세상에 널리 전하여졌읍니다.

十五 법수法秀

법수法秀는 당나라 때 사람입니다 그가 현종玄宗 개원開元 26’738’년에 꿈에 이상한 스님을 만났는데 가사袈裟 오백벌만 지어 회향사廻向寺에 보내라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법수가 곧 가사를 만들어 회향사를 찾아가려 하였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읍니다. 하루는 길애서 꿈에서 본 그 스님을 만나게 되었읍니다.

부탁한 가사는 어떻게 되었는가?”

스님은 대뜸 이렇게 물었읍니다.

가사는 되었으나 회양사를 찾지 못하겠읍니다.”

법수가 대답하자, 그 스님이 따라오라.” 하기에, 며칠 동안 따라가다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아주 궁벽한 곳으로 가서 한 곳에 이르니 돌로 쌓은 단壇이 나왔읍니다.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스님과 함께 오래도록 예배드리자, 어느 사이엔가 층암절벽 위에 있는 많은 기와 집들이 보이는 것이었읍니다. 스님과 같이 올라가 보니 그곳에 과연 회향사라는 현판이 보였읍니다.

건물과 경치가 모두 인간세계에서는 보지 못하던 훌룡한 것들이었으며, 대중스님들도 많은데 다 성인들 같이 보였읍니다.그 스님은 가사를 전부 나누어 주고나서 한 빈방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 방은 본래 지금의 당나라 천자의 방인데, 여기 있으면서 항상 음악을 좋아하던 탓에 인간으로 귀양가서 임금이 되었다.”

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더니 옥통소를 하나주며, “이것이 당나라 임금이 불던 것이니 가져다 주라.” 하였읍니다. 하룻밤도 더 못 자게 해서, 그 이튼날 산을 내려와 처다보니 절은 간 곳 없고 오직 바위만 보일 뿐이었읍니다. 법수가 여러 차례 예배한 뒤에, 대궐로 가서 옥통소를 올리고 그 연유를 말하니, 현종 황제가 받아 불어보는데 정말로 많이 불던 사람같이 소리가 잘 났읍니다.

그래서 현종은 천하에 둘도없이 뛰어난 문장가인 이태백李太白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자신은 옥통소를 불며 노래하고 양귀비를 시켜 춤추게 하니 마치 인간을 떠난 신선놀음과 같았읍니다. 이 소문이 천하에 퍼지자 기이하다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十六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리는 스님이 있었읍니다. 남에게 얻어 먹고 다니는 거지 스님인데 살림살이라고는 큰 포대 하나 뿐 이었읍니다. 포대 하나만 들고 다니다가 사람들의 뒷꼭질 똑똑 치면서 돈 한닢 달라 하곤 하였읍니다. 그것은 일종의 법문이었읍니다.

, 예를 들어, 생선 장수를 보면 생선 한 마리 만 달라고 하여 한 입만 베어 먹고 포대에 넣고 다녔읍니다. 그렇게 무엇이든 눈에 띄기만 하면 달라고 했읍니다. 그리고 장차 가뭄이 계속될 것 같으면 흐린 날에도 삿갓을 쓰고 다니고, 장마가 계속될 것 같으면 맑은 날인데도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녔읍니다. 이런 식으로 앞일을 예견하는 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읍니다.

포대화상이 돌아가실 때916에는 명주明州 옥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에서 법문을 하면서 앉은채로 입적했읍니다 그 때 이런 게송을 남겼읍니다.

미륵, 참 미륵이여 彌勒眞彌勒 미륵진미륵

천만억 몸을 나투는구나 分身千萬億 분신천만억

때때로 사람에게 보이나 時時示時人 시시시시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구나.時人自不識 시인자부식

포대화상의 죽은 시체는 전신全身을 그대로 절 동당東堂에 모셔 두었읍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니 곳곳에서 포대화상이 돌아다니는 것이었읍니다.

十七 배도杯渡스님

배도杯渡스님은 당나라 때 스님으로 성도 이름도 알 수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큰 강을 만나면 지고 다니던 걸망에서 조그마한 접시를 꺼내서 강물 위에 띄우고는 그것을 타고 강을 건너곤 하여, 사람들이 접시를 타고 건넌다는 뜻의 배도杯渡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면 접시를 타고 물을 건너는 스님이 접사가 없다고 강을 못 건널 까닭이 있겠읍니까? 그런 것은 모두 장난입니다. 배도스님은 그렇게 하며 여러곳을 다니며 중생을 교화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죽은 뒤에도 이곳 저곳에서 나타나곤 하였읍니다.

十八 지공誌公스님

지공誌公 화상은 신통력이 뛰어난 스님이었읍니다. 그래서 梁나라 무제武帝는, 이상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하여, 스님을 잡아서 옥에 가두었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거리를 자우롭게 다니는 지공 화상을 볼 수가 있었읍니다. 옥졸이 잘못 지켜서 그런가 하고 옥에 가보면 스님은 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읍니다.

그 이야기르 보고받고서 무제는 크게 놀랐읍니다. 무제는 지공화상을 궁중에 모셔놓고, 잔치를 베풀어 참회를 올리며, “스님, 몰랐읍니다. 옥에 모실 것이 아닉고 대궐로 모시겠읍니다. 궁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법문을 해주십시요하고 청하였읍미다.

지공화상은 그 청을 받아들여 궁중에 머물기로 하였읍니다. 그런데 스님이 계시던 절에서도 예전과 똑같이 지공 화상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리가 없다하며 가서 알아보니 과연 사실이었읍니다. 이에 양나라 무제는 크게 발심하여, 천자 자리에 있던 40여년 동안 불교를 더없이 융성 시켰읍니다.

지공스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무제가 물었읍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겠읍니까?”

:내 탑이 무너질 그때까지…”

지공스님이 돌아가신 뒤에 무제가 몸소 종산鐘山 정림사定林寺에 가서 탑을 세우고 그 안에 전신全身을 모셨읍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지공화상이 구름 위에 서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장사지내려 온 수천, 수만의 대중이 그것을 보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였읍니다.

그 많은 사람이 얼마나 환희심을 내었겠읍니까?

그일을 기념하여 개선사開善寺라는 절을 짓고 천하에서 으뜸가는 탑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무제는 급한 생각에 목조탑을 세우게 하였읍니다. 드디어 나무로 지은 그 탑이 다 만들어지자. 무제는 비로서 아차! 잘못했구나, 지공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탑이 무너질 때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목조탑이 얼머나 오래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탑을 헐고 새로이 석조탑을 짓기로 결심하고는, 사람들에게 시켜 그 목조탑을 헐기 시작하였읍니다. 바로 그 때 후경喉剄이 처들어와서 양 무제는 망하고 말았읍니다.

양 무제가 어느 때인가 지공 화상께 아렇게 물은 적이 있읍니다.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읍니까?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목의 두 곳을 가르켰읍니다. 그 때에 무제는 무슨 말씀인가, 목이 달아난다는 뜻인가하고 의아해 하였읍니다.

나중에 후경이 쳐들어오자 그제서야 비로서 그 뜻을 알 수 있었읍니다. 지공스님이 목을 두 번 가리킨 것은 바로 목 후喉자, 목벨 경剄 자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十九 사명대사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는 옛날 이야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보기로 사명대사의 비석을 들 수 있읍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유명한 스님입니다. 스님의 출생지는 경상남도 밀양의 무안입니다. 나라에서는 그곳에 스님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워 놓았읍니다.

그런데 이 비석에서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에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 생기려 하거나, 아니면 어떤 중대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면, 이 비석에서 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이 나오는데, 조금 흐르다 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양이 나온다고 합니다.

많이 나올 때는 大斗 일곱 말에서 여덟 말까지도 나왔는데, 그동안 동학혁명,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 3.1운동, 그리고 8.15해방, 6.25사변. 여순반란사건, 4,19의거. 5.16혁명 때 그 돌에서 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5.16 때에는 다섯 말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각 신문에서 이 사실을 많이 보도하였느데 특히 동아일보에서 자세히 소개했읍니다.

나는 이 사실을 신문을 통해서 보고, 또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믿기는 어려워 직접 가 보았읍니다. 비석은 무안 지서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읍니다. 흙으로 대를 모아 놓고 여러 층층대를 올라가서 큰 돌로 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새까만 돌로 비석을 세워 놓았는데 마치 방금 만든 비석 같았읍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지붕을 씌워 놓고 비각을 만들어 놓았읍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습기 같은 것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읍니다.

비각 주변에는 비각을 지키는 집이 서나 채 있고 구연이라는 노스님이 계시는데, 표충사 주지스님을 오래 한 분이었읍니다. 그 노장스님이 말씀하기를, 비석에서 물이 나오는데 샘처럼 펑펑 쏟아지는 게 이니고 글자 사이사이의 매끄러운 데에서만 마치 구슬 맺히듯 땀 나듯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비석전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석 밑에는 물이 고이게 되어 있어서 그양을 알 수 있게 해 놓았읍니다.

그래서 그 노장스님에게 세상의 어느 돌에서도 물이 안 나오는데 이 산중의 비석에서만 물이 나온다는 것은 거짓말 이닙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은 딱하다는 듯이 설명을 덧붙였읍니다. 비석에서 물이 나오면 수백명의 사람이 몰려오고 순경들이 와서 밤새 지킨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물 한 방울을 더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과 순경이 지켜보고 있으니 거짓말일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석의 물빛은 보통 물빛과 같고, 또 물맛도 보통 물맛과 같다고 합니다. 내가 갔을 때는 물이 나오는 날이 아니라서 그냥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 왔읍니다. 가는 길이 무안 장날이었는데, 사람들을 잡고 사명대사 비석 이야기를 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비석에서 땀이 난다는 것입니다.모두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했읍니다. 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글자에는 전혀 물이 흐르거나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사를 끝내고 표충사를 들려서 부산으로 왔는데 당시에 동아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분이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물었읍니다. 그래서 사실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스님께서도 남의 말만 듣고 믿습니까?” 하고 반문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래서 당신은 삼십년 검사 생활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그 때에 증인들 말을 안 믿고 또 보지 않은 것은 재판 안하고 직접 본 것만 재판합니까?” 하고 되물었읍니다. 수백 명의 증인이 있으면 확실한 것입니다. 사명대사가 그 비석을 직접 만든 것이 아니라도 그것은 사명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법당의 부처님도 부처님께서 직접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절도하고 기도도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사명대사는 사백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물을 흐르게 해서 나라의 중대사를 예시하는 신기한 힘을 아직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대사의 무애자재한 능력이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보기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의 무한한 능력을 개발한다면, 귀종 선 선사도 될 수 있고 또 원효스님의 스승인 혜공스님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부지런히 공부하여 큰스님들 처럼 자유자재한 해탈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본이 되는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영겁불망永劫不忘이니, 곧 영원토록 다시 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겁불망永劫不忘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해탈의 경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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