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February 25, 2011

31 영원한 자유인 달마스님

31 영원한 自由人 九 달마스님

달마스님을 보기로 들어보겠읍니다. 불교인 이라면 거의 알고있는 달마스님의 이야기가운데 척리서귀履西歸 라는 것이 있읍니다. 신짝 하나를 들고 西天 곧 인도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달마슨님이 혜가慧可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시자 웅이산熊耳山에다 장사를 지냈읍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송운宋雲아라는 사람이 인도에 가서 많은 경經을 수집하고 귀국하는 길에 총령葱嶺 ; 파밀고원에서 쉬고 있었읍니다.

그 때 마침 어떤 스님 한 분이 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왔읍니다. 가까이 왔을 때 자세히 보니 그 분은 달마스님 이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읍니다. 스님께서는 이제 너회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국으로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 효명제曉明帝 ; 516~528’는 죽었어, 가 보면 새 임금이 계실 테니 안부나 전하게라고 말씀하시고는 고개를 넘어가셨읍니다

송운이 돌아와 보니 과연 먼저 입금은 죽고 새임금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가 천자가 되어 있었읍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읍니다.그랬더니 달마스님은 돌아가신 지가 여러 해가 자났다고 했읍니다 송운은 너무 놀라 자기 혼자만 본 것이 아니라 수십 명이 함께 달마스님을 보았으니 절대 거짓이 아니라고 말했읍니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여 달마스님 묘를 파 보기로 했읍니다. 무덤을 파보니 빈 관만 남아 있고 관 속에는 신 한짝만 놓여 있었읍니다. 달마스님의 척리서귀라는 말은 선종에서는 누구도 의심하자 않는 사실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후死後에도 이처럼 대자유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에대한 조주스님의 법문이 있읍니다.

조주 남쪽 석교 북쪽 趙州南石橋北 조주남석교북

관음원 속에 미륵이 있도다. 觀音院裏有彌勒 관음원리유미륵.

조사가 신 한짝 남겨두었으나 調師 遺下一 조사유하일척리

지금에까지 찾지 못하도다. 直至如今否得 직지여금멱부득

조주스님하면 천하만고에 다 아는 대조사로서, 달마스님과 연대가 그리 떨어지지 않은 때에 사셨읍니다. 그런 조주스님이 달마스님이 신 한짝 버리고 간 것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읍니다.

이 게송 하나만 보아도, 달마스님이 신 한짝만 들고 간 것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읍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며 반드시 대자유가 따릅니다. 보통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기를 더 들어 보겠읍니다

승가僧伽스님

서기 708년 당나라의 중종中宗황제가 승가僧伽 대사를 국사國師로 모셨읍니다. 대사의 속성은 하何씨인데, 어느 때는 몸을 크게도 나투고 어느 때는 작게도 나투고 또는 십일면관세음보살十一面觀世音菩薩의 얼굴로도 나투고 하여 그 기이한 행동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읍니다.

스님께서 710 3 2일에 돌아가시자 중종이 장안 근처의 절에다 그 육신을 모셔두려고 하였읍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바랍이 일며 시체 썩는 냄세가 온 도성 안을 덮어서 사람들이 코를 들 수가 없었읍니다. 중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대사가 본래 사주泗州 보강왕사普光王寺에 많이 계셨는데 죽은 육신도 그리로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하고 신하들이 황제께 아뢰었읍니다

그래서 중종은 향을 피우고 마음으로 축원하기를, “대사의 육신을 보광왕사로 모시겠읍니다.”하자, 잠간 사이에 온 장안에 향기가 진동하였읍니다.

그해 오월 보광왕사에다 탑을 세우고 대사의 육신을 모시니,

뒤로 탑 위에 자주 나타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보였읍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 탑에 와서 소원성취를 빌게 되었고 그럴때마다 가서 탑 위에 모습을 나타내곤 하였는데, 그 얼굴이 웃음을 띄우고 자바로우면 소원성취하고 찡그리면 소원성취하지 못하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아서 세상에서 부르기를 사주대성泗洲大聖이라 하였읍니다.

779 7월에는 궁중에 나타나서 그 때에 천자로 있던 대종代宗에게 법문을 하였읍니다. 이 일로 대중이 크게 감격하여 그 화상畵像을 그려 궁중에 모셔놓고 항상 예배하였읍니다.

822년에는 큰 화재가나서 대사의 탑이 다 타 버렸읍니다. 그러나 대사의 육신은 조금도 상함이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읍니다.

869, 나라 안에 큰 난리가 났을 때에, 도적들이 사주泗洲로 처들어오다가 대사가 탑 위에 몸을 나타내자 놀라서 다 물러갔읍니다. 당시 의종懿宗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증성대사證聖大師라는 호를 올렸읍니다.

1119년 당나라의 서울에 대홍수가 났을 때였읍니다. 대사가 또 궁중에 나타나므로 천자인 의종徽宗황제가 향을 꽂고 예배를 하였읍니다. 그러자 대사가 육환장을 흔들며 성城위로 올라가니, 성 안의 온 백성들이 다 보고 기꺼워하는 가운데 큰 물이 곧 빠져버렸읍니다.

이상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을 몇가지 보기를 든 것일 뿐으로, 그박에도 기이한 사적事蹟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듯이 승가 대사가 사후에 보광왕사의 탑 위에 그 모습을 자주 나타낸 사실은 그 근방 사람들이 다 보게 됨으로써 천하가 잘 아는 사실이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사실이 확실하여 의심할 수 없는 것을 가르켜 사주 사람들이 대성을 본듯 한다〔사주인견대성 泗州人見大聖〕는 관용구까지 생겨나게 된 것은 세상이 다 잘 아는 바입니다.

十 一 보화普化스님

보화普化 스님은 반산보적半山寶積 선사의 제자로 항상 미친 사람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교화하였읍니다. 그 당시 그런 기행을 하는 스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오직 임제臨濟스님만이 심중을 알고 흉허물없이 잘 지냈읍니다.

하루는 진주鎭州의 저자거리에 나와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나에게 장삼 한 벌 해달라.”

하며 졸랐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화스님에게 장삼을 지어 드렸읍니다.그러나 스님은

이것은 내가 입을 옷이 아니다

하며 받지를 않는 것이었읍니다. 사람들이 더욱 이상히 여기며 미친 중이라고 수군댔읍니다.

어느 날 임제스님이 그 소문을 듣고는 장삼 대신에 관棺을 하나 보내니, 보화스님이 웃으며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하고는 그 관을 짊어지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동문 밖애서 떠나겠다.”고 하였읍니다. 다음 날 동문 밖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는데 보화스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늘 여기서 죽지 않겠다. 내일 서문 밖에서 죽겠다.”고 하며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욕을 하고는 흩어졌읍니다.

다음 날 서문 밖에 또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 않고 내일 남분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읍니다.

다음 날 남문 밖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화스님은

오늘 여기서 죽지않고 내일 북문 밖에서 죽겠다.”

고 하며 또 관을 메고 떠나버리니,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마친 중이 거짓말만 하여 사람을 속이다고 삿대질을 하며 분위기가 살벌하였읍니다. 다음 날 북문 밖에는 과연 보하스님이 관을 메고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읍니다. 보화스님은 관 위에 묵묵히 앉아 있는데 마침 한 길손이 지나므로 그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이 관 속에 들어가 눕거든 관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해달라’”

고 하고는, 그 관 속에 들어가 누우며 관 뚜껑을 닫으므로 그 길손이 못질을 하고 떠나갔읍니다. 길손이 성중에 들어가 그 이야기를 하니 진주성 사람들이 놀래며 북문 밖으로 보화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읍니다. 가서 못질한 관 뚜껑을 열고보니 그 속에 있어야 할 보화스님은 온데 간데 없었읍니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느데 그때 마침 공중에서 은은히 요령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사람들은 그 요령 소리가 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수없이 절을 하며 보화스님의 법력을 알아보지 못한데에 대해 통탄하였읍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화스님이 보인 전신탈거全身脫去의 이적입니다. 이 사실은 선종 어록 가운데 가장 권위있는 임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읍니다.

十二 왕가王嘉 ...

왕가는 후진後秦 때 숨어사는 사람으로 유명한 도안道安 스님과 친하였읍니다. 도안스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어 왕가가 찾아가니 도안스님이 말하였읍니다.

나와 같이 가지 않으려는가?”

왕가가 대답하였읍니다.

나는 아직 빚이 좀 있어서 빚을 갚고 가겠읍니다.”

그 뒤에 요장姚長이 장안長安을 빼앗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 안에 있었는데, 요장이 물었읍니다

내가 곧 천하를 얻겠는가?”

조금 얻겠다〔畧得〕.”략득

요장이 그말을 듣고 왕가를 죽여버렸으니 왕가가 말한 바로 이를 말한 것이었읍니다.

그 뒤에 요장의 아들 요흥姚興이 천하를 얻었는데 요흥의 字가 자략子畧이었읍니다. 그러니 조금 얻겠다〔략득畧得〕란 말은 자략子畧이가 요장을 죽이고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왕가가 죽던 날, 어떤 사람이 농상壟上에서 왕가를 만나니, 왕가가 자기를 죽인 요장에게 편지를 보내자 요장은 그 편지를 받아보고 크게 놀래며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十三 동빈거사洞賓居士.

동빈거사洞賓居士 여순양呂純陽은 당나라의 현종玄宗 천보天寶 742~755 때 하양河陽에서 났읍니다. 그 무렵 신선도神仙道를 닦아 크게 유명해진 종리권鐘離權이 동빈을 보고

세상에 영화榮華는 잠간 동안이니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도를 배우라고 권하였읍니다.

동빈은 그 말을 좇아 종리鐘離를 따라 공부 길을 떠났읍니다. 한 곳을 지나다가 조리는 큰 금덩어리를 하나 주어 가지고 대단히 기뻐하며 말했읍니다.

자네가 도道를 닦으러 가니 하늘이 그것을 알고 도道 닦는 밑천을 하라고 주는 것이니 이것을 팔아서 모든 비용에 쓰자.”

그러면서 동빈에게 그 금덩어리를 주자, 동빈은 크게 성내며 그 금덩어리를 집어던지며 말하였읍니다.

내 들으니 도道하는 사람은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데 금덩어리 하나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놈이 무슨 도道 닦는 놈이냐? 너는 도인道人이 아니라 분명코 도적놈이니 너 같은 놈은 따라갈 수 없다.”

그러고는 뿌리치고 돌아가려 하였읍니다. 그러자 종리는 크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금던어리를 자세히 보라.”

동빈이 자세히보니 그것은 금이 아니라 썩은 돌이었읍니다.

그제서야 종리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임을 알았읍니다

그리하여 깊은 산골에 가서 움막을 짓고 공부를 하는데, 하루는 종리가 어디 갔다 온다 하며 더 깊은 골짜기에가서 무슨 약을 캐어오라 하므로, 동빈은 지시한 곳에 가서보니 아주 잘지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읍니다. ‘이런 깊은 산골에 어찌 이런 집이 있는고하는 의아심이 나서 그 집 마당에 가서 보니, 방안에서 세상에 보기드믄 예쁜여자가 반기며 나오더니, “우리 남편이 먼 길을 떠난 지 오래 되어서 대단히 적적하더니 마침 잘오셨읍니다.” 하며 동빈의 손을 잡아 당기려 하는 것이었읍니다.

이에 동빈이 번개같이 발로차며 꾸짖기를, “이 요염한 년 이것이 무슨 짓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읍니다. 그러자 갑자기 집과 그여자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자기 스승인 종려가 허허 하고 손뼉치며 웃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이리하여 동빈은 또 다시 시험당한 줄 알았읍니다.

종리가 하는 말이, “세상에 제일 어려운 것이 재물과 여자인데 네가 그만큼 뜻이 굳으니 이제는 너의 집에 가서 부모를 아주 하직하고 참으로 공부 길을 떠나자고 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종리와 같이 자기고향에 가서 집으로 갔는데 대문이 잠겨 있고 아무리 소리쳐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읍니다. 그래서 담을 넘어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자기의 부모, 형제, 처자가 누군가에게 맞아 죽어 사지四肢가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온 마당에 가득 널려 있었읍니다.

종리가 이것을 보고 깜짝놀라더니 벌벌 떨며 동빈더러 그 시체를 전부 주워 모으라하였읍니다. 동빈은 처음부터 조금도 놀라는 빛이 없었읍니다. 시체를 주워 모으면서 얼굴을 조금도 찌푸리지 않고 마치 나무 막대를 주워 모으듯 아주 태연하였읍니다. 종리가 그것을 보고 또 한번

크게 웃으니 모든 시체는 간 곳 없고 집안에서 자기 가족들이 반기며 쫓아나왔읍니다. 그때야 비로서 종리에게 시험당한 줄 알고 동빈은 크게 탄복하며 수없이 절하였읍니다.

그 뒤로 동빈은 신선도를 닦아 세상에 으뜸가는 신선이 되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 비롯하여 기묘한 재주를 많이 가졌읍니다. 그리하여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황룡산黃龍山에서 희기晦機 선사의 도력道力에 항복하고 그 밑에서 크게 깨쳐 불법佛法으로 돌아왔읍니다. 그 후 천여 년 동안 그 몸 그대로 돌아다니며 많은 불사佛事를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들입니다.

일례를 들면, 송나라의 휘종徽宗 선화宣化 원년元年 1119에 휘종徽宗 황제가 임영소林靈素라는 사람에게 속아서 그와 모든 것을 의논하는데, 문득 동빈이 그 자리에 나타나서는 임가를 꾸짖고 황제에게 속지 말라고 타이른 것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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