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29, 2011

무궁화 꽃이 피었읍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읍니다

내 석양은 아직지지 않았다

조일환 자서전 에세이

천수만에 걸처진 저녁노을이 너무 아름다웠다.

볽게 불든 노오란 해가 수평선 아래로 잦아들 때 고깃배 하나가

슬그머니 태양 안으로 미끄러저 들어왔다.

나의 천수만 언제나 살포시 내려앉은 바다안개, 석양에 어우러지는 천수만의 정체는

여전히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삶에 대한 찬미를 끓어 안는다.

속도를 못 느끼는 고깃배가 태양의 끝머리에 멈추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태양보다 붉은 용기가

불끈 치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누군가의 손길이 어깨에 얹혀졌다.

오랜침구, “자네 벌써 환갑이야,”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제 고작 환갑이라네.”

내 석양에는 여전히 청년보다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고 있다.

내 석양은 아직 지지 않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읍니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 나라꽃

삼천리 강상에 우리 나라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 나라꽃,,,

초등학교 아이들이 부르던 우리나라꽃이라는 노래다. 요즘은 무궁화에 대한 사랑이 식었는지 그런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별로 발견할 수 없다.

1975년도에 나는 전국무궁화심기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맡아 이 나라 곳곳에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 적이 있다.

일제시대 이전만 해도 어디를 가나 무궁화가 만발했다고 들었읍니다. 그러나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무궁화 퇴치 운동을 벌인 바람에 지금은 말로만 나라꽃이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기회에 애국심도 고취할 겸, 전국 곳곳에 무궁화 심기 캠페인을 펼쳐 볼가 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나의 이런 뜻을 얘기한 사람은 반달 할아버지로 유명한 동요 반달의 작곡자 윤극영 선생 이었다. 윤 선생은 대번에 기특한 일이라면서 찬성하고 격려해 주었다. 윤 선생이 지도위원을 맡아주셨다.

이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무궁화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나는 큰 실망을 맛보았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무궁화를 우리 國花라고 했다. 그러나 태극기와는 달리 무궁화가 나라의 상징물인 국화로 올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몇몇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따졌다.

“”아니, 사람 탄압하는 법은 하루에도 몇 건씩 뚝딱뚝딱 잘만 만들어 치우면서 무궁화를 우리의 국화로 규정하는 법은 왜 안 만들고 방치하는 거냐

그러나 돌아논 반응은 시큰둥했다. 현재 우리가 중요한 의식 때마다 부르는 애국가도 국가 상징물로 법에 규정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까짓것, 온 국민이 나라꽃이라도 여기고 있으니 그건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다.

나는 무궁화 심기 운동의 실천 계획을 세워나갔다. 무엇보다 당시에만 해도 무궁화를 구경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무궁화를 그리라 하면 장미를 그려놓거나 동백이나 나팔꽃 모양으로 그려놓는 모습을 몇 차례 목격했기 때문에, 우리의 무궁화 심기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여겨오던 터였다.

우선 이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해 나가자면 대중적인 인지도가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연예인 쪽에 협조를 요청했다. 처음엔 좀 떨떠름해 하더니 나중에는 애국적인 열정에서 사심없이 전개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여러사람이 동참의 뜻을 밝혀왔다. 배상룡, 송해, 심철호, 한주열 등의 코미디언들을 비롯한 많은 연예인들이 혼쾌히 협조하갰다고 나섰다.

이제는 실제로 묘목을 확보하고 꽃을 심는 등 실천에 옮길 일꾼둘이 필요했다. 나는 문무회, 안일력 등 협객 사회의 원로들이 모두 나설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2백만 그루 심기 운동을 벌인다.”

목표는 그렇게 기세좋게 정했으나 모든일이 수월하게 풀려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우선 묘목을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당시에 차령산 줄기에서 묘목사업을 하고있던 具아무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사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동참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무궁화가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곳이 초등학교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라꽃을 가까이 보고 무궁화에 대한 사랑을 키우면서 자라야 애국하는 사람으로 성정헐 수 잇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교정에 무궁화를 좀 심으러 왔읍니다.”

우리는 전국의 초등학교를 돌면서 취지를 설명하고 심을 자리를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교장이나 교사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니까 너도나도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아이고 꽃 모양도 보기 좋은게 아니고 ……”

잘 가꿔 놓으면 무궁화만큼 아름다운 꽃도 없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꽃이 아닙니까.”

진딧물이 심해서 아이들한테 눈병을 옮긴다는 애기도 들은 것 같고 하여튼 우리 학교에는 안 심었으면 좋겠읍니다.”

이런 반응에 부딪치면 한심하기도 하고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들에게 큰소리 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건 일본놈들이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퍼트린 유언비어입니다. 그들은 무궁화에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퍼트려서 이 땅에 무궁화의 씨를 말리려고 유도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궁화를 한민족이 겨례의 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온 국토에 무궁화가 만발하면 그 꽃을 바라보는 식민지 백성들이 민족의식을 가지고 제국주의자들에게 반감을 가질 게 아니겠읍니까. 그리고 어느식물에나 그정도의 벌레는 꼬이게 마련입니다. 일 년에 소독 한 두번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잘 크고 꽃도 잘 피웁니다. 진딧물이 유난히 많다 어떻다 운운하는 것도 다 일본놈들이 무궁화를 지저분한 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퍼트린 나쁜 소문입니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서 끈질기게 설득을 했다.

그럼 한번 심어 보세요.”

마지못해 그렇게 허럭을 하면 우리는 정성스럽게 묘목을 파종했는데, 기막힌 일은 얼마 뒤에 다시 가보면 언제 그랬는지 다 뽑아내 버리고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한 줄기로 딱 맞아 떨어진다면야 어떤 일이든 쉽지 않은 일이 없겠지. 이 정도의 어려움은 각오를 했잖느냐’”

나는 회원들을 설득했지만 내심으로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우리가 무궁화를 심는 곳은 학교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순국 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동작동 국립묘지에 대대적인 파종을 시작했고, 전국의 고속도로 주변과 애국지사들의 묘소들, 그리고 산 속의 사찰들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심어나갔다.

내가 무궁화를 심으러 가서 가장 심각한 논쟁을 벌렸던 곳은 창경원(현재 는 창경궁)이었다. 창경원은 당시 동물원과 식물원으로서, 봄이면 너도나도 벗꽃놀이를 즐기고 평소에는 동물이나 식물을 구경하던 유원지 역핳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곳도 엄연히 조선시대의 궁궐인데, 일제가 식민지 백성들의 옛 궁궐을 동물원으로 전락 시키기 위해 조성한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해방을 맞이하고도 보습이 바뀌지 않은채 벗꽃이 만발한 동식물원으로 남아 있엇던 것이다.

창경원에 무궁화를 심으러 왔읍니다.”

동물원 책임자를 만나 그렇게 말했더니 그건 동물 책임자의 권한이 아니라 식물원 원장의 권한이라 했다. 하는 수 없이 식물원 원장을 만났다.

아무데나, 그리고 아무 꽃이나 막 심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아무 꽃이나가 아니고 그리고 여기는 아무데나가 아닙니다.”

나도 물러서지 않고 따지고 들었다. 둘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보시다시피 나무를 심을 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지 않습니까?”

심을 자리를 만들어야지요 다른 나무들은 원래 다 그 자리를 타고난 겁니까?”

심어놔 봤자, 소독도 해야 하고…… 무궁화가 조경 측면에서 볼때 가치가 있느냐 하는 점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여기 경내에만 해도 벗꽃이 지천으로 깔렸고, 또 식뭉원 안에는 세계의 식물들이 다 있잖소 이것들은 소독도 안하고 물도 안 주고 가만 놔둬도 저절로 자란단 말이요? 창경원 이거 누가 지었어요? 우리 조상들의 宮이 아닙니까 여기다 외국 식물들은 다 갖다 심으면서 왜 나라꽃을 못 심겠다는 거요? 왜 선조들의 궁궐 자리에 진그러운 뱀이나 사자우리를 지어놓고, 또 벗꽃으로 포위를 해버렸는지 알아요? 우리 민족의 뿌리를 비웃기 위해서 일본놈들이 한 짓 아니오!”

왜 그렇게만 생각해요?”

역사적 사실이 그런데 그걸 부정하려고 하는 거요?”

벗꽃의 원산지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실도 몰라요?”

그쯤은 나도 알아요, 본래 한라산과 지리산이 벗꽃의 원산지라고 합디다. 그렇지만 현재는 일본놈들이 사쿠라라고 해서 국화로 섬기고 있는 꽃 아니요. 그리고 일본놈들이 여기다가 벗꽃을 마구 심을 적에 지리산이나 한라산이 원산지니까 한국의 토종꽃을 심어주자, 그런 취지로 이 벗꽃숲을 조성한 거요? 한국의 옛 궁궐을 우리나라 사쿠라로 울타리 둘러버리자, 이런 의도로 심은 것 아니오 그런데, 그 일본놈들 꽃은 물주고 가지치고 하면서 돌보고 가꾸면서 나라꽃인 무궁화는 못 심겠다는 거요.”

무국화 심기 운동을 펼치면서 나름으로 그 운동의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나도 어지간히 무궁화에 대한 공부를 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식물원 원장에게 한 치도 지지 않으려 했고, 그쪽으로서도 명색 식물학자인 자신이 낮도깨비처럼 쳐들어온 문외한 에게 고분고분 물러설 수 없다는 기세었다.

내가 알고 있기에 일제는 나라꽃으로 받들고 있던 무궁화와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한다는 소나무, 이 둘이 식민지 백성들의 저헝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징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궁화가 보이기만 하면 절단하고 그 자리에 탱자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다는 애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진 시골집들 대부분은 예전에는 전부 무궁화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그런작업을 한 게 아니라, 무궁화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퍼뜨려서 한국인들의 손으로 그걸 뽑아내게 했던 것이니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무궁화가 나라꽃인 것은 나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로는 가꾸는 데에 문제가 많아요 개량을 해서 품질을 바꿔야 합니다.”

원장이 한 발 물러섰다.

개량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본래 우리 조상들이 보고 우러렀던 예전의 원형은 또 그대로 이어내려야 하는 법이요. 근본을 바꾸는 것은 안됩니다. 이게 우리의 얼이고 혼이고 역사고 정기 아닙니까. 도대체 해방된 지가 언젠데 아직 일제로 부터 정신적인 독립을 못하고 있어서야 되겠소.”

이거 침 믹무가네식이로구먼. 몇 구루 심으시오.”

그 원장으로서도 참 난감한 대목이 있었을 것이다. 식물에 관한 한 자신이 박사인데, 그 방면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 단지 무궁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만 들이대면서 자신을 매국노 취급으로 몰아붙여 댔으니 어이가 없기도 햇을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의 나는 애국이라는 大義와 나라꽃을 심자는 데에 아무도 막아서는 안 된다, 名分이 확실한 일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거나 주춤거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으리는 창경원에 수백 그루의 무궁화를 심었다 . 그러나 우거진 벗나무 숲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그곳이 苑이 아닌 宮으로 바뀌어서 창경궁昌慶宮으로 변모해 있다. 이제는 뱀도 사자 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벗꽃도 모두 뽑혀나갔다.

그것 보라구 내가 옳았지!

창경궁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그렇게 쾌재를 부른다. 물론 창경궁이 무궁화 동산으로 바뀌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거야 고증에 의해서 옛 궁궐을 복원했을 터이니 더 이상 시비할 생각은 없다.

우리의 무궁화 심기 운동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에서도 범 국민무궁화심기운동 본부의 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공무원으로 하여금 무궁화 심기 운동에 동참하게 했다. 우리는 5년동안 무려 1백만 그루의 무궁화를 심는 실적을 올렸다. 물론 일부에서는 금방 심어놓은 무긍화 묘목을 다시뽑아버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도 들어가 무궁화를 심었고, 4월 초파일이면 절에 들어가 대대적인 무궁화 파종작업을 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 자리에 무궁화가 잘 자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운동 덕분으로 지금은 어디를 가나 무궁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가 있게 되었다. 자칫 씨가 말라 버렸을 지도 모르는 나라꽃을 우리의 국토에다 그만큼이라도 조성했기에 이만큼이라도 퍼져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 일로 나는 본의 아니게 무궁화 전도시가 되고 말았다. 대학이나 사회단체로부터 강연 요청이 쇄도하였다. 나는 나를 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가서 무궁화 심기 운동의 핑요성은 역설하였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숨을 거둘 때 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위대한 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말이다.

나는 애국을 입에 달고 다니다. 따라서 나 같으면 사과나무가 아니라 무궁화를 심겠다고 역설했다. 사고나무에서는 사과라는 열매를 수확한다 그렇다면 무궁화에서는 무엇을 수확할 까?

사과보다 더 값진것을 수확한다. 민족 정신과 겨레위 얼을 따는 것이다. 우리 민족처럼 외침을 당해온 민족도 드믈 것이다.

역사적으로만 그런게 아니다. 앞으로도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우리는 주변의 열강국들의 틈새에서 민족자존을 지켜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겨레를 한 곳으로 뭉치게 민들어줄 상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나라꽃 무궁화다. 무궁화는 그저 한 송이 꽃이 아닌 것이다.

나의 이러한 역설에 모두들 공감하는 모습니었다.

나는 벗꽃이 우리 토종 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러나 해마다 봅철이면 진해에서 벗꽃놀이가 행해지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곳은 해군의 심장부다. 국토방위의 전진기지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해상활동이 활발했을 때 우리의 국운도 융성했다. 신라 때의 장보고 시절에는 일본과 중국의 상선商船들을 우리가 통제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활약은 또 어떤가.

그런 해군의 심장부인 진해 기지에서 더구나 우리를 침탈한 적이 있는 왜인倭人들의 상징인 벗꽃을 무성하게 심어놓고 축제를 벌인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 하필 벗꽃놀이인가 말이다.

나는 육군의 심장부인 계룡대에다 무궁화 동산을 조성할 것을 제의한다. 나라사랑의 정신이 펄펄 살아 있는 군인들로 하여금 꽃을 가꾸게 하면 누구보다 예쁘고 밝고 건강한 무궁화를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무궁화가 가장 활짝 만개한 시기를 잡아서 전국의 어린아이들을 불러다 무궁화 축제라도 벌려보라. 애국가를 수백 번 부르게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있는 나라사랑의 현장 교육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궁화 자랑을 한 가지만 더 하겠다.

무궁화는 그 피고 지는 모습이 우리 민족성을 빼닮았다. 무궁화가 피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은 거의 없다. 이른 새벽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랬다가 아침이면 활짝 핀 꽃봉오리를 내보인다. 이슬이 아롱다롱 맺혀있는 그 모습을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꽃이 질 때에도 천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벗꽃처럼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떨어져 날리지도 않는다. 무궁화는 그 생명이 다할 때에도 꽃잎이 돌돌 말려서 다소곳이 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최후의 모습인가!

당신은 무궁화를 너무 편애한 나머지 그 우수성만을 너무 과장해서 선전해 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아렇게 대답하겠다

나라 사랑이 너무 지나쳐서 나쁠 일은 없젆소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