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18, 2011

화첩기행 이난영의 목포는 울지 않는다.


예의 길을 가다 김병종의 화첩기행

이난영과 목포

이난영의 목포는 울지 않는다.

이난영 1916~1965

기녀린 외모만큼이나 애절한 음색의 이난영.

유달산 비칼에서 태어나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설음을

남도창 같은 恨의 노래 〈목포의 눈물〉에 실었다.

부르고 부르다보면 어느새 마알간 슬픔의 굽이를

돌아나와 힘이 되어주던 노래.

한시대의 국민적 연가였던 그 목포의 눈물은

바로 이난영의 눈물이기도 했디.

이난영의 목포는 울지 않는다.

이난영과 목포

어렸을 적 이웃에 재미있는 치고의사 한 분이 살았다. 그는 한길 쪽으로 남 유리문을 열어 놓고 손님이 없을 때면 늘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다. 18번이 〈목포의 눈물〉이었는데 환자가 나처럼 만만한 어린애일 경우에는 치료하는중에도 노랫가락을 놓지 않았다. 이 치과의시에게 〈목포의 눈물〉은 일종의 勞動謠인 셈이었다.

사아고옹에에 배엣노오래ㆍㆍㆍ한껏 늘여빼어 흥얼거리다가 거짓말처럼 입 안 가득 화안해지는 소독약을 칙 뿌려주면서 사암학도오 파도깊이 스며어어 드느은데에ㆍㆍㆍ노래가 일인지 일이 노랜지 늘 건들건들 유쾌하였다.

소독약이 입 안 가득 잠겨오며 화안 해질 때면 나는 까닭 모를 아련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 그 몽롱한 슬픔이 달콤쌀쌀한 소독약 때문이었는지, 소년기의 정신적 離乳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치과의사의 노랫가락 때문아었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지만, 어쨋든 나는 그 치과에 딘면서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목포의 눈물〉을 저절로 뗄 수 있었다.

불멸의 국민가요 〈목포의 눈물〉

가물가물 멀어지는 삼학도 뱃길처럼 언제 들어도 아련하게 슬픈 노래 그러나 부르다보면 어느새 슬픔의 굽이를 돌아나와 오히려 민초들에게 싦의 뒷심이 되어주는 노래, 그래서 가요이면서도 南道唱 같은 느낌을 주는 겨례의노래.

사고의 뱃노래도 없이 그 목표로 떠난다. 강경, 송정리, 영산포의 곡창을 흝으며 한나절을 힘겹게 달리던 호남선 열차는 마지막 긴 숨을 토하며 목포땅에 나를 내려 놓는다.일제때 목조 가옥들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목표는 오랫동안 어둠도 골라 다녀야 할 만큼 적막한 땅이었다. 이 古都는 오랫동안 옛 영화가 무색하게 항구도시다운 떠들석함과 활기를 찾을 수 없이 노쇠한 짐승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급속하게 활기를 되찾아 가고있어 눈물을 닦고 환회의 노래라도 불러야 할 것처럼 보인다. 원래 목포는 구한말과 일제에 걸처 우리나라 최대의 문물집산지, 일제부터 깨인 곳이어서 현대 의술과 이태리풍 벽난로와 빠라모드와 서양신사들로 늘 왁자하였고, 방이면 우유밫 가로등인 영란등이 일시에 거리를 밝혀 도쿄와 상하이의 중심지 못지않았다는 곳이다.

그 목포는 그리움이 파도 깊이 스며드는 항구도시이자 예술의 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포의 눈물〉의 고장이다. 이 〈목포의 눈물〉은 목포의 노래이면서 목포사람들만의 노래가 아니다.〈눈물젖은 두만강〉이 함경도만의 노래가 아닌 것처럼,〈목포의 눈물〉이 목포사람들만의 노래는 아니지만〈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만은 틀림없는 목포사람이다. 그리고〈목포의 눈물〉은 바로 이난영의 눈물이기도 하였다.

가녀린 외모만큼이나 애절한 음색의 이난영은 1916년 이 목포의 陽洞 3바윗동 비탈지지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집은 오막살이였지만 문 열면 바윗등에 능소화, 백일홍이 철철이 피어 어린 소녀의 가슴을 화사하게 물들여 주었다. 이난영 노래의 애잔한 서정성은 어쩌면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가슴을 물들인 바윗동의 그 고운 꽃들로부터 심어졌는지도 모른다.

목포는 호남선 열차가 싣고온 쌀을 부려놓으면 고베神戶로 실어가고 했던 거점이어서 부두 노동자들이 많았다. 난영의 아바지는 부두 노무자였다.유달산을 사이에두고 산 이래서는 일본과 조선의 부자들이 살았으며 산비탈에는 부두 노무자들이 많이 살았다.

부친이 선창에 나가 날품팔이를 해야만 했던 어려운 형편이어서 그녀는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얼기설기 다니다 말다 하면서 학교공부를 끝낸다. 그러고 보면 노래란 애초부터 가르치거나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린 소녀 이난영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삶은 처음부터 고달프고 서글펐다.〈목포의 눈물〉의 그 신비한 슬픔의 빛은 바로 그녀 자신의 파란의 생애에서 곪삭아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어머니는 그녀가 열 살 때 식모살이를 떠나버리고 어린 소녀의 몸으로 그녀는 목포의 조선면화공장에 나가 솜타는 일을 해야 했다. 솜 공장에서 일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니직이 唱歌를 부르곤 했다.

이 솜 공장 소녀 이난영은 어느날 제주로 식모살이간 어머니를 찾아 목포에서 배를 탄다. 그리고 엄마가 식모로 있던 그 일본인 집에서 난영은 허드레일을 도우며 혼자 애잔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목소리를 알아본 집주인의 도움으로 1932년 그녀 나이 열여섯에 미침네 삼천리 가극단의 무대가수가 될 수 있었고, 이 삼천리 가극단을 따라 다시 오사카大坂까지 가게 되어 거기서 천신만고의 우여곡절 끝에 OK 레코드 사장이었던 李哲을 만나게 된다. 연이어 당대 일급의 작곡가 손목인과 연결되고 처음으로〈불사조〉라는 노래를 취입하기에 이른다. 본명 李玉禮 아닌 李蘭影으로, 가수의 길은 이렇게 우연찮게 열리게 된다.

이즈음 조선일보사에서는 한 가지 독특한 기흭을 하였는데, 일제의 탄압속에 위협받아 흐트러진 민족성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OK 레코드와 손잡고 전국 6대 도시를 상대로 향토가사를 현상모집한 것이다. 이때 목포 출신 文一石이라는 문학청년이 〈목포의 노래〉를 출품하여 전국 3천여 통의 응모자중 1등으로 당선되고, 그의 〈목포의 노래〉를 이철은 〈목포의 눈물〉로 바꾸워 역시 목포 출신 이난영의 목소리로 취입시킨다. 작곡은 〈타향살이〉의 손목인, 이때만 해도 신인가수 이난영이나 〈목포의 눈물〉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이난영의 비음섞인 애절한 엘레지 가락에 실려나오면서 전국이 스믈스믈하기 시작했다.

《목포의 눈물》이 이난영의 눈물에서 민족의 눈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종로거리의 레코드가게 축음기들은 큰길 쪽을 향해 밤낮없이 《목포의 ㆍㆍㆍ》를 틀어댔고, 음반가게마다 《목포의ㆍㆍㆍ》를 사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눈 물불길이 되어 삼천리 반도에 타올랐다. 그리하여 그 나이 18세 때 이난영은 이미 노래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OK 그랜드 쇼단과 함께 전국 200여개의 크고 작은 상설극장은 물론 멀리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순회공현을 다녀야 했다. 고복수의 《타향살이》 와 더불어 《목포의 눈물》은 나라 빼앗긴 동표들이 모국어로 부르는 애절한 국민적 연가였다. 이후 쏟아져 나온 목포 관련

가요만 총 128.

이제 한 시대 국민적 연인이었던 이난영은 가고 《목포의 눈물》은 삼학도를 건너다보며 유달산 중턱에 노래비로 남아있다. 유달산은 목포의 어제와 오늘을 고스란히 지켜본 어버이 같은 산이다. 광주에 무등산이 있듯 목포에는 유달산이 있다.

르네상스식 서양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그러나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산이기도 한 목포문화원 장방형 축대를 돌아 기상대옆 돌계단을 하니씩 오른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30~40년대의 일본가옥을 찍기 위해 일본에서 사진작가들이 찾아올 만큼 이 일대는 옛 그림자를 많이 지니고 있다

청미장이나 유달장같은 보료 깔린 韓室요정에서 기생들이 옥색 물들인 옷 입고 들어와 창과 가요를 부르던 모습은 이제 간곳없다. 어쩌면 이난영의 그 특이한 엘레지가락도 바로 그런 이 유달산 아래 요정의 노래문화와 맥이 닿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골색시 같은 백일홍의 군락지어 피어있는 돌계단 굽이굽이 돌아 유달산 중턱 바위에 목포시내를 바라보며 노래비는 서 있다. 그 노래비에는 이렇게 새겨있다.

살아 있는 보석은 눈물입니다. 남쪽 하늘 아래 꿈과 사랑의 열매를 여기 싣습니다.”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그 주변의 이야기들

노래에서의 성공과는 달리 이난영은 굴곡과 파란의 삶을 살았다. 625와 함께 남편 김해송〈작곡가〉이 납북되면서 노래의 여왕은 자녀의 양육비를 위해 한때 악극단까지 서기도 했다. 딸들을 김시스터즈로, 아들들은 김보이스로 만들어 라스베이거스까지 진출시킨 그녀는 1942년《목포는 항구다》를 끝으로 가수대열에서 물러나 있다가 1965 4월 어느날 빈집에서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자살설위경련에 의한 급사설등이 꼬리를 물었으나 사인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목포시 대안동 17번지 한자리에서 50년 동안 목포 악기점을 운영 해오던 박오주(74)는 《목포의 눈물》이 뜨면서이난영 LP판을 엄청나게 팔아 기반을 잡았던 사람, 늘 난영에게 빚진 느낌을 지니고 있던 그는 마침내 사재를 털고 시의 도움을 받아 1969년 유달산에 노래비를 세우게 된다.

, 돈이사 누가 안 아깝것소마는 우리가 원체 이난영 그양반을 사랑했응깨ㆍㆍㆍ: 박오주씨의 부인 말이다. 목포사람들이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록 유서 깊은 삼학도 물길은 매립되어 가로막혀 있지만, 목포 앞바다에 점점이 정겹게 떠 있는 섬들을 바라보며 고향에 돌아온 난영의 혼은 노래비로 인해 가슴시리도록 위로받았을 것이다. 목포에서는 매년6월 무렵 난영 가요제가 열리고 있는데 금년이 17회이다.

《목포의 눈물》가사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는 다음과 같은데, 일제 때에는 2절 가사의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ㆍㆍㆍ를 문제삼아 레코드의 판매를 금지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 19세의 작곡가 손목인을 수감 시키기도 했다. 가사 중 원한’, ‘노적봉등을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반일등의 정서와 꿰어 맞추었던 것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사랑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은 영산강을 아느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이타 옛상처가 새로워 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에 사랑

왜 하필 목포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은 남도 의 엘러지 가락이 판소리 아닌 대중가요로 절묘하게 형상화된 경우이다. 호남선 종착역인 목포는 남도 한의 종결지아지도 하다. 특히 수탈과 억압으로 점철된 일제 때의 온갖 애환이 서린 도시이자 현대에 와서는 정치적 시련과 좌절도 많았던 땅이었다. 목포가 남도의 종착항구라는 점과 함께 독특한 그곳만의 의 정서가 풍류와 예의기질과 맞물려 눈물이 그토록 긴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광주의 눈물이나 부산의 눈물아닌 목포의 눈물이 제 빛과 색갈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발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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