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2, 2011

ㅇ인생제4장 천직 자르기의 명인

인생 제 4장 천직 자르기의 명인

인생을 요리하다

한인타운 노시스시노시쇼고 창업주

한인타운서 스시의 전통 통했다

최고의 맛을 위해 자르고 화합 해치는 직원 자르고

에 순응하는 섭리 28년째 변함없는 맛

칼은 빠르고 순했다. 날것의 살결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서 베어나갔다. 자르는 것은 떼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결에 순응하는 섭리차럼 보였다. 순한 칼질은 주인이 완성했다. 노시 쇼고(73) 씨는 LA한인타운 베벌리 불러버드와 호바트에 있는 정통일식점 노사 스시의 창업주다. 1983년 개업한 이래 28년째 변함없는 맛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칼질은 그의 식당보다 꼭 2배 더 오래 묵었다.17살 때부터 56년간 칼을 길들였다. 그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졸업이다. 하지만 자르는 일로는 명인이다. 노시씨는 자르는 것은 살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생선을 자르듯 집념을 잘라서 맛을 살리고, 식구들을 살리고, 터전을 살렸다. 그가 한인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처음이다. 영어가 익숙지 않은 그와 일본어를 모르는 기자 사이에서 인턴기자가 통역을 했다.

사시미 刺身라는 단어에는 배신을 협오한 사무리이 정신과 주군을 배려하는 정성이 담겨있다. 사시미가 처음등장한 때는 700여 년 전인 14세기 초반 일본의 전국시대로 불리는 무로마치 시대. 사시미를 직역하면 몸을 찌르다라는 뜻이다. 회에는 자르다(키루)가 더 어울리지만 당시에는 이말이 금기시됐다. ‘상대방의 등을 베다’ ‘배신하다라는 의미의 우라가루를 연상시키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찌르다 꽂다라는 의미의 스시를 쓰게됐다.

또 다른 유래는 생선의 지느러미나 아가미에 작은 깃발을 꽂아생선의 종류를 구분한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역시 무로마치 시대 때 오사카의 한 장군이 귀한 손님을 맞아 요리사에게 생선회를 주문했다. 맛에 반한 손님이 무슨 생선인지 물엇지만 장군은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음식을 준비했던 요리사는 궁리끝에 작은 깃발에 생선의 이름을 적어 생선회의 지느러미 혹은 아가미에 꽂아 상에 올렸다.

이때부터 생선회는 몸을 찌르다는 의미의 사시미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자르다.

자르는 업의 시작은 단순했다. 오사카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잡은 생선을 어시장에 배달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과였다. 어시장에서 퍼덕거리는 생선을 맛으로 바꾸는 칼질만 보면 눈이 반짝 빛났다.

-왜 요리사가 되려했나.

보고배운게 생선이다. 이왕 생선을 만질 거라면 창조적이고, 예쁘게 칼질하는 요리가 낫겠다 싶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진학을 포기했다.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다른선택의 가능성을 무 자르듯 석둑잘라냈다.

동네 밥집에 취직했다. 3년간 설거지만 하고, 생선회를 올려놓는 무채를 썰기만 했다. 마침내 생선을 만질 수 있게 되자 본격적인 배움의 길을 떠났다. 10년간 오사카 전역 10개 유명 식당을 돌며 일을 익혔다. 한 곳에서 1년 씩 일했다. 그 식당의 사계절 요리를 익히기 위해서다.

어떻게 배웠나.

요리학교가 없던 때에 요리사들도 후배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로지 몸으로 배워야 했다. 어깨너머로 보고 냄새를 맡고, 맛을 봐서 흉내를 내는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몰래 먹으면서 익혔다.그러다 들켜 혼나기도 했다.어떻게 하나, 배워야 하는데.”

13년간 시장통 밥집부터 최고급 정통요리점까지 오사카의 맛을 섭렵했다. 자르는 데 익숙해지자 나이서른아었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삼십 해을 보냈다. 큰 땅에 가고 싶었다. 1968년 미국행 비행기를 탓다.

한인타운에서 자르다.

LA에 와서도 14년간 남 밑에서 일했다. 때를 참고 가다렸다.

그는 내 가게를 열면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고 당시 비장했던 각오를 떠올렸다 미국온지 1년만에 갑자기 쓰러졌던 기억 때문이다. 대부분의 스시맨들처럼 그도 술을 좋아했다. 건강생각않고 마시다가 쓰러졌다. 고혈압 이었다 정신이 번쩍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식당을 준비했다. ‘노시는 축복을 뜻하기도 한다..

-왜 한인타운을 선택했나.

시실 내 식당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인들이 키워왔다. 식당자리는 골프샵하던 리상(이씨)’이 추천해줬다. 한국인들도 회를 좋아한다면서 타운에 가게를 열면 성공한다고 했다. 애초부터 우리 가게는 한국인들을 위한 일식집이었다.”

좌석은 32개 직원없이 혼자 시작했다. 잘익은 솜씨는 불과 한두 달 만에 입소문을 탔다. 아침에 문 열기 전 부터 손님들이 줄서 기다렸고, 저녁끼지 줄이 끊이질 않았다. 90% 한인 들이다.”

-짧은 기간에 성공했다.

한인들 덕이다. 줄 서서 기다려도 한인들은 맛에 행복했다. 일손이 부족하면 한인 손님들이 도왔다고 한다.”

-한국어를 못하지 않나.

못한다.그래서 한국어 발음을 일본어로 적어 메뉴를 외웠다.(아직도 새우는 또렸이 말했다.) 가징먼저 배운 한국말은 기다리세요였다. 한인들은 항상 하이쿠, 하이쿠(빨리빨리)’ 재촉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스시 단골의 60%는 한인이다. 노시씨는 나머지 40%타인종이라고 불렀다. 일본인도 그에겐 타인종이다. 그는 한인타운에서 힌인들을 위해 잘라왔다.

#넉넉히 자르다

그의 칼은 넉넉하다. 자르는데 째째하지않다. 다른 일식점보다 훨씬 두툼하게 회를 썬다. 누가 썰어도 반드시 그두께가 나오도록 스시맨들을 가르쳤다. 절대 포기못하는 원칙이라고 했다. 그는 후한 인심은 성공으로 돌아온다 회 한점에도 철학을 담는다.

-자르는데 명수다. 직원도 많이 해고했나.

수도 없다. 나는 화합이 첫 번째다.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불화하면 그만 두게 했다. 어떤 비지니스든 마찬가지아닌가.”

-요리와 인생은 어떻게 닮았나.

시작할 때 마음가짐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처음 칼을 잡았을 때 감촉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무 기뻐서 몇시간씩 썰고 베고 했다. 한결같은 마음이 한결같은 맛을 만든다.”

맛은 한인들에게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28년 전 아버지 손을 잡고 찾아온 한인 꼬마가 장성해 품에 자기 아들을 안고, 아버지를 모시고 가게를 찾는다. 노시씨는 그 한인 3대를 보면 가슴 뻐근한 보람을 느낀다.

자난 12월 그는 평생 품었던 칼을 내려놓고 은퇴했다. 가게는 27년간 주방을 맡은 요리장 오가타 슈이치(65)씨와 메니저 이마다 켄시(39)씨에게 지분을 반반씩 양도했다.

-왜 자식에게 식당을 맡기지 않았나.

외동딸이 있지만 요리를 모르기 때문에 맡길 수 없다.음식을 모르는 2세가 물려받은 식당은 망하기 십상이다. 두사람은 식당의 전통을 이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인터뷰를 마치겠다고 하자 그가 꼭 한마디를 마지막에 넣어달라고 했다.

그대로 옮겨 적는다.

노시와 호또쓰루(노시는 은퇴해서 이제 ㆍ멍하니 있다.) 한인들 덕에 한 번도 어려운 때 없이 28년간 살았다. 행복했고, 감사했다.”

글ㆍ정구현 기자 통역ㆍ 조원희 가자

koohyun@kor3adaily.com

노시스시는 1983년 베벌리 불러바드와 세라노 코너에 30석 규모의 작은 일식점으로 문을 얼었다. 7년 뒤 120석 규모의 지금 자리로 확자 이전 했다. 대개 일식당은 점심과 저녘 중간에 휴정하지만 노시스시는 쉬지 않는다. 매주 월요일만 문을 닫는다. 밥값은 현금만 받는다. 생선과 음식재료를 현금 거래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질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 손님에게서 받은 현금을 맛으로 되돌려주는 노시씨의 경영철학이다. 28년간 이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굳이 타협한 것이 있다면 지난해 11월 현금이 없는 손님을 위해 기게 내부에 현금자동지급기(ATM)를 들여놓은 정도다. 매일 300~400명의 손님에게 150파운드 정도의 회를 판다.

명인의 귀뜸

일식맛의 척도는

고등어 회

한식도 그렇듯 일식도 흔한 음식에서 식당의 실력이 좌우된다. 노시씨에 따르면 일식 회의 척도는 고등어 회다. 일식당에서는 오늘들여온 고등어는 그날 팔지 않는다. 반드시 숙성시켜야 한다. 소금과 식초로 감을 해 저온숙성시킨다. 시거나 짜면 안 되고, 비린내가 나도 실격이다. 노시씨는 고등어회 한점이면 그 식당이 얼마나 요리에 정성을 들이고 준비하는 지 알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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