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22, 2011

지리산 첫잠 깨우는 /동편제'의 탯자리

지리산 첫잠을 깨우는 동편제의 탯자리

강도근과 남원

김병종 교수의 畵帖紀行 의 길을 가다

강도근 1918~96

동편제의 탯자리, 서권기書卷氣 그윽한 문향 남원

지리산을 닮은 웅장한 우조羽調의 동편제 소리맥을

고집스레 지켜온 강도근은 돈과 명예를 좇거나 중앙무대에

나서지 않고 평생 야인으로 남원에서만 지냈다.

:나야 원래 들에서 났응깨ㆍㆍㆍ라며 농부임을 자처했던 그

내 소리 심줄이 지리산에 있는디 씨잘때기없이

어딜 돌아다니겠느냐던 그는 말없는 스승 지리산이

내어준 소리를 지리산에 돌려주고 지리산 품으로 돌아갔다.

빗줄기 비슥이 수묵水墨처럼 번지는 날, 나는 남원으로 간다. 차창 저편으로 빠르게 들과 산이 지나간다. 뒷자리에서 오십줄 넘어뵈는 두 아낙의 감칠 맛 나는 사투리가 들려온다. 곡조만 넣으면 그대로 남도 판소리다.

아이고 성님, 이내 속 썩으며 살아온 것 글로 엮으면 소설이 몇 권이오.” “말해 뭐한당가. 오장육부 문드러져도 언놈이 눈질 한번 주었던가.”

과수댁인 듯싶은 두 여인의 박절한 개인사는 주거니 받거니 차가 五里亭고개이르도록 계속된다. 멀리 춘향이 경황중에 버선발로 떠나 보냈다는 버선밭이 보인다.

여인들의 대화에 오버랩되면서 문득 환청처럼 임방울 1904~61의 애원세성이 휘휘 감겨 오는 것 같았다.

쑥대머리 귀신향용/적막 옥방 찬 자리/생각나니 임뿐이라/보고지고 보고지고/한양낭군 보고지고/오리정 정별후로/일장 서를 못봤네ㆍㆍㆍ

-〈춘향가〉중 〈쑥대머리〉의 일부

이 애절한 연인 사이의 바가悲歌는 일제때 SP 음반으로 나와 무려 백만장이 팔렸다 하니 그 시절 국민가國民歌요 민족의 노래였을 터이다. 우리서민들은 포악한 남원부사 변학도를 일제나 官 같은 수탈기관으로 옥방의 춘향을 힘없고 가련한 민중 자신들의 삶으로 빗대어 받아들였음직하다.

그 동편제의 탯자리 남원.

지리산 안자락으로 슬며시 꺾어들며 낫게 엎드려 흡사 토장그릇 같은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곳. 한번 토해진 소리는 3년을 흩어지지 않는대서 동에서 서에서 소리꾼들이 모여들었다는 천혜의 땅이다. 지리산 자락따라 금지, 대강, 곡성을 한달음에 잇는 호남 제2의 질펀한 곡창이고, 그래서 수많은 소리 藝人들은 토반의 그늘아래 먹고사는 걱정없이 득음에만 몰두할 수있었을 터이다.

조선 8명창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던 가왕 송흥록 歌王 宋興祿, 조선 순조~철종 에서부터 김도근과 그의 제자 안숙선, 이난초에 이르기까지 실로 기라성 같은 이 나라 명창들이 이곳에서 득음하고 이곳에서 절창했다. 송광록, 유선준, 송만갑, 김정문, 이화중선, 박초월ㆍㆍㆍ엉기는 이름들을 손가락만으로는 헤아릴 수없다.

그 중에 강도근, 사람들은 그를 도편제왕이라는 별호로 불렀다. 동편제의 정통 우조羽調:강건,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남성적 찬조唱調를 일관되게 지켜낸 그의 소리는 쉰 듯아면서도 힘있고 윤기 있는 천구성이 특징이다. 남원에서 강문姜門은 국악의 종택宗宅, 대금산조 인간문화재 강백천 1898~1982이 간도근의 사촌형이고 판소리와 창극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강산홍은 가낵천의 딸이다. 가야금의 강정렬과 가야금산조의 강순영 등이 강도근과 인척간으로, 강도근은 어려서부터 가문의 이러한 음악적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 강도근 생전에 서양 친구 한 사람과 찾아간 적이 있다.마루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먼저 온 사내가 있었다.

아ㆍㆍㆍ해봐라.” 방안의 동남동녀 몇이 연습을 하다말고 건너다보는 중에 간도근은 치과의사처럼 소년의 입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봇쓰것소, 눈이 너무 순해빠져서ㆍㆍㆍ그러더니 문을 탁 닫고 들어가버렸다. 뜻밖에 목소리가 아닌 이었다. 연습이 끝나기를 기다려 어렵게 춘향가 한 소리를 청했다. 그는 잡것들! 시도 때도 없이ㆍㆍ구사령대며 마루로 나와 숨을 골랐다. 몇 번 헛기침 끝에 지리산을 마주하고 소리를 토했다. 그때 이미 칠십이 가까웠지만 용틀임하며 뿜어져나오는 상천은 듣기에도 숨가빴다. 소싯적 이후 지리산 손유폭포에서 사나운 물소리와 싸워 잡아먹히지 않고 터득했다는 바로 그통목이었다.

곁에서 서양 친구가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저렇게 사납고 공격적인 사랑노래는 생전처음이네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하긴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 아닌 하나도 이쁘지 않은 저런 쉰소리, 억센소리의 사랑노래는 우래가 없으리라ㆍㆍㆍ.

이제는 강도근도 가고 없다.

남원이 일찍부터 소리 문화의 요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들과 물이 풍부해 먹고살기에 별어려움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였을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배부르고 나면 풍류나 藝를 찾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물론 그곳이 사방을 향해 문을 연 깨인곳이라는 데서도 연유한다.

남원 가서 풍류자랑 말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을 터였다.

남원은 동으로 경남 함양, 남으로 전남 곡성, 구례, 서로 순창, 임실등으로 잇대어 있어 전라, 경상 문화가 겹쳐지면서 가야, 삼국 문화 이래 특유한 문화의 완충지역이 되어 왔던 것이다.

『택리지』는 이를 바옥한 토지를 거느린 덕으로 풀이한다

조선조 남녀 차별의 층층 九曲之中을 박차고 일어나 개혁적 문학세계를 열었던 三宜堂 마땅할 의 김씨 같은 깨인 여성 예술가가 나왔던 것도 이런 풍토에 기인되었을 터였다.

어쨌든 수많은 명창들과 시인, 묵객, 도공들이 배출되어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서권기書卷氣 그윽한 文鄕아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중 저 유명한 「만복사저포기」와 서거정, 김종직, 신흠, 정철 등의 시를 기리어 광한루에 모실만큼 이곳은 두루 藝의 기질로 충일한 땅이다.

두 민ㄱ간 고전의 발원초로서 남원의 『춘향전』과 『흥부전』을 낳게 했다는 사실로도 이러헌 기질은 입증된다. 지금도 국립민속국악원에 청하거나 명문장같은 유서깊은 한식점에 들르면 가야금 병창을 둘을 수 있고 많은 在野 소리꾼들이 있어 은근히 소리의 맥을 잊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원은 청각 못지 않게 미각 문화가 발달항 곳.

번성기 남원 요정의 한끼 식사에 반찬이 아흔일곱 가지가 나왔데서, 고속버스 타고 내려와 점심 한끼만 하고 올라가도 차비가 빠진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였다. 남원 음식 중에는 새집의 추어탕을 빼놓지 못한다. ‘새집 할머니는 음식을 조리하는 손맛으로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들을 소리 소문 없이 도와온 자선가로도 유명하다.

그이는 일일이 음식상을 돌아보며 음식의 간은 물론 사람 안부까지 챙겨 근친近親의 집에 들르는 푸근한 느낌이 들곤 한다. ‘새집의 별미를 들거나 명문장의 상을 물리고 나면 조산사람들이 만든 묵란墨蘭, 풍죽風竹의 사군자 부채를 보치며 요천강을 따라 걸어볼 일이다. 반짝이는 물빛을 보면 해가 기우뚱 서쪽으로 몲겨질 때쯤 곡성입구에 닿게 될 것이다.

요천강 물굽이가 지지부진할 때면 歌王 송흥록이 벼락같이 소리를 해대고 그 바람에 놀란 물줄기가 곡성까지 한달음에 흐르곤 한다던가. 새벽이면 지리산 첫잠을 깨우는 강도근의 우람한 통성에 사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는 곳.

일상에 지처 사는 일이 시들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열차에 몸을 싣고 소리여행을 떠나볼 일이다.

강도근, 그리고 동ㆍ서편제

1918년 남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판소리 인간문화재 강도근은 1996년 남원에서 생애를 접었다.

열여덟 나이로 명창 송만갑의 수제자였던 金正文,1887~1935 문하에 들어가면서 동편제를 구전심수口傳心授받았던 그는 타계하기까지 남원을 떠나지 않았다. 지리산을 닮은 웅장한 우조羽調의 동편제 소리맥을 고집스레 지켜온 그는 돈과 명예와 중앙무대를 좇지 않고 평생 야인으로 남원에서만 지냈다. 이 사실에 대해 그는 나야 원래 들野에서 났응께ㆍㆍㆍ라며 스스로 농부임을 자처했다.

또한 네 소리 심줄(힘줄)이 지리산에서 왔는디 山門나가 씨잘대기없이 어디를 돌아댕기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겉멋이 잔뜩 들어간 분粉칠한 소리상업소리를 미워했던 그는 지리산이 그에게 내어준 소리를 지리산에 들려주고 결국 지리산 품에 눕게 된다. 그의 묘소는 은사 김정문 선생의 향리인 남원시 주천면 상주마을에 있다. 생전에 살았던 집은 남원시 향교동에 그대로 있다.

그에관한 자료는 만원국립민속국악원 기획위원인 박재윤옹과 전인삼 국악장 등이 보관하고 있다.

일찍이 지리산 반야봉과 선유폭포에서 혹독한 득공으로 소리를 수련했던 그에게 지리산은 말없는 스승인 셈이다. 강도근이 평생 고수했던 동편제는 섬진강을 경계로 전라도 동쪽지방에 전승되었던 판소리 유파로, 남원, 임실, 전주를 중심으로 구례, 순천, 지역과 정읍, 고창까지 전파되었다.

순조때의 송흥록을 비롯, 박만순, 정춘풍, 박기홍, 송만갑, 유성준 등이 동편제 명창으로 꼽힌다. 대체로 단순 소박하면서도 대범하고 웅장한 가풍歌風에 끝을 뚝 잘라서 맺는 경우가 많다. 이에비해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의 전라우도 쪽에서 부르던 법제로 철종때의 박유전을 비롯 정창업, 이날치, 김창환 등이 서편제 명창으로 꼽힌다. 소리는 정교하면서도 애잔한 맛이 있으며 끝을 길게 끄는 경우가 많다. 지역적으로 함평, 나주, 해남, 강진으로부터 보성까지 퍼져있다.

지리산 산악지역 남원 구례등에 동평제가, 평야지역 나주, 해남, 보성등에 서편제가 발달하는 경향이 있다. 동 ㆍ서편제 외에 충청, 경기지역을 기반으로 한 중고제가 있는데 순조때의 염계달로부터 모흥갑, 고수관을 비롯 김창룡, 조학진 등의 명창으로 이어졌으나 근래에는 그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고 있다. 성음이 분명하고 경기, 충청지역 민요의 음색이 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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