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20, 2011

노래여, 옥주산천 들노래여

藝의 길을 가다

김병종교수의 화첩기행

진도소리()와 진도

징학게 이쁜섬진도

음기 세어 여자가 세고 예藝가 센땅

조선 남화의 탯자리이자 춤과 노래의 보고寶庫인

그 섬에서는 부는 바람, 구르는 돌에도

예기藝氣가 묻어 있다.

특히 동ㆍ서편젠나 판소리 열두마당으로도

가를 수 없이 분방해 판소리의 사문란적斯文亂賊이라

불리기도 하는 진도소리는 일과 노래,

한과 해학이 하나된 절묘한 노동요이다.

노래여, 옥주沃州 산천 들노래여

진도소리唱와 진도

땅에도 음양이 있다.

학문은 양기 센 땅에서 승勝하고, 예藝는 음기陰氣 센 땅에서 승한다. 대구, 안동은 양기 센 땅이다. 그래서 남자가 세고 학문이 세다. 안동에서는 서예를 선호하고, 목포ㆍ진도엣서는

그림을 선호한다. 진도에 남화의 성지라고 불리는 허소치의 운림산방이 서게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풍수風水에는 어둡지만, 예향藝鄕이라고 불리는 곳일수록 음기 센 땅임을 느끼게 된다. 나라안 예향 중의 예향으로 꼽히는 진도도 그렇다. 여자가 세고 藝가 세다.

폐일언하고, 진도예술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소리이다. 진도소리는 野스럽다. 실제로 들판에서 만들어진 것이 많지만 내용도 야한 것이 많다.

진도 唱은 동ㆍ서편제나 판소리 열두 마당 정맥의 계보에 들지 않는 외가外歌가 많다. 판소리법통에서 많이 어긋저있다. 그래서 진도창을 판소리의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몰아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판소리의 속악俗樂이다. 하지만 야한 속화俗畵가 더 눈을 번쩍 뜨이게 핟듯, 번듯한 보학譜學도 없는 진도소리는 때로 절절하게 다가와 가슴을 친다.

진도에 유난히 단가와 노동요 그리고 잡가가 성했던 것은 그것이 생활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생활 따로 노래 따로가 아니었다. 일 따로 노래 따로가 아니었다. 일하며 흥얼대고 흥얼대며 일하다 보면 노래가 만들어지곤 했다.

그래서 노랬말은 다듬지 않은 일상 구어체가 태반이다.

갯마을이 많았던 진도엔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못하는경우가 많았다. 어부인 남편이 죽고나면 생계는 꼼짝없이 여인인 아내가 맡아야 했다.

남편없이 시부모 섬기며 험한 일손에 하루 해를 보내다 보면 신세 한탄이 절로 나오고ㆍㆍㆍ 동병상련의 여인네들이 새벽부터 들일, 길쌈일, 바닷일로함께 어울려 일하다 보면 이런 타령들이 노랫가락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흥얼대다 보면 한나절이 힘든지 모르고 지나곤 했던 것이다.

진도창은 바로 그런 고통과 슬픔을 삭이고 이길 수 있는 힘이었다.노래는 그것이 아무리 슬픈 노래라 할지라도 부르는 중에 슬픔의 고개를 넘게 하는 힘이 있다. 슬픔의 고개를 넘어서게 할 뿐 아니라 회망의 지평을 그려보게 한다. 풍류란 그래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빈들거리며 노는 소모적인 것이 아니다. 정신과 격조를 잦춘 놀음이며 잘 놀 때면 생산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전통 때문일까.

진도 남자중에는 유난히 풍류 잘하는 한량들이 많다. 진도 남자 중에 단가 하나 못하고 북채 한번 못 잡는다면 그건 배냇병신이란 소리가 있을 전도이다. 재미있는 것은 진도 소리의 질펀한 해학성이다. 힘들게 일하다 나오는 노동요라 해서 원망과 애절한 한과 비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깨가 절로 들썩여지는 흥겨움과 함께 배시시 웃음 나오는 해학;이 일미인 것이다. 고된 시집살이와 어려운 살림살이도 이런 해학으로 슬쩍슬쩍 넘겼을 터이니.

진도는 원래 비옥한 땅과 청정 해역에 인심마져 후하다 하여 옥주沃州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던 곳이다. 그곳은 고래로 詩ㆍ서ㆍ화에 춤ㆍ노래는 가히 웬만한 나라 하나가 간직함직한 함량인데다 다채롭기까지 하다. 세계 민속음악제에서 금상을 탄 바 있는 진혼 무곡<씻김굿>과 사물악기 반주의 가무극 <다시래기>, 메김소리 뒷소리 애절한 <진도만가>와 흥과 한에 얽혀있는 <진도아리랑>,<육자배기>, <강강술래>, <들노래>등ㆍㆍㆍ

충무공 혼이 서린 역사의 바닷길 울돌목, 하늘에 걸린 사장교斜張橋 ‘’진도대교로 건너 그 소문난 예도藝島로 들어간다.

정겹고 야트막한 산과 그 산허리를 여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싸고 도는 바다, 푸르름을 더해 가는 들과 기름진 황토 그리고 점점이 박힌 들꽃들, 목포서부터 동행한 산수화가 우암 벅응규의 말마따나 징하게 이쁜 섬이다.

목포-진도간을 뱃길로 다녀야 했던 시절, 목포 한량들은 굳이 진도에 건너오지 않고서도 유달산아래 요정 보료에 앉아 원향 그대로의 진도창을 들을 수 있었다 한다. ‘청미장이나 향원같은 유서 깊은 고급 한식집에서는 옥색 치마저고리에 품새도 아릿다운 童女들이 나와 치마 말기 위로 삼각형 겨드랑이 살을 슬쩍슬쩍 드러내며 부채춤도 추고 북채가 부러지도록 밤들이 낭자하게 단가도 뽑았다고 하건만 이제는 그런 풍류를 찾기 어렵다.

1975년 진도에 여행왔다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목격한 당시의 프랑스대사 피에르 랑드 씨가 즉석에서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렀다는 回洞 바다를 둘러보고 나오니 어느덧 해는 기우뚱해지고 첨찰산尖察山 산그늘이 짙다. 출출했던 차라 곧바로 아리랑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육자배기 식당과 아리랑 식당 등에서는 연이 닿으면 진도창을 들을 수 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상이 나온다. 무채에 재래식 식초로 버무린 준치회가 특미였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칼질의 기교로 교묘하게 뼈를 저며버려 씹을 것도 없이 혀에서 녹는다. 시원한 간재미탕과 함께 귀하다는 흑산도 홍어도 사에 오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흔해 빠진 것을 일러 만만한게 홍어좆이라 하지만 흑산도 참홍어는 이젠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숨소리마져 잡히는 작은 방에서 듣는 소리는 문화회관 공연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그리고 홍주 한약재인 지초芝草와 순오곡주를 걸러 내린다는 색이 발그레한 토속주는 40도가 넘는 독주여서 술에 약한 사람은 목에 털어넣는 순간 상머리잡고 쓰러진다는 술이다. 그래도 진도 사람들은 홍주없이 진도창 없다고 말한다.

저녁상 물리기 전에 진도 들노래의 기능 전수자인 박동매와 진도아리랑의 박종숙 그리고 고수 김오현이 들어온다. 옆방에는 마침 아그들 데리고 산공부 떠나느 길이라는 명창 이임례도 와 있었다. 그녀의 일대기는 영화 <회모리>로도 제작된 바 있다.

동매 씨가 소녀적부터 집에 드나들며 친숙했다는 우암이 잔을 권한다.

동매, 홍주 한잔 혀?

나 우선 찬 맥주로 목 축이고 그 담에 홍주 할라요.”

동매씨는 스스럼없이 자기 잔에 가득 맥주를 따른다.

워매, 그라면 사정없이 타불 텐디?”

우암이 걱정스레 말했지만 동매는 픽 웃는다.

까치 뱃바닥 같은 횐소릴랑 허덜 마시오. 속이타야 말에 개미甘味가 붙제잉?”

허긴 그려.”

텅 김오현이 바짝 북을 끌어단겼다.

<진도만가>부터 풀려 나온다. 중중모리 완만하던 가락이 어느 순간 속도를 탄다 싶더니 <새타령>으로 들어선다. 이어<진도 흥타령> <산타령>, <방아타령>, <매화타령>으로 소리는 숨가쁘게 핏줄을 달린다.

동매 씨의 거칠면서도 힘있는 소리와 종숙 씨의 간드러지면서도 애처로운 소리가 절묘하게 만나고 헤어지고 꺽아지고 되만나기를 거듭한다.

이욱고 <들노래>

어이기야라 먼데로고나/유월이라 초여드레 온다는 비는 아니 오고/ 동남풍이 날 속였네

<먼들소리>는 어느새 자전적 가사로 바뀌어 버린다.

우리 인생 한번 가면/다시 오지는 못하느니/어기야 허~어 여허허라 날 버리고 가셨네에/영 버리고 가셨네

새상살이 무엇인지/아지못한 나를 두고 ㆍㆍㆍ

연전에 작고한 어머니 조공례 씨에게 어렸을 적부터 쥐어박히며 이 사설을 머릿속에 넣곤 하던 생각 때문이었을까. 동매 씨는 목이메인다. 이내 흐느끼는 동매 씨를 우암이 달래어 맥주 한잔으로 잠시 목을 축인다. 박동매와 박종숙의 압권은 단연 노동요의 단가短歌. 진도의 노동요들은 힘들게 일하며 나오는 노래이면서도 원망과 한탄보다는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해학이 일미이다. 매운 시집살이와 길쌈일, 들일의 고된 살림실이를 이런 해학으로 슬쩍 넘겼을까.

씨암씨 잡년아 잠 깊이 들어라. 느그아들 넘렵허면(똑똑하면) 내가 밤마실 돌까

씨암씨 모르게 술 돌라먹고 이 방 저 방을 다니다가 씨암씨 불알을 밟고 말았네

국악인 신경희의 고향인 초사리나 박보화, 박옥진의 탯자리 마을에는 아직도 채보되지 않은 채 구전되어 오는 이런 잡가, 단가들이 가는 곳마다 밟힌다.

두 사람의 소리는 밤을 새우고, 가락따라 떠돌던 꿈길을 파도소리가 깨운다. 진도 출신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생전에 맘먹고썻다는충무공 전적비 서 있는 벽파진으로 나가 본다.

무적霧笛을 울리는 새벽 안개 자욱한 바다 저편으로부터 가물가물 소리가 들려온다.그러고 보면 이 섬에서는 하루를 열 때도 소리요, 닫을 때도 소리다.

자고 넘어도 상이이~/건네 헤쳐도 바다이네

가네 가네 내 세월이/이렇게도 잘 갈까ㆍㆍㆍ

진도소리와 남도 들노래

진도 소리는 멀리 조선말 궁내부 참의과 정만조鄭萬朝, 1858~1936가 남망산 아래로 유배를 오고 박영효朴泳孝,1861~1939가 제주로 유배를 갔을때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진도 협률단協律團이나 아성창극단

그리고 815후의 공화창극단 등을 통해 歌ㆍ무ㆍ악의 총체 속에서 발달해 왔다. 이후 진도국악원군립민속예술단으로 이어지면서 군 단위로는 드믈게 계속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소리예술이 이어져왔다.

진도 소리는 무가巫歌나 만가(상여소리)가 많고 죽음과 관련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그 중 온전히 하룻방을 새며 지속되는 씻김굿(중요무형문화재 제72)의 김대례 할머니의 소리는 유명하다. 亡者의 혼을 불러내어 그 한을 씻어주는 그녀의 소리는 이승의 소리 같지가 않아 귀신의 소리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밖에 박병천, 채계만홍의 소리가 유명하다. 중요무형문화재 81 <다시래기>에는 인간문화재 강준섭 씨가 아름나 있다. 이 가무극적인 민속놀이는 상가에서 출상 전날 밤 행해지는 것으로 사물악기(장구,,꽹가리,) 반주에 맞추어 노래와 춤과 재담으로 엮어진다. 디시래기라는 말은 다시낳다’. ‘다시 생성하다는 뜻으로 망자의 환생을 가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상두꾼喪徒軍의 상여소리인 진도민가(무형문화재 19)는 인간문화재 김항규, 설재림 씨가 유명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인 들노래는 가락이 무척 다양하고 흥겨우며 뒷소리를 길게 빼는 특징이 있다. 전수자 박동매36는 남도 들노래 인간문화재였던 조공례1930~97의 딸로, 그녀의 외조부 조정호옹이 걸궁패 상쇠였던데다가 들노래 명창이어서 들노래 삼대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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