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3, 2012

호미와 연필

호미와 연필
중앙 신인 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정동순


호미를 들고 나가 땅을 파 보았다. 호미는 어머니 등을 긁어주던 효자손처럼 흙의 표면만 긁어댈 뿐 땅을 깊이 파지 못한다. 호미날은 겨우 작은 깻잎만큼 남았고, 나무 손잡이의 끝은 뭉실하게 닳아있었다. 주인이 흘린 땀에 쇠붙이마져 녹아내린 때문일까?


낡아서 땅을 잘파지 못하는 호미는 대신 어떤 기억 하나를 파낸다.


한여름 더위에 어머니를 따라 밭을 매러 가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였다. 햇볕이 너무 뜨거워, 길이 노랗게 흔들리며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어머니를 따라나섰던 것은 호랑이도 나온다는 산밭에 어머니 혼자서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밭일을 하면서 어머니가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밭을 매는 동안, 옛날이야기 뿐만 아니라 살아오신 이야기들이 실타래가 풀려나오듯 끝없이 이어졌다. 어머니가 풀어놓는 실타래를 놓칠세라 귀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열어두고, 건성건성 김을 매며 밭고랑을 따라갔다.


어머니의 밭고랑에는 시대가 뿌린 억센 풀들이 어찌 그리 많았던 것일까? 일제 강점기와 육이오 전쟁이 어머니의 젊은 날이었다. 일제 감점기 때, 향촌에서는 아직도 서당교육이 대세였고, 드믈게 일제가 세운 소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이 다닐 학교는 없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이제, 여자로 태여나 배우지도 못허고, 가문을 잇지도 못허고 인생이 꼬여부렀다. 어느 해던가, 동네에 야학이 들어왔제, 야학에 가서 한글을 배웠는디, 잘했다고 상으로 연필을 받았어야. 난생 처음으로 연필을 만져 봉게 얼매나 신기하고 좋던지!



우리할아버지한테는 귀헌 한문 책들이 수레로 실어낼만큼 많았제.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걸 다 물려받았을 턴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보니까, 그 많던 책들이 다 어디로 사라져 부렀는지 해평 아재집에 몇권만 남아 있드라,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어머니는 딸들이 호미를 잡기보다는 연필을 잡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고된 농사일에 새까맣게 그을린 촌 아낙네의 얼굴로 면사무소나 농협에 일을 보러 갈 때마다 기도 하셨다고 한다. 당신의 딸들도 저렇게 그늘에앉아 펜을 잡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매일 아침일어나 정안수 떠놓고 비는 것도 모두 자식들에대한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자매들에게 뜨개질이나 자수같은 것을 전혀 못하게 하셨다. 그런 것 할 시간이 있으면 글이라도 한자더 읽으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바람은 다섯딸 중에서 세 딸이 교편을 잡게 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언니에이어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게되었다. 동생도 대학 졸업후, 곧 교직에 들어섰다.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내가 사는 양을 보려고 어머니가 오셨다.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들이 말은 잘 듣대? 옛말에 선생 똥은 개도 안 묵는다고 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항시 남의 아이들 귀히 여기고 잘 가르쳐라. 근디 월급은 얼매나 받냐?"
"보너스랑 합쳐서 한 백만원 받아요."


"허허, 그러면 쌀이 열 가마니네. 니 한달 월급이 내 일년 농사보다 낫다."
어머니는 호미대신 '연필'을 잡은 딸이 자랑스러웠는지 이미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을 지키지 못하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교편을 놓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이태 전이었다. 오래 벼르던 끝에 태평양 건너 우리 집에 오신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놓고 어머니께서 오실 날을 기다렸다. 그중에 으뜸이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드리는 것이었다.


막상 어머니가 오셨을 땐, 두 살짜리 와 여섯 살짜리 이이들 뒷치닥꺼리로 바쁘기만 했다. 또 과외와 도서관의 시간제 일로 바쁘게 집을 드나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무척 속이 상하셨던가 보다.


"그 좋은 직업을 놔두고 와서 , 여기서 왜 이 고생이냐?"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격려는 못 해 줄망정 왜 그래요?"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짜증을 내였다.


어머니는 딸들이 호미를 잡기보다는 연필을 잡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
어머니의 원대로 난 연필로 글밭을 일구며 살아간다.
내 실끄리에 옮겨 감았던 어머니의 사연들을
시상에 플어내는 어머니의 연필이 되고 싶다.

어머니는 무료하실 때,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조용히 이이들이 읽는 전래동화집을 읽곤 하셨다.


"아이고, 어찌야 쓰까" 얼른가서 콩쥐 눈물 좀 닦아줘야 쓸 턴디..."
"심 봉사가 눈을 번쩍 떴구나! 어쩜 요리도 맛갈스럽게 썼을까이?"
돋보기를 쓰고도 어머니는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처럼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들곤 하셨다.


우리집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드리고, 어머니가 마음껏 글을 쓸수 있도록 맞춤법에 맞는 글쓰기도 가르쳐 드리고 싶었다. 허나, 바쁘다는 핑게로 어느 것 한 실천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실 때, 잘 깍은 새연필 몇 자루와 공책을 가방에 넣어 드렸다. 어머니는 연필을 기쁘게 받으셨다.
"하이고! 요새 연필은 좋기도 허다. 내가 이 연필로 글씨 연습도 허고, 너한테 편지도 쓰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니, 고향 집 수돗가 나무 기등에는 세 자루의 낡은 호미가 걸려있었다. 그중에 손잡이가 유난히 반질거리던 한자루를 가져왔다. 잡초를 뽑고 밭고량의 흙을 파던 어머니의 호미가 심었던 것은 무엇일까? 어머니의 유품이 된 낡은 호미를 만져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머니와 밭을매러 다니던 어린시절, 김은 잘 매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들은 부지런히 내 실꾸리에 옮겨 감았던 것 같다. 이제는 어머니 스스로 쓸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써 드리는 것이 내 소원이 되었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써서 언젠가 당신의 산소에 바치고 싶다.

그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도시에서 방황하던 시절의 내생도 뙤약볕 아래 뿌리 뽑힌 잡초처럼 나둥그라졌을 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의 원대로 연필로 글밭을 일구며 살고 있으니, 이제는 내 실끄리에 옮겨감았던 어머니의 사연들을 지상에 풀어내고싶다.
어머니의 연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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