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18, 2011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끝편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끝편

仙道체험기 김태영

성현들의 지혜는 영원하고 완전하지만, 가르침의 전달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옛 성현들의 통로에 불과하다. 종교의 창시자들이나 지도자들을 숭배하는 것은 확실한 철학도 없이 교리나 의식을 받드는 것과 같다. 성현들의 길을 따르는데는 영웅숭배란 있을 수 없다.

위대한 성자들은 자신들을 어떤 특정 종교나 교파와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차별을 넘어선 곳에 있다. 그들은 인류 전체에 속한 영혼들이다.

수학에는 숫자 1이 있다. 모든 숫자들은 똑같이 1의 배수이다. 이와 유사하게 이 우주에는 하나의 절대적인 실재가 있고, 이 우주의 다른 모든 이름은 그 하나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는다.

0 을 먼저 쓴 다음 1을 놓아보십시요. 이렇게 (01) 말입니다. 만일 1이 먼저 나온다면 0은 가치를 지니게 되지만, 만일 1이 먼저 나오지 않는다면 0 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0 (zeros) 과 같은데, 만약 하나 (1) 의 실재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의 실재를 기억하게 되면, 삶은 보람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삶은 짐이 될 것입니다.

㉲ 물질은 에너지로 에너지는 물질로 변화될 수 있다네, 이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라는데 있지. 모든 명칭과 형태의 이면에는 현대의 과학자들이 아직 그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일관된 법칙이 숨어 있다네, 베단타나 고대의 과학자들은 삶속에 내재된 그러한 법칙들을 가르쳐 주고있지.

삶의 에너지는 유일한 것이며, 우주 만물은 다양한 것 같으나 본질은 오직 하나 뿐이라네. 즉 물질의 근원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지. 따라서 두 물질간의 관계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라네. 물이 얼면 얼음이라 하고, 증발될 때는 수증기라 하지.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똑같은 물질의 세 가지 형태와, 그것들간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형태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말이네. 오늘날 과학자들은 바로 그러한 어린아이와도 같다네. 즉 그들은 모든 물질 안에 있는 동일성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옴겨가는 것에 대한 법칙을 알지 못한다네.

근심은 몸을 마비시키고 긴장되게 하지만, 명상은 마음을 느슨하게 플어주고 고요하게 한다. 명상에는 마음의 정화가 필수적이나, 근심에 의한 것은 마음의 정화가 필요 없다.

극심한 근심이 마음을 지배할 때 마음은 마비되고 무감각하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이 세상의 불행에 대해서 명상한다면, 그것은 근심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이 경우 개인의 마음은 확장되어 우주의 한 마음과 결합된다. 마음이 개인의 이익에 집중될 때, 그것을 근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불행쪽으로 향할 때, 그것은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둘 다 마음이 집중되지만, 후자의 경우엔 의식이 확장된다는 점이 다르다.

㉵ 명상瞑想은 확장이요, 근심은 긴장이다.

개아個我 의식이 확장되어 초월 의식과 결합하는 것은 사마디samadi라고 한다.(三昧 無念無想 )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다.그러므로 잠재된 힘을 일깨울 수 있다면 누구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다. 무아의 신성을 얻은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고칠 수 있다. 모든 치유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불행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일이다.

개아의식個我意識이 확장되어 우주 의식에 이르게 되면 타인의 병을 대신 앓고자 하는 연민의 마음이 우러나게 된다.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고통이라 하겠지만, 성자들에게는 고통이 아니다. 의식이 개아의 테두리에만 제한될 때, 사람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도통을 받지 않는다.다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파할 뿐이다.

쾌락과 고통은, 감각이 세상의 객관적인 대상에 접할 때 나타나는 서로 상반된 감정이다. 의식이 감각의 수준을 초월한 사람은 이 대립되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 감각으로부터 임의로 마음을 거둬들여서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의식의 중심을 밝히는 행법이 있다.그런 상태의 마음은 쾌락과 고통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처럼 한 곳에 집중된 마음은 치유를 가능케 하는 힘찬 원동력을 낳는다. 모든 치유의 힘은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치료가 개아를 의식하는 순간, 치유의 자연수러운 흐름은 멈추어 버린다. 저급한 마음의 방해를 받지 않는 의지의 힘을 통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만일 인간이 끊임 없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의식하면서, 모든 행동을 그 목적의 실현을위해 집중한다면 그에게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그러나 삶의 목적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불행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법이다.

㉺ 사랑이 없으면 의무는 속박을 만든다. 사심없이 남에게 봉사하면서 迷妄의 언덕을 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복되도다.- 미망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못잡고 헤메임.

㉻ 인간은 필요한 모든 치유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 사용법을 모른다. 그러나 내면이 잠재되어 있는 치유력과 접하는 순간, 자기자신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은 오직 하나의 신에 속한다. 인긴은 단지 그 힘을 나르는 그릇인 것이다.

ⓐ 당신 앞에 와서 나를 숭배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믿지말라. 예수도 붓다조차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 영적인 길에는 전혀 무지한 사람이 신비한 지식의 소유자로 추앙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먼 믿음을 반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나는 전에도 그런 광신자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경험했었다.

ⓒ 깨달음을 얻은 스승은 육체적 정신적 부조화를 벗어 버리고 순수하고 밝은 우주의 빛과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스승 앞에 서면 스승의 순수한 흐름과 연결되기 때문에 축복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대들이여! 자신의 등불을 밝혀라. 구원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대 자신을 깨달아라. 열반을 얻으면 스스로 부처가 될 것이다.” 하고 석가는 말했지만 오늘날의 라마승이나 불교 승려들은 의식儀式만 행하고 있다.

ⓔ 스승이 당신 앞에 서 있더라도 당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 사람이 스승인줄 모를 뿐 아니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다. 다이야몬드가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면 다이야몬드가 앞에 있어도 그것을 한 조각 유리로 취급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다. 그리고 다이야몬드와 유리의 차이점을 모를 때 유리 조각을 하니 얻어다가 그것이 다이야몬드인줄 알고 평생 간직할 것이다.

ⓕ 법맥을 받아 가르치는 진정한 스승은 바탕이 좋은 제자를 찾는다. 그는 특별한 표시나 증상을 보고 누가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어떤 제자도 스승을 속일수는 없다. 스승은 제자가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쉽사리 간파한다. 만일 제자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 스승은 방편을 써서 점차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린다. 그리하여 심지와 기름이 알맞게 갖추어졌을 때 스승은 불을 붙인다. 그것이 스승의 역할이다. 그결과, 성스러운 영혼의 빛이 발해지는 것이다.

ⓖ 그대의 운명은 그대가 창조한다. 죽음과 탄생은 단지 삶의 두 현상 일 뿐 본래의 성품을 잃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고통의 원인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 자유가 온다.

ⓗ 내적인 불멸성을 자각한 사람은 외부 세계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다.

죽음이란 육체의 습관이자, 또한 필요한 변화다. 죽어가는 사람은 그 순간을 위해 교육을 받아 두어야 한다. 죽음이라고 부르는 변화 그 자체는 고통이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고통을 불러 일으킨다.

요기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몸의 습관일 뿐이며, 성장 과전 중에 일어나는 변화 가은데 하나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이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면, 노년이 되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을 때라도 지금처럼 비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 현대인들은 생명의 또 다른 차원을 탐구하여 죽음이라고 하는 공포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 내부 생명의 율동을 배우려면 욕망을 넘어사는 법을 배우고, 율동적인 파동의 정묘한 힘을 느낄 수 있을만한 감수성과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

ⓛ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이 히말라야 성자들의 첫번째 메시지이고, 두번째 메시지는 내면의 실상實相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자연스러워지고 종교나 문화에 관계 없이 순수한 道를 베풀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자신을 갈고 닦아라. 과학에 대한 수용 능력이 있다면 모든 수행법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겸손의 덕을 기르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로 한걸음 깊이 나아가는 것이된다. 겸손으로 해서 잃는 것은 없다. 대신 많은 것이 올 것이다. 기도와 명상은 내면의 덕을 기르는데 필요한 의지력의 발판이 된다.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는 모두 하나의 진리에서 나왔다. 진리를 실천하지 않으면서 종교만 따른다면,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신에 속한 사람은 모든 존재를 사랑한다. 사랑은 우주의 종교다. 자비로운 이는 종교의 한계를 넘어 나늼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깨닫는다.

마음은 수많은 힘의 원천이다. 그 속에 숨겨진 자원들을 개발한다면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다 성공할 수 있다. 만일 마음이 훈련되어 한 곳에 집중된채 안으로 향한다면 우리의 존재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마음은 인간이 지닌 가장 뛰어난 도구이다.

스와미 라마 지음, 박광수 옮김 정산사 펴냄 히말라야 성자들 (부제목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영혼의 순례기) 중에서 유익한구절을 저자가 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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