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5, 2011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두째

히말라야의 성자들의 지혜 두번째

仙道 체험기 김태영 지음 중에서

㉮ 최고의 스승은 그의 가르침을 침묵으로써 전한다.

㉯ 초심자들이 명상 수련을 시작하면,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리고는 이 변화무쌍한 이름과 형상의 세계는 거짓이며, 그 뒤에 영원히 변함없는 절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진리를 알게 되었을때는, 진리는 오직 하나이며 만유 속에 편재해 있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 단계에서 구도자는 절대세계와 현상세계 양쪽에 들어 있는 똑같은 단 하나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오직 단 하나의 궁극적 실체만 존재하며 겉으로 거짓인 것처럼 보아는 것도 실제에 있어 서는 절대 유일자의 한 현현顯現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생들만이 이러한 표면적인 모순에 혼동을 겪게 된다. 유능한 스승은 학생들에게 각기의 수준에 맞는 단계들을 의식할 수 있게 해 준다.

㉰ 지식은 단지 정보에 불과할뿐 오직 실천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체험을 해야 한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것만이 참된 앎이다.

㉱ 질시나 질투는 아집我執이라는 자궁 속에서 자라나며, 이기심과 집착심에서 영양을 섭취한다.

㉲ 욕망은 불행의 어머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욕망의 에너지를 자각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돌릴 때 욕망은 깨달음의 도구가 된다. 그 단계에 이르면, 욕망은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자아 실현의 도구로 변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촛불은 산들바람만 불어도 꺼져 버린다.그러나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다루워서 숲에 불을 붙이면 산불이 된다. 그때, 바람은 불을 끄는 역활이 아니라 오히려 불길을 세차게 오르게 하는 역활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도자가 수행의 도움으로 욕망의 불을 알맞게 지펴가면 그 불은 점점 자라나 크나큰 에네지로 변한다.큰 어려움과 아품은 장애가 되는 대신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의 길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장애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세상 사물에 투영하는 자신의 약점과 가치관이 스스로 장애를 만들어 낼 뿐이다. 집착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가장 큰 장애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린다면 이런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道의 길을 갈때 신은 많은 유혹을 던진다. 그러나 모든 유혹을 걷어찼을 때에야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하게된다. 어린애가 울때 그 어머니의 행동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처음에 어머니는 아이에게 과자를 준다. 그래도 울움을 그치지 않으면 인형 같은 선물을 주면서 달랜다.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이번에는 아이를 품에안고 달랜다. 어머니도 아이를 안아주기 전에 몇번 다른 장난감을 주는 법이다. 깨달음이나 자아 실현의 길도 꼭 이와 마찬가지다.

집착과 분노와 자만을 버리면 당신은 명상 그 자체가 되리라. 그러면 굳이 명상하려고 앉을 필요가 없게 된다ㅏ. 삶 전체기 바로 명상이므로

독약은 성인을 죽일 수 없다. 성인은 진리 속에 살고,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고 말을 마친 소크라데스는 미소를 지으며 독약을 마셨다.

때가 되면 지성도 더 이상 우리를 인도할 수 없고, 직관이 앞을 이끌어 주게 된다. 지성은 계산하고, 결정하고, 판단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직관은 생명의 원천인 의식 깊숙한 곳에서 자발적으로 올라오는, 막힘 없는 흐름이다. 마음이 맑고 평온하게 가라앉았을 때 직관의 빛이 동터 온다. 순수한 직관은 의식을 확장시켜 사물을 맑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때 삶 전체가 이해되며 미망이 사라진다. 이러한 일련의 체험을 겪고나면 자연히 직관의 인도를 받게 된다.

나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의 죽음이란 불가피하다. 나는 영원한 존재다. 그런데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다니

이기심이 없고, 진실되며, 말과 핸동 뿐만 아니라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에 얽매여 이기적으로 되는 사람은 스스로 많은 장애를 만들어 낸다.

무집착은 자유를 주지만, 집착은 속박을 준다.

자신의 의식을 활짝 열어 우주 의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배우게 될 때 카르마(업장)의 작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라라.

A 도력이 있는 사람은 육체적, 심리적, 영적 면에서 모두 사람을 치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의 마음과 의식은 세속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속되고 산란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데 합당하지 않다. 사심이 들어가는 순간 마음은 저급한 곳으로 흐르게 된다.

B 모든 인간은 스스로 치유력을 지니고 있다. 치유력은 모든 삶의 가슴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생동하는 의지의 힘을 알맞게 쓰면 치유력을 육체나 마은의 환부로 보낼 수 있다. 치유력은 환자에게 靈的인 영양을 공급하여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 치유의 열쇠는 사랑, 사심 없는 마음, 생동하는 의지력, 그리고 내면의 신에대한 열렬한 헌신이다.

C 삶과 존재의 예술은 출가하든지 세속에 있든지를 막론하고 인생의 목적과 무집착을 향한 자각에 있다.

D 한 나라의 문명을 말살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선 그나르의 말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국인둘은 성공했다. 인도 독립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도에서는 영어가 인도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단일한 모국어가 없기 때문에 인도인끼리릐 의사 소통에 많은 장애가 있다.

E 불교의 사랑은 기독교의 그것보다 범위가 더 넓다. 기독교가 사랑을 인간에게만 한정했던 반면에, 불교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게로 확장시켰다. 기독교는 신학의 도움을 빌어 인생을 분석란 뒤 신앙에서 멈춘다. 불교는 삶의 근원을 따져서 열반에서 멈춘다. 불교의 고행은 평화를 가르치고, 기독교의 고행은 기쁨을 가르치지만, 이 두 종교를 이해 한다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주거나 빼았아 갈 수 없는 평화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의지를 간조한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을 가꿔 나가기 위해서는 수행과 훈련, 훈습을 중요시한다.

F 기독교가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불교가 니르바니(열반)를 이야기 할 때, 성현의 길은 진아를 깨달음에 대해서 말한다. 성현의 길에서는 오직 진아의 앎을 통해 궁극의 실재를 깨닫는다 기독교와 불교와는 달리, 성현의 길은 예배의 대상으로 특정 상징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번째 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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