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19, 2011

6-25 전쟁의 원인-근인

625 전쟁의 遠因 近因

권태영 몬테벌로대 명예교수

6월이다 6월은 625를 회상케 한다 625 전쟁에 참전한 탓일가? 625전쟁을 회상할 적마다 전쟁의 원인을 생각하게 된다.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을 알아본다. 遠因을 알자면 한미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한미관계는 1882년에 체결된 힌미통상 수호조약으로 시작됐다.한국은 마국의 도움을 받아 외국의 침략을막고 독립을 지탱하는게 주 목적이었고,미국은 통상이 주목적이었다.조약에는 중재구절 (good offices clause)이 들어있었다.

러ㆍ일전쟁(1904~5)에서 일본이 이기자 시오도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은 러시아를 견재하기 위해 친일 정책을 택했다. 미국은 한미조약을 잊어버리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미국과 일본이 태프트-가쓰라비밀각서를 교환한 사실을 한국정부는 전연 몰랐다. 태프트는 당시 미국국방장관이었고 가쓰라는 일본수상이었다.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이권을 존중하고, 미국이 일본의 한국 이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다. 러ㆍ일전쟁후 미국이 친일정책을 택하지 않고 625전쟁 때처럼 한반도를 수호했다면 2차대전도 피하고 뒤따른 한국전쟁도 피했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이 한국을 집어먹는 걸 미국은 보고만 있었다.일본은 만주를 집어삼키고 중국까지 손을 뻗폈다. 드디어 1941 12 8일 진주만을 공격해 2차대전을 도발했다.2차대전 중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이기자면 소련을 대일전쟁에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이 겨울에 얼지않는 한국의 항만을 탐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국을 미끼로 소련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이 아직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국을 전후 당분간 국제 신탁통치 하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심한데는 두가지 구실이 있었다.

진주만 공격 2주 후 중경에 있는 미국대사에게 한국임시정부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한국임시정부는 온건파가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공산당의 지지를 못 받고 있어 인정하지 않는 게 좋다고 보고했다. 당시는 미국이 소련의 협조를 구하던 때였다. 주미 중국대사에게도 한인망명자들의 동향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승만 씨와 한길수 씨가 분열돼 있어 희망이 없다고 보고했다. 한길수 씨는 당시 미 국무부의 호평을 받은 인물이었.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5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을 한국 신탁통치 이사국의 일원으로 초청하고, 그 해 7월 포스탐회담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소련의 북한점령에 합의 했다. 38선을 경계선으로 결정한 것은 전후 맥아더 장군의 일반명령 제 1호였다. 그렇게 해서 한반도가 분단되었기 때문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토령의 함반도 정책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학자들의 해설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펜실베니아 대학교수는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란 책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련의 공산주의 위협을 자각하지 못했다고 해석하고,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사학교수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란 책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소련의 공산주의 위협을 감안했기 때문에 소련을 신탁통치 이사국으로 초청했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련의 한반도 공산화 야망을 묵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주벨트 대통령이 1945 4월에 서거함으로서 미소간의 협조가 깨어지고 말았다.

625전쟁의 近因에 대해서도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국문제 전문가 셀리그 헤리슨은 Korean Endgame이란 책에서 이렇게 해석했다.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유는 트루먼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말한 것처럼 공산군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한이 소련과 중공의 지령을 받고 남침을 감행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이것이 세계공산화 계략의 첫 단계라고 생각 했다.

1989년 소련이 무너지고 난 후 공개된 소련의 비밀문서를 보면 해석이 달라진다.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지령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김일성이 단독으로 했다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다. 박헌영이 남북통일을 주장하자 김일성이 선수를 쓴 것으로 나타났다.박헌영은 군정 때 남로당 당수로 있다가 월북한 사람이다.

1955년에 숙청당했다. 1949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계획을 제의하자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골격하지 앟는 한 공격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1950 1월 김은 다시 스탈린을 조르기 시작했다. 지금 치지 않으면 남한이 너무 강해진다고 했다. 그 해 4월 다시 스탈린을 찾아갔다. 그래도 스탈린은 승낙하지 않았다. 김이 전보를 48통이나 보내 졸라댔다. 드디어 5월에 승낙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전쟁이 단사간에 끝날 거라고 오산했다.

이것이 625전쟁의 遠因과 近因이다 러ㆍ일전쟁 후 시오도 루즈벨트 대통령이 친일정책을 택하지 않고 한반도를 버리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2차대전과 625전쟁을 피했을 것이다. 2차대전 후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북한을 소련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오늘날 북한의 시달림을 받고 있지 않을 것이 분명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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