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9, 2012

죽고 싶으면 죽도로 오라


"죽고싶으면 竹島로오라"
竹島(경남통영)=주정환 기자 jwjoo@joongang.co.kr


지난달 31일 오후 7시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의 작은 섬 竹島. 주민 6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남쪽바다 외딴섬의 밤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폐교 운동장엔 육지에서 찾아온 특이한 방문객 19명이 한줄로 섰다.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체를 경영하다 실패한 '전직 사장님' 들이었다. 이들 앞엔 섭씨 550도의 뜨거운 숯불이 새빨간 불티를 어지러이날리며 타고 있었다.


  "내 안의 모든 부정적인 마음을 태워버리겠읍니다. 이제 나의 미래는 불빛처럼 환하게 밝아올것입니다." 한 사람의 힘찬 외침이 고요한 섬의 정적을 깼다. 그리고 용기를 내 뜨거운 숯불위로 힘차게 걸어갔다.발바닥은 흙과 재로 더러워 졌지만 놀랍게도 불에 데인곳은 전혀 없었다. 그 뒤를 이어 18명의 동료도 무사히 숯불 위를 걸어 지나갔다. "와아아~" 함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랑하는 동료를 얼싸안고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들에게 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 숯불 걷기는 낡은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다음날 오전6시 죽도의 동쪽 바닷가.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둑어둑한 벼랑 위로 19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와 세찬 바람소리를 벗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깊은 명상에 감겼다.


 밤샘 조업으로 고단해보이는 고깃배가 바다가운데를 천천히 지나갔다. 잠시 후 벌건 아침노을이 한려수도의 섬과 섬 사이로 퍼지더니 '말갛게 씻은 얼굴'의 고운 해가 먼 산 위로 눈부신 자태를 드러냈다. 노란 아침 햇살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선 번뇌와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새 희망이 솟아났다. 머리위로 두팔을 활짝펴고 야호~ 소리를 질렀다. 오늘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누군가의 희망찬 목소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의 이름모를 노란 야생화가 새삼 아름다워보였다.


 텐트에서 명상하며 자기반성
지난달 8일 통영 여객선터미널. 19면의 '전직 사장님'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죽도로가는 여객선 '섬누리호'를 탔다. '제4기 재기 중소깅업 경영자 힐링캠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부도와 폐업으로 막대한 빚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고 음지로 숨어든 사람들을 돕기위해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이 마련한 프로그램이었다.


 연수생들은 폐고를 고쳐 만든 죽도 연수원에서 이달 2일까지 26일간 공동생활을 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 출발의 의지를 다졌다. 기자가 죽도 연수원을 찾아간 것은 캠프 24일째 되는 지난달 31일이었다. 오전 7시 통영항에서 하루 두번다니는 여객선을 타고 1시간이 조금넘게 걸려 죽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5분거리인 연수원 입구에선 '허밀청원(虛密淸圓)' 이라 적힌 현판이 손님을 맞았다.


 '묵은 마음 비우고 맑고 둥군 마음만 가득채워 가는 곳' 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형광빛 점퍼를 입은 연수생들은 운동장에서 아침식사 전 명상을 하고 있었다. 41세에서 63세까지 남자 16명과 여자 3명으로 구성된 연수생중에는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사람도 적잖다"며 "이들에게 '죽고 싶으면 죽도로오라'는 말로 캠프참가를 권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름도 생소한 외딴섬에 제발로 찾아올 사람들이라면 그만큼 마음이 절박하고 막다른 곳까지 몰려 있다는 뜻" 이라며 "연수생 들에게 형광빛 점퍼를 지급한 것은 혹시라도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사고가 났을 때 남의 눈에 쉽게 띄도록하기위해서"라고 소개했다. 연수생들은 4주의 교육기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벌렸다. 외부 세계의 편리함을 잊고 자연의 치유력에 의존해 상처받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TV 나 인터넷는 전혀보지못하고 가져온 휴대전화도 연수원에 맡겨둬야 했다. 식사는 매일 오전 9시와 오후 3시 두 끼. 연수원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야채 위주의 식사였다.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것은 기본이고 커피도 마시지 못한다. 구멍가게조차없는 죽도에선 돈이있어도 살 수가 없는 품목들이다. 섬에는 물이 귀해 빗물을 받아쓰는 사정상 샤워는 일주일에 한번만 할 수 있었다.


 캠프 2주차부터는 산 위에 각자 1인용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낮에는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밤에는 한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만한 좁은 텐트속으로 들어갔다. 텐트안에선 희미한 손전등을 비춰 책을 읽거나 명상을 했다. 고라니 등 야생동물이 부스럭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는 자장가삼아 들었다. 맑은 말이나 흐린날이나 새벽에 잠이깨면 동쪽 바닷가 위에 앉아 일출을 보며 명상에 잠겼다.


 한 원장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사업실패우 술과 담배에 절어살면서 불면증, 우울증, 당뇨 등 각종 질병을안고 오는 경우가 많다."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절제와 금기를 요구하고있다." 고 설명했다. 그는 "교육프로그램은 특정한 이론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스스로 명상하며 심리적 안정을 찾는 데 중점을 뒀다"며 "처음엔 잔뜩 굳어있던 연수생들의 표정이 날이갈수록 밝아지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모든게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
정영주(57)는 5년전만 해도 잘나가는 여성 기업인이었다. 중국 지린성 창춘에 진출해 1만 1500(평방미터 약 35000평)규모의 봉제공장을 세웠다. 직원수는 270명을 헤아렸다. 매출의 100%를 의존하는 거래처였던 국내 대기업이 중국 상업을 확장하면서 사원복 주문이 폭팔적으로 늘어난 덕분이었다. 장씨는 30대 재벌에 속하는 이 거래처를 철석같이 믿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2008년 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경기가 급격히 악하됐다. 자재 값과 인건비는 가파르게 올라가는데 거래처는 '단가를 내리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압박했다. 장씨는 '단가를 후려 치더라도 주문을 받아와야 공장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모든 게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그나마 납품대금도 제때 받지 못했다.


 봄에 납품한 제품 값을 차일피일 미루다 가을에야 겨우주는 건 예사였다. 5년전 납품한 대금 중 아직 받지못한 돈도 남아있다. 거래처 담당자가 바뀔 때 마다 예전 담당자가 약속했던 사항은 모르쇠로 잡아뗐다. 정부는 '상생'과 '동반성장'을 외쳤지만 현장에선 전혀 딴 세상 얘기였다. 정씨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부처에도 민원을 냈지만 아무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공장 자금사정은 급격히 나빠졌지만 복잡한 중국 법규에 따라 공장문을 쉽게 닫을 수도 없었다.


주문 물량이 반토막으로 줄고 공장 가동율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노는 직원들을 어쩔 수없이 집으로 보냈다가 부당해고로 고발당했다. 정씨는 "거래처 담당자가 단가이하로 회사 비용을 절감했다며 성과급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피눈물이 났다. 그 성과급이 결국 나 같은 중소기업의 고혈을 쥐어짠 대가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소연 했다. 그러면서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분위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고 울먹였다.


 세상을 원망하며 눈물로 살아가던 장씨는 이번 캠프에 참가하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했다. 장씨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하루종일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였지만 이젠 다 내려놓고 웃으며 살아가기로 했다." 고 말했다. 그는 "야외에서 혼자 명상하면서 마음의 부자가되니까 모든게 달라 보였다. 아들이 '모든 분노를 죽도 바다에 던지고 오세요'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 말대로 실천하려고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익훈(58)씨는 1998년 외환위기 때 부도난 공장을 인수해 14년간 제빵업체를 운영했다. 성실 납세기업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열심히 세금도내고 사회에 공헌한다는 자부심도 가졌다. 하루 평균 5t 분량의 밀가루을 빵 기계에 쏟아부으며 장미빛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비교적 재무상태가 탄탄했던 거래처가 어느 날 인수합병(M&A) 전문가에게 넘어가더니 순식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거래처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빚잔치를 하고 매각되면서 애써 납품한 물건 값을 거의 다 날려버렸다. 거래처의 새 주인은 10대 재벌에 속하는 대기업이었다. 잠시 희망도 거져봤지만 소용없었다. 새 주인은 납품단가 인하부터 요구해왔다. "지난해 11월 공장 문을 닫고 골방에 틀어박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며 "결국 내가 사업 이이템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반신반의하며 죽도를 찾아온 그는 교육 1주차에는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그러나 2주차에 들어가면서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매일 해 뜨는걸 보면서 분노하는 마음을 내려놨다. 어느 정신과 의사도 해주지못한 마음의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이어 "이곳에서 생전 처음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됐다"며 "그동안 무릎과 어깨가 좋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저절로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재기성공하면 같은 처지 사람돕고 싶어
 아항훈(46)씨는 20년전 작은 사진관에서 출발해 한동안 승승장구하며 결혼식 관련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깢지 사업을 키워나갔다. 결혼식이 몰리는 계절에는 하루에만 300만원의 현금을 쓸어담은 적도 있었다. 연매출 10억원대에 직원수는 40명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쳐 예식장 건설에 뛰어든 게 화근 이었다.


  6600평방미터(약 2000평)의 땅을 구입해 건축허가를 신청했는데 담당공무원이 2년이나 질질 끌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간신히 허가는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금융회사의 돈줄이 꽉 막혀버렸다. 할 수 없이 3층짜리 예식장을 포기하고 1층짜리 일반건물로 용도를 바꿔 건출을 마무리 했다. 그런데 경기불황으로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건물을 놀릴 수 없었던 이씨는 직접 고깃집을 차렸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게 장사가 됐다. 하지만 구제역 파동을 겪으면서 손님이 뚝 끊기고 말았다. 그는 "모든 게 내 잘못이고 내 판단 착오였다."고 했다. TV 한대 남기지 못하고 전 재산이 경매로 넘어갔다. 먹고살기 위해 대리운전 핸들을 잡았던 이씨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손님에게서 재기중소기업개발원에 관한 얘기를 듣고 죽도를 찾았다. 이씨는 "여기서 4주간 지내면서 내 마음속에 응어리진 부분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나 자신을 학대하고 비관하며 미워하기만 했는데, 이젠 나부터 나 자신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연수생들은 죽도를 나가는 순간 다시 현실의 벼랑에 서야한다. 죽도의 벼랑에서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란 사실을 연수생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육을 마치는 연수생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중소 제조업체를 경영하다 부도를 냈다는 장만경(56)씨는 "처음 죽도에 들어올 때는 아 자신을 거지나 쓰레기로 여길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며 "지금은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재도전할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사업에 성공한다면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와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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