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12, 2011

제삼장 시작 학 산다는 것은 배우는것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孔子 八十翁 怡堂 安秉煜 수필집

제 삼장 시작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

인간의 일생은 3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공부하고 준비하는 시대다. 청소년 시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사회에 나아가서 활동하는 시대다. 중장년 시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사회적 활동에서 조용히 울러나 安息하는 것이다. 인생의 노년 시대가 여기에 속한다.

생즉학生卽學,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Living is Learning. 우리는 살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살아야한다. 우리는 살기위하여 배우고 배우기위해 산다.

日日學, 우리는 날마다 배우는 學人이 되어야 한다. 인생은 학교요, 우리는 학생이다.

인간의 행동 중에서 배운다는 행동처럼 좋은 것이 없다. 배운다는 행동은 인간의 가장 생산적인 행동이요, 건설적인 행동이요, 창조적인 행동이다.

현대는 고도의 학습 사회다. 우리는 저마다 열심히 배워야 한다. 한문자 5만여 자 중에서 제일 좋은 글자는 배울 학 學자다.배울 학자는 어떤 구조를 갖는가.

어린애 子가 책상에서 一 두손으로 臼 무엇을 爻 배우고 있는 모양을 그린 상형 문자다 學.

지상에는 수억 권의 책이 있지만, 첫 글자가 배울학 자에서 시작하는 책은 오직《논어》밖에없다.

《논어》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를 따라 복습을 하니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논어》는 공부하는 기쁨과 학습하는 행복을 가장 먼저 강조했다.

《 논어》는 과거 1천여 년 동안 우리 한국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우리 국민처럼 배우기를 강조하고 교육을 역설하는 국민은 없다. 우리가 과거 30여 년 사이에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급속하게 발전한 중요한 요인은 우리국민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우리는 유교권儒敎圈에 속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교육 국가로서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갖고 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강점의 하나다.

나는 학생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학생이란 무슨 뜻이냐.배우는 인생, 배우는 생활, 배우는 생애, 배우는 생명이란 뜻이다.

배움의 정신은 세 가지다. 첫째는 향상向上의 정신이다.향상의 의지가 강한 사람일수록 열심히 배운다. 보보등고步步登高, 우리는 쉬지 않고 한발 한발 높은 데로 올라가야 한다.

둘째로 배움의 정신은 활동의 정신이다. 왕성한 활동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열심히 배운다. 활동의 의욕이 없는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세째는 겸손의 정신이다. 교만한 사람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배운다는 것은 겸손하다는 것이다. 겸손한 사람일수록 열심히 배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학생의 정신을 가지고 부지런히 배워야한다.

몇년 전에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시아 기독교 교육자 대회가 열였다. 그때 가장 깊은 감명을 준 것은 케리 여사였다. 케리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현대인들이 저지르기 쉬운 세 가지 정신적 범죄가 있다. 첫째는 불학不學.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불교不敎,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불위不爲,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다.」모르면 열심히 배워야한다. 모르는데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것은 정신적 태만이다.

독일의 시인 괴테 Goethe는 이렇게 말했다.「가장 유능한 사람은 부단히 배우는 사람이다.

배워야 능력이 생긴다. 배우지 않으면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능력은 학습의 산물이다. 시인 괴테는 또 이렇게 말했다. 「쓸모가 없는 존재는 죽은 존재다.

우리는 多才多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無才無能한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는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쓸모가 없는 사람은 무용지물無用之物로 전락한다.

무학인無學人은 무능인無能人이요, 무능인無能人은 무용인無用人이다.유학인有學人은 유능인有能人이요, 유능인有能人은 유용인有用人이다.

무용인은 사회적으로 존재 가치가 적고 유용인은 사회적으로 존재가치가 크다.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육적 태만이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가르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부모는 자식을 가르쳐야 하고, 형은 동생을 가르쳐야하고, 과장은 자기의 부하를 가르쳐야 한다.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지식과 기술과 경험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남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처럼 좋은 것이 없다. 돈이나 물질은 나누어 주면 없어지지만 지식과 결험과 기술은 나누어 주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의 기본적 차이가 잇다.

배우는 자가 되는 동시에 가르치는 자가 되어라. 남을 가르친다는 것처럼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 없다.

가르칠 교敎자는 아버지가 손에 채찍을 들고 자식을 가르치는 모양을 그린 상형 문자다.

중국에서 교육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맹자孟子다. 그전에는 교학敎學이란 말을 썻다. 맹자가 교육이란 말을 쓴 이후 이 말이 한자 문화권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맹자는 군자삼락론君子三樂論을 말했다. 군지에게는 인생의 세가지 즐거움이 있다.

첫째로 부모처자가 모두 건강하고, 형제가 아무 사고없이 지내는 것이 인생의 一樂이다

부모구존 형제무고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둘째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 대하여 떳떳하고, 천지신명 앞에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二樂이다 앙불괴어천 부부작어천 仰不愧 於天, 俯不怍 於人, 二樂也.

이말에서 부앙천지俯仰天地란 말이 나왔다.

셋째로 천하의 재주있는 인재를 모아서 교육하는 것이 인생의 三樂이다 득천하영재이교육지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맹자》의 진심盡心 上편에 나오는 명언이다. 영英은 꽃부리 영자요 아름다울 영자다. 꽃부리같이 빛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처럼 세상에 보람있는 일이 없다.

사람이 일생동안 정열을 바쳐 해볼 만한 가장 중요한 사업은 교육 사업이다. 육영育英 사업처럼 훌륭한 일이 없다. 교육자들의 모임을 三樂會라고 하는 것은 맹자의 이 명언에서 유래한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 태만이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도 하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의무의 태만이요, 공덕심公德心의 부족이요, 시민 정신의 결여요, 책임감의 결핍이다.

복도에 떨어진 종이 조각은 보는 즉시 주어야 한다.대낮에 공연히 켜 있는 전깃불은 반드시 꺼야 한다. 공원의 수도꼭지에서 쓸데없이 물이 나오면 당장 꼭지를 잠가야 한다. 이런 일은 지극히 쉽고 사소한 일이요. 교양있는 시민의 당연한 의무에 속한다. 이런 작은 일을 저마다 실천하면 밝고 깨끗하고 질서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

동물의 세계는 학교가 없다. 책도 없고 선생도 없다. 인간의 세계에만 학교가 있다.

동물은 자연이 부여한 본능本能의 지혜로 충분히 살아간다. 본능本能은 동물이 태어날 째부터 갖고 있는 선천적인 근본根本적 생활 능력能力이다.

거미는 가르치지 않아도 정교精巧하고 섬세한 거미줄을 칠줄 안다. 소는 가르치지 않아도 먹어야 할 풀과 먹어서는 안 될 풀을 정확하게 분간한다. 소는 절대로 독초毒草를 먹지 않는다. 이것이 동물이 갖고있는 본능의 놀라운 지혜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장 무능무력無能無力한 동물로 태어났다. 말도 할 줄 모르고, 밥도 먹을 줄 모른다. 내버려두면 죽고 만다.어린애는 부모의 장기간의 정성스러운 양육과 보호가 절대로 필요하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는 《교육학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피조물被造物이다.」인간 이외의 딴 피조물은 교육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인간은 교육이 절대로 필요하다.인간이 교육을 받지 못하면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칸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만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에서 교육을 빼면 남는 것이 없다.인간은 교육의 産物이다.

우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우리 몸에서 제거하면 우리는 미개인과 야만인으로 전락한다. 교육이 인간을 만든다. 교육에 의해서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는 만물중에 가장 무력한 동물이지만 지는知能이라고 하는 놀라운 학습 능력을 갖는다.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 되고, 문명의 건설자가 되고, 역사의 창조자가 되고, 지구의 주인이 된 것은 무한한 학습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학습 능력처럼 놀라운 것이 없다. 다시 칸트는 아렇게 말했다.

「 교육은 인간에게 부과된 최대최난最大最難의 과제다. 」인간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느냐. 어떻게 교육해야만 인간의 재능과 특색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고, 인가다운 인간을 만들 수 있느냐, 익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농사중에서 제일 어려운 농사는 인생농사人生農事다. 교육은 인생농사다. 교육은 하나의 기술技術이다.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기술이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기술이 있다.

첫째는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다. 우리는 이것을 생산生産기술, 또는 물질기술이라고 한다.우리는 양복을 만들고, 자동차를 만든다. 자연과 물질이라는 재료에 인간의 두뇌와 재주와 노력을 가공하여 쓸 만한 물건을 제작한다.

둘째는 사회社會기술이다. 어떤 제도, 어떤 조직, 어떤체재를 만들어야만 살기 좋은 사회,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정치라고 한다. 정치는 바람직한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기술이다. 이것은 생산 기술보다 훨씬어렵다.정치는 경국제민經國濟民, 즉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기술이다.

셋째는 사람을 만드는 기술이다. 이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바람직한 인간을 만드는 기술이다.

장 자크 루소Rousseau가 그의 유명한 교육 소설《에밀》에서 갈파한 바와 같이 「교육의 목적은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Spencer도 같은 말을 했다. 「교육의 목적은 인격 형성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사람, 인간다운 인간, 인격다운 인격을 만들 수 있느냐. 물음은 간단하지만 대답은 간단하지않다. 교육은 인간을 만드는 어려운 기술이다.

칸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교육은 한 세대가 그 경험과 지식을 그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그 세대는 여기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또 그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

교육은 문화의 계승이다. 다시 칸트는 말했다.

「인간에게는 선善의 싹이있다. 좋은 교육이야말로 세계의 모든 선善이 싹트는 원천이다.

「신神은 인간에게 이렇게 외칠른지 모른다. 나는 선善으로 향하는 모든 소질을 네게 부여했다.이소질을 발전시키는 것이 네 의무다. 그러므로 네 幸不幸은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교육은 소질의 계발啓發이다. 신은 우리에게 善의 싹을 심어 주었다. 이 싹을 지혜롭게 개화결실開花結實케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요 책임이다.

한문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식을 낳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식을 기르는 것이 어렵다 생자비난 양자난生子非難 養子難. 자식을 기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 양자비난 교자난養子非難 敎子難.

자시을 낳아서 기르는 일보다도 가르치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인간을 만들 수 있느냐. 어떻게 해야만 이상적 인격 형성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은 칸트가 갈파한 바와같이 인간에게 부과된 가장 중대하고 가장 어려운 과제다.

학學의 목적이 무엇이냐. 學의 목적은 知요, 覺이다. 우리는 알기 위해서 배우고, 깨닫기 위해서 배운다. 학의 목적은 바로알고 깨닫는 것이다. 正知正覺이 학의 목적이다.

중국의 위대한 지도자인 孫文은 그의 명저 《三民主義삼민주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知覺을 중심으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선지선각자先知先覺者, 먼저알고 먼저 깨닫는 자다.둘째는 후지후각자後知後覺者, 나중에 알고 나중에 깨닫는 자다. 세째는 부지부각자不知不覺者,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소수의 특출한 先知先覺者가 있다. 그들은 역사가 배출한 탁월한 인물로서 사회에 선구적 영도자先驅的 領導者가 된다.선지선각자의 말씀을 듣고 나중에알고 나중에 깨닫는 사람이 後知後覺者이다. 우리는 적어도 후지후각자는 되어야 한다.

우리는 知의 인간이 되어야한다. 우리는 사물을 알되 정확하게 알고, 분명하게 알고, 깊이있게 알아야 한다. 우리는 明知人이 되고, 良知人이 되고, 上知人이 되고, 大知人이 되고,예지인叡智人이 되어야한다.

인간의 知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남을 속이는 교활한지 교지狡知가되고, 사람을 해치는 간악한지 간지奸知가 되고, 사악한지 사지邪知로 전락한다.

우리는 覺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覺은 깨달을 각자다. 覺은 사물의 이치를 깊이 환하게 깨닫는 것이요, 각성하는것이다. 覺 자는 배울학學 자와 볼견見 자가 합해진 글자다. 많이 배우고 많이 보아야 바로 깨달을 수 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 自覺이요, 먼저 깨닫는 것이 先覺이요, 늦게 깨닫는 것이 면각晩覺이요, 근본을 깨닫는 것이 本覺이요,바로 깨닫는 것이 正覺이요, 원만하게 깨닫는 것이 원각圓覺이요, 크게 깨닫는 것이 大覺이다.

正知正覺에 도달할 때 마음에 미혹迷惑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밝아지고, 전신이 총명해지고, 光明正大의 경지에 도달한다.

知와 覺의 목적이 무엇이냐, 行이다, 알면 行해야 하고, 깨달으면 실천해야 한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깨달으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정말 깨닫는 것이 아니다.

行이 없는 자, 行이 없는 覺은 올바른 知가 아니요, 올바른 覺이 아니다. 우리는 지행일치知行一致, 覺行일치, 學行일치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제 삼장 끝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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