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4, 2010

홀로사는 줄거움 법정스님

홀로사는 줄거움
봄에 책을 내며 꽃이 지나간 자리에 초록이 눈부시다. 온천지가 살아있다는 소식
으로 생명의 물감을 마음껏 풀어내고 있다.
이 책에 실은 글들은 (( 오두막 편지 )) 이후 각과 삶의 모습을 담은 것들이다.
2004년 5월 법정
산방에 지친 달빛에 잠이 깨어 요즘 자다가 몇 차례씩 깬다.
쌓인 눈에 비친 달빛이 방 안에까지 훤히 스며들어 자주 눈을 뜬다.
내 방 안에 들어온 손님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자리에 일어나 마주앉는다.
천지간에 아무 소리도 없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다. 이 적막 강산에 어쩌다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흩날리는 소리가 들릴 뿐.
그리고 때로는 내 기침소리에 잠에서 깰 때가 있다.
머리맡에 벗어 놓은 누더기를 걸치고 앉는다.
기침이 한밤중에 나를 깨운 까닭을 헤아린다.
한낮의 좌정보다 살아온 날보다 자다가 깬 한밤중의 이 좌정을 나는 즐기고자 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면
기침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다. 맑은 정신이 든다. 중천에 떠 있는 달처럼
내 둘레를 두루두루 바춰주고 싶다.
이 겨울 아침나절, 산중에 피어난 눈꽃은 환상적이다. 언뜻 달밤에 피어있는
벗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는 이렇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조화를 간직하고있다.
그 어떤 화가일지라도 이처럼 완벽한 설경산수는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자연은 어떤 분별도 사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무심히 드러낼 뿐이다.
산중에 있는 어떤 절에 갔더니 한 스님 방에 니름 있는 화가의 산수화가 걸려있었다.
아주 뛰어난 그림이였다.
그러나 주인과 벽을 잘못 만나 그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연 산수가 있는 산중이기 때문에 그 산수를 모방한 그림이 기를 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산수화는 자연과 떨어진 도시에 있어야 어울리고
그런 곳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살아서 숨쉰다.
이런 일이있었다.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이 백만 불에 팔렸다.
그림을 갖고 싶은 한 귀부인은 그 그림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인다.
한 미술평론가가 그녀에게 말한다. "이 그림은 진품이 틀림없읍니다. 이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의 말을 듣고 귀부인은 그림을 산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림을 들고 직접 피카소를 찾아간다. "선생님, 저는 이미 이 그림을 화상에게서
샀으므로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그림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 피카소는 그 그림을 보더니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 미술평론가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와 동거하던 애인도
그곳에 있었는데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부인, 이 그림은 진품이 아님니다."
그러자 피카소의 젊은 애인이 말한다. "아니 여보,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이 이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평론가 선생도 그자리에 있었구요.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어요?" 피카소는 말한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리지날이 아닙니다. 나는 그 전에도 그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읍니다. 그 시절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오리지널은 지금 파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피카소의 참 면목이 있다. 누가 만들었느냐는 주요하지 않다.
설사 화가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진짜가 아니고 모조품일 수 있다는 겄이다.
그에겐 맨 처음에 그린 그림이 오리진날이었다. 그 그림은 자기 존재의 내면에서
탄생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그림을 그릴 때 아무 잡념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
그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위대한 창조는 무심에서 나온다.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고 텅 빈 충만인 공( )의 경지다.
오늘 ((금강경 오가해 (( ))를 펼쳐 야보신사의 시를 디시 읽었다.
오두막 이숙한 밤 홀로 앉아 있으니
고요하고 적적해
본래의 자연 무슨 일로
서녘 바람 숲을 흔드는고
외기러기
먼 하늘에 울고 간다.
아보선사의 노래처럼 고요하고 적적한 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달맞이 산방에 들어와 잠든 나를 깨운 것도, 소리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달의
숨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도 이 모두가 무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였다가 지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강물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도 또한 자연의 무심이다.
이런 일을 그 누가 참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 앞에 무심히 귀를 기울일
뿐이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받아드리려면 입 다물고 그저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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