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13, 2012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
                                              이 아침에 이기희 윈드 화랑 대표

가을이 떠나고 있다. 홀로 선책길에 올라 낙엽을 밟아보라. 낙엽은 아침이슬로 눈물을 감추고 제 몸이 밟힐 때마다 바스락 신음 소리내며 작별을 서두른다, 떠나가는 모든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꽃들의 향연이 떠나간 뒤뜰엔 마른 풀잎들이 생명을 품고 내일을 기약한다, 계절은 등 돌리며 빛바랜 정원의 꽃씨 한 알 떨어트린다.

묵은 것들은 농익은 맛을 낸다. 상큼하진 않지만 감칠맛으로 다가온다. 겉절이는 풋풋하고 신성한 맛을 내지만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 추억의 정원에는 오래되고 빛바랜, 쿨쿨한 냄새나는 해묵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묵은지는 오래된 김장 김치로 양념을 강하지 않게 해 담근다.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숫성시켜야 제 맛이 나는 데 오래 숙성 저장 할수록 맛있고 깊은 맛을 낸다. 추억의 창고에 묵은지가 많은 사람의 하루는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다.

묵은지는 일반 김장김치보다 조금 짜게 담가야 긴 겨울을 버틴다. 인생의 짠맛, 신맛, 험한 맛을 많이 본 사람은 엄동설한을 버틸힘과 용기를얻는다.

너무 빨리 숫성된 김치는 금방 신맛이 나지만 묵은지는 서서히 오랜기간 발효되기 때문에 시어지지 않는게 특징이다. 짧은 시간 한 방에 날리는 성공은 쉽게 사그러들지만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삶은 묵은지처럼 오래 지속된다.

묵은지 배추는 속이 덜차고 푸른잎이 많으며 단단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

사는 게 마음에 덜차고 적게 가져도 늘 푸른 마음으로 단단하게 살면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낼 수 있을까?

김장은 배추를 소금물에 담근다. 는 침장(沈藏)에서 나왔는데 김장으로 바뀌게 됐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유래 됐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변형을 거듭했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고 한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며 다시 죽고, 매운 고추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돼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마지막으로 죽는다.

김장 담그는 일은 다가올 험난한 엄동설한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익숙한 손 맛으로 오래된 정원에서 해묵은 추억의 불씨 하나 지피는 일이다.

난로가에서 톡 톡 튀는 밤톨 까먹던 그 유년의 시간으로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일이다.

오늘이 허전한 그대여, 떠나는 게절의 끝자락 붙잡고 처우적거리는 그대여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마음 속 깇은 곳에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의 항아리를 꺼내 보세요.

너무 자주 열어보면 그 아름답던 날들이 빨리 시어질지 몰라요. 추억의 항아리는 우거지로 단단히 덮어 땅속 깊이 묻어 두세요.

참쌀 풀 섞은 물에 고춧가루와 고추씨를 개고 열치액젓 다진마늘과 생강 소금을 넣듯 생의 모든 슬픔과 기쁨, 황홀한 추억을 모두 담아 꼭꼭봉해 당신 가슴깊이 묻어 두세요. 

당신이 와로울 때마다 은근하게 잘익은 추억의 묵은지가 오래된 정원에서 늘 당신과 함께 하길 바라요. 

Friday, November 9, 2012

절차의 힘 1




절차의 힘 프롤로그 1
사이토 다가시 지음 . 홓성민 옮김


     절차의 힘 프롤로그 1

사이토 다가시 지음 . 홓성민 옮김
일을 쉽고 편하게 만들어 주는
절차의 힘은 어느 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단 철저한 훈련을 통해 길러진 절차의 힘은 다른 영역에 효과적으로 응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감을 희복하는데 큰 도움이된다. 한 가지일에 탁월한 재능을발휘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잘 한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즉 한가지 일에 정통하면 그 내면의 절차가 확실히 이해되고, 어떤 방식으로 절차를 밟아가야한다는 것이 몸에 익혀지게 되므로 다른일에도 그것을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절차의 힘을 단련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일을 할 때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절차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한 뒤 일을 시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해도 효율성 면에서 현격히 차이가 난다. --좋은 생각--

절차의 힘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특별한 천재나 예술가를 제외하면 잠재력이나 재능 면에서 사람들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단지 일을 하는 데 있어 차근 차근 절차를 밟아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믾은 사람들은 애초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없었다고 한탄하며 절망을 한다. 그러나 실패라는 쓰디쓴 결과를 놓고 자신의 능력부족이나 불우한 성장 과정, 열악한 환경 탓으로 돌려버리면 더 이상 개선할 여지가 없어진다.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해 버렸으므로 노력도 하지않게 된다. 하지만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었다' 고 생각하면 당연히 그에대한 대처법도 달라진다. 이 점이 중요하다.


공부를 예로 들어보자. 문제를 하나 푸는 데도 아무 생각없이 무턱대고 푸는것과 차근차근 공식에 대입해 가며 푸는 것과는 결과에 있어 큰 차이가 난다. 시험 점수가 나쁘게 나오면 자신의 안 좋은 머리 탓으로 돌리거나 "원래부터 이 과목은 나에게 맞지 않았어" 하며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시험 결과가 나빳던 것은 그에 대비해 준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거나 시간을 적절하게 배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냉철하게 판단 할 수 있게 되면 실력은 향상된다.


집안이나 직장에서 일을 제대로 훈련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차가 생명이라는 것을 잘 안다. 절차를 바르게 인식하면 자신의 실패에대해 질책하는 정도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실패를 딛고 일어설 염두가 나지 않지만, '내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제대로 절차를 밟지 않았던 것 뿐이다.' 라고 생각하면 자신감을 잃지않고 새롭게 도전하여 일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갈 수 있게 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반성하는 것을 좋아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상황이 한결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귿이 자신의 인간성 전체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고도 단지 차례와 방법을 효과적으로 바꾸는 간단한 일을 통해 흭기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아서 일이 잘못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절차의 힘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절차의 힘이라는 개념을 내것으로 만들면 여러가지 일과 살황을 절차라는 절단면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즉, 모든 일에 절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됨으로서 다양한 종류의 활동을 서로 연결해 보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절차의 힘이 갖는 효용성이다. 예를 들어, 요리를 하는 일과 논문을 쓰는 일은 완전 별개의 활동처럼 보이지만, 절차의 힘이라는 칼로 잘라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공통점이 선명하게 들어난다. 이 개념의 편리함을 이해하게 되면 차츰 삶에 자신감이 생기고 그만큼 향상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원래 절차라는 단어는 회의 테이블에서 논의되는 아론적인 말아라기보다는 현장에서 사용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말이다. 조각상 같은 예술 작품을 만들 경우에도 절차가 중요하다고 조각가들은 이야기 한다. 어쩌면 예술적 재능은 약간만 있으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절차를 제대로 알고 익힘으로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는 건지도 머른다.


절차를 배우고 익히는 이런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예술같은 창조적인 분야에서조차 재능이 아닌 절차의 힘이 중요한 관건이라면, 그 밖의 다른 활동들에서 절차의 함이 갖는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절차의 힘만 익히면 모든 활동이 한결 수월해지고 편해진다는 발상은 무척 흥미롭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또 실패한 일에 대해서 보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안에 잠자고 있는 절차의 힘을 깨워라
절차의 힘에 곤한 이야기를 하다 보년, "내겐 절차의 힘이 없으니 그것을익힐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사람을ㄹ 자주 만나게 된다. "나느 절차의 힘을 갖고 있읍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을 이제까지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이 책에서 나는 절차의 힘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배우고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볻다 더 중요한 점은 자신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절차의 힘을 분명하게 자각하는 일이다. 절차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처 그것ㅇ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일 처리 능력이 없다고 단정 지으며 노력핮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절차에도 여러가지 형태가있으며, 자신에게 꼿 맞는 절차 스타일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모리 오가이(군의관 . 소설가) 처럼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함면서 일을 해나가는 탕입이 있는가 하면, 사카구치 안고(소설가 . 평론가) 처럼 방안에 물건들을 잔뜩 늘어놓은 채 소설을 쓰는 탕입도 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각품을 많아 남긴 것을 보아도 사람마다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 밟는 절차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가이 경우, 먼저 주변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는 방식의 절차의 힘을 갖고있다.
그에 반해 사카구치 안고의 경우 비록방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지만, 바로 그 난잡함이 그에게는 소설 창작의 핵심 포인트다. 깔끔하게 저리되어 있기보다 오히려 마구 어질러져 있는 편이 훨씬 일이 잘된다면 그 난잡한 주변환경이 그에게는 바로효과적인 방법이자 절차가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부 요시하루(일본 장기의 최고수)라는 장기의 대가가 있는데, 예전에 그는 여관이나 호텔에서 쉽사리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장기의 대국은 주로 호텔이나 여관에서 이루어지는 터라 번번이 쉽게 지쳐버려 대국에도 자주 영향을 받곤 했다. 이 문제를 그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우선 여관에 도착하면 방에 짐을 몽땅 꺼내놓는다. 그러고는 자기집처럼 마구 어지른다. 그러면, 자기만의 공간처럼 느껴져 편안한 기분으로 대국에 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부의 경우, 여관에서 방을 어지르는 것이 그가 가진 절차의 힘이다. 정리정돈을 못한다고 해서 일을 할 때 젍차를 제대로 밟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책상위에 서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어디에 무엇이있는지 알아서 실수없이 민첩하게 일을 처리해 내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맞는 절차의 스타일을 발견하고 키워가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절차의 힘이 가진 가장중요한 의의다. 설사 전반적인 일을 아무리 뛰여나게 완수해 낸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절차의 스타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만의 방식을 활용하는 절차의 힘을 체계적으로 기술화 하는것이 이 책의 최종 목표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 첫번째 단계로서 먼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한는 절차의 힘을 깨달아야한다. 직장에서 일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른일에서는 확실한 절차로 마무리를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 처럼 특정한 일에 대해서는 뛰어난 절차의 힘을 발휘하면서도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가정적인 타입으로 요리를 잘하면서도 직장일에는 서툰 사람은 요리에 필요한 절차의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업무에 연결하는 회로가 없는 것이다.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는 일을 출발점으로 하여 서툴고 생소한 분야를 차츰 극복해 나가는 것이 바로 절차의 힘을 키우는 핵심 요령이다. 어떤 영역에서 자신만의 절차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 힘을 다른일에 적극적으로 응용해야 한다.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제가가각 다른 절차의 힘을 전부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절차의 힘을 발견하여 그것을 차츰 발전시키고 확장시켜가는 것이 중요하다.


죽고 싶으면 죽도로 오라


"죽고싶으면 竹島로오라"
竹島(경남통영)=주정환 기자 jwjoo@joongang.co.kr


지난달 31일 오후 7시 경남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의 작은 섬 竹島. 주민 60여 명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남쪽바다 외딴섬의 밤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폐교 운동장엔 육지에서 찾아온 특이한 방문객 19명이 한줄로 섰다. 중소기업이나 개인 사업체를 경영하다 실패한 '전직 사장님' 들이었다. 이들 앞엔 섭씨 550도의 뜨거운 숯불이 새빨간 불티를 어지러이날리며 타고 있었다.


  "내 안의 모든 부정적인 마음을 태워버리겠읍니다. 이제 나의 미래는 불빛처럼 환하게 밝아올것입니다." 한 사람의 힘찬 외침이 고요한 섬의 정적을 깼다. 그리고 용기를 내 뜨거운 숯불위로 힘차게 걸어갔다.발바닥은 흙과 재로 더러워 졌지만 놀랍게도 불에 데인곳은 전혀 없었다. 그 뒤를 이어 18명의 동료도 무사히 숯불 위를 걸어 지나갔다. "와아아~" 함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사랑하는 동료를 얼싸안고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들에게 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 숯불 걷기는 낡은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다음날 오전6시 죽도의 동쪽 바닷가.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둑어둑한 벼랑 위로 19명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와 세찬 바람소리를 벗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깊은 명상에 감겼다.


 밤샘 조업으로 고단해보이는 고깃배가 바다가운데를 천천히 지나갔다. 잠시 후 벌건 아침노을이 한려수도의 섬과 섬 사이로 퍼지더니 '말갛게 씻은 얼굴'의 고운 해가 먼 산 위로 눈부신 자태를 드러냈다. 노란 아침 햇살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 속에선 번뇌와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새 희망이 솟아났다. 머리위로 두팔을 활짝펴고 야호~ 소리를 질렀다. 오늘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뜰거야." 누군가의 희망찬 목소리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가의 이름모를 노란 야생화가 새삼 아름다워보였다.


 텐트에서 명상하며 자기반성
지난달 8일 통영 여객선터미널. 19면의 '전직 사장님'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죽도로가는 여객선 '섬누리호'를 탔다. '제4기 재기 중소깅업 경영자 힐링캠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부도와 폐업으로 막대한 빚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고 음지로 숨어든 사람들을 돕기위해 재기중소기업개발원이 마련한 프로그램이었다.


 연수생들은 폐고를 고쳐 만든 죽도 연수원에서 이달 2일까지 26일간 공동생활을 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 출발의 의지를 다졌다. 기자가 죽도 연수원을 찾아간 것은 캠프 24일째 되는 지난달 31일이었다. 오전 7시 통영항에서 하루 두번다니는 여객선을 타고 1시간이 조금넘게 걸려 죽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5분거리인 연수원 입구에선 '허밀청원(虛密淸圓)' 이라 적힌 현판이 손님을 맞았다.


 '묵은 마음 비우고 맑고 둥군 마음만 가득채워 가는 곳' 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형광빛 점퍼를 입은 연수생들은 운동장에서 아침식사 전 명상을 하고 있었다. 41세에서 63세까지 남자 16명과 여자 3명으로 구성된 연수생중에는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사람도 적잖다"며 "이들에게 '죽고 싶으면 죽도로오라'는 말로 캠프참가를 권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름도 생소한 외딴섬에 제발로 찾아올 사람들이라면 그만큼 마음이 절박하고 막다른 곳까지 몰려 있다는 뜻" 이라며 "연수생 들에게 형광빛 점퍼를 지급한 것은 혹시라도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사고가 났을 때 남의 눈에 쉽게 띄도록하기위해서"라고 소개했다. 연수생들은 4주의 교육기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벌렸다. 외부 세계의 편리함을 잊고 자연의 치유력에 의존해 상처받은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TV 나 인터넷는 전혀보지못하고 가져온 휴대전화도 연수원에 맡겨둬야 했다. 식사는 매일 오전 9시와 오후 3시 두 끼. 연수원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야채 위주의 식사였다.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하는것은 기본이고 커피도 마시지 못한다. 구멍가게조차없는 죽도에선 돈이있어도 살 수가 없는 품목들이다. 섬에는 물이 귀해 빗물을 받아쓰는 사정상 샤워는 일주일에 한번만 할 수 있었다.


 캠프 2주차부터는 산 위에 각자 1인용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낮에는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밤에는 한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만한 좁은 텐트속으로 들어갔다. 텐트안에선 희미한 손전등을 비춰 책을 읽거나 명상을 했다. 고라니 등 야생동물이 부스럭거리며 돌아다니는 소리는 자장가삼아 들었다. 맑은 말이나 흐린날이나 새벽에 잠이깨면 동쪽 바닷가 위에 앉아 일출을 보며 명상에 잠겼다.


 한 원장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사업실패우 술과 담배에 절어살면서 불면증, 우울증, 당뇨 등 각종 질병을안고 오는 경우가 많다."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절제와 금기를 요구하고있다." 고 설명했다. 그는 "교육프로그램은 특정한 이론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스스로 명상하며 심리적 안정을 찾는 데 중점을 뒀다"며 "처음엔 잔뜩 굳어있던 연수생들의 표정이 날이갈수록 밝아지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모든게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
정영주(57)는 5년전만 해도 잘나가는 여성 기업인이었다. 중국 지린성 창춘에 진출해 1만 1500(평방미터 약 35000평)규모의 봉제공장을 세웠다. 직원수는 270명을 헤아렸다. 매출의 100%를 의존하는 거래처였던 국내 대기업이 중국 상업을 확장하면서 사원복 주문이 폭팔적으로 늘어난 덕분이었다. 장씨는 30대 재벌에 속하는 이 거래처를 철석같이 믿고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2008년 말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경기가 급격히 악하됐다. 자재 값과 인건비는 가파르게 올라가는데 거래처는 '단가를 내리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압박했다. 장씨는 '단가를 후려 치더라도 주문을 받아와야 공장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모든 게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그나마 납품대금도 제때 받지 못했다.


 봄에 납품한 제품 값을 차일피일 미루다 가을에야 겨우주는 건 예사였다. 5년전 납품한 대금 중 아직 받지못한 돈도 남아있다. 거래처 담당자가 바뀔 때 마다 예전 담당자가 약속했던 사항은 모르쇠로 잡아뗐다. 정부는 '상생'과 '동반성장'을 외쳤지만 현장에선 전혀 딴 세상 얘기였다. 정씨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정부부처에도 민원을 냈지만 아무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공장 자금사정은 급격히 나빠졌지만 복잡한 중국 법규에 따라 공장문을 쉽게 닫을 수도 없었다.


주문 물량이 반토막으로 줄고 공장 가동율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노는 직원들을 어쩔 수없이 집으로 보냈다가 부당해고로 고발당했다. 정씨는 "거래처 담당자가 단가이하로 회사 비용을 절감했다며 성과급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피눈물이 났다. 그 성과급이 결국 나 같은 중소기업의 고혈을 쥐어짠 대가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소연 했다. 그러면서 "여자라고 우습게 보는 분위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고 울먹였다.


 세상을 원망하며 눈물로 살아가던 장씨는 이번 캠프에 참가하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했다. 장씨는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하루종일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였지만 이젠 다 내려놓고 웃으며 살아가기로 했다." 고 말했다. 그는 "야외에서 혼자 명상하면서 마음의 부자가되니까 모든게 달라 보였다. 아들이 '모든 분노를 죽도 바다에 던지고 오세요'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그 말대로 실천하려고 한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익훈(58)씨는 1998년 외환위기 때 부도난 공장을 인수해 14년간 제빵업체를 운영했다. 성실 납세기업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열심히 세금도내고 사회에 공헌한다는 자부심도 가졌다. 하루 평균 5t 분량의 밀가루을 빵 기계에 쏟아부으며 장미빛 미래를 꿈꿨다. 그러나 비교적 재무상태가 탄탄했던 거래처가 어느 날 인수합병(M&A) 전문가에게 넘어가더니 순식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거래처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빚잔치를 하고 매각되면서 애써 납품한 물건 값을 거의 다 날려버렸다. 거래처의 새 주인은 10대 재벌에 속하는 대기업이었다. 잠시 희망도 거져봤지만 소용없었다. 새 주인은 납품단가 인하부터 요구해왔다. "지난해 11월 공장 문을 닫고 골방에 틀어박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며 "결국 내가 사업 이이템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반신반의하며 죽도를 찾아온 그는 교육 1주차에는 눈물만 흘렸다고 했다. 그러나 2주차에 들어가면서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씨는 "매일 해 뜨는걸 보면서 분노하는 마음을 내려놨다. 어느 정신과 의사도 해주지못한 마음의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이어 "이곳에서 생전 처음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됐다"며 "그동안 무릎과 어깨가 좋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저절로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재기성공하면 같은 처지 사람돕고 싶어
 아항훈(46)씨는 20년전 작은 사진관에서 출발해 한동안 승승장구하며 결혼식 관련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깢지 사업을 키워나갔다. 결혼식이 몰리는 계절에는 하루에만 300만원의 현금을 쓸어담은 적도 있었다. 연매출 10억원대에 직원수는 40명까지 불어났다. 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쳐 예식장 건설에 뛰어든 게 화근 이었다.


  6600평방미터(약 2000평)의 땅을 구입해 건축허가를 신청했는데 담당공무원이 2년이나 질질 끌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간신히 허가는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금융회사의 돈줄이 꽉 막혀버렸다. 할 수 없이 3층짜리 예식장을 포기하고 1층짜리 일반건물로 용도를 바꿔 건출을 마무리 했다. 그런데 경기불황으로 세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건물을 놀릴 수 없었던 이씨는 직접 고깃집을 차렸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게 장사가 됐다. 하지만 구제역 파동을 겪으면서 손님이 뚝 끊기고 말았다. 그는 "모든 게 내 잘못이고 내 판단 착오였다."고 했다. TV 한대 남기지 못하고 전 재산이 경매로 넘어갔다. 먹고살기 위해 대리운전 핸들을 잡았던 이씨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손님에게서 재기중소기업개발원에 관한 얘기를 듣고 죽도를 찾았다. 이씨는 "여기서 4주간 지내면서 내 마음속에 응어리진 부분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나 자신을 학대하고 비관하며 미워하기만 했는데, 이젠 나부터 나 자신을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연수생들은 죽도를 나가는 순간 다시 현실의 벼랑에 서야한다. 죽도의 벼랑에서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것이란 사실을 연수생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육을 마치는 연수생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중소 제조업체를 경영하다 부도를 냈다는 장만경(56)씨는 "처음 죽도에 들어올 때는 아 자신을 거지나 쓰레기로 여길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며 "지금은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재도전할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사업에 성공한다면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와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Tuesday, October 30, 2012

23 제 4편 영원한 자유 오매일여

24 4편 영원한 자유 1장 오매일여

1 영겁불망 永劫不忘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고괴로울고가 따릅니다. 미래겁이 다하도록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며 무한한 고가 항상 따라 다니는 이것이 이른바 생사고生死苦라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 수가 있는가? 그러기 위하여서는 굳이 천당에 갈 필요도 없고 극락에 갈 필요도 없읍니다. 오직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 ,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대해탈의, 대자유의,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불성佛性이니 법성法性이니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니 진여眞如니 등등으로 말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개발하면 곧 부처가 되므로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일찌기 선문禪門에서 조사祖師 스님들은 말씀하셨읍니다.

산 법문 끝에서 바로 깨치면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活句下 薦得 활구하 천득

永劫不忘 영겁불망

곧 불교의 근본 진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 깨친 자체는 영원토록 잊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배운 기술이나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잊기도 합니다만, 도를 성취하여 깨친 이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금생에만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생에도, 내내생에도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동시에 생활의 모든 것을 조금도 틀림없이 모두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불망永劫不忘 이라는 것입니다.

마조馬祖스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한번 깨치면 영워히 깨쳐서 一悟永悟 일오영오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不復更迷 불복경미

그러므로 깨첬다가 매昧 새벽매했다 또 깨쳤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깨치면 금생, 내생, 여러 억천만 생을 내려가더라도 영원토록 어둠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원오圓悟스님도 그에 대해 말씀하셨읍니다.

한번 깨치면 영원히 얻어서 一得永得 일득영득

천겁, 만겁을 두고 그와 똑같을 뿐 변동이 없다. 億千萬劫 亦只如如 억천만겁 역지여여

깨친 경계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그것은 바로 깨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이렇게 되면 이에 따르는 그 신비하고 자유자재한 활동력인 신통묘력神通妙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참으로,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 입니다.

대자유에 이르는 길, , 영겁불망永劫不忘인 생사 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화두話頭가 근본이며,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없읍니다. 영겁불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 수 있읍니다. 숙면일여熟眠一如하면, 곧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如來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眞如一如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아라야阿羅耶 ; Alaya 위位에서입니다. 8아라야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 자유자재합니다. 그러나 미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은 진여위眞如位의 자재自在함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아라야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위, 진여위에서의 숙면일여가 되어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지 이상의 아라야위에서의 수면일여만 되여도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매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토록 퇴진退進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아라야위에서의 불망不忘과 진여위眞如位에서의 불망은, 차이는 있지만, 다시 매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은 같읍니다.

오매일여도 여래위에서의 오매일여와 아라야위에서의 오매일여가 다르면서 또한 같은 것과 흡사합니다.숙면일여라고 하여 잠이 깊이 들어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니다. 예로부터 대종사, 대조사치고 실제로 숙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읍니다.

누구나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별識心分別이므로 앞 못보는 영혼에 불과합니다. 봉사 영혼이 되어서 수업수생隨業受生하니 곧 업따라 다시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는 하나도 없읍니다. 김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되고, 박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중처변추重處便墜로서 곧 자기가 업을 많이 지은 곳으로 떨어지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자기의 자유가 조금도 없는 것을 수업수생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자재한 경계가 되면 수의왕생隨意往生하니 곧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읍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김 가가 되든 박 가가 되든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으로, 불교의 이상이며 부처님 경전이나 옛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재한 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것 같아도 그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몸을 바꾸면 다시 캄캄하여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송나라 철종哲宗 원우 71092년 이었읍니다.소동파蘇東坡의 동생이 고안高安에 있을 때 동산洞山 선사와 수성 총 壽聖 聰선사와 같이 지냈읍니다. 그 동생이 하루 밤에 두 스님과 함께 성 밖에 나가서 오조 계 五祖 戒 선사를 영접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이튿날에 형인 동파가 오는 것이었읍니다. 그때 동파의 나이가 마흔아홉이었는데 계戒 선사가 돌아가신 지 꼭 오십년이 되던 때였읍니다. 오 십년 전 그의 어머니가 동파를 잉태하였을 때 꿈에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윈 중이 찾아와서 자고 가자고 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가바로 계 선사였읍니다. 계 선사는 살아서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위었더랬읍니다. 동파 자신도 어려서 꿈을 꾸면 스님이 되어서 협우峽右에 있는 경우가 많았읍니다. 그런데 계 선사가 바로 협우 사람이었읍니다.

이 사실들로써 동파가 계 선사의 후신인 줄 천하가 다 잘 알게 되어서 동파도 자신을 계 화상戒 和尙 이라고 불렀읍니다.그리고 동파는 자주 동산洞山에게 편지를 해서 어떻게 하든지 전생과 같이 불법佛法을 깨닫게 하여 달라하였으나 전생과 같이는 되지 못하고 죽었읍니다. 오조 계五祖 戒 선사는 운문종의 유명한 선지식이었는데, 지혜는 많았지만 실지로 깊이 깨치지 못한 까닭에 이렇게 어두어져 버린 것 입니다.

실제로 옛낭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오매일여가 기본이고, 영겁불망이 표준이 되어서 수도하고 법을 전했읍니다. 여기에 실례를 들어 이야기히겠읍니다.

2 대해선사

앞에서 나온 오조 법연 선사의 제자에 원오 극근 圓悟 克勤 선사가 있고, 그 제자에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있읍니다. 강원에서 배우는 서장書狀이라는 책이 대혜 종고 선사의 법문으로, 그는 임제의 정맥으로서 천하의 법황法王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읍니다. 이제 대혜스님이 어떻게 공부했고 어떻게 인가를 받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겠읍니다.

대혜스님은 스므살 남짓 되었을 때, 요즘 말로 한소식했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읍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진짜 소식이 아니라 가짜 소식이었읍니다. 그래도 전생 원력이 크고, 또 숙세宿世의 선근善根이 깊은 분이어서 그 지혜가 수승했습니다. 그래서 가짜 소식을 진짜 소식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 가짜 소식을 가지고 천하를 돌아다니는데, 이 가짜 소식에 모두 속아 넘어 갔읍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대혜스님이 성취한 것은 엽전에 불과한데 세상사람들은 진금眞金처럼 여기고 바로 깨쳤다고 인가를 하여 대혜스님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날뛰고 다녔읍니다.

그무렵 천하 5대사라는 다섯 분의 선지식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담당무준湛堂 無準 선사라는 분이 있었읍니다. 대해스님이 이 선사를 찾아가며 천하 사람이 나를 보고 참으로 깨쳤다고 하고 진금眞金이라고 하니 이 스님인들 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읍니다. 그러고는 병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하는 말을 막 쏟아부었읍니다. 담당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 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가?” 하고 물어왔읍니다. 자신만만하게 횡행천하橫行天下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 하던 그 공부가 잠들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법력이 천하제일이라고 큰 소리 텅텅 쳤지만 잠이들면 캄캄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담당스님에게 이렇게 말했읍니다.

스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엽전인가 봅니다. 저를 엽전인 줄 모르고 금덩어리라고 하니 그 사람들이 모두 엽전 아닙니까? 스님께서 제가 엽전인줄 분명히 지적해 주시니 스님이야말로 진짜 금덩어리입니다. 사실 저도 속으로 의심을 하고 있었읍니다. 모든 것에 자유자재하지만 공부하다 깜박 졸기만 하면 그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이것이 실제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읍니다.”

이말을 들은 무준 선사는 크게 꾸짖었읍니다.

입으로 일체 만법에 무애자재하여도 잠들어 캄캄하면 어떻게 생사를 해결 할 수가 있느냐! 불법이란 근본적으로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 생사해탈을 얻는 것이 근본이야, 잠들면 캄캄한데 내생은 어떻게 하겟어.”

그러면서 담당스님은 대혜스님을 내쫓았읍니다. 대해스님의 근본 병통病痛을 찔렀던 것입니다.

, 옛날에 경순景淳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자신의 법이 수승한 듯 여기고 있었읍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잘못하여 넘어진 뒤로 중풍이 걸렸는데, 그러고나니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과 법문했던 것을 모조리 잊어버리고 그만 캄캄한 벙어리가 되어 버렸읍니다. 모든 법을 아는 체했지만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넘어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도솔조兜率照 선사라는 이가 행각行脚을 다니다가 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이렇게 한탄했읍니다. “한번 넘어져도 저렇게 되는데 하물며 내생이야 偶一失跌尙如此 況隔陰耶. 우일실질상여차 황격음야

이 생사 문제는 영겁불매가 되여 억천 만겁이 지나도록 절대불변하여 매昧하지 않아야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넘어져도 캄캄하니 뭄을 바꾸면 두망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천하에 자기가 제일인 것 같았던 대혜스님도 무준 선서가 그렇듯 자기 병통을 콱 찌르니 항복 안 할 수가 없었읍니다.그리하여 다시공부를 시작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정진하고 있었는데 담당 무준 선사가 시름시름 병을 앓더니 곧 죽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읍니까?”하고 물으니 경사京師의 원오 극근 선사를 소개해 주었읍니다.그 유언에 따라 그는 원오 극근 선사를 찾아갔읍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나 원오스님은 절벽 같고, 자기 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 되는 것이었읍니다. 만약 원오 극근 선사가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리라는 귿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 복 도리가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 있는 줄 몰랐구나 !” 라고 크게 참회하고 원오선사께 여쭈었읍니다.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는데, 담당 무준 선사의 법문을 듣고 그 후로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잠들면 공부가 안 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 하지말고 공부 부지런히 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그때 비로서 공부에 가까이 갈지 몰라.”

이렇게 꾸중을 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읍니다.그러다가한번은 원오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확철히 깨달았읍니다.기록에 보면 신오神悟라 하였는데.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그때 보니 오매일여입니다. 비로서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읍니다. 이리하여 원오스님에게 갔읍니다. 원오스님은 말 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냈읍니다. 말을 하려고만 하면,

아니야 아니야 不是 不是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러다가 원오스님은 대혜스님에게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 有句無구 如藤倚樹 유규무구 여등의수는 화두를 물었읍니다.그래서 대해스님은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같아 대답을 했읍니다. 그러나 원오스님은 거둡 아니라고 하셨읍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 해! “

대해스님이 그말을 믿고 불석신명不惜身命하여, 곧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더욱 부지런히 공부하여 드디어 깨쳤읍니다. 이렇듯 대해스님은 원오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 데까지 성취했읍니다. 이렇게 확철히 깨쳐 마침내 원오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았읍니다. 동시에 임제의 바른 맥 임제정종臨濟正宗을 바로 깨쳤다고하여 원오스님이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주었읍니다. 이리하여 대혜스님은 임제정맥의 대법왕으로서 천하의 납자衲子들을 지도하고 천하 대중의 대조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대혜스님 어록에 남아 있읍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에서 원오스님은 또 말씀하셨읍니다

애석하다. 죽기는 죽었는데 살아나지 못했구나 可惜 死了不得活 가석 사료불득활.”

일체망상이 다 끊어지고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여여한 그 때는 완전히 죽은 때입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거기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아나느냐?

화두를 참구 안 하는 아것이 큰 병이다 不疑言句 是爲大病 불의언구 시위대병

공부란 것이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거기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만 그것이 바로 깨친 것이고, 화두를 바로 안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마음의 눈을 바로 뜬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 깨치려면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야 합니다.내가 항상 이 오매일여를 주장한다고 오매일여병에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오매일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법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고, 또 선禪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오매일여를 반대하고 비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혜스님과 같은 대근기大根機도 오매일여가 되기전에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읍니다.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오매일여를 말씀씀했으니 안 믿을 수도 없었읍니다. 그래서 속으로 부처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다가 자기가 완전히 오매일여가 되고 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읍니다.

그래서 대혜 선사는 아렇게 말했읍니다.

부처님께서 오매일여라 하신 말씀이 참말이요, 실제로구나

佛說寤寐一如 是眞言是實言 불설오매일여 시진언시실언.” 3 태고스님 계속 .”

숭산스님가르침 금강경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숭산 큰스님 가르침 금강경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지혜의 향기 잘 생겨서 죄송합니다. ---이원익 불사모 대표

  내가 이직 아이였을 땐데 어느 날 갑자기 좀 아무렇게나(?) 생긴 양반이 텔레비젼에 나타나 연방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하며 자꾸 얼굴을 드리미는 바람에 사람들이 정말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던 일이 기억난다. 그런데 못 생긴게 정말 죄송스런 일일까? 자기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역사상으로는 이와 반대로 장 생겨서 평생 죄송해 한 이가 있는데 부처님의 십대제자에 드는 아난다가 바로 그분이다.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기역력도 비상해서 스물다섯 해 동안이나 부처님의 비서실장 노릇을 하며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육하원칙에 따라 하나도 빠뜨맂지 않고 다 기억하고 외워 두었다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되뇔 수 있었으니 가히 인간녹음기라고 할만 하였다.

  그래서 별칭이 '가장 많이 들은 자(多聞第一)' 이다. 부처님의 열반 후 마하가섭이 주도하에 부처님의 '목소리를 들은자(성문)' 500명이 모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던 부처님의 설법을 정리한는 '첫 번째 모여 외기(弟一次結集)' 가 있었는데 이 때 이 인간녹음기의 천재성이 여지없이 발휘 되었다. 경, 율, 논 가운데 경장의 대부분은 바로 이 아난다의 머릿 속에서 풀어져 나온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불경들이 ' 나는 이렇게 들었다(Evam maya shrutam)' , 곧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나(我)' 란 바로 아난다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부처님이 성불하신 후 카필라 성을 찾아 오셨을 때 여러 왕자들과 함께 출가하였다.

  그가 어느 날 슈라바슽티 거리에 탁발을 나갔다가 기원정사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침 가장 하층민인 마등가 종족의 마을을 지나다가 목이 말라 우물가의 처녀에게 물한 쪽박을 청하였다. 그런데 프라크리타라느 이름의 이 아기씨는 자기는 너무 천민이라 고귀한 사문의 청을 들어 줄 자격이 없다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에 아나다는 부처님의 제자는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처녀에게서 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프라크리타는 아난다의 수려한 용모와 자비로움에 반해 그를 사랑하게되니 잘 생김으로인해 나타난 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결국 부처님이 둘 사이를 중재하여 프라크리트는 비구니가 되어 진리의 길을 함께가는 길동무로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렇듯 빼어나게 잘 생긴 죄에다 부처님을 너무 그림자처럼 따르며 의존하다보니 부처님의 입적 때까지 아난다 자신의 성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모여 외기 직전까지도 그의 참가 자격에 논란이 있었으나 책임을 통감한 그가 용맹정진하여 결집의 바로 전날 밤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니 이튿날 경장 송출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이와는 좀 다른 경우지만 김동환의 '웃은 죄' 라는 시가 생각난다.

  무릇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사나이는 지나치는 우물가를 조심할지어다.

즈름길 묻길래 대담 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퍼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