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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October 30, 2012

숭산스님가르침 금강경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Thursday, May 24, 2012

KARMA 업

카르마 · 業 Karma
보살업 菩薩業 Bodhisattva ㅡ> 대자대비 大慈大悲 Complete Cpmpassion
선업 先業 Good karma ㅡ> 행복 福 Happiness
악업 惡業 Bad karma ㅡ> 고통 苦 Suffering
적업 積業 Accumulated karma ㅡ>소질 素質 Predispositions
동업 同業 Same karma ㅡ> 동행 同行
만상 萬相 종연생 從緣生 종연멸 從緣滅 모든것은 업을 통해 나타나고 업을 통해 사라진다.
Everything appears through karma, and disppears through karma.
心生卽法生 法生卽相生 相生卽苦生
마음이 나오면 법이나오고, 법이나오면 모양이 나오고, 모양이 나오면 고통이 나온다.
Mind appears then Dharma appears, Dharma appears then form appears,
form appears then suffering appears.
心滅卽法滅 法滅卽相滅 相滅卽苦滅
마음이 사라지면 법이 사라지고, 법이 사라지면 모양이 사라지고, 모양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진다.
Mind disappears then Dharma disappears, Dharma disappears then form disappears,
form disappears then suffering disappears.
一切唯心造 우리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All things are created by the mind alone.
원인 原因 Primary Cause ㅡ> 연기 緣起 Dependent Origination ㅡ> 결과 結果 Result

우리가 지금하는 모든말과 행동은 현생과 다음 생, 다음 생에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업이라고 햇다. 우리는 요즘 세계도처에서, 특히 아프리카나 인디아같은 곳에서 기아의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한쪽 나라에서는 음식이 넘쳐나느데 그들은 먹을것이 없어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간다. 전쟁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도무지 나쁜 업을 지을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어린이들까지 에이증에 걸리고 살해당하고 극심한 기아와 가난에 사달린다. 왜 이런일이 일어날까. 그러나 인과관계는 언제나 명확하다.
우리가 하는, 우리가 겪는 모든일들은 우연이 아니다. 바로 전생에 지은 습관의 에너지에서 온다. 우리가 품었던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이것이 업을 만들어 어떤 결과로 열매를 맺는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어떤 마음 생태를 갖는가 이다. 아마 우리는 이생에서 많은 복과 돈을 가질지도 모른다. 좋은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상황에만 오직 복을 비는 것에만 집착하면 그것은 좋지 못한 상황, 불행의 씨앗이된다. 왜냐하면 모든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線은 점에서 시작한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순간의 마음이 다음 순간, 다음 未來를 만드는 것이다. 다음 生을 만든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의 상태이다.
마음의 중심인 단전이 강하지 않으면 바깥조건과 상황은 언제나 우리를 쥐고 흔들어 댈 것이다. ㅇ이것이 바로 업이 우리를 재배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죽는 순간, 우리 영혼은 육신이라는 그릇을 떠나 어딘가로 향한다. 악마가 이끄는 지옥으로 갈 지도 모른다. 돈을 훔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힌 나쁜 짓을 했다면 아귀가 되어 방황할 지도 모른다. 동물의 몸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다시 인간이되어 불법을 만나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중생을 위한 생을 살았다면 천국의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이 세상의 법은 아주 맑다. 순간순간 지금행동이 중생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나만을 위한 것이냐. 우리의 망음이 욕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는가, 아니면 평화로 가득차 있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 좋고 나쁜것을 만들지 말아라. 그래야 윤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를 얻어 아무곳이나 오갈 수 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한 삶을 산다면 천국과 지옥도 마음대로 아무 걸림없이 오갈 수 있다.
아무것도 우연히 생기는 것은 없다. 우리 인생은 이미 이전 생에서 만들어진 습관의 힘에의해 상당량 결정된다. 우리의 이 업을 다른 중생을 돕는 데 쓸 것이냐. 아니면 우리 자신만을 위해 쓸 것이냐, 이것이중요하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보살업 菩薩業 ㅡ> 대자대비 大慈大悲
선업 善業 ㅡ> 행복 幸福
악업 惡業 ㅡ> 고통 苦痛
적업 積業 ㅡ > 소질 素質
동업 同業 ㅡ> 동행 同行
원인 原因, ㅡ> 연기 緣起, ㅡ> 결과 結果

부처님은 업이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마음이 사라지면 업 또한 사라진다. 업은 생각이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우리는 업을 만들지 않는 공허한 미음을 갖는다. 제 8식이 공할 때 긍정의 업과 부정의 업이 모두 사라진다. 공한 마음은 업이없는 마음이다. 우리가 얼마나 중생을 도우며 살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는 다음 생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 본성을 찾으면 우리삶의 방향도 찾아진다.
우리는 이미 긍정적인 업과 부정적인 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러분이 매일 중생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업을 만들어 행복을 이룬다. 나쁜일을 하면 악업이 되어 고통을 낳는다.
예날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아렇게 말씀하셨다.
"매일 한 가지씩 착한일을 해라."
말하고 듣는것은 쉽지만 행하는 것은 어렵다. 시미어 하루 24시간ㅁ만 돌이켜보아도 남에게 착한일한 기억을 더듬는다면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세상 인과관계는 넌제나 명확하다. '나는 무엇인가.' 우리 본성을 찾고자 갈구하는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 중생을 도와라.
'업' 에대해 좀더 설명해보자. 업, 즉 카르마란 마음의 습習(익힐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아이들은 별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렸을때부터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잘 친다. 혹은 어떤 운동을 잘하거나 그림을 잘그리는 아이들도 있다. 모차르ㅡ트의 이약기를 잘 알 것이다. 그는 부모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교향곡을 쓰고 연주했다. 그런 행동은 그가 전생에 만들었던 강한 습관에서 나온다.
예날에 스님 한 분이 돌아가셨다. 관습에 따르면 장례를 마치고 스님의 몸은 돌아가신 지 일주일 안에 와장을 해야한다. 스님의 몸은 훌륭한 수의에 덮여서 관에 넣어졌다. 5일째 되던 날, 승려와 신도들은 관 주위에 모여 긴 염불 의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안에서 고함소리가 나는 게 아니가.
"문을 열어라. 나 좀 나가게 해다오, 나좀나가게 해다오."
사람들이 뒤로 나자빠졌고, 여자들은 무서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마침내 관을 열어보았더니, 아니 그 스님이 일어나 앉는것이 아닌가.
"아니, 스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람들이 놀라 묻자 스님이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 물었다.
"왜 나를 관 속에 넣었느냐?"
"스님은 나흘전에 돌아가셔서 지금 장례식을 치르는 중입니다."
"아니야, 나는 꿈을 꾸고 있었어."
"꿈이요, 무슨 꿈이요?"
"아주 재미있는 곳에 갔었지."
스님은 하숨 돌리더니 꿈 이야기을 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그는 큰 나무아래 있었다. 나무 옆 높은 언덕엔 큰 집이 있었고, 문 앞에는 긴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자 마당에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너무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마치 빨려들듯 집 안으로 들어깄다. 마치 날아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큰 사자가 나타나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왜 여기 왔느냐. 돌아가라."
사자는 그 스님을 들어올려서 땅에 내리쳤다. 그는 '쿵' 하고 떨어지면서 잠을 깬 것이었다. 깨어나 보니 좁은 관안에 갇혀있었고, 자신의 머리가 부딛친 곳은 다름아닌 관 뚜껑이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관 문짝을 두둘겨댄 것이다. 꿈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게 정말 꿈이였나요?"
바로그때 큰스님이 들어왔다. 큰 스님은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밖에 나가 마당에 있는 나무를 보아라."
사람들이 밖에나가 나무를 보니 죽었던 스님 꿈에 본 그 나무가 아닌가. 죽었다가 돌아온 스님은 "바로 저 나무입니다. 나무 위에 새집까지 똑같아요."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큰스님은 그 스님에게 나무위로 올라가 새집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새집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스님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갓 태어난 새가 몸을 웅크린채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큰스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다른사람들도 모두 의아해했다. 그러자 큰스님이 살아 돌아온 스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죽었다. 그런데 너는 사는동안 나쁜 업이 많아 새로 환생했다. 네가 들었다는 음악과 노랫소리는 네가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도록 스님들과 신도들이 염불을 하는 소리였다. 그들의마음이 아주 간절해서 너는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들의 강한 에너지가 너의 의식을 끌어 잡아당긴 것이다. 그래서 너는 다행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저 새집속에 있는 갓 태어난 죽은 새는 바로 인간으로 환생하기 전 너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큰스님의 말씀에 귀를 귀울였다.
"이제 너는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지고 똑바로 수행 하거라. 그러면 너는 본성을 찾아 중생을 돕게 될 것이다. 살아돌아온 스님은 깊이 절을올렸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적어도 5백번 이상의 인연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한 부모아래 형, 동생으로 태아난 인연은 얼마나 대단한 것이지 한번 상상 해 보라. 사랑에 빠진 남녀, 결혼한 부부, 절친한 친구, 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전생의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다. 이 모든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전생에서 서로 함께한 어떤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법문을 듣기 위해 절에가면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다들 처음보는 얼굴이다. 그러나 법문을 듣는 똑같은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중국 사람들은 전생에 대부분 중국인이였을 것이다. 한국, 미국, 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 또한 다른 업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은 개라도 어떤 개는 아주 영리하고 어떤 개는 아주 포악하다. 절에 가보면 법당 안팎을 서성이는 개나 고양이가 있다. 어떤 것들은 아예 법당 안에 들어가고싶어 안달을 한다. 내쫓기를 여러번 해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절이란 그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못된다. 가난하기 때문에 배를 곯기가 십상이고 맛있는 고기 반찬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도 절을 떠나지 못한다. 이것들은 전생에 佛緣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전생에 인간이었고, 또 불연이 있었건만 나쁜 업 때문에 동물로 환생한 것이다. 그러나 전생의 습관은 계속 이어져 부처님의 가르침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애완 고양이에 집착해있는 제자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가족들보다 고양이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엄마가 병원에서 숨이 넘어간다는 연락을 받고도 고양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며 병문안 조차 가지않았다. 인간과 동물사이의, 특히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의 업과 관련해서는 두기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전생에서도 주인과 애완동물로 만났을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생에 둘 다 인간이었으나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아주 못된 짓을 해서 동물로 태어나 한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경우이다. 그러니 조심하라.(하하하)

모든것은 업을 통해 태어나고 업을 통해 사라진다.
우리의 육체는 모두 업에서 나오고 업은 생각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업이 몸을 만들고 몸이 업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모양, 개의모양, 고양이 모양, 그리고 천국의 상태, 지옥의 상태 이 모든 것이 업에서 부터 나온다. 전생에 만들어진 업은 이생에 우리가 받을 몸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업'이 몸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몸에 집착한다. 몸이요구하는 업을 되풀이하고 심지어 그것을 더 깊고 강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몸이 업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 순환은 돌고돌아 우리 삶을 더욱더 고통스럽게 한다. 이름하여 윤회, 생로병사의 끝없는 순환이다.
만물이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마음을 가지면 업을 가지게되고 업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고통을 ㅁ만든다. 그러나 마음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으로 돌아올 때 더 이상 이름도, 모양도 없다. 업도 없고 고통도 없는 것이다.
엄은 아주 단순하다. 마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런 마음이 다음순간, 다음순간, 또 다음순간을 만든다. 이 모든것이 우리의 다음생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구슬이 하나씩 모여 목걸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주의 자연법칙이다. 비가오면 꽃이피고 비가오지않으면 꽃이피지않는다. 태양이 나오면 따뜻해지고 구름이 가리면 추워진다. 인생도 비슷하다. 업을 벗어던지고 싶다면 강한 수행이필요하다. 그래야만 중생을 돕는 데 우리 업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생각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업에만 집착한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어도 완벽히 잠든 상태에서 다른사람ㅇ을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생각과 욕심을 끊는다면 여러분은 지혜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에 집착하여 안간힘을 다해 무엇인가를 쥐려고해도 우리의 일상이란 한낱 꿈에 불과하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는 일은 정말 잠들어 꾸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눈을 떠라.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라. 그럴 때에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업을 통제해 중생을 돕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5백 년 전 공부도 많이하고 돈도 많은 유명한 학승이 한 분 게셨다. 그 당시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스님들은 재산을 무려받아 제자들이 講院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그래서 돈이많은 스님에게는 제자가 많았으나, 가난한 스님에게는 제자가 거의 없었다. 돈이많은 이 학승에게는 1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중 마지막 제자기 '돌음' 아었다. 돌음은 스님께 학비를 받아 3년동안 경전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경전은 아무 필요가 없어. 경전이란 우리의 마음을 구하기 위한 것일 분이니 이미 내 마음이 비어 있다면 경전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참선도량으로 들어가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스승에게 말했다.
"스님, 오로지 경전만을 읽는것은 옳은 공부가 아닙니다. 이제는 선방으로 들어가야겠읍니다. 스님은 연로하셔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그때 스님은 어디로 가시겠읍니까?"
스님은 잠자코 돌음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말이 맞다. 그럼 우리 함께 가자꾸나. 그런데 내 땅과 곡식창고, 그리고 재산은 누가 지켜줄까?"
"스님에게는 유능한 제자들이 많으니 그들에게 모든것을 맡기고 떠나시지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럼 결정되였다. 내일 바로 떠나자꾸나."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그렇게 생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난 부자가 되고 싶어. 유명한 스승이 되고 싶어' 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돌음이라는 제자만 공부를 제대로 했던 셈이다. 스승은 돌음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아 ! 내가 백 번째 제자까지만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더니 부처님께서 이토록 영특한 제자를 보내주셨구나.'
스승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돌음과 함께 길을 떠날 것이라고 알렸다. 그 스님은 자신의 논과 커다란 곡식창고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고는 제자들에게 각각 할 일을 정해 주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두살마은 짐을 꾸려 작별인사를 한 뒤 함께 공부하기로 한 절로 향했다. 산으로 올라가던 그들이 잠시 멈춰섰을 때였다. 계곡사이에 있는 절을 내려다보던 돌음이 놀라 외쳤다.
"스님, 절에 불이 났어요!"
"무라고? 이런! 내 창고에 불이 났구나. 안 되겠다. 너 혼자서 가거라. 나는 절로 돌아가야겠다.!"
"안됩니다. 스님 저까짓 절과 곡식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죽을 때 과연 어디로 가는지 , 이물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돌음의 만류에도 스승은 돌아가고 말았다. 돌음은 재산에 집칙하는 스승의 마음을 ㅂ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혼자 떠났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 돌음은 스승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뒤 그 스님의 49제가 다가왔다. 수많은 조문객과 제자들이 모여들어 먹고마사며 스승의 재산을 나누어갖기위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때 돌음도 49제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맏사형을 만났다. 맏사형은 3년 만에 돌아온 돌음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스님께서 입적하실 땐 꼼짝도 않더니 이제야 왔어? 그러고도 재산을 나누어 갖겠다구?"
"아닙니다. 제게는 땅이나 돈은 필요 없어요. 주실 수 있다면 죽 두 그릇만 주세요, 부탁입니다."
"고작 그게 다냐?"
"예"
"좋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에는 제사같은 의식을 치르는 곳에서 마을의 혼령들에게 음식물을 바쳐 악령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돌음은 죽 두그릇을 받아들고 큰 맷돌이 있는 넓은 법당으로 들어가 가장안쪽의 가둥을 세 번 쳤다. 그러자 큰 뱀이 나타나 그 맷돌 쪽으로 기어가더니 돌음이 가져다 둔 죽을 모두 마셨다.
돌음이 뱀에게 물었다.
"스승님, 어떻게 뱀의 몸을 빌리셨읍니까?"
"미안하다. 진작 네 말을 듣지않아 뱀의 몸을 빌리게 되었구나."
그 뱀은 다름아닌 그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 스승은 왜 뱀으로 태아났을까? 그토록 성대한 49제를 치렀는데도 고작 뱀으로 태아난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의 마음이 바로 뱁과 같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부와 명성만을 좇아 의식과 영혼이 경쟁적이고 욕심으로 가득하게되어 다음생에서 뱀의 몸을 받은 것이었다. 뱁은 눈물을 흘렸다. 돌음은 이렇게 말했다.
' "스님께서는 욕심이 많았읍니다. 그런데 뱀으로 환생하여 그 죽을 다 드셨는데도 족하지 않으십니까? 어서 맷돌에 머리를 찧으셔서 그 몸을 버리십시요!"
"이 몸이 어때서 그러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뱀이된 스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정 그리못하시겠읍니까?"
돌음은 눈물을 머금고 막대기를 세번 내리쳐 뱀을 죽였다. 그러자 뱁의 시체에서 시퍼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 허공으로 몰라갔다. 돌음은 그 연기를 따라갔다. 연기는 새의 형상을 빌리기 위해 근처를 날던 새를 쫓아갔다.
"안돼요!"
돌음이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었을까. 그연기는 다시 황소의 몸속에 깃들이려고 하였다.
"안돼요!"
돌음이 다시소리쳤다. 그러자 연기는 더 멀리 날아 깊은 산속 한 중년부부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가량 지난 뒤 돌음은 그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다. 중년 남자가 나왔다.
"무슨 일이신지요?"
"당신 부부가 곧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려드리려 왔읍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가없어 항상 걱정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마 스님께서 잘못아신 것일 겁니다. 내 아내는 지금 마흔 다섯입니다. 아기를 낳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요."
"어쨋든 만약 아기를 가지면 당신 부부는 나에게 그 아기를 주어야만 합니다."
"아기를 갖기만 한다면야 드리지요."
` "좋아요. 1년 후에 다시 오겠읍니다."
그로부터 얼마후 정말 늙은 아내가 임신을 했다. 그 붑부는 스님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이어 아주 예쁜 아기가 태아났다. 그들은 너무 행복했다. 1년후 돌음 스님이 다시 나타났다.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약속한 대로 아기를 나에게 주십시요."
그러나 그 부부는 완강히 거절했다. 돌음 스님이 꾸짖으며 말했다.
"1년 전 저와의 약속을 잊으셨읍니까?"
"하지만 우리 아기예요. 20년동안 기도를 드려 겨우 얻은 자식입니다."
"이 아기를 제게 돌려주지 않으면 아기는 앞으로 3년을 채 살지 못합니다."
돌음은 이렇게말한 뒤 돌아갔다. 아기는 3년동안 아무 탈 없이 잘 자랐다. 부부는 스님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햇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며칠이 지나자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 부부는 걱정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때 돌음이 다시나타났다. 부부는 사정을 했다.
"아이가 곧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아이를 나한테 달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저한테 주시면 제가 돌보겠읍니다."
할수없이 부부는 아이를 돌음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아이가 스님의 손으로 넘어가자마자 끓던 열이 내리고 금방 미소를 지으면서 행복해 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에도 금세화기가 돌았다. 부부는 이 아기가 돌음 스님과 아주 강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하느 마음으로 아이를 보냈다.
아이는 잘 자랐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돌음이 참선을 하는데, 소년이 부엌으로가서 칼을들고 오더니 돌음을 내리치려는게 아닌가. 순간 돌음이 뒤돌아보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의 팔목을 잡았다.
"칼을 내려놓고 이리오너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한다.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해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이 싫어요. 그래서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왜?"
그소년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그러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돌음은 그를 창문으로 데리고 가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은 뒤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앉아 이 구멍에 큰 소가 올 때깢지 처다보아라. 오직 이것 뿐이다. 어떤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이 구멍만 보아라."
소년은 하루종일 먹고자는 시간만 빼고 창호지 구엉을 쳐다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지나고 1백일이 지나자 어느 날 구멍이 아주 커졌다. 그러자 정말 큰 소가 나타났다.
"음매."
아이가 "와 아아아" 소리를 지르던니 돌음을 불렀다.
"스승님 소가가요."
돌음이 뛰어오더니 갑자기 소년의 빰을 때렸다.
"지금 어디 소가 있다는 말이냐?"
순간 소년은 완벽하게 자기 자신을 이해해 깨달음을 얻었다. 소년은 정신을 차려 돌음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 당신은 전에 나의 제자가 아니었읍니까?"
소년의 말이 끝나자 돌음이 소년앞에 삼배를 올렸다.
전생에 소년은 바로 뱀으로 환생했던 돌음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욕심이 많아 지혜가 모자랐던 것이다. 그런 부족한 스승을 돌음은 사랑으로 잘 보살폈던 것이다. 돌음은 업을 잘 볼수 있어서 스승이 뱀에이어 노부부의 아이로 다시 몸을 받아 태아난 것을 알고 푸른연기를 따라갔던 것이다. 돌음과 스승은 서로 아주 좋은 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생에서도 그들은 스승과 제자가 된것이다.
똑같은 업을 갖는다는것은 중요하다. 강하고 맑은 방향을 갖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하다. 돌음이 선방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스승과 그의 업을 이해할수 없었다. 그러나 선방에서 수행을 통해 그 자신을 이해하게 됐고 스승의 마음까지 아주 잘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니 우선 진정한 우리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자신의 업을 먼저 이해하고 우리가 가진 업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해야 한다. 오직 이 길만이 고통에서부터 중생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Sunday, May 13, 2012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법과 윤회

업과 윤희 · 唯識論 과 六途輪廻 因果說
The View od Mind -Only and Karma
육근六根SIX ROOTS . 눈眼EYES, 귀耳EARS, 코鼻NOSE, 혀舌TONGUE, 몸身BODY, 마음意MIND
육식六識Six Consciousnesses . 안식 眼識eye-, 이식 耳識ear- 비식鼻識nose-, 설식舌識tongue-, 신식 身識body-, 의식 意識mind-,
육진六塵Six Dusts . 모양 色color, 소리聲sound, 냄새香smell, 맛 味taste, 감각 觸touch, 마음法mind.
18계 十八界 Eighteen Realms ( 육근 . 육식 . 육진)
현보 現報 Results received in this life 현생에 받는 업
순보 順報 Results received inthensxtt 내생에 받는 업
순후보 順後報 Results received in the life after next 내내생에 받는 업

Thinking mind 未那識 我癡, 我見, 我慢, 我愛, 등의 妄識 Discriminating consciousness 분별심
---->Alaya 阿賴耶識, 藏識 Storehouse Consciousness 의식의 저장고---->>
四生 Four Births 태어남의 네가지 유형
胎 Womb 태생, 卵 Egg skstod, 濕 Moisture 습생, 化 Transformation 화생.
六途 Six Ways of Samsara 육도윤회
--->天堂Heaven 천당(+20)
--->阿修羅 Asura아수라(+10)
--->人道 Huaman Route인간 (0)
--->畜生Animals 축생(-10)
--->餓鬼Demons Hungry ghosts(-20)
--->地獄 Hell 지옥
A. (+10) - (+5) = (+5), (-5) - (-3) = (-2) ~~~(+3)
B. (+15) - (+5) = (+10) (-30) - (-5) = (-25) ~~~(-15)

팔자란 무엇인가? 운명이라는 게 있는가, 없는가? 인간은 몸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우리몸은 '나'가 아니다. 때때로 내 안에 있는 어떤것이 나의 육체를 지배한다. 그것을 '영혼' 혹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정신, 에고, 자아, 의식, 영혼, 존재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본래 그것에는 이름과 모양이 없다. 단어 하나로 딱히 얘기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일단 나는 이것을'의식' 이라고 부르겠다.
나무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는 서 있을 수 없고 곧 죽는다. 인간에게도 뿌리가 있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여섯가지 뿌리가 있다고 했는데,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육근이라고 부른다. 눈은 보고 귀는 들으며 코는 냄새맡는다. 또 혀는 맛보고 몸은 느끼며 마음은 인식한다. 이 뿌리들을 통해 우리는 외부 세계를 경험하며, 안과 밖을 만든다. 이 뿌리로 부터 형태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각觸, 마음法의 여섯가지가 나오는데, 이것을 육진六塵이라 부른다.
또 이 육진 각각이 의식을 갖고 있는데, 눈이 색을 보고 알아보는 마음을 안식眼識이라하고, 귀가 소리를 듣고 아는 마음을 이식耳識이라하며, 혀가 맛을 보고 아는 마음을 설식舌識, 몸으로 느껴 아는 마음을 촉식觸識, 뜻으로 헤아려 보고 아는 마음을 의식意識이러한다.
의식이 없다면 육근은 제대로 가능할 수가 없다. 눈으로 말하자면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눈뜬장님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색맹이다. 눈은 있어도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눈뜬장님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눈, 귀, 코를 따로따로 가지고 있다면 별 의미가 없다. 각각의 뿌리는 그것들이 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위해 서로 연결된 의식이 필요하고, 또 이것들이 조화롭게 기능해야만 한다.
내가 오래전 수덕사에서 겪은 이야기다. 어느가을, 스님들이 겨울 3개월 수행(동안거)에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위해 아주 매운 고추를 따고 있었다. 모두들 굵은 삼베로 된 커다란 자루들을 하나씩 차고 있었다. 물론 채 익지않은 초록색 고추는 그대로 두고 빨간고추만 따야 했다. 다들 열심이었는데, 유독 스님들 중 한 명이 아주 빠른 솜씨로 고추를 따고 있었다. 다른 스님들은 자루에 반도 못채웠는데 이 스님은 어느새 가득채워 자루도 묶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스님들이 "어쩌면 그렇게 빠르냐"고 혀를 내둘렀다. 그 스님은 "내가 서있던 곳에는 붉은 고추라 아주 많아 금새 땃다"고 자랑했다. 옆에 서있던 주지스님도 그 스님이 아주 부지런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밭일을 모두 끝내고 부엌에 돌아와 바구니를 풀어놓은 순간 일이벌어지고 말았다. 이 스님이 따온고추는 모두 채 익지않은 푸른색 고추투성이었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벌컥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채 익지도 않은 고추를 땃단 말이냐?" 그러나 그 스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게 어떻게 푸른 고추입니까? 다 붉은 고추 아닙니까?" 하고 따져 뭇는 것이었다.
아뿔사! 이 스님은 색맹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눈 하나만 가지고있다고 다되는 게 아니다. 그런 눈은 세 개, 네 개씩 가져봐야 소용이 없다. 귀머거리 역시 멀정하게 귀를 가지고 있지만 듣지못한다. 감기에만 걸려도 제대로 맛을 볼 수 없는 경험을 누구나 한 번 쯤 했을 것이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 여섯가지 뿌리는 이철럼 의식과 긴밀하게 연경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식이 없다면 비록 외형상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내 친구 이선생은 아주 머리가 좋은데 애석하게도 앞을 못보는 장님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보통사람 못지않은 많은 지혜를 갖고있었다.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얘기이다. 그는 방안에서 $#171금강경»을 읽고 있었다. 수년 전에 선물로 받았다는 사본이었는데, 천천히 페이지를 한 장 한장 넘기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모습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장님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정말 손가락 하나한에 힘을 실어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며 책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를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이선생, 지금 «금강경»을 읽고 셰시군요.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책을 거꾸로 들고 계십니다."
"오! 그래요."
그는 내 말을 듣고 놀란듯이 이내 책 위아래를 바꿨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곧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 것이었다. 잠시후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 죄송합니다. 조금 전 당신이 들고있던 방향이 맞았어요. 제 실수 였읍니다."
"네, 그래요, 느낌이 이상했어요. 항상 저는 옳게 들고 있어요. 당신은 장난기가 심하신 스님이시군요, 하하하."
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책을 똑바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느낌으로 책을 똑바로 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해와 기억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아주 맑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어느날,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는 김선생이라는 분에 대해 얘기를 나눈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어느어느 도시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의 미름은 무엇무엇이며 그는 어떤어떤 학교를 졸업했고 그의 여동셍은 언제 누구누구와 결혼을 했고 등등 아주 지잘한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 이선생은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하고 물었다.
"저는 한번들으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요."
더욱더 신기한 일은 그에게 손님이 찾아오면 그는 대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누구인지 곧 알아 맞힌다는 점이었다.
손님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반긴다. 몇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닥쳐도 그는 그 사람들 각각의 이름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며 반기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 수가 있을까? 심지어 두 눈이 정상인 우리도 사람을 확실히 기억하기 힘들다. 겉으로는 아는체를 쉽게하고서도 속으로는 저 사람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어디서 만났더라' 하며 기억을 더듬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나 이 선생은 달랐다. 한 번은 내가 그에게 물었다.
"저사람은 우리가 몇 달전에 단 한 번 만나 불과 몇 분간 얘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문을 열자마자, 그의 목소리을 듣기도 전에 대번에 알아 볼 수 있읍니까?"
이선생은 대답대신 자기 코를 가리켰다.
"문을 열면 냄새가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나는 금방 '이건 박선생 냄새, 저건 최선생 냄새' 하고 금방알아차려요."
그의 코는 아주 예민했던 것이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감각기관 중 가장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 '눈'이라고, 눈을 안 쓰면 눈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코나 귀로 옮아간다. 눈을 감으면 바깥 것들이 더 잘들리는 경험을 많이 해보았을 것이다. 아마 우리 감각에너지의 80퍼센트가 눈에서 쓰일 것이다. 이선생의 경우는 눈에 들어갈 에너지가 다른곳에 쓰여 여는 사람보다 더 예민한 코를 갖게된 것이다.
장님 사무라이에 관한 아주 유명한 일본영화 주인공이 있다. 그의 이름은 사토이치다. 사토는 조용하고 겸손한 성격이었지만 필요할때는 거침없이 그의 칼을 사용하곤했다. 싸움을 싫어했지만 누군가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즉각 싸움에 개입하는 것이었다.많은 사람들이 그를 옆에서, 앞에서, 심지어 뒤에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토이치는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수 없었지만 그의 칼끝은 아주 섬세했던 것이다. 완벽히 장님이었을지라도 그의 劍은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한 번에 가장중요한 포인트를 쳤다. 힘을 한번도 낭비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되도록 가벼운 상처를 주는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제압하곤 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까? 그는 상대방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와 냄새, 바람의 감각으로 모든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에너지만 집중시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말하지만 인간은 육근과 육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이 모두 18계(十八界)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 18계 속을 헤메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과 슬픔, 오고 감, 이것저것을 만든다. 이 19계가 우리가 살고있는 전 우주를 만든다. 인간은 여섯가지 감각들에 묶이고 집착하면서 이것이 만들어낸 18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모든것은 이 18계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밤에 우리는 가끔 꿈을 꾼다. 그러나 18계는 꿈이 없는 세계이다. 그것들은 우리감각에서만 나와 우리가 깨어있을 때 기능한다. 꿈은 어디서 오나? 꿈을 꾸는 것은 어떤다른 종류의 의식이 또한 우리 마음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기가 이세상에 태어난다. 아기는 눈, 코, 귀. 혀, 몸,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 섬세하게 작동하기 전이다. 아기의 인식은 느낌과 감각에 치중돼 있다. 아기는 뱌고프면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우유를 주면 좋다고 웃는다. 오줌을 싸면 기저귀의 느낌이 좋지 않으니까 운다. 기저귀를 갈아주면 느낌이 좀 좋아진다. 아기는 그저 감각덩어리일 뿐이다. 태어나 처음 2년동안 아기는 단지 감각만을 받아들여 그에 반응할 뿐이다. 태어나 처음 2년 동안 아기는 단지 감각만을 받아들여 그에 반응할 따름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좋고 싫은 감각에 대한 분별심이 생긴다. 마음의식이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엄마가 오면 행복해진다. 다른사람이오면 그렇지 않다. 단지 "나는 엄마, 아빠가 좋아" 하고만 생각할 뿐이다. 만약 엄마가 함께놀면 그냥 그렇게 할 뿐이다. 어떤 낯선 사람이 함께 놀려고 하면 "난 싫어"하며 와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다음에 엄마가 나타나면 다시 행복해진다. 이것이 제 7식의 시작이다. 나쁜것과 옳은 것, 싫은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해내는 마음이다.
제 7식은"이건 좋다. 저건 싫다"하는 감정으로 변화한다. 제7식은 분별식 分別識, 말라식末那識이라고 한다. 여기서 제7식은 좀더 발전해, 보고 듣고 좋고 싫은 것에 대해 더욱 섬세해진다. 이것이 저8식, 즉 기억의 시작이다. 기억이란 의식의 저장고 장식 藏識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보고 행했던 모든것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마치 컴푸터와 같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것이 저장되기 때문이다. 마치 컴퓨터와 같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것이 기록되는 것이다. 이 인간의 컴퓨터는 아주 섬세해서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모든것이 여기 기록된다. 때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해도, 그것이 바로 순기억(pure memory)의 영역이다.
밤에 우리는 더 이상 보지도, 맛보지도, 느끼지도, 듣지도 못한다. 눈, 귀, 코, 혀, 몸, 생각하는 마음이 활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제7식과 제8식은 결코 쉬지 않는다. 순수한 감각을 느끼는 의지의 마음은 기능을 멈췄다 하더라도 감정과 지적인 마음은 여전히 활동한다. 자고있을 때도 이것들은 여전히 활동 중이여서 우리는 그동안의 경험과 습관으로 만들어진 모든 이미지와 감각과 감정들을 경험한다. 어쩌면 하늘을 날지도 모르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악당을 만나 싸울 수도있고, 고향에가서 오래전 친구를 만날 수도있다.
참선을 할 때도 뉴욕에가서 옛 친구를 만난다. 또 샌프란시스코나 바르샤바로 간다. 아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와 싸울 수도 있고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18가지 영역은 작동하지 않는 다 그러나 제7식과 제8식은 여전히 깨어서 서로 활동을 한다. 그때 경험하는 것은 이것들의 상호관계를 통한 어떤 강한 기억 혹은 감정이다. 이 느낌의 이미지는 완벽하게 실체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꿈의 본질이다. 결국 꿈이란 우리가 이미 경험했던 것 혹은 우리의식에 저장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앞서 소개했던 내 친구 이선생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처럼 날 때부터 앞을 못 보아 어떤사물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꿈을 꾸나요?"
그는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했고, 내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사람이라든가 산, 바다, 고층빌딩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색깔과 장소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꿈을 꿉니까. 꿈에서 하늘을 본 적이 있읍니까?"
"물론 없지요. 실제로 진짜 하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꿈에는 하늘이 나타나지 않지요. 다만 나는 걷고 먹고 얘기하고 앉고 옷 입고 모욕하고, 이런 꿈을 꿔요."
이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선생은 꿈의 본질, 즉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꾸는 꿈ㅇ이란 단지 눈, 코, 귀, 혀, 몸, 마음을 통해 우리 기억에 씌여진 것들 뿐이다. 눈의식이 없다면 우리역시 꿈에서 어떤 대상을 보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미친사람을 본다. 미쳤다는것은 마음에너지가 불균형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6. 7. 8.식등도 불균형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은 어떤 강한 욕망만을 좇고 조화롭게 균형을 찾을 수가 없게된다. 6. 7. 8식들이 서로 균형을 찾지 못해서 연결될수 없는 것이다. 종종 길거리에서 혼잦말하는 사람을 볼 수있다. 옆에는 아무도 없느데 옆사람과 얘기하는 것처럼 웃고 떠든다. 마치 하늘이라도 날 수 있을 듯 자유롭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많은 데서 마구 옷을 벗기도 하고 악마와 싸우기라도 하는 듯 성난표정으로 마구 소리를 지른다. 이런 삶들은 어떤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서 의식이 점점 분리되어 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각각의 의식들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고 싶어한다. 제6식은 제7식과 이야기할 것이고 이미지와 기억들을 저장한 제9식역시 다른의식과 소통할 것이다. 제8식은 다른 의식들에 의해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제6식에 의해 균형이 흔들린다.
제8식은 모든것을 지배해서 꿈으로 형상화하여 그것이 실제라고밑게 만든다. 왜냐하면 제6식에서 나오는 눈으로 본 것, 귀로 들은것, 코로 냄새 맡은 것, 혀로 맛본것, 몸으로 느낀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들은 더 이상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약간씩 미쳐있다. 거의 모든삶의 의식은 약간씩 불균형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음 에너지의 균형을 잡는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참선수행의 첫 번째 이익이다. 수행을 열심히하면 절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두 개의 자석을 음극과 양극에 놓는것과 같다. 누군가 어떤 강한 욕망에 집착해 있으면 그것에 대한 강한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마치 두개의 자석을 양극끼리 맞대놓으면 서로를 밀어내는 강력한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의식은 분리된다. 그러나 수행을 열심히 하면 우리의 양극 에너지가 우주의 에너지와 연결되어 마음과 삶에 균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뭔가 하고 있을 때 오직 하라. 마음속에 어떤것을 만들지 말고 그냥하라. 감정, 조건, 상황을 점검해서 그것에 집착하면 어떤불균형이 나오게 되어있다. 더 오래, 더 깊이 뭔가에 집착하면 마음에 더 큰 불균형과 부조화가 나올 뿐이다. 그러나 맑은마음을 가지고 어떤것도 옳다, 그르다 분별하지 않으면 이 세상모든것이 우리에겐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아주 유명한 공안이 하나있다. 큰스님 서암 스님은 매일 저 멀리 푸른산을 바라보며 법당앞에 서 있곤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스님"이라고 부른 뒤 "예" 하고 대답했다. 그리곤 "맑은 마음을 가져라"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뒤 다시 "예" 하고 혼자 대답하곤 했다. 또 "언제 어디에서도 정신을 바짝차려 남에게 속지말아라"고 말하고는 "예" 하고 대답했다. 서암 스님은 자신에게 있는 두 개의 마음과 서로 얘기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약간 미친 행동일 수도 있다. 부르는 스님은 누구인가. 대답하는 스님은 또 누구인가. 스님은 한 명인가, 두명인가. 누군가를 부르는 스님은 제8식이고 대답하는 스님은 제7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공안을 이해하면 우리는 우리 의식의 기능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 큰스님이 제자에게 매일 걸으면서 하루 종일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으라고 시켰다. "누가 이 몸의 주인공인가. 또 어디에 사는 가?" 제자는 이 질문으로 열심히 수행해서 어느 날 깨달음을 얻었다.
또 다른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주 깊이 잠들면 꿈도 안 꾸는데, 그때 너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디 있는냐?"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주인공, 우리의 본래 주인공, 그놈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이 고통의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꿈속에서 경험할 수도 있다. 꿈이 의식의 저장고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이렇게 맟선 것들을 꿈에서 볼 수있을까? 그것들은 어디서 왔나. 우리는 때때로 책이나 영화나 TV를 보다 처음보는 내용이나 장면인데도 아주 익숙한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매일 우리는 지하철, 가게, 학교 등에서 많은 얼굴과 마주친다. 어렸을 적 만화나 잡지에서 어떤사진을 볼수도 있고 그것들로부터 나온 이미지는 여전히 의식의 창고에 저장된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그뿐 아니다. 현생에서 행했던 모든 것 혹은 과거 삶에서 경험했던 모든것이 저장된다. 이 저장고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고성능 컴퓨터는 결코 어떤것도 놓치지 않는다. 이것에 관련해서, 앞서 소개한 이선생에 관한 재미난 일화가 또 하나있다.
어느 때인가, 내가 일본의 교토 젠 센터에 머물고 있을 무렵이다. 어느 날 내가 오사카에 있는 한국 절에 급히가야할 일이 생겼다. 그러나 가는 길을 제대로 아는 신도가 한 명도 없었다. 신도들 중 한명이 이선생이 아마 그곳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선생 집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이선생은 대문을 열어주면서 내가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아이고 스님, 어서 오십시요" 하며 흔쾌히 맞았다. 내가 오사카 절 가는 길을 알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며 앞장을 섰다.
장님을 앞세우고 두 눈 멀쩡한 정상인이 뒤따르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라. 얼마나 재미있는 상황이냐. (하하하) 정상의 눈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아주 단순한 것도 제대로 못 보는 데 비해 이 선생의 눈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애 無碍의 눈이었다. 우리는 이선생의 집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택시 정류장까지는 약간걸으셔야 합니다."
이선생은 지팡이도 없이 척척 앞장서 걸었다. 그는 약간 검은 색의 선그라스만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장님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길을 걸어 내려와 외쪽, 오른쪽, 왼쪽으로 돈 뒤 길 한가운데 나있는 육교로 길을 건넜다. 그는 육교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육교를 걸어올라갔다. 나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선생, 어떻게 육교있는 곳을 이렇게 잘 알아요?"
"아,...... 그건요, 집에서 500미터가량 똑바로 걸으면 생선 냄새를 실은 바람이 불어오지요. 아마 생선가게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50미터쯤 더 가면 주유소가 있어요. 석유내새로 알수 있지요. 그리고 20미터쯤 가면 육교가 나오지요.'' 과연 길 아래를 보았더니 주유소가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선생은 이미 냄새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걸어 지하도를 통과하니 택시 정류장이 나왔다. 일본애서는 택시가 아주 재미있다. 길 오른편에 서 있으면 택시가 온다. 기사가 안에서 자동으로 문을 열기 때문에 승객이 문을 따로 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길가에 서 있었고 이윽고 택시가 다가왔다. 이선생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확히 손잡이를 잡고 안에 들어가 앉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선생은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었고 지팡이도 없었기 때문에 택시기사는 그가 장님인 줄 모르고 있었다. 이선생은 유창한 일본어로 기사에게 오사카에 있는 절 가는 길을 상세히 알려줬다.
"고속도로로 들어가서 교차로를 지나 빵집 앞에서 우회전한 뒤, 두 불록을지나 좌회전해 공원 오른편으로 가십시요."
기사는 이선생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정확히 절에도착했다.
"아니, 당신은 한 번도 운전을 한 적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길을 그렇게 잘아세요?"
"아, 몇 년 전 부처님 오신닐 이곳에 한 번 왔었지요."
나는 놀라자빠질 정도였다. 이건 아주 훌륭한 사례다. 우리 의식의 저장곤는 결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순간에 보거나 듣거나 경험한 것들은 영원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죽어 몸은 사라져도 우리 의식의 저장고는 일하는 것을 멈추지않고 우리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 준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전생에 제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현재 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된다.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모든것이 우리의 과거 업에서 온다. 우리 의식의 창고안에 저장된 행동과 시고에서 나온다. 같은 식으로 우리가 현생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의 다음생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몇 년 전 내 제자 중 하나가 아이를 낳았다. 내가 미국 뉴헤이븐 젠 센터에 있을 때 그녀는 그 아기를 데리고 왔다. 태어난 지 4일인가 5일 된 아기였다. 아주 작은 체구에 아직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 엄마나 다른 사람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생태였기 때문에 그가 사람들을 느끼고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자거나 눈을 뜨거나 아기 얼굴은 언제나 커다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주변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든 그는 전혀 감정의 동요가 없는 듯했다. 항상 웃음 띤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도대체 이것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이 아기는 막 태여났지만 이전 생에서부터의 그의 업이 이 같은 행복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는 무슨일이일어나는가. 그때 우리몸은 '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지수화풍의 살호작용일 뿐이다. 이미 공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제7식과 제8식은 결코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만들었던 업, 그들이 좇았던 습관을 따라 새 몸을 만든다. 살면서 어떤 행동을 했나? 이것이 새 몸을 만든다. '업이 몸을 만들고 몸이 업을 만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요즘 많은 사라들은 그들의 욕망과 몸의 만족만을 좇아 일생을 허비한다. 이것이 동물릐 마음이다. 오직 나, 어직 나뿐이다. "난 다른사람들은 상관안 해." 개나 고양이는 서로에 대해 관심이 없다. 뱀은 새의 조건에 대해 관심이 없다. 요즘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와 같아지고 있다. 이런종류의 삶이 만들어내는 업 때문에 아마 그들은 다음생애에 동물로 태어날 것이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한번 보라. 모든 사람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있지만 안은 뱀의 마음, 개의 마음, 고양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한 80퍼센트가 뱀, 개, 고양이의 마음일 것이고 20퍼센트만이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전생과 현생에 걸쳐 만들어놓은 업ㅂ, 즉 마음의 습관의 결과이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의 업만을 좇는다. 그들의 업은 그들을 항상 지배해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난 이걸 원해." "난 저걸원해." "난 이 사람이 좋아." "난 저 사람이 싫어." 이런 습관의 힘은 제8식에 저장된다. 마음 공부를 하지않으면 모든 중생등레게 갖는 사랑과 자비심이라는 본성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 만들면 뭔가를 갖게된는 이것은 인과 법칙이며, 부처님의 만든 창조적인 생각이아니라 이미 이 세계에 내재되어잇는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어떤 종류의 생에서 다른종류의 생(때때로 인간, 동물, 아귀)으로 끊임없이 옮겨다니는 법칙을 아주 맑게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방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어떻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전 인생을 결정하는 마음을 지키는가. 그것이 또한 우리의 다음 생을 결정한다. 내 업을 통제하고 지배하기위한 것이야말로 수행의 목적이다.

Tuesday, May 1, 2012

숭산 행원 대선사의 가르침 법화경

법화경 • 法華經 The Lotus Sutra

제법종본래 諸法從本來 All phenimena from their very origin. 본래 모든 법은,

상자적멸상 常自寂滅相 Always have the aspect of stillness and extinction 적멸하여

불자행도기 佛子行道己 When the disciple of the Buddha walks this path. 도룰 행하는 불자는

래세득작불 來世得作佛 He will become a Buddha in future lives.

중국말로 «법화경»은 '실상묘법경( 實相妙法經)'이라고 부른다. 실상은 '참'이라는 뜻이고 묘법은 '신비한 법문' 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법화경»은 어떻게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어떻게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법화경»은 완벽한 전적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해 가르찬다. 사실 이것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얻어야 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생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본래 마음을 잃어버린다.

내 말을 듣고 있는동안 여러분의 마음을 휙휙 흝고 지나가는 망상들을 좇으면 여러분과 나는 완벽하게 분리된다. 그러나 모든 생각을 끊어서 단지 이 말을 듣고 있는 것으로 돌아오면 완벽하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내 말과 여러분이 듣고 있는 귀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말하는것과 듣는것이 둘이 아니요, 그것이 이미 부처님이고 예수님이다.

이것은 한국사람만 경험하는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독일, 중국사람만 경험하는것도 아니다. 남자만 경험하는 것도, 여자만 경험하는것도 아니다. "탕!" 나는 때때로 이것을 '원점(primary point)' 이라고 부른다.

몇 년 전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신부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일행 중 하나가 전날 나의 법문을 듣고 의문이 생겨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선사님께서는 '원점(primary point)'이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점과 하느님의 창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그때 지금처럼 테이블을 탕 쳤다. 그게 전부였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신부님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얘기하는것은 단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테이블을 치는것은 생각이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부처님이전입니다. "탕!" 우주 이전입니다. "탕!" 하느님의 창조 이전입니다. 당신이 그 지점을 볼수 있다면 신을 볼수 있읍니다."

그러자 다른 신부님이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당신은 신을 볼 수 있읍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신부님이 입고계신 셔츠가 까만 색이군요."

« 법화경 » 은 바로 이 지점이 "탕!" 어떻게 우리의 본성이고 모든 현상의 본질인지 깨닫게 해준다. 또 이 경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미래생에 부처가 될것아라고 한다.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생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이 안되는 것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기 위해 나온 구별일 뿐이다. 실제 우리는 바로 지금, 바로 이 장소가 아닌 때에 부처가 되지 못한다.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간에 되는 것이 아나다. 무처가되고 싶으면 단지 수행하면 된다. 바로 지금 수행한다면 '다음 생'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된다. "탕!" 여러분은 단지 이순간을 가질 뿐이다. '다음 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순간에 뭔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이미 부처의 마음이다.

부처의 마음을 얻는것은 어렵지 않다. 미래의 어느순간 일어나는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안과 밖이 없이, 주체나 객체가 없는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말한다. 오직 수행하라. 그러면 부처가 된다.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추종자들은 '나무묘법연화경 南無妙法蓮經' 을 암송한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이것이 일본의 «법화경» 제목이다. 그들은 이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아름다운 집과 훌륭한 아내를 얻는다고 믿는다. 그 어떤것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해주는 도깨비 방망이의 진언같다.

그런수행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뭔가 얻고 싶다면 이것은 좋은 방법이다. 그렇지만 올바른 불교공부나 참선수행은 어떤것도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아무묘법연화경 뿐만아니라 모든 진언 수행의 최종 목표이다. 어떤종류의 진언도 똑같다. 심지어 '코카콜라, 코카콜라, 코카콜라'하고 계속 열심히 반복 외우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空 의 마음을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절대의 상태이며, 우리가 원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점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기본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기본원인이 제거되면 우리의 조건과 행복이 나타날수 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본원인을 제거할 것인가. 단지 그냥 하면 된다. 이 그냥하는 마음에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그결과 우리는 우주 에너지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원점이라고 부른다. 원점을 유지하면 천천히 기본원인이 사라진다. 생각이 단지 기본원인을 만들 뿐이다.생각을 끊으면 기본원인은 태양열에 증발하는 물처럼 자연스레 사라진다.

열심히 수행하면 이것은 매우쉽다. 그러나 자꾸생각을 하면 그것은 우리의 업을 만들고 업은 태양을 가려 결국 기본원인인 물은 증발할 수 없게된다. 어떤 수행을하든지 큰 물음을 가지고 그냥 해보아라. 노력하는 마음과 큰 의혹을 가지면 어떤 종류의 수행이든 본성을 얻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오래전 한국에는 석두石豆라는 이름의 스님이 계셨다. 돌머리라는 뜻이다. 그는 아주 멍청했지만 대단한 노력가였다. 어느 날 석두는 스승에게 물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스승은 '즉심시불 卽心是佛', 즉 마음이 부처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석두는 이를 '짚신시불'이라고 잘못알아들었다. 즉 짚신이 부처라고 잘못알아들은 것이다. (하하하하하!) 그리하여 그는 3년동안 오로지 '짚신이 부처라니, 이말이 무슨 뜻이냐. 도저히 모르겠다.'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수행방식에 대해 의심을 품지않았다. 스승에게 따져 묻지도 않았다. 좋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직 매일 이상의 한가운데서 앉거나 일어서거나 먹거나일하거나 오직 집중해서 이질문을 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화두로 삼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덕에서 나무를 해가지고 오다 바위에 발을 찧었다. 지게위 나무가 머리위로 쏟아지고 짚신 한 짝이 멀리 날아갔다. 순간 석두는 깨달음을 얻었다. 날아간 짚신과 그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의 우주가 된 것아었다. 그때 그는 그의 본성을 보았다. 그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부처가 바로 짚신이로구나,"

그는 스승에게달려가 소리쳤다.

"스승님, 스승님, 이제 부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읍니다."

"오, 그래, 네가 깨달은 것을 설명해 보거라."

석두는 갑자기 짚신으로 스승의 머리를 한대 때렸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그것뿐이냐?"

" 내 짚신이 다 찢어졌읍니다.

스승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어댔다.

"훌륭하다. 네가 깨달음을 얻었구나."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수행을 해서 오직 하나의 마음을 갖느냐 하는것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오직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수행을 하면 모든것이 명확해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하라.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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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28, 2012

숭산대선사의 가르침 반야심경

반야심경 . 般若心經 The Maha Prajna Paramita Heart Sutra

照見 五溫皆空 度一切 苦厄
Perrceiving that all five skandhas are empty saves all begins from suffering.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괴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Form does not differ from emptiness, emptiness does not differ from form.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No appearing, no disappearing, no taint, no purity, no increase, no decrease.
나타나는것도, 사라지는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涅槃
All Dharmas are marked with emptiness No cognition, no attainment, Nivana

正等正覺
Unexcelled perfect enlightenment---anuttara samyak sambodhi.
정등정각, 아뇩다라삼약삼보리
Gate,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반야심경*, 정확히 말해 (마하바라밀다심경)은 260자 밖에 되지않는 짧은 경전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반야심경*안에는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8만 4천 경전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전 세계 모든 절에서 읊어진다. 서울 화계사와 계룡산 무상사의 국제선원 에서도 매일 아침 한국말로 한번, 영어로 한 번, 저녁에는 한국 말 한번, 영어로 한번해서 두번씩,
그리고 결제기간 동안에는 더 많이 암송된다. 때때로 마음이 맑지않거나 참선수행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을 읽어라. 그러면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마하(Maha)라는 말은 위대하다는 뜻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 , Prejna Paramita)'이라는 말은 지혜의 완성을 뜻하며, '심셩 Heart Sutra'은 마음에 길 이라는 뜻 이다. 따라서 이것을 '지혜로 가는 위대한 길'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에서 진정으로 무한한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땅이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고. 어떤이에게는 바다가 가장 큰것으로 보일지도 무른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가장 클까? 어쩌면 우주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고 무한대의 세계를 담고 있으니까. 한 위대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는 나의 몸을 덮고 있지만 나의 마음은 온 우주를 덮을 수 있다." ㅇ우주는 내가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사실상 아주 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주라고하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으로 전 우주를
덮고 있는 것이데,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우주의 무한대적 시공간보다 훨씬 큰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반야심경*은 이 가장 큰 것, 큰 마음을 지적한다. 이 작은 경전의 제목에 '가장 크다'는 의미인 마하를 붙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모든 중생을 과로움과 번뇌에서 구한다. 照見五溫皆空 度一切苦厄

이 세상 도처에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들은 어떤 물질적인 것을 얻기위한 욕심을 쫓는다. 자신들이 느끼는 것들이 삶을 완성시켜줄 것이라 믿고 있으며,다른 사람들에의해 인정받고 싶다는 야망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투쟁하는지와 상관없이, 설사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들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영원히 지켜낼 수는 없다. 이것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 고통 역시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진짜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다 죽게되면 고통는 사라진다. 고통은 단지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ㅇ을 깨달으면 어떠한
고통이나 재앙도 존재하지 않게되다. 생각을 하면 어디에서도도 참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모든 집착을 끊으면 우리의 참 자아는 어디든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몇가지 중요한 점들을 배웠다. 부처님은 먼저 우리가 '마음' 혹은 '나'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이라는 다섯가지가 뭉쳐만들어진 무더기(五溫, skandhas)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 무더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정신적 에너지의 집전물(五溫)일 뿐이다. 인간은 형태, 감각, 인식, 의지, 의식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변할 때 불가피하게 고통에 빠진다. 이것들이 실제이고 '나'라고 믿기 때문에 결코 고통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이 에너지의 집적물들 역시 공허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무엇이 고통을 만드는가?
이 앞에 지금 컵이있다. 여기에 주스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컵이 깨지먄 주스를 어디에 담을 것인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무터 고통이 오는가? 우리가 오온이라는 정신적 에너지 무더기에 집착한다면 고통은 머물 곳(컵)을 갖게 된다.
그러나 *반야심경*으ㅢ 말대로 이 에너지의 무더기가 공허하다면 고통은 그것이 머물 컵을 잃는다.
따라서 '공'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중여하다. 열심히 수행하여 *반야심경* 오온의 핵심을 통찰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욕심으로부터 구해준다. 그러나 거둡 말하지만,
단지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모양이 공이고, 공이 모양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반야심경*은 '모양 色이 공이고 공이 모양 色이다'라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오래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이상 생활에서 이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다.
예를 들어 여기에 갈색나무의자가 있다고 치자. 딱딱하고 무겁지만 앉을 수도 있고 물건을 놓을 수도 있다. 의자에 불을 붙여보자. 잠시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보면 의자는 이미 불에 타고 없어져버린 뒤다.
딱딱하고 강한 것으로 보였던 그것이 찌꺼기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의자라는 물체는 이처럼 공하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한다. 다시말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든 짧은 시간이 걸리든 의자는 결국 변한다.
그러므로 이 갈색의자는 완벽히 공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앉으면 우리 몸무게를 지탱한다.
우리들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이것이 모든 고총의 원인이다. 이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고 싶으면 '이름과 모양이 실체가 아니며 무상하다.'는 약을 먹어야 한다. 그것들은 엊제나 변하고 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부나 명예,
다른사람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조차 공허하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우리들은 몸을 소중히여긴다. 또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곧 죽고 몸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생전에 얼마나 몸을 소중히 다뤘느냐에 관계없이 죽을 때는
이 공한 몸을 가져갈 수 없으며 돈도, 명예도 섹스도 그 어떤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런것들에 집착해 있다. 그들은 이름과 이공허한 것들을 위해, 단지 그것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그들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그들은 오로지 돈과 명성,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높은 지위를 얻기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이 공헐하고 무상한 것들을 얻기위해 때로는 온갖 모욕과 고통도 감수한다.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섹스에 집착한다. 소용없는 일이다. 모든 형태는 공하기 때문에 뭔가가지거나 지킬 수 잇다.
고 하는 생각 자체가 환상이다.
가장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나는 애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이다.바로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아의 삶을 만든다. 그것이 지금과 다음 생을 결정한다. 모든것이 본래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우리은 이 무상한 것들을 놓아버리고 고통없이 살아갈수 있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젹한 자유이다.
이와 관련해 아주 뉴명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아테네에 디오게네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최고의 철학자였음에도 집없이 방황하는 한 마리 개와 같은 생활을 했다. 늘 밖에서 노숙을 했으며 옷은 늘 헐벗었다.
그날그날 먹을 거리도 걱정하지않고 지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옷도 입지않은 채 지내는 등 그의 생활은 그야말로 자연주의 그 자체였다.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역시 거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깁자기 서늘하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그의 눈앞에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알렉산더대왕이 서 있는것이 아닌가.
알렉산더는 돵대한 군사력과 지적인 우수함으로 세계를 정복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있는 영웅이었다. 그날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로부터 몇가지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방문한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화려한 군복을 입고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과시하며 디오게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누운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오, 알렉산더 대왕이시군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시요, 디오게네스. 당신을 돕고싶어 이렇게 찾아왔소. 나는 이미 세계를 정복했소. 셀 수 없는 왕궁과 부가 내게있소. 당신이 원한다면 다 드리리다. 땅이든, 돈이든, 지위이든 말만하면 모두 당신것이요. 소원을 말하시요."
"고맙습니다. 원하는 것이 하나 있긴 하지요." "말씀만 하십시요. 다 드리겠읍니다." "좀 비켜서 주시겠읍니까?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좀 춥군요."
"오, 미안 합니다. 알렉산더가 사과하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소원 입니다. 하하하하.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모양과 공함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알렉산더 대왕은 단지 햇빛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 세상 모든것을 다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디오게네스는 단지
"햇빛을 가리지 마시요"라고 말했을 뿐이다. 오직 그것 뿐이다. 디오게네스는 이미 온 진리를 다 얻었다. 그는 실제가 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과 모양 역시 공해서 부나 명예, 사람, 가족, 높은 지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모든것은 공하다. 왜 이 공한 것들을 갈망하는가. 그것들은 진정으로 우리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지금 나는 단지 햇빛을 원할 뿐이다.' 이것이 다다. 디오게네스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라는 것을 완벽히 깨달았기 때문에 완벽하게 자유였다. 더 이상 붙잡을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것을 깨달으면 수행이 필요없다. 법문 또한 필요없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수행이 필요하다. '모양이 공하고 공한 것이 모양이다'라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참선 수행은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나는것도 줄어드는것도 없다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가령 여기 3밀리리터의 물이 담긴 병인 있다고 하자 이병에 100도의 열을 가하면 물은 모두 수증기로 변한다.
0도 이하로 얼리면 얼음이 된다. 물은 이처럼 모양과 온도에 따라 변하지만 물 그자체인 H2O는 변하지 않는다. 부증불감 不增不減 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을 통해 이같은 에너지 불멸의 법칙을 고안해 냈고,
후쿠는 화학을 통해 질량불변이라는 진리를 창출해냈다. 이처럼 불교는 현대 물리학이나 화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물은 더럽고 깨끗한것도 없다. 깨ㅔ끗한 물을 마셔도 조금있다가 더러운 오줌으로 나온다. 물은 또 개울에 있다해서 적고 바다에들어간다고 해서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이 따로있지 않다.
*반야심경*은 우리의 본성을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반야심경*에는 '아니다' 不라는 말이 여러번 나온다. 진정한 공함을 깨달으면 말이나 단어가 없다. 입을 여는 순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말이나 단어는 우리본성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과 단어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말과 단어라는 약이 필요하다.
*반야심경*은 이 두가지를 모두 인식하고 있다. 즉 우리의 본성이 아닌것을 설명함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드러낸다. 딱히 무엇인지 얘기할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닌것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우리 본성은 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다. *반야심경*은 오직 '아니다'라고만 말한다. 아마 이것이 말과 단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는다. 더럽거나 깨끗하지도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우리의 본성은 완벽하게 정지해 있으며 그리고 공하다. 그것은 모든것을 구성하는 우주적 실체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타나거나 사라짐이 있겠는가.
어떻게 더러움과 순수함이 있겠는가 이모든 것은 결국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다.*반야심경*은 생각이전의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법은 공하다. 깨달음도 깨달을 바도 없다. 그것이 열반의 세계다. 諸法空相 無智無得


*반야심경*은 '모든법은 공하다'라고 한다. 따라서 법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것조차 큰 실수다. '진정한 공' 의 경지에서는 말도, 단어도, 법도 없다. '보든 법이 공하다'고 입을 여는 순간 이미 '공'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 '공'이 아닌 것이다.
말과 단어를 단순히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이 지적하고 있는것을 실제로 얻어야 한다. 모든것이 공한 경지에는 인식도, 깨달음도 없다. 공이야말로 절대이다. 그러나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탕!"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반야심경*에 나온 이말은 그저 그럴듯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도 머리로, 개념적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진리를 찾는데 도움이 안 된다. 뭔가를 얻어야한다. 아니,
사실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한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공'이라는 소승적 경험에서 한 다계 더 나아간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거기에는 말도, 단어도 없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절대, 즉 열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소승불교에서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해 얘기했다. 모든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고통을 멈추게하고 삶과 죽음을 멈추게 한다. 이것이 열반이며, 거기에ㅔ는 분별이없다. 가고 오는것도, 높고 낮음도, 좋고 나쁜것도 없으며, 죽고 태아남도 없다.
존재하지조차 않는것을 어떻게 멈추게 할수 있는가 이미 고통이 없는데 어떻게 고통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가. 바로 그 때문에*반야심경* 에서는 '고통도' 고통의 원인도, 고통의소멸도, 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정등정각 正等正覺,

야뇩다라삼약삼보리 '아뇩다라삼약삼보리 anuttara samyak sambodhi' 눈 산수크라수트로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깨달음' 다시말해 '일체만상을 두루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바로 진리를 일컫는 다른이름인 것이다. 열반의 경지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진정한 공함을 얻는다면 그것이 열반일 뿐이다.완벽한 정적과 축복의 경험이다. 주체도 대상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으며, 오고 감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다. 어을 것 또한 없다. 그러나 우리의 수행은 이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열반의 실천에 대해 알아야한다. 이름하여 그 어떤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정한 깨달음이다. 집착이 없으면 진리를 얻는다. 우리마음은 공허해서 우주와 같이 맑다. 즉, 거울처럼 맑다는 것이다.
거울 앞에 산을 비추면 오직 산이 있을 뿐이다. 물을 비추면 오직 물이, 붉은것을 비추면 붉은것이 있고, 흰것을 비추면 흰것이 있다.
열반는 공함을 얻는 것이고 긍극적으로는 얻는것도 업ㄱ다는 것이다. 아뇩다라삼약삼보리는 진리를 얻기위해 공의 경험을 실천하는것을 의미한다. 공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라 그것이 대승불교이고 대자대비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magate, bodhi svha!


한단계 더 나가보자. '공'을 얻으면 그다음 진리를 얻는다. 그러나 단순히 진리를 발견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이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곧 진리를 얻었다는 말이다.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푸르다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정말미에 우리는 아주 뛰어난 진언 眞言, 위대하고 밝은 진언,
최상의 진언인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마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를 읊는다 그것은 '간다 간다 간다. 고해를 넘어 고통이없는 곳으로간다' 고 번역된다.
*방야심경*말미에 나오는 이 진언은 '실천'을 의미한다. 이 진언전까자 모든것은 공함과 진리를 얻는것에 대한것이다. 이 진언은 우리가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 세상을 돕고 싶다면 어떤 종류의 행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대보살의 행동이다.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깨달음을 실천해야한다ㅏ. 그것은 우리가 바로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다. 순간순간 고통을 바라보면서 오직 중생을 돕는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반야심경*은 정말 흥미롭다. 그것은 이분법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서 절대의 세계로 나가고,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순간의 세계라고 부르는 세계로 이끈다. 이분법적 세계는
'모양은 공하고 공한것이 모양이다'라는 세계이다. 절대의 세계는 空, 즉 열반이다. '모양도 없고 공함도 없다'. 이어서 완벽한 세계는 '아뇩다라삼약삼보리'. 즉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진리 그자체를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를 경험한 우리는 순간순간 다른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사ㅛㅇ해야 한다. *반야심경*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아제아제 파라아제 파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것은 위대한 사랑과 대자대비심이 잇는 순간의 세계를 계속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대보살의 길이다.
우리가 모든 중생과함께 실천을 할 때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위대한 사랑은 저절로 나타난다.
실천이라고 해서 어려운것이 아닌다. 순산순간 조화롭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이 이미 세계평화이다. 누군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 물을주고, 배가 고프다고하면 빵을 주면된다.
단지'......할 뿐'이다 우리 앞에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이있으면 아무생각없이 단지 도우면 된다. 단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반야심경* 앞부분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지시없이 단지 깨달음과 깨닫지 않음에 대한 설명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가면 우리가 뭔가 깨달았다면 뭔가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자.
이것이 아제아제 파라아제 아라승아제 모지사바하의 의미이다.
한단계, 한 단계 순간순간 즉각적으로 우리는 대자대비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깨달은 진리를 사용해서 어떻게 살아애 할지를 얻어야 한다. 순간순간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오직 할 뿐이다.

Wednesday, April 25, 2012

숭산 큰 스님 가르침 금강경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금강경 * 金剛經 The Diamond Sutra
凡所有相 皆是虛妄 All appearance is delusion. 실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은 환상이다
菩見諸相 非相 卽見如來 If you view all appearance, then that view is your true nature. 모든 현상은 환이다. 모든 현상은 존재하지않는 것으로 깨닫는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應無所住 而生基心 Do not become attached to any thoughts that arise in the mind.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If you see form as the Absolute, If you search out the Absolute with your voice. 바깥모양을 절대로 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you are practicing the wrong path, and you cannot see your true self. 참나自我를 찾을 수 없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All compounded things are like a dream, a phantom, a bubble,or a reflection.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과 같다.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They are like dew or lightning.Thus should you view them. 또한 이슬이며 번갯불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경전이 *금강경*과 *반야심경*이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에서도 제일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금강경*은 *반야심경*보다는 훨씬 분량이 많다. *금강경*은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근본의 근본경전이다. 고종의 근본경전이다. *금강경은 한 시간 이내면 다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지만 대승불교의 핵심이 담겨있는 글로서, 소승불교를 건너 대승불교로 가는 다라와도 같다. 즉, 소승 * 대승적 관점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살도의 길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幻이다 제상비상 諸相非相
이 얘기는 *금강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잘 알려진 부처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것이 또한 무상하며, 우리라는 존재역시 무상하다. 바로 소승불교의 중심 가르침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금강경*변역본을 보면 '우리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그 다음에 본질, 참 자아를 볼 것'이라고 되어있다. 즉, 어떤 주제가 있고 그주제가 어떤대상을 파악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주체, 실제를 보는 자인 우리 자체가 이미 무상한 존재이다.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대상 역시 무상하다. 어떻게 幻이 幻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존재가 무상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것은 언제나 쉬지않고 움직이고 변한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 우리의 움직이지않는 참 자아를 볼 수 있는가? 자칫 이것은 말장난에 빠질우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실체를 幻으로 보고, 그다음에 본질, 참 自我를 볼것'이라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다시번역하는 것이 옳다. '모든현상은 幻이다. 모든현상을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깨닫는 것 자체가 참 자아이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이 세상을 볼 수있고 들을 수있고 냄새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지는 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보고있는 그 자체가, 듣고있는 그 자체가, 냄새 맡고있는 그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다. 여기에는 대상과 주체가 따로없다. 들을 때 그것이 우리의 참 自我이다. (주장자를 치시면서) 이 "탕!" -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가 '......할 때 참 자아를 얻을 것이다." 라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누가 참 자아를 얻는가? 幻은 幻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觀하는 것 그 자체가 참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應無所住 而生基心
禪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수 있는 6조 혜능 대사는 속세에서 '老行者'라고만 알려진 평범한 신도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병든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는 효자였다. 그는 산에서 매일 나무를 해다가 시장이나 집근처 마을에 내다팔아 생계를 꾸리며 살았다. 어느 날 부잣집에 나무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걸어가는데, 스님 한 분이 다음과 같은 염불을 외면서 그의곁을 지나갔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이 마을을 듣는 순간 마음이 확 열렸다. 마음속에 무엇인가 꽝 하고 다가온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불교에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경전을 공부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한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완전히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오직 *금강경*의 이 대목만을 들은 것이다.
"어디에도 생각에 집착함이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우리마음속에서 왔다갔다 하는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 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진짜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을 놓아버릴 때 그 순간 일어나는 생각이 진리이다. 빨간 불이면 멈추고 파란 불이면 건너가는 보행자처럼 말이다.
*금강경의 이 대목은 아주 간단하지만 매우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집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생각을 경험하는 매우 명확한 길을 보여준다. 단지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의미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안과 밖이 언제나 하나가 되어 단지 그것을 그것을 하라는 얘기다. 하늘을 볼 때 단지 푸른빛을 볼 뿐이다.
순간순간 '...... 할 뿐 이다. 벽은 하얗다. 지금은 저녘 7시 36분이다. 바로 지금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 장애없이 우리마음에 단지 생각이 오고 갈 뿐이다. 바깥모양을 절대로보며 그 절대를 소리로 찾으려하면 참 나를 찾을 수 없다.
若人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많은 사람들은 신이나 부처에 집착해 있다. 피상적으로 사물을 보고 바깥에서 산이나 부처를 찾는다. 그리고 뭔가 기적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신도, 부처도 볼 수 없다. 모양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바깥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처럼 안의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바깥대상에 따라 함께 일어나는 느낌, 인식, 충동, 의식을 의미한다. 그것들 역시 '어떤 형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형태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ㅂ본래 형태도 감정도, 인식도, 충동도, 의식도 없는 그것들은 완벽히 무상하다. 이것들에 집착하면 우리는 참 나를 볼 수 없다. 집착은 모든것이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다. 이 착각때문에 우리는 바깥세계에 뭔가 대상과 사물이 있다고 믿으며, 안에도 뭔가 있다고 믿는다. 즉 안과 밖을 만드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집착이다. 절대를 알아야 참 나를 찾을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이름도 모양도 옶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없다.
그런데 참 나를 보는것과 진리를 보는것은 약간 다르다. 참 나를 보는것은 절대를 보는 것이다. "탕!"-모든것은 우주적 본질, 똑같은 본질이다. "탕!"- 이것이 바로 참 나를 깨닫는 단계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먼저 참나를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런 연후에라야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절대를 께달아야 한다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탕"- 그러나 이 깨달음은 대승불교로 가는 중간 길이다. *반야심경*, *화염경*, *법화경*에서 우리는 완벽한 진리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의 핵심은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이며, 이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만약 참 自我를 발견하고 싶다면 완벽하게 비여있어야 한다. 먼저 空함을 얻어야만 한다. 본성을 찾고 싶다면 비어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본래 空함이 우리의 本性이다. 본성이란 절대이다. "탕!" 만물이 절대이다. 이것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삶은 꿈이며, 환이며, 물거품이며, 이슬이며, 번갯불 이다. 모든것을 이렇게 알아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이 역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생각에 집착하면 모든것이 이름과 모양을 갖게되며, 있다 없다 하는 이분법적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또 변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무상하다. 모든것이 꿈이고 이슬이고 물거품이며 번갯불 이다. 이 세상 어느것도 그대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두가 변화의 과정에 있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별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럴 때에라야 이 끊임없이 변하는 우주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떤바깥 세계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을 잘 간직하면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오고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것도 없다. 이름과 모양은 공허하며, 전 우주는 완ㅂ벽히 공하다. 우리의 존재역시 완벽히 공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곧 참 自我를 얻을 수 있다.
*금강경*은 만물의 무상함을 가르쳐 우리가 이 생각이라는 '꿈'을 캐기위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러나 경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金剛經을 사용해야만 한다. '오직 모를 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다이야몬드와 같은 칼이다. 오직 수행하라. 오직 수행하라. 단지 그것 뿐이다.

Sunday, April 22, 2012

선의 나침판 대승불교







THE COMPASS of ZEN
대승 불교 大乘佛敎 MAHAYANA BUDDHISM

법체유공관 法體有空觀
INSIGHT INTO the existence and nonexistence of DHARMAS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무상개공관 無相皆空觀
Insight into the fact that there are no external tangible charateristics and that all is emptiness
(이름과 모양이 공하다는 통찰)
유공중도관 有空中道觀
Insight into existence, emptiness, and the MIddle Way
(존재와 공함, 중도에 대한 통찰)
제법실상관 諸法實相觀
Insight into the true aspect of all phenomena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사사무애관 事事無碍觀
Insight into the mutual interpenetration of all phenomena
(모든현상의 상호침투)
직사이진관 卽事而眞觀
Insight which sees that phenomena themselves are the Absolute (실제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대승불교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 세상 중생들에게 행한 첫 번째 가르침이 소승불교라고 믿었다. 알다시피 부처님은 6년 고행끝에 보리수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시 자신의 깨달음의 경지를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그래서 심지어 부처님은 처음엔 아예 가르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인도에는 브라만교, 요가 등 많은 가르침들이 있었고, 스승들도 많았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당시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신 혹은 구루(영적 지도자)에 의존하지않고 얻은 자신의 깊은 통찰을 누가 과연 믿고 따라줄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때 한 브라마 신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두루 찾아보시면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도 있읍니다. 그들은 당신의 가르침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 먼저 가르치는 것이 어떠실지요."
그리하여 부처님은 보리수를 내려와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학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님은 먼저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의 통찰은 너무깊고 심오하여 당시 풍미했던 가르침들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위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부처님은 우선 무지와 욕망,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 뒤 어떻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쳤다.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무상관과 이 세계는 더러움으로 가득차 있다는 부정관, 그리고 종국에는 나와 너가 없다는 무아관을 얻어야 한다."
부처님은 이 같은 기본 깨달음을 얻는 길을 가르친 뒤 열반을 얻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착한일을 많이하고 나쁜행동을 하지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계율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맑고 순수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고통을 벗어 던져서 완벽한 축복의 세계로 가는 열반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으로서 이름하여 소승불교라 한다. 사람들이 대승불교인 *화엄경*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소승불교 사상을 먼저 가르친 것이다. 소승불교는 먼저 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고통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완벽한 공 또는 열반으로 가는 것이다. 제자들이 이 같은 가르침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대승불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승불교는 '고통'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 즉 '空'에서 시작한다. 즉, 이 세계가 완벽히 공하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삶이 단지 고해'라는 것은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바깥 실체가 순수하든 순수하지않든, 좋든 나쁘든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모든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체라고 믿는 바깥의 이름과 모양은 언제나 변하고 변해서 본래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고통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왜냐하면 고통 역시 본래 없는 것이니까.
대승불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을 향한 모든 수행이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낼 것인가?" 대승불교의 수행은 마지막 한 생명이라도 고통에서 구해내지 않으면 자기 혼자서 무한한 축복의 세계인 극락으로 가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말한다. 이런 마음이 바로 大慈大悲이다. 내 삶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모든 중생을 위해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을 자전거에 비유할 수 있다면 대승불교는 버스나 기차에 비유할 수 있다. 즉, 소승불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대승불교는 나쁜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도 함께 가는 것이다. 실제로 부처님은 처음에 이런 가르침을 주었지만 수준이 너무 높아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성숙해질 때까지 소승불교 사상을 펴신 것이다. 자, 그렇다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대승불교는 크게 여섯가지 통찰로 나뉜다.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먼저 모든 실체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다. 나의 실체와 우주의 실체는 똑같기 때문에 자성(自性, SELF-NATURE)이 따로 없다. 모든 법의 실체는 空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각자자신의 몸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이 깨달음을 얻기가 쉽지않다. 중국에서는 수행의 일종으로 '자기 몸을 시체로 보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나는 송장이다. 송장이다. 송장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방식으로 수행하면 몸이 우리 마음에 불어넣는 모든 욕심과 집착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이 몸이란 실제로 '나'가 아니다. 몸은 완벽하게 空한 것이다. 변하고 변해서 결국 사라진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나는 송장이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몸이 空하고 결국 모든것이 공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이몸조차 언젠가 시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시체라고 생각하면 그다음 모든 것은 아무문제가 안 된다. 죽은 시체에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모든것을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실체가 이와같다. 우주의 모든것은 똑같이 하나의 실체이며, 실체는 긍극적으로 空하다. 이것이 실체와 비실체에 대한 통찰로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이름과 모양이 空하다는 통찰
이 깨달음은 실재하는 모든 이름과 모양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空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과 모양을 만들어놓은 뒤 이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름과 모양이 바뀔 때마다 고통을 겪는다. 태양, 별, 산, 강, 나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 부여한 일시적인 이름과 모양일 뿐이다. 앞에서 모든 법의 실체가 '공空'이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법의 이름과 모양 역시 '공空'하다.
중도 中道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미 중도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중도란 좋고 나쁜 것이 없는 것이다. 높고 낮음도, 가고 옴도,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중도는 단지 '空'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空은 이 우주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절대'로 향하는 길이다. 절대는 완벽하다. 좋고 나쁨, 높고 낮음, 오고 감, 삶과 죽음은 우리의 생각이 만든 것들이다. 머릿속에 있는 개념이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만든다. 이것이 근본적인 망상이다.
생각은 '나'를 만든다. 또한 '나' 아닌 것'을 만든다. 우리가 이처럼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불완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고통이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고통을 다른 중생들에게도 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본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가고 오는 것도 없다. 모든것은 이미 완벽하다.
중도란 空이라는 깨달음으로가는 또 다른길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空은 완벽한 길이다. 만물이 공하며 공은 절대 그 자체이다.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모든것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이 공함은 절대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공함은 전 우주의 기본적 진리이다. 여기에는 옳다, 그르다 하는 분별이 없다. 분별심이란 오로지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이원성이 사라지면 '절대'가 우리 앞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것은 '완벽한 실체의 세계' 이다.
거듭 얘기하지만 모든것은 空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절대이다. 따라서 모든것은 완벽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것이 진리眞理, 실상實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세상 모든것이 진리 아닌것이 없다. 해, 달, 별, 산, 강, 나무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모든 존재가 가지고있는 이름과 모양 또한 진리이다. 과연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소승불교는 모든것은 언제나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진리는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만약 우리가 완벽하게 이 전 우주의 공함을 깨닫는다면 여기서 한 단계더 나아가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옆에 벽을 가르키며) 여기 이 벽 색갈은 하얗다. 그것이 진리이다. 저 창밖에 나무는 푸르다. 그것도 진리이다.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이 역시 진리이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바삐 움직인다. 이것도 진리이다. (시계를 보며) 지금은 저녁 7시 15분이다. 이 모든것들이 진리이다. 이 일상의 모든것들의 진리인데도 이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들은 좋고 싫음을 스스로 만들고 좋고 나쁨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대승불교의 궁극적 가르침인 대자대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실상에 대해 바로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핵심만 다시 짚어보자. 소승불교의 핵심은 모든것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맞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고통이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한단계 넘어오면 사실 모든것이 본질은 공하다. 고통조차도 본래없으며, 모든것은 절대이고 완벽하다. 그리하여 모든것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누군가 바로 당신 앞에서 괴로움을 겪고있다. 그것 역시 진리이다. 그렇다면 진리 아닌것이 있는가? 이건 박사급 수준이다. 실체와 이름과 모양은 완벽하게 공하다.
그것이 절대이다. 그것이 진리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이런 깨달음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생을 돕기 위해서이다.
모든 현상의 상호침투
만물은 이미 진리이여서 경계없이 상호공존한다. 예를들어 내 앞에 우주가 있다고 치자. 구름은 끊임없이 오고가고 가끔 비도 내린다. 빛도 오고간다. 바람도 앞뒤로 불고, 폭풍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모든 것들이 우주공간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함에도 우주는 그것들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또 그 여러가지것들은 서로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주는 완벽하게 공하기 때문이다.
마음도 이와같다. 열심히 참선수행을 함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연후엔 감정이 오고가든, 생각이 오고가든, 좋은 상황이 오고 가든, 나쁜상황이 나타났다 사라지든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비심이 생기게되고, 내가처한 모든상황을 오직 다른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행복한 때이든, 고통을 겪을 때이든 오직 다른 중생을 위해 쓸 수 있다. 우리 앞에 닥친 모든상황,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을 오직 다른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데 쓸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본래가지고 있는 심성, 즉 대자대비大慈大悲이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무언가 집착해 있다는 얘기이다. 마음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떤감정, 어떤생각, 어떤문제도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생긱하는 모든것이 진리이다. 우리의 행복도 진리이며 슬픔도 진리이다. 나쁜상황도 진리이며 좋은상황 역시 진리이다. 모든것은 똑같이 공하며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진리 아닌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있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실체 그 자체가 절대라고 보는 통찰
우리는 이미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만물은 공하므로 모든것이 이미 완벽한 길이다. 이것을 지적知的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실제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이고 경계가 없으며, 나의 모든행동이 순간순간 중생을 향한 큰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 본래 '나'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중생을 위한다는 말조차 틀린 말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 길에는 생각도 없고 고통도 없다. 아무것도 방해하는것도 없다. 이렇게 되면 순간순간의 할일이 명확해 진다. 순간순간의 모든행동은 진리이며 완벽하게 다른중생의 고통과 닿아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 완벽한 길이며 진리의 길이다.
이런 자비어린 행동은 어떤 관념이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이며,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나 I' 라는 것은 본래없기 때문에 중생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나의고통이며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심'. 위대한 사랑과 자비를 가진마음, 즉 절대의 길이다.
지금까지 얘기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먼저 우리는 모든것이 똑같이 우주의 실체이며 기본적으로 空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 이 우주만물의 수많은 이름과 모양이 공하므로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이며 진리의 길, 바른 길이다.
여기서 부터는 어떤법칙, 어떤이름, 어떤 모양이든지 모두 진리여서 우리를 방해하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무애無碍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며 부처의 행동이다. 순간순간의 행동이 모든 존재와 사물과 함께 나누는 우주적 본질에 닿아있다. 더 이상 '너'와 분리된 '나'는 없디. 이미 우리의 행동은 大慈大悲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대승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모든것이 空하다는 것과 모든것이 그대로 진리라는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모든것이 空한데 그게 眞理란 말입니까?"
아주좋은 질문이다. 답은 쉽다. 집에가서 거울을 한번봐라. 거울속엔 아무것도 없다. 완벽하게 공하다. 거울앞에 붉은 공을 갖다대면 붉은공이 나타나고, 하얀공을 갖다대면 하얀공이 나타난다. 산을 갖다대면 산이나타난다. 있는 그대로 모든것을 비출 뿐이다. 붉은공을 치우면 더 이상 붉은 공이 없다. 오로지 그것을 비출때만 상像이 나타난다. 맑은 거울은 언제마 완벽히 공해서 어떤 것이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것도 아무런 장애없이 비춘다. 모든것은 이 空한 우주라는 거울앞에 서있는 그대로 왔다 갔다 하며 비춘다. 아무것도 덧붙이지도, 빼지고 않는다. 모든것을 비추는 거울이나, 거울에 비친 傷 역시 '空'하므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인간의 마음은 이렇지 못하다 마음의 거울에 붉은 것을 갖다대면 우리역시 붉은것을 비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붉은 것을 치운뒤 하얀것을 갖다대면 우리마음의 거울은 여전히 '붉은것'을 '생각'하고 있다. '붉은 것보다는 하얀것이 낫지 않을까?' 혹은 '다음에 다시 붉은것이 나타날까?' 혹은 '지금앞에있는 하얀것은 좋지않아, 붉은것이 더 좋아, 아니야, 하얀것이 더 좋아...... 아, 잘모르겠다' 하고 '생각'한다.하얀것이 앞에있지만 우리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혹은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아주강한 욕심이나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다른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행동하는 대신 이 세상의 좋고 나쁨에 집착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모든것이 空해서 결국 모든것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사는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심은 저절로 나온다.
대보살의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만물이 '空'해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삶은 모두 중생을 위한 삶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자비심은 절로 나온다. '나'가 있으면 욕심이 나오고 모든것과 내가 분리된다. 그러나 '나'가 사라지면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참선 수행을 통해 이런 진리을 깨달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자비로운 대보살의 행동은 저절로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나오듯 '얻을바도 없으며, 얻을것도 없다.' 순간순간 중생을 돕는 일만 있을 뿐이다.

Thursday, April 12, 2012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무아관

무아관 無我觀 .Insight into Nonself

萬相, The charateristics of all external phenomena
成, Arising 住, Stabilty 壞, Decline 空, Dissolution
삼라만상은 생겨나 머물고 변하다 사라진다.
心相, Aspects of the mind
生, Arising 住, Stabilty 異, Defferentiation 滅, Extinction
사람의 마음도 생겨나 머물고 변하다 사라진다.
인 因, Cause 과 果, Effect 윤회輪廻, Samsara
원인 原因, Primary cause
연기 緣起. Dependent origination
결과 結果, Result
선인 善人 ㅡ 선과 善果
A good cause leads to a good result.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는다.
악인 惡因 ㅡ 악과 惡果
A bad cause leads toa bad result.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만상은 성주괴공 萬相成住壞空
삼라만상은 생겨나서 머물고 변화를 거듭하다 결국 사라진다.
비나 눈을 보라. 처음에는 어떤 형태를 띠고 내리다가 끝내는 녹거나 증발해서 결국 없어지고 만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산, 바위, 나무, 동물, 태양, 달, 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랜시간이 지나면 태양도 사라질 것이고, 모든 별은 빛을 잃고 지구와 달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空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다만 순간이냐, 억겁이 걸리는냐의 시간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물리학이다.
드러나 나타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게, 그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물었더니 한 제자가 '스페이스space'라고 답했다. 또 다른 제자는 '유니버스universe'라고 했다. 그러나 스페이스든, 유니버스든, 결국 시작이 있다. 이 우주도 빅뱅에서 시작됐따. 따라서 사라질 수 있다. 우주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원한 것인가? 우리는 그 영원한 것을 찾아야 한다.

마음도 생주이멸 心相生住異滅
우리의 마음 역시 우주의 삼라만상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마음은 끊임없이 오고 가는데, 그것이 걸리는 시간을 재본다면 1초도 채 안 걸릴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끊임없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한국 속담에 '여자 마음이 부엌에서 거실까지 오가는동안 열두 번도 더 변한다'라는 게 있다. 남편이나 부모에게 상을차려 갖다주면서 온갖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맛이 없으면 어쩌지, 너무 많이 준비한 것은 아닐까. 남기면 안 되는데...... .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여자 마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다 이와같다. 마음이 변하면 얼굴색도 변한다. 마음이 변함에 따라 얼굴이 빨갛다가 노랗다가 창백해지기도 한다. 마음도 우주와 같아서 에너지를 얻으면 얼굴이 붉어졌다가 에너지를 잃으면 노랗게 변하거나 나무 많은 생각과 감정에 사로잡히면 어두워진다. 얼굴색이 이렇게 변하듯 우리 마음도 변한다. 이름과 모양이라는 것이 본질이 아니므로 이름과 모양을 가진 모든 것은 변한다. 마음이란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바로 무아관이다.
거듭 말하지만 몸이란 것은 렌터카이다. 갑이라는 사람의 렌터카가 미국산이면 을은 한국산이고 병은 일본산이다. 이 몸이 렌처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열반으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아, 나의 육신은 늘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나의 손이고 이것이 나의 머리고 이것이 나의 가슴이다. 그러나 이 육신의 나는 참 나가 아니다." 이 몸이 덧없기 때문이다. 이 렌터카는 계속 변하고 변하고 변한다. 이 마음이란 것 역시 변하고 변한다. 그러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본성 true-self이 바로 무아 non-self인 것이다.

원인 . 결과 . 연기 . 윤회 原因 . 結果 . 緣起 . 輪廻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어떤 원인에 따른 결과이며, 이 결과는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 된다. 이 가르침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이다. 서양 사람들이 묘즘 불교의 가르침에 심취하는 이유도 이처럼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불교철학은 현대과학적인 관점과 많이 닮아 있다. 절대자나 신을 믿는 종교들은 이 세상이 절대자나 신이 만든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신에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우리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가 열심히 기도한다해도 우리가 바라는대로만 이루워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 아난다와 함께 걷고 있었다. 무처님은 길가에 떨어진 짚을 발견하고 아난다에게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아난다는 "생선 냄새가 납니다"고 했다.
부처님은 "왜 생선 냄새가 날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아난다는 "생선을 쌋던 짚인 모양입니다."라고 대답했다.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또 얼마쯤 가다 보니 길에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그것을 주며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다.
"향냄새가 납니다. 아주 고급의 향을 쌌던 종이 같읍니다."
아난다가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이 새상 모든 이치가 이와같다. 생선을 싸면 생선냄새가 나고 향을 싸면 향냄새가 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이다. 크든 작든 다 끊임없이 인과관계에 얽혀있다."
인과 법칙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고 나는 왜 한국에서 태어났나?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가? 왜 어떤 사람의 머리는 검고 어떤 사람은 노란색인가? 왜 누구는 가톨릭이고, 누구는 이슬람교도인가? 왜 누구는 머리가 좋고, 누구는 예술에 재능이 있는가?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봐서 결혼하고 어떤 사람들은 연애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전생에서 어떤 조건과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세상에 우연히 이루엊진 것은 하나도 없다.모든것은 이미 우리가 전생에 행한 행동들 때문에 결정되었다. 부처님은 길을 가다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수천 번 만났던 인연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니 사랑하는 사람이나 결혼하는 사람과는 얼마나 많은 인연이 쌓여 있었겠는가.
이 세상일은 어떤 조건 아래있는 원인 때문에 결과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업karma이라 부른다. 업은 단지 우리의 습관의 에너지habit-mind가 뭉친 것이다. 어떤 것을 여러 번 하거나 생각하면 정신적 습관이 되어 똑같은 것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업을 만든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반복했던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스스로 만든다. 이것이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이다.
전생에 나는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한 어떤 업을 갖고 있으므로 내가 다시 한국에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내게 만약 미국, 독일, 폴란드의 업이 있다면 그 나라 사람으로 태어날 것이다. 죽으면 몸은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타 사라지지만 업은 계속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 이업이 어떤 조건과 맞아떨어져 미국 사람, 독일 사람, 폴란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전생의 업과 현생에서 만나는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신동이었던 모차르트를 생각해보라.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악보 보는 법, 악기 다루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는 분명히 전생에 악기를 아주 잘 연주하는 사람아었을 것이고 그것이 정신적 습관, 즉 업을 만들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실제로 음악을 아주 좋아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음악을 좋아했다. 모차르트의 전생의 의식은 이런 조건과 만나서 어떤결과를 맺은 것이다. 아이는 이미 음악에대한 강한 업이 있는 것이고 새로운 조건과 몸을 찾으면 이 정신적 습관의 힘 mental habit force은 계속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업과 운명은 어떻게 다를까. 흔히 말하는 '팔자'와 업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과나무 밑에 앉아 사고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 결국 사과는 무릎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예 나무를 흔들거나 나무위에 올라가 사과를 딴다고 하자. 아때도 마찬가지로 사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방법, 즉 나무 밑에 앉아 사과가 떨어지기를 가다라는 것이 바로 운명이다.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언젠가 사과는 떨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나무를 흔들면 우리가 직접 인과관계에 개입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내 다른 행동, 혹은 사고의 원인과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 모든것은 수 없는 생에서 만들어놓은 습관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생에서 우리는 인과관계를 조절할 수도 있고 총제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그것은 바로 마음 공부를 통해서 가능하다. 매일 참선 수행하고 염불 수행해야 한다. 절하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하여 본성으로 돌아오면 우리 업을 조종할 수 있으며, 나쁜 업도 막을 수 있다. 나쁜 업을 받고 태어났다고 불평하지말라. 그저 열심히 수행하라. 계으른 마음을 버리고 '오직 모를 뿐' 이라는 한 길로 나아가라. 그러면 당신은 원인, 조건, 결과를 조율할 수 있다.
성냥을 예를 들어보자. 성냥은 각 사람속에 들어있는 원인에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그것은 불꽃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조건에서는 타오르지 못한다. 이때 성냥갑은 어떤 조건이다. 원인이 조건을 만나면 '불' 이라는 결과가 만들어진다. 성냥으로 성냥갑을 그으면 불꽃이 인다. 성냥갑에 종이를 그어대 봐야 불꽃은 일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우리인간의 의식속에 다양한 원인이 있다고 가르친다. 즉, 생각이 원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원인이 어떤 조건과 만나면 장시간에 걸쳐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조건을 만나게 하지않으면 당연히 원인도 소멸한다. 원인은 천천히 자연스럽게 저절로 사라진다. 이 조건을 만들지 않는 것, 아니, 통제할 수있다는 것이야말로 수행을 통해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오직 모를 뿐.'
술을 예로 들어보자. 술 먹고 싶다는 욕망은 근본 원인이고 술은 조건이다. 따라서 술이 일단 손에 들어오면 마시게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습관이 된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술을 피하겠다고 생각하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욕망은 조금씩 사라진다. 술,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욕망의 근원이 이런 조건을 만나면 결과적으로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
파란 콩을 심으면 파란 콩이나오고 노란 콩을 심으면 노란 콩이 나온다. 노란 콩을 심은 데서 파란콩이 나올수는 없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원인은 나쁜 결과르 낳는다. 불교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업과 삶을 이해하고 싶으면 내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바로 지금 이순간의 마음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좋은 일을 하면 행복해 지고, 나쁜일을 하면 고통이 찾아온다. 그것이 전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내 인생만 이렇게 힘들까? 탄식한다. 하지만 인과법칙은 간단하다. 우리는 어떤 마음의 습관을 계속 만들어온 다음, 그것을 바꾸려 하거나 원인을 제가하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온 것이다. 이생에서뿐 아니라 수많은 전생에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결과를 경험해왔다. 습관이 수없는 다시 태어남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그것을 움직일 수 없기 대문에 이 습관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아주 많이 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아주 좋다. 그런데 어떤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공한 사람들은 전생에 이미 노력을 많아 해서 그 습관이 이생의 조건과 만나 별다른 노력없이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전생의 행동과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동시에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안되는 사람들은 전생에 만들어놓은 나쁜 업들 때문이다. 부지런히 일해도 전생에 쌓아놓은 업이 장애로 작용해서 이생에서 무르익어 노력이 열매맺기 힘들기 때문이다. 착한 마음을 가져라. 그것이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만약 사는게 힘들면 이렇게 생각하라.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내 잘못이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아니면 전생에서 이런 고통이 나올 원인이 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금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원인을 버릴 수 있으니 행복해 진다. 열심히 수행해서 중심이 흔들리지않으면 어떤것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것은 다 원인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업은 이미 전생의 생각과 행동, 즉 오랜 시간이 만들어온 마음의 습관에의해 결정된 것이다. 이생에서 순간순간 이 습관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칙으로서 참선 수행을 열심히하면 원인이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결과도 변하는 것이다.
사는 게 힘들면 사람들은 외부조건만 탓한다. "저 사람이 나빠 지금 상황은 나에게 좋지않아. 그가 나에게 잘못하기 때문에 내가 힘든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의 원인을 부모 탓, 배우자 탓 혹은 사회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수많은 생을 통해 만들어온 내 안의 생각과 사고에 있고,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열심히 수행해서 '오직 모를 뿐'을 간직하면, 근본 원인이 제거돼 아무리 나쁜 조건을 만나더라도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원인이 사라지면 고통이 사라지는 법이다.

Wednesday, April 4, 2012

숭산 대선사 가르침 무상관

무상관 • 無常觀 Insight into Impermanence

인생8고 • 人生八苦 The Eight Sufferings
生Birth 老Old age 病 Sickness 死Death 四苦The Four Sufferings
애 별 리 고 愛 別 離 苦 Being separated from those you love
원 증 회 고 怨 憎 會 苦 being in the presence of those you dislike
구 불 득 고 求 不 得 苦 Not getting what you desire
오 음 성 고 五 陰 盛 苦 The imbalance of the five skandhas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생로병사는 모든 인간이 격는 고통이다.
우선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 아앙……”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으로서 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다. 아기가 태어나면 ‘구아앙’ 하는 소리로 우는데, “구’란 ‘求’한다’는 뜻이고 ‘아 我’란 ‘나’를 말한다. 즉 구아란 “나를 구해주세요” 하는 말이다. (하하하)
태어나면서 “아,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 기쁘다” 하면서 웃고 태어나는 아기가 있는가? 아기들은 엄마 배 속에서 나오면서 고통과 추위에 떨면서 양수로 뒤범벅된 몸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의사들은 아기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탯줄을 끊는다. 사방천지가 피로 얼룩져있다. 이처럼 인간은 나면서부터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라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태어남은 시작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부모들은 이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자식들을 살아남게 하기 위해 오직 투쟁만을 가르쳐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그것을 잘 이겨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겪을 고통의 실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에 대한 모든 걱정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 하면서 아이들의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자라면 늙은 나를 보호해주겠지, 내 지팡이가 돼주겠지’ 하는 마음, 혹은 이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가 계속 이세상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부모들은 이이들을 잘 먹이고 일히고 가르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한다고 밀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열정과 기대는 결국 집착을 불러일으켜 고통을 만든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마국에 이민와서 열심히 일하며 산다. 남들보다 덜먹고 덜입고 덜 자면서 쉬지않고 일해 큰돈을 모은다. 그러다 몸이 망가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국 무엇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거지? 하며 허무해 한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나와 절친한 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벌린 사업이 크게 성공해 돈을 많이 벌었다. 아이들도 모두 일류대학을 졸업했고, 다들 결혼해 아이낳고 잘 살고 있다. 그는 여행도 여기저기 많이다녀 안목도 넓었다. 어느 날 그와 차를 마시다가 내가 물었다.
“이선생, 당신은 아주 많은 일을 성취했고 경험했읍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성공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은 결국 무엇을 얻었읍니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읍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였지만 실제로 그의마음은 텅 비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보통의 삶이다. 가지려고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지만 늙는것도 고통이다. 왜 늙는 것이 고통인가 우선 나이들면 힘이 없어져 사람들이 무시한다. 노인들이 가끔 실수라도 하면 젊은이들은 깔깔대고 웃어댄다. 노인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젊은이도 있다. 늙는다는것은 슬픈일이다. 젊었을 때 잘하던 일도 아니들면 서툴어진다. 모습도 추하게 변해서 얼굴엔 주름이 생기고, 시력은 흐려지며 귀도 잘 안들린다. 또 제대로 걷지를 못해 지팡이가 필요해지기도 한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치아도 빠진다. 젊음이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슬픈일이 아닐 수없다. 늙는것을 고통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있다
늙음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30여년 전 동경에 있을 때 친구의 딸이 찾아왔다. 그녀는 이제 자기나이가 마흔을 넘기니 늙는다는 것을 실가마게 돼 너무나 슬프다고 불평했다. 주름진 자기얼굴을 보기싫고 그것이 늘 신경이 쓰여 절에와도 염불이 안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그녀보다 늙은 사람들도 절에와서 열심히 염불을 하는데 그녀는 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거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에 절에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후6개월쯤 지난 뒤 웬 젊은 여자가 나를 찾아와 아는체를 했는데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햇다. 간신히 살펴보니 아! 이 여자가 마로 ‘늙음’을 한탄하며 발길을 끊었던 친구의 딸이 아닌가? 나는 깜짝놀랐다. 그녀는 성형수술로 주름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그러나 수술로 얼굴의 주름을 없앴다고 해서 나이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그여자는 수술로 잠시 행복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결국 주름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그때는 아마 처음보다 더 큰 슬픔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고통이며, 늙고 죽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의 고통앞에 놓여있다. 나이가 든다는것이 슬프다는 것은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100살 먹은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기도 한다. 언젠가 120살 먹은 사람의 인생을 담은 다큐멘타리 필름을 본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이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며 죽음과 싸워 이기고 있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TV에서 본 그의 얼굴은 슬퍼보였으며 늙은 원숭이 같았다. 눈믈, 콧물을 계속 흘려대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깔깔거리기도 했다. 삶의 기쁨과 슬픔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 두려움을 가지기도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퇴화하기만 할 뿐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찾아오는 병마도 또한 고통이다. 젊었을 때라면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병의 고통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들이 아니다. 똥, 오줌도 마음대로 조절하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소화도 잘 안되고, 숨을 쉬기도 힘들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 걸어다니기조차 힘들어져 그저 누워있기만 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만 큰 병이 드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나 약물중독을 가지고 있거나 불치병을 않는 어린이들도 많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큰병이나면 수술해야 하고 병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본인 부주의가 아닌데도 에이즈AIDS에 감염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 귀, 코, 폐의 질환에서 오는 신체의 고통에 시달린다.
가끔 병원에 가보면 모든사람이 다 환자같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도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 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환자들이나 가족들 모두 얼굴이 굳어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친거야.” 그들은 원망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아니, 병원까지 갈것도 없이 그냥 거리를 걸어봐도 도처에서 우리는 육신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요즘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각종 불치병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또 한편에선 이를 치유하기위한 각종약과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왜 부처님께서 그렇게 좋은 환경을 버리고 출가를 했는지 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왜 인간들이 이런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부처님께서 이 모든고통이 근원을 캐내기 위해 수행을 시작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살았는가? 아니다. 그 역시 죽었다. 아니, 삶도, 죽음도, 병도, 늙음도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생각이 만들어낸 망상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참 나’란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아무리 부자이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일시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생로병사가 없는 본성을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 몸 역시 결국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드는 것, 그리하여 결국 죽는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몸은 단지 렌터카일 뿐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때가되면 다른 렌터카로 바꿔타야 한다. 나는 한국산 렌터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미국, 프랑스 제를 가지고 있다. 내 렌터카는 별로 좋지않아 언젠가는 독일제로 바꿔야 할 것 같다.(하하하) 그러나 렌터카를 바꾸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것은 렌터카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에만 집착해있지, 운전기사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처를 입을까. 잃어버릴까. 차에만 정신을 쏟을 뿐 기사가 누구인지조차도 모르고 산다. 기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차를 바꿀때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물, 땅, 공기, 불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우리 렌터카는 생로병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운전기사에게는 생로병사가 따로없다. 운전기사, 즉 우리의 ‘참, 자아’를 알아야 한다. 이것만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최선의 처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