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문제 한국외교의 기준은 58년전 '변영태 문서' (당시 외무부 장관)
"ICJ(국제사법재판소)에 증명할 하등의 이유 없다" 첫 공식 정리--- 일본에 전달
독도에 대한 우리 외교통상부의 입장은 어제 오늘 정해진 게 아니다. 58년 전 변영태(1951~55년 재임) 외무부 장관이 우리측 입장을 단호하고 논리적으로 서술한 외교문서에 명시돼 있다.
3장짜리 이 구상서(note verbale)는 독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처음으로 공식 정리한 문서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22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서한을 반송키로 한 결정에도 중요한 준거가 됐다고 한다.
변영태 전 장관은 이 문서에서 "한국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갖고 있으며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권리를 증명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52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선포에 이의를 제기한 이후 계속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펴왔고 우리 정부는 독도에 경비부대를 살주시키고 한국영토라는 표지를 세우며 대응했다.
일본은 54년 9월 25일 독도 문제를 ICJ에 가서 결정하자고 제안한다. 우리 정분는 한 달 뒤인 10월 28일 당사 일본이 ICJ서 결정 제안하자
"한국인에게 독도는 주권의 상징 일본의 독도 탈취기도는 재침략"
노다 서한 반송 결정에도 근거로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엔 논란의 여지가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변영태 전장관의 구상서는 이때 작성됐다.
"ICJ에 분쟁을 제출하자는 제안은 잘못된 주장을 법률적으로 위장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영토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유사 영토분쟁'을 꾸며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타협의 여지 없이 완전하고, 분쟁의 여지가없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대해 일본은 "유사 청구권'을 설정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독도를 과거사 문제로 연결시킨 것도 변영태 전 장관이다.
그는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한 최초의 희생 영토다.
독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불합리 하지만 시종일관한 주장에 대해 한국국민은 일본이 동일한 방법의 침략을 반복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는다"고 썼다. 이를 근거로 그는
"한국 국민에게 독도는 일본과 상대한 한국주권의 상징이며, 또 주권의 보전을 시험하는 실례다. 한국국민은 독도를 수호하고 한국 주권을 보정할 결의를 갖고 있다"고 선포했다.
문서와 함께 발표된 성명도 눈길을 끈다.
"독도는 단 몇 개의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고서야 어찌 독립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독도 탈취를 꾀하는 것은 한국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뒤 우리정부는 65년 한 . 일 회담을 마무리 지을 때도 이 내용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신용하(독도 학회 회장) 울산대 석좌교수는 변영태 전 외무장관에 대해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정립한 책임자"라며 "정부는 앞으로도 이 입장을 계속 견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환 장관도 "(독도에 대한) 영토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식민지 이후 영토수호를 역사적 맥락에서 접근해야한다는 것을 그때 굳건히 정리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큰 문제가 생겼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원진 기자 jealivre@joongang.co.kr
Wednesday, August 29, 2012
Tuesday, August 28, 2012
원조 지킴이 '독도 의용수비대'
원조지킴이 '독도 의용수비대'
53년 결성된 민간 무장 조직--- 무력으로 일본인의 상습침범 결사 저지
1954년 11월 21일 새벽, 일본 해상보안청의 함정 세척이 독도로 접근했다. 1000 톤급 PS-9, 10, 16, 함은 좌우, 중앙으로 섬을 포위했다. 일본 항공기도 선회했다. 600m앞. 권총 소리와 함께 일제사격이 시작됐다.
M-1 소총이 불을 뿜었다. 박격포탄은 PS-9함 갑판을 때렸다. PS-10 함도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우며 동쪽으로 도망쳤다. (홍순칠 {이땅이 뉘 땅인데] .혜인)
53, 54년 들어 독도를 침범하던 일본은 큰코를 다쳤다. 사상자는 16명.
'겁도없이' 총과 대포를 해상보안청 함정에 쏴댄 이들은 독도 의용수비대였다. 일본인 야마자 엔지로가 독도를 삼키려는 음흉한 꾀를 낸 50년 뒤 몸으로 독도를 사수한 이들이 바로 의용수비대다.
독도 의용수비대 구상은 기갑부대 상이군인 출신 홍순칠(당시 23세)의 아이디어였다. 울릉도 출신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6.25때 부상해 52년 7월 섬으로 돌아온 그는 어느 날 지팡이를 짚으며 울릉경찰서장을 찾았다가 이상한 물건을 본다. '島根縣隱技郡 五箇村 竹島' 라고 쓰인 표목. 일본이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한 표시를 우리 어부가 떼온 것이다.
피가 끓은 그는 곧 수비대조직에 착수했다. 경찰의 총기를 몇개 대여받고 합숙훈련도 했다. 전쟁중인 2군과 경북 병사구 사령부를 찾아가 소총, 권총, 경가관총 1정을 얻어냈다. 전쟁통의 부산 양키시장에 가서 바다사자 1마리를 주고 권총과 소총을 얻었다. 다 자비였다.
그렇게 편성된 의용군은 15명 규모 전투대 2개조, 보금연락담당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등 45명이었다.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소총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톤 보트 1척 53년 4월 20일 의용대는 독도 서도에 올랐다.
곧 일본의 독도 침범이 개시됐다. 5월 28일 오전 11시쯤 일본의 수산시험선 시마네마루가 선원 30여명을 태우고 나타나 6명이 상륙했다. 고기를 잡던 한국 어부 30여명을 불법으로 조사했다. 6월에도 함정 두 척이 미국기를 걸고와서 독도 동도에 표지판을 만들었다.
의용수비대는 6월 24일 일본 오게 수산고등학교 지톰마루호를 서도 150m앞에서 붙잡아 '독도는 한국 땅'을 주지시켜 보냈다. 7월 12일 새벽 5시 일본 군함 PS-9 침범때는 진가를 발휘했다. 함정 90m 앞에서
경기관총으로 200발을 쏟아부었다.
53년 7월 정전 뒤 대한민국 정부가 경찰 4명을 잠깐 파견하고, 해병대 815-LST함이 잠깐들르고, 경북도경국장이 위문 왔지만 의용대를 대체해주지못했다. 그 와중에 일본은 8월 5회, 9월 2회, 10월 1회로 끝없이 왔다. 한국당국은 거의 몰랐었다. 홍순칠은 8월에 그들이 가까이 접근하는게 목격됐을 때는 총을 쏴 저지했다.
54년에도 침범은 계속됐다. 10월 2일 오키. 나가라호는 의용수비대가 만든 대형가짜 나무 대포에 속아 도망갔다.
침범은 11월 21일 의용대의 공격 이후 사라졌다. 그렇게 의용대는 56년 12월 30일까지 독도를 지키고 대한민국에 임무를 인계했다. 모두 3년8개월이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독도는 일본의 실효적 지배에 놓일 수 있었다. 의용대는 66년 방위포장(훈장)을 받는다. 혁혁한 활동에 대한 보답으로 초라했다. 안성구 기자.
53년 결성된 민간 무장 조직--- 무력으로 일본인의 상습침범 결사 저지
1954년 11월 21일 새벽, 일본 해상보안청의 함정 세척이 독도로 접근했다. 1000 톤급 PS-9, 10, 16, 함은 좌우, 중앙으로 섬을 포위했다. 일본 항공기도 선회했다. 600m앞. 권총 소리와 함께 일제사격이 시작됐다.
M-1 소총이 불을 뿜었다. 박격포탄은 PS-9함 갑판을 때렸다. PS-10 함도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우며 동쪽으로 도망쳤다. (홍순칠 {이땅이 뉘 땅인데] .혜인)
53, 54년 들어 독도를 침범하던 일본은 큰코를 다쳤다. 사상자는 16명.
'겁도없이' 총과 대포를 해상보안청 함정에 쏴댄 이들은 독도 의용수비대였다. 일본인 야마자 엔지로가 독도를 삼키려는 음흉한 꾀를 낸 50년 뒤 몸으로 독도를 사수한 이들이 바로 의용수비대다.
독도 의용수비대 구상은 기갑부대 상이군인 출신 홍순칠(당시 23세)의 아이디어였다. 울릉도 출신으로 군에 입대했다가 6.25때 부상해 52년 7월 섬으로 돌아온 그는 어느 날 지팡이를 짚으며 울릉경찰서장을 찾았다가 이상한 물건을 본다. '島根縣隱技郡 五箇村 竹島' 라고 쓰인 표목. 일본이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한 표시를 우리 어부가 떼온 것이다.
피가 끓은 그는 곧 수비대조직에 착수했다. 경찰의 총기를 몇개 대여받고 합숙훈련도 했다. 전쟁중인 2군과 경북 병사구 사령부를 찾아가 소총, 권총, 경가관총 1정을 얻어냈다. 전쟁통의 부산 양키시장에 가서 바다사자 1마리를 주고 권총과 소총을 얻었다. 다 자비였다.
그렇게 편성된 의용군은 15명 규모 전투대 2개조, 보금연락담당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등 45명이었다.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소총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톤 보트 1척 53년 4월 20일 의용대는 독도 서도에 올랐다.
곧 일본의 독도 침범이 개시됐다. 5월 28일 오전 11시쯤 일본의 수산시험선 시마네마루가 선원 30여명을 태우고 나타나 6명이 상륙했다. 고기를 잡던 한국 어부 30여명을 불법으로 조사했다. 6월에도 함정 두 척이 미국기를 걸고와서 독도 동도에 표지판을 만들었다.
의용수비대는 6월 24일 일본 오게 수산고등학교 지톰마루호를 서도 150m앞에서 붙잡아 '독도는 한국 땅'을 주지시켜 보냈다. 7월 12일 새벽 5시 일본 군함 PS-9 침범때는 진가를 발휘했다. 함정 90m 앞에서
경기관총으로 200발을 쏟아부었다.
53년 7월 정전 뒤 대한민국 정부가 경찰 4명을 잠깐 파견하고, 해병대 815-LST함이 잠깐들르고, 경북도경국장이 위문 왔지만 의용대를 대체해주지못했다. 그 와중에 일본은 8월 5회, 9월 2회, 10월 1회로 끝없이 왔다. 한국당국은 거의 몰랐었다. 홍순칠은 8월에 그들이 가까이 접근하는게 목격됐을 때는 총을 쏴 저지했다.
54년에도 침범은 계속됐다. 10월 2일 오키. 나가라호는 의용수비대가 만든 대형가짜 나무 대포에 속아 도망갔다.
침범은 11월 21일 의용대의 공격 이후 사라졌다. 그렇게 의용대는 56년 12월 30일까지 독도를 지키고 대한민국에 임무를 인계했다. 모두 3년8개월이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독도는 일본의 실효적 지배에 놓일 수 있었다. 의용대는 66년 방위포장(훈장)을 받는다. 혁혁한 활동에 대한 보답으로 초라했다. 안성구 기자.
Monday, August 27, 2012
독도
독도분쟁의 유발자, 야마자 엔지로
"조선땅" 日 내무성 의견 무시
독도를 몰래 자신의 땅으로 편입한 일본, 그 뒤 다시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킨 제국주의의 야욕은 어떤 경로를 거쳐 펼쳐졌을까. 이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일본인이 있다. 일본 독도 왜곡의 뿌리이자 제국주의 첨병이다. 독도를 사이에두고 한국과 일본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펼쳐지는 요즘 우리는 이 사람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장보다는 차분한 사실 확인을 통해 일본의 왜곡과 억지를 잠재우자는 취지에서다. 매우 드믈지만 이 인물을 면밀하게 추적한 저작이 있다.
«독도실록 1905» (예영준 저, 책밭)이다 그에 덧붙여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인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의 도움말을 통해 독도 왜곡에 이어 한반도 강점까지 넘본 이 일본인의 행적을 소개한다.
한반도 침탈 앞장선 '흑룡회' 와 관련
19세기 말은 조선의 황혼 녘이었다. 한반도의 해역에는 낯선 철선[鐵船]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제국의 기운을 뻗치려는 낯선 외지인들의 발길도 잦았다. 그런 기운은 어느덧 황혼을 맞은 조성의 운명을 옥죄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의 초임 외교관으로 부산의 일본영사관에 부임한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 1866-1914] 였다.
그가 벌인 첫 작업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로, 경부선의 측량작업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제국주의의 기운을 한반도로 뻗기위한 인프라에 주목했던 셈이다 그러나 사정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26세의 청년 외교관 야마장의 꾀가 번득였다. "조선의 새를 사냥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정부에 허락을 받자".는 내용 이었다.
일종의 사술[詐術]이었다. 그의 꾀대로 일은 벌어졌다. 조선정부에 "새를 사냥할테니 붉은 깃발을 세우면 사람들이 접근치 못하게 해 달라"고 한 뒤 부산~서울의 철로 부지를 샅샅이 측량했다. 그가 벌린 측량작업을 바탕으로 일제가 1904녀 한반도 강점을 위해 경부선을 깔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의 출생지는 일본의 후쿠오카[福岡]이었다. 구마모토와 함께 이 지역은 한반도 침탈과 깊은 관련이있다. 최서면원장은 "메이지[明治]유신에서 주류에 섞이지 못했던 후쿠오카와 구마모토 출신정객들은 일본의 힘을 바깥으로 뻗는 확장정책을 주도하면서 결국 한반도 침탈의 선봉에 섰다"고 지적했다. 그 지역 출신자들로 이뤄진 대표적인 단체가 현양사[玄洋社]다. 나중에 한반도 침탈에 앞장선 조직 흑룡회[黑龍會]와 일본 낭인들의 모임인 천우협[天佑俠]등이 다 현양사의 구성원으로서 우두머리였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 막역한 관계였다.
야마자는 1901년 부터 1908년까지 일본외무성 정무국장을 맡는다. 장관과 차관 밑에 국장으로는 통상과 정무만 있던 시절이었다. 통상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맡은 자리가 정무국장으로, 일본의 대외 정책을 모두 주무르는 요직중의 요직이었다. 그가 정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벌인 일은 부지기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독도를 강제로 일본에 편입하는 작업이었다. 아울러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뒤 러시아와 전쟁(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 강점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독도 강제 편입의 사정은 이렇다 일본 시네마현 출신인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어부가 있었다. 독도에까지 와서 그곳에 서식하던 강치(바다사자의 일종)를 포흭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독도의 강치잡이를 독점하기 위해 이 섬을 조선정부로부터 임차할 생각이엇다. 그러나 "혹시 (독도가) 조선의 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본수산국, 해군 수로부관리들의 말을 듣고 아예 독도를 일본의 땅으로 편입하려는 청원을 낸다.
그에따라 나카이는 내무성을 찾아갔으나 "조선 영토라는 의심이 있는 불모의 섬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부정적인 대답을 듣는다. 실망했던 나카이가 정부 보고용으로 직접작성한 '다케시마 경영의 개요'라는 진술서는 당시 야마자가 보인 반응을 이렇게 적고 있다. "태연하게 듣고 있던 국장이 천천히 입을 열더니, 외교사의 일은 다른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니며--- 시국(時局)으로 봐도 영토편입은 대단한 이익이 있음을 인정하나다는 뜻을 밝혔다."
"(정무국장은) 시국이야말로 영토편입을 급히 필요로하며 망루를 세워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 감시에 대단히 요긴하지 않을까--- 서둘러 청원서를 외무성에 제출하라고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야마자가 말한 '시국'은 그가 준비하고 있던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에 이미 통신선을 설치한 상태였다. 최서면 원장은 "당시 해군의 전투는 누가 먼저 상대를 발견해 함포로 선제사격을 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울릉도에 이어 독도에 통신선을 가설해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을 먼저 파악하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외무성, 1910년께 나카이가 정부보고 그 다음 과정은 제법알려져 있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네마현으로 편입하고, '랑코(리앙쿠르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던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러곡절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독도가 일본 땅으로 둔감하는 과정은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부의 개인적인 욕심, 러시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야마자 엔지로의 음모로 결국 성사됐던 셈이다.
48세로 사망해 행적은 잘 안 알려져
최서면 원장이 최근 입수한 문서가 있다. 야마자가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라는 인물에게 보낸 편지 7장이다. 가토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대한제국 시절 서울주재 일본공사로 활약하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 한국에서 궁내부 고문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최원장이 입수한 그의 편지 한 대목에 는 '조선의 땅을 군사적으로 활용토록 조치를 취하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가토에게 대한제국 왕실을 움직여 한반도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라는 권유였다. 1905년 벌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은 진해를 주목했다고 알려져 있다.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해 동해로 진출하는 길목인 진해의 군사적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다.
야마자는 당시 영국과의 동맹 체결을 주도한 뒤 러시아를 제압해 아시아로 팽창하려는 계획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의 뜻대로 일본은 진해를 발틱함대와의 전쟁기지로 십분 활용했다. 최원장은 "이런 기록을 통해 일본이 어떻게 한반도를 병합까지 끌고 갔는지를 살필 수 있다"며 "야마자의 편지에는 두만강 하구 섬인 녹둔도를 정찰해 일본이 할양 받게끔 상황을 만든 뒤 만주 지역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내용도 있다"고 말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이끈 야마자는 결국 독도뿐만 아나라 한반도 전체를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두는 '보호국화'에 성공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벌어진 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는 물론 내 정상의 모든 권한까지 빼앗는 정미 7조약을 체결했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야마자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그의 역할이 이렇게 중대했음에도 그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않은 이유는 야마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8년 외무성 정무국장 자리를 떠나 영국에서 4년을 근무한 뒤 1913년 중국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주중 일본대사였다.그는 이듬해 5월 27일 집무실에서 쓰러진 뒤 사망했다. 중국 남부의 당시 실권자 위안스카이( 袁世凱)가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주간중앙 유광종 기자
"조선땅" 日 내무성 의견 무시
독도를 몰래 자신의 땅으로 편입한 일본, 그 뒤 다시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킨 제국주의의 야욕은 어떤 경로를 거쳐 펼쳐졌을까. 이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일본인이 있다. 일본 독도 왜곡의 뿌리이자 제국주의 첨병이다. 독도를 사이에두고 한국과 일본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펼쳐지는 요즘 우리는 이 사람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장보다는 차분한 사실 확인을 통해 일본의 왜곡과 억지를 잠재우자는 취지에서다. 매우 드믈지만 이 인물을 면밀하게 추적한 저작이 있다.
«독도실록 1905» (예영준 저, 책밭)이다 그에 덧붙여 이 분야 최고 권위자인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의 도움말을 통해 독도 왜곡에 이어 한반도 강점까지 넘본 이 일본인의 행적을 소개한다.
한반도 침탈 앞장선 '흑룡회' 와 관련
19세기 말은 조선의 황혼 녘이었다. 한반도의 해역에는 낯선 철선[鐵船]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제국의 기운을 뻗치려는 낯선 외지인들의 발길도 잦았다. 그런 기운은 어느덧 황혼을 맞은 조성의 운명을 옥죄고 있었다. 일본 외무성의 초임 외교관으로 부산의 일본영사관에 부임한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 1866-1914] 였다.
그가 벌인 첫 작업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로, 경부선의 측량작업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제국주의의 기운을 한반도로 뻗기위한 인프라에 주목했던 셈이다 그러나 사정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26세의 청년 외교관 야마장의 꾀가 번득였다. "조선의 새를 사냥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정부에 허락을 받자".는 내용 이었다.
일종의 사술[詐術]이었다. 그의 꾀대로 일은 벌어졌다. 조선정부에 "새를 사냥할테니 붉은 깃발을 세우면 사람들이 접근치 못하게 해 달라"고 한 뒤 부산~서울의 철로 부지를 샅샅이 측량했다. 그가 벌린 측량작업을 바탕으로 일제가 1904녀 한반도 강점을 위해 경부선을 깔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의 출생지는 일본의 후쿠오카[福岡]이었다. 구마모토와 함께 이 지역은 한반도 침탈과 깊은 관련이있다. 최서면원장은 "메이지[明治]유신에서 주류에 섞이지 못했던 후쿠오카와 구마모토 출신정객들은 일본의 힘을 바깥으로 뻗는 확장정책을 주도하면서 결국 한반도 침탈의 선봉에 섰다"고 지적했다. 그 지역 출신자들로 이뤄진 대표적인 단체가 현양사[玄洋社]다. 나중에 한반도 침탈에 앞장선 조직 흑룡회[黑龍會]와 일본 낭인들의 모임인 천우협[天佑俠]등이 다 현양사의 구성원으로서 우두머리였던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 막역한 관계였다.
야마자는 1901년 부터 1908년까지 일본외무성 정무국장을 맡는다. 장관과 차관 밑에 국장으로는 통상과 정무만 있던 시절이었다. 통상을 제외한 모든 업무를 맡은 자리가 정무국장으로, 일본의 대외 정책을 모두 주무르는 요직중의 요직이었다. 그가 정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벌인 일은 부지기수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독도를 강제로 일본에 편입하는 작업이었다. 아울러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뒤 러시아와 전쟁(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한반도 강점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독도 강제 편입의 사정은 이렇다 일본 시네마현 출신인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三郞)라는 어부가 있었다. 독도에까지 와서 그곳에 서식하던 강치(바다사자의 일종)를 포흭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독도의 강치잡이를 독점하기 위해 이 섬을 조선정부로부터 임차할 생각이엇다. 그러나 "혹시 (독도가) 조선의 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본수산국, 해군 수로부관리들의 말을 듣고 아예 독도를 일본의 땅으로 편입하려는 청원을 낸다.
그에따라 나카이는 내무성을 찾아갔으나 "조선 영토라는 의심이 있는 불모의 섬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부정적인 대답을 듣는다. 실망했던 나카이가 정부 보고용으로 직접작성한 '다케시마 경영의 개요'라는 진술서는 당시 야마자가 보인 반응을 이렇게 적고 있다. "태연하게 듣고 있던 국장이 천천히 입을 열더니, 외교사의 일은 다른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니며--- 시국(時局)으로 봐도 영토편입은 대단한 이익이 있음을 인정하나다는 뜻을 밝혔다."
"(정무국장은) 시국이야말로 영토편입을 급히 필요로하며 망루를 세워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 감시에 대단히 요긴하지 않을까--- 서둘러 청원서를 외무성에 제출하라고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야마자가 말한 '시국'은 그가 준비하고 있던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에 이미 통신선을 설치한 상태였다. 최서면 원장은 "당시 해군의 전투는 누가 먼저 상대를 발견해 함포로 선제사격을 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울릉도에 이어 독도에 통신선을 가설해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을 먼저 파악하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외무성, 1910년께 나카이가 정부보고 그 다음 과정은 제법알려져 있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네마현으로 편입하고, '랑코(리앙쿠르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던 독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러곡절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독도가 일본 땅으로 둔감하는 과정은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어부의 개인적인 욕심, 러시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야마자 엔지로의 음모로 결국 성사됐던 셈이다.
48세로 사망해 행적은 잘 안 알려져
최서면 원장이 최근 입수한 문서가 있다. 야마자가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라는 인물에게 보낸 편지 7장이다. 가토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대한제국 시절 서울주재 일본공사로 활약하다 고종의 신임을 얻어 한국에서 궁내부 고문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최원장이 입수한 그의 편지 한 대목에 는 '조선의 땅을 군사적으로 활용토록 조치를 취하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가토에게 대한제국 왕실을 움직여 한반도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라는 권유였다. 1905년 벌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은 진해를 주목했다고 알려져 있다. 발틱함대가 대한해협을 통과해 동해로 진출하는 길목인 진해의 군사적 중요성을 간파한 것이다.
야마자는 당시 영국과의 동맹 체결을 주도한 뒤 러시아를 제압해 아시아로 팽창하려는 계획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의 뜻대로 일본은 진해를 발틱함대와의 전쟁기지로 십분 활용했다. 최원장은 "이런 기록을 통해 일본이 어떻게 한반도를 병합까지 끌고 갔는지를 살필 수 있다"며 "야마자의 편지에는 두만강 하구 섬인 녹둔도를 정찰해 일본이 할양 받게끔 상황을 만든 뒤 만주 지역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내용도 있다"고 말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이끈 야마자는 결국 독도뿐만 아나라 한반도 전체를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두는 '보호국화'에 성공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벌어진 뒤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는 물론 내 정상의 모든 권한까지 빼앗는 정미 7조약을 체결했다.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야마자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그의 역할이 이렇게 중대했음에도 그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않은 이유는 야마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8년 외무성 정무국장 자리를 떠나 영국에서 4년을 근무한 뒤 1913년 중국 특명전권대사로 부임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주중 일본대사였다.그는 이듬해 5월 27일 집무실에서 쓰러진 뒤 사망했다. 중국 남부의 당시 실권자 위안스카이( 袁世凱)가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주간중앙 유광종 기자
Friday, August 24, 2012
대선가도에 부는 태풍 안철수 생각
대선가도에 부는 태풍, "안철수 생각"
김원동 칼럼 미주신문인협회 고문
이건 선풍기 바람정도가 아니다. 가히 태풍 수준이다. 대선가도에 느닷없이 돌풍을 일읔키는 한 권의 책, 그 위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망연자실[茫然自失]하는 속에서도 여타 대권경선주자들의 입에서는 한결같은 말들이다.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척 하며 안풍(안철수 태풍)을 빗대어 별것아니라며
"안풍이닌 허풍"이라고 입을 맞추어 궤변을 늘어 놓지만 패색이 역력한 모습인데 어쩌라.책[敗色]은 찍는대로 모조리 품절이란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기습적으로 출간한 화제의 책 '안철수 생각'은 출판이 당일로 완전 매진[賣盡]되는 유래없는 진기록을 낳고 있다.
그 책이 그토록 경이적인 돌풍을 일으키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박을 터뜨렸을까에 대한 답은 대충 한가지로 집약된다. 구닥다리 고물정치인들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를 향한 새로움과 변화를 추구하는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이 얼마나 큰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유 있는 반응이다. 그런가하면 이 책을 놓고 흠집을 내려고 안달을 부리는 패거리들도 있다.
소위 박근혜 진영의 정치철새들로서 한물간 올드보이들인 김종인 홍사덕 등이 말도 안되는 주접을 떨지만턱없이 역부족이다. 그리고 민주당의 대선 경선주자들도 가세한다. 저들이 피 터지도록 경선 싸움을 펼치는 동안 책과 방송을 통한 인기몰이로 부전승 무임승차를 노리는 얌체 수준의 꼼수라며 주장하나 영양가 없는 말장난 수준에 지니지 않는다.
이 뿐 아니다. 대선정국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자신들의 방송출연신청은 거부하면서 출마선언도 하지않은 안철수를 출연시킨 것은 공영방송으로서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돼지 목 따는 소리를 한다. 예민한 시기에 SBS는 대선가도에서 지지율 상승의 지름길인 '힐링캠프'에 왜 안철수를 내세우느냐는 주장이다. 시청률을 먹고사는 방송에서 쪽박 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안철수를 선택한 것뿐이다.
동풍을 일으키고 있는 책 '안철수의 생각'이 활자매체를 통한 소통이라면 힐링캠프 출연은 육성을 통한 소통이이라는 안철수 진영의 논리는 한층비약한다. 소통과 화합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대통령이 과연 누구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최종대결이 예상되는 어느 후보와의 차별화를 부각시킨다.
"생각하는 정치"앞에 "지시하는 정치"는 게임이 어렵다는 것이다. 책이나 방송을 통한 다양한 여러 현안가운데서도 핵심적인 키워드는 단연 소통이다. 소통과 합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정치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안철수는 그래서 "한국 이대로는 안된다"는 말을 강조한다. 사실상 출마선언에 다름아니다.
책의 공동저자인 세명대학의 한 교수는 말한다. 안철수와 책 준비를 위한 대담에서 앞으로 대선 막바지 경성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올 네거티브 공략에 대응을 물어봤을 때 안교수가 했다는 말이다. 총알(비판과 검증) 몇방을 맞아도 그 길이 가야할 길이라면 감당할 수 있다는 답변의 전언이다.
여기에서 아철수의 완벽을 기하는 성실함 뿐 아니라 과단성과 배짱도 보았다는 설명이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그는 별다른 아킬레스건도 없을 것이라는게 일반 국민들의 상식적인 추론이기도 하다.
구정물 속에서 개싸움을하며 자란 여타 대권지망자들과의 다른점을 여러모로 차별화 하고 있다.
병원균이 득실거리는 구정물 마시고 자라난 구태의연한 정치인이 아닌 무공해 식수먹고 자란 새로운 정치인을 기다리는 국민들의 바램과 정서가 이렇게 '안철수 생각' 이라는 미래한국의 청사진을 함께 제시한 내용의 책이 나오면서 국민과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절묘한 타이밍도 맞춘것 같다. 시의적절하게 정시 도착한 책 '안철수 생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허기사 누가 되면 뭣하랴 유권자 고유의 권리행사가 아닌 '한 표에 대한 본전심리'와 특정인에대한 향수병에 매몰되어 있는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그 DNA 가 문제다. 난치병 수준의 한심한 민도[民度]말이다. 문제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보다도 한심한 정치 후진성의 민도[民度]다.
김원동 칼럼 미주신문인협회 고문
이건 선풍기 바람정도가 아니다. 가히 태풍 수준이다. 대선가도에 느닷없이 돌풍을 일읔키는 한 권의 책, 그 위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망연자실[茫然自失]하는 속에서도 여타 대권경선주자들의 입에서는 한결같은 말들이다.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척 하며 안풍(안철수 태풍)을 빗대어 별것아니라며
"안풍이닌 허풍"이라고 입을 맞추어 궤변을 늘어 놓지만 패색이 역력한 모습인데 어쩌라.책[敗色]은 찍는대로 모조리 품절이란다. 눈 깜짝 할 사이에 기습적으로 출간한 화제의 책 '안철수 생각'은 출판이 당일로 완전 매진[賣盡]되는 유래없는 진기록을 낳고 있다.
그 책이 그토록 경이적인 돌풍을 일으키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대박을 터뜨렸을까에 대한 답은 대충 한가지로 집약된다. 구닥다리 고물정치인들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를 향한 새로움과 변화를 추구하는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이 얼마나 큰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유 있는 반응이다. 그런가하면 이 책을 놓고 흠집을 내려고 안달을 부리는 패거리들도 있다.
소위 박근혜 진영의 정치철새들로서 한물간 올드보이들인 김종인 홍사덕 등이 말도 안되는 주접을 떨지만턱없이 역부족이다. 그리고 민주당의 대선 경선주자들도 가세한다. 저들이 피 터지도록 경선 싸움을 펼치는 동안 책과 방송을 통한 인기몰이로 부전승 무임승차를 노리는 얌체 수준의 꼼수라며 주장하나 영양가 없는 말장난 수준에 지니지 않는다.
이 뿐 아니다. 대선정국의 유-불리를 따지면서 자신들의 방송출연신청은 거부하면서 출마선언도 하지않은 안철수를 출연시킨 것은 공영방송으로서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돼지 목 따는 소리를 한다. 예민한 시기에 SBS는 대선가도에서 지지율 상승의 지름길인 '힐링캠프'에 왜 안철수를 내세우느냐는 주장이다. 시청률을 먹고사는 방송에서 쪽박 찰 일을 저지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안철수를 선택한 것뿐이다.
동풍을 일으키고 있는 책 '안철수의 생각'이 활자매체를 통한 소통이라면 힐링캠프 출연은 육성을 통한 소통이이라는 안철수 진영의 논리는 한층비약한다. 소통과 화합의 중심에 설 수 있는 대통령이 과연 누구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면서 최종대결이 예상되는 어느 후보와의 차별화를 부각시킨다.
"생각하는 정치"앞에 "지시하는 정치"는 게임이 어렵다는 것이다. 책이나 방송을 통한 다양한 여러 현안가운데서도 핵심적인 키워드는 단연 소통이다. 소통과 합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정치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안철수는 그래서 "한국 이대로는 안된다"는 말을 강조한다. 사실상 출마선언에 다름아니다.
책의 공동저자인 세명대학의 한 교수는 말한다. 안철수와 책 준비를 위한 대담에서 앞으로 대선 막바지 경성에서 수없이 쏟아져 나올 네거티브 공략에 대응을 물어봤을 때 안교수가 했다는 말이다. 총알(비판과 검증) 몇방을 맞아도 그 길이 가야할 길이라면 감당할 수 있다는 답변의 전언이다.
여기에서 아철수의 완벽을 기하는 성실함 뿐 아니라 과단성과 배짱도 보았다는 설명이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그는 별다른 아킬레스건도 없을 것이라는게 일반 국민들의 상식적인 추론이기도 하다.
구정물 속에서 개싸움을하며 자란 여타 대권지망자들과의 다른점을 여러모로 차별화 하고 있다.
병원균이 득실거리는 구정물 마시고 자라난 구태의연한 정치인이 아닌 무공해 식수먹고 자란 새로운 정치인을 기다리는 국민들의 바램과 정서가 이렇게 '안철수 생각' 이라는 미래한국의 청사진을 함께 제시한 내용의 책이 나오면서 국민과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절묘한 타이밍도 맞춘것 같다. 시의적절하게 정시 도착한 책 '안철수 생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허기사 누가 되면 뭣하랴 유권자 고유의 권리행사가 아닌 '한 표에 대한 본전심리'와 특정인에대한 향수병에 매몰되어 있는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그 DNA 가 문제다. 난치병 수준의 한심한 민도[民度]말이다. 문제는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보다도 한심한 정치 후진성의 민도[民度]다.
시론 아주 특별한 광복절
시론 아주 특별한 광복절
한 민족 평황연구소장 김용현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춘다/ 기여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나라 찾은 그날에 어느 때인들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만은 올해 8.15를 앞두고는 새삼스레 우리에게 조국은 무엇이고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명제 앞에 숙연해 지면서 특별한 광복절을 맞게 된다.
런던올림픽에서 잘 싸운 한국의 젊은이들이 있어 어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철을 신명나게 보낼수 있어 행복했었다.
그 중에서도 무리를 가장 기쁘게 만든것은 아무래도 일본과의 축구 경기였다. 결승전도 아니고 동메달을 놓고 벌이는 경기였지만 어떤 경기보다도 열광했던 것은 그 상대가 바로 일본이었기 때문이다.한국에게 일본은 그런 나라이다. 경제든, 문화든, 스포츠든 일본이 상대가 되기만하면 무슨일이 있어도 이겨야 하는 굳은 결기를 숙명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문화, 스포츠가 다 일본을 이기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정치만은 그렇지 못해 왔다. 자국민이 일본군 위안부로, 군인으로 강제징용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지만 해방된지 67년이 흘러도 사과 한마디 받아내지 못한 것이 이 나라 위정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 안보 논리만 앞세운 박정희 정권은 고작 8억 달러의 청구권에 급급해 이들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 소멸마져 약속해 주고 말았다.
또 집권기간 내내 친일, 저자세 외교로 일관해온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국민정서에 뜬금없이 합류해 일시적이나마 청량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임기 말 국내 정치의 국면 전환용으로 기획된 것이라면 독도문제 해결은 이후 더어려운 고비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이 외교가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일분을 경계하고 일본을 꼭 이겨야 하는 것인가.
과거에 붙잡혀서?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은 삼국시대 왜구의 침입을 시작으로 16세기 임진왜란(7년) 그리고 근대사 40년간의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0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 한민족을 괴롭혀 온 흉악한 아웃나라인 것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을 경계하는 더 큰 이유는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도 그렇게 내다보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지배세력들의 행태를 보면 한반도 통일의 소극적인 훼방꾼을 넘어서 이른바 '한반도 급변사태'를 기획하며 한국전쟁 때와 같은 전쟁특수가 일본이 사는 길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의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려면 이제라도 과거 침략전쟁과 식민지 통치로인한 모든 범죄를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독도영유권 주장을 철회하고 한일 군사협력 강화를 미끼로 또 다시 한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며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침략정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명박 대통령도 독도 방문이 일회용 깜짝쑈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번 광복절기념사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폐기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8.15광복절 67주년은 아주 특별한 광복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민족 평황연구소장 김용현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춘다/ 기여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나라 찾은 그날에 어느 때인들 감격하지 않을 수 있을까만은 올해 8.15를 앞두고는 새삼스레 우리에게 조국은 무엇이고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명제 앞에 숙연해 지면서 특별한 광복절을 맞게 된다.
런던올림픽에서 잘 싸운 한국의 젊은이들이 있어 어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철을 신명나게 보낼수 있어 행복했었다.
그 중에서도 무리를 가장 기쁘게 만든것은 아무래도 일본과의 축구 경기였다. 결승전도 아니고 동메달을 놓고 벌이는 경기였지만 어떤 경기보다도 열광했던 것은 그 상대가 바로 일본이었기 때문이다.한국에게 일본은 그런 나라이다. 경제든, 문화든, 스포츠든 일본이 상대가 되기만하면 무슨일이 있어도 이겨야 하는 굳은 결기를 숙명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문화, 스포츠가 다 일본을 이기고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정치만은 그렇지 못해 왔다. 자국민이 일본군 위안부로, 군인으로 강제징용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지만 해방된지 67년이 흘러도 사과 한마디 받아내지 못한 것이 이 나라 위정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경제 안보 논리만 앞세운 박정희 정권은 고작 8억 달러의 청구권에 급급해 이들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 소멸마져 약속해 주고 말았다.
또 집권기간 내내 친일, 저자세 외교로 일관해온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국민정서에 뜬금없이 합류해 일시적이나마 청량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임기 말 국내 정치의 국면 전환용으로 기획된 것이라면 독도문제 해결은 이후 더어려운 고비를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이 외교가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토록 일분을 경계하고 일본을 꼭 이겨야 하는 것인가.
과거에 붙잡혀서?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은 삼국시대 왜구의 침입을 시작으로 16세기 임진왜란(7년) 그리고 근대사 40년간의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0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 한민족을 괴롭혀 온 흉악한 아웃나라인 것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을 경계하는 더 큰 이유는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도 그렇게 내다보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지배세력들의 행태를 보면 한반도 통일의 소극적인 훼방꾼을 넘어서 이른바 '한반도 급변사태'를 기획하며 한국전쟁 때와 같은 전쟁특수가 일본이 사는 길이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의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려면 이제라도 과거 침략전쟁과 식민지 통치로인한 모든 범죄를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독도영유권 주장을 철회하고 한일 군사협력 강화를 미끼로 또 다시 한국의 영토 주권을 침해하며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침략정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명박 대통령도 독도 방문이 일회용 깜짝쑈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번 광복절기념사에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폐기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8.15광복절 67주년은 아주 특별한 광복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uesday, August 21, 2012
10문 고양이 밥 그릇이 깨졌다.
10 문 고양이 밥그릇이 께졌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고양이 밥그릇이 깨졌다.
질문
1.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공안은 如如를 표현하는 공안이다.
여여의 경지에는 분별이 없다. 상대적인 것도 없다. 만물이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 하나에 '25센트'라고 하지.
그리고 25샌트를 지불하고 그것을 사먹었다고하자.
1쿼터, 25센트, 이이스크림, 그리고 행복감------.
모양은 변했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공안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신이 이해하는 것은 단지 쥐,
고양이밥 고양이 밥그릇, 깨졌다.하는것 등등이다.
그 뒤에 숨겨진 뜻을 파악해야 한다.
1쿼터의 숨겨진 뜻은 25센트이고 25센트의 숨겻진 의미는
아이스크림이 배 안에 들어가 "아, 시원하다" 그것이 전부이다.
우리 어른들은 너무 똑똑해서 이것을 잘모른다.
그러나 이이들이라면 척 보면 알 것이다.
세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세남자가걸어가고있다. 첫 번째 남자는 칼 소리를 만들고,
두 번째 남자는 손을 흔드는 흉내를 내고
세 번째 남자는 손수건을 흔든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질문
1.만일 그대가 거기 있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2. 관계란 무엇인가?
3. 상황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완벽히 즉여[卽如]의 공안이다. 마치 TV 퀴즈 게임 같다.
아니운서가 몇가지 를 말하고 참가자들에게 묻는다.
"지금 이 제시어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화면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청중 중 한 사람이 이것을 보고 웃으면 다른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웃는다.
상황은 마찬가지이지만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10개의 공안을 끝내면 이 질문을 숙제로 받게된다.
이것까지 통과하면 당신은 선사님께 깨달음을 점검 받고 인가를 받게된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고양이 밥그릇이 깨졌다.
질문
1.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공안은 如如를 표현하는 공안이다.
여여의 경지에는 분별이 없다. 상대적인 것도 없다. 만물이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 하나에 '25센트'라고 하지.
그리고 25샌트를 지불하고 그것을 사먹었다고하자.
1쿼터, 25센트, 이이스크림, 그리고 행복감------.
모양은 변했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공안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신이 이해하는 것은 단지 쥐,
고양이밥 고양이 밥그릇, 깨졌다.하는것 등등이다.
그 뒤에 숨겨진 뜻을 파악해야 한다.
1쿼터의 숨겨진 뜻은 25센트이고 25센트의 숨겻진 의미는
아이스크림이 배 안에 들어가 "아, 시원하다" 그것이 전부이다.
우리 어른들은 너무 똑똑해서 이것을 잘모른다.
그러나 이이들이라면 척 보면 알 것이다.
세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세남자가걸어가고있다. 첫 번째 남자는 칼 소리를 만들고,
두 번째 남자는 손을 흔드는 흉내를 내고
세 번째 남자는 손수건을 흔든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질문
1.만일 그대가 거기 있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2. 관계란 무엇인가?
3. 상황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완벽히 즉여[卽如]의 공안이다. 마치 TV 퀴즈 게임 같다.
아니운서가 몇가지 를 말하고 참가자들에게 묻는다.
"지금 이 제시어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화면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청중 중 한 사람이 이것을 보고 웃으면 다른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웃는다.
상황은 마찬가지이지만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10개의 공안을 끝내면 이 질문을 숙제로 받게된다.
이것까지 통과하면 당신은 선사님께 깨달음을 점검 받고 인가를 받게된다.
Monday, August 20, 2012
9 문 남전참묘
9 문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이 고양이 목을 베어버렸다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것을 본 남전 큰스님이 "내가 중재를 하지" 하시면서
한 손에 고양이를 들고 한 손에 칼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들 중에 한마디 깨달은 말을 하면 이 고양이를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남전 큰스님이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그날 저녁 조주 큰스님이 밖에서 돌아왔다. 남전 큰스님이 낮에 있었던 일을 조주 큰스님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조주 큰스님은 짚신을 벗어 머리위에 모자처럼 쓰고 맨발로 걸어나갔다.
그 모습을 본 남전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조주스님이 아까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 목슴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질문
1. 남전 큰스님이 "한마디 깨달은 말을 하면 고양이를 살려준다."고 했을 때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2. 조주 큰스님이 신발을 머리위에 이고 가버렸다. 이는 무슨 뜻인가?
남전 큰스님의 문하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고양이 하나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여기서 싸운다는 얘기는 속세 사람들처럼 고양이를 서로 가지려고 싸운것이 아니라. 고양이에게 과연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논란이 오간 것이다. 짐승에게 불성이 있는지를 논하는 것을 당시의 한 유행이었다. 이 논쟁의 한가운데에 조주의 일대공안,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가 태어난 것이다.
고양이에게 불성이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싼 논쟁을 본 스승 남전이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고양이를 들고 외친다.
"진리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주겠다. 그렇지 못하면 너회들을 대신하여 고양이를 죽이겠다."
그러자 다들 묵묵부답이었고, 남전 큰스님은 한칼에 고양이 목을 따버린다.
살생을 절대 금기로 알고있는 불문[佛門]에서 죄 없는 고양이 목을 따버린 것이다. 고양이 목은 당시 스님네들의 목숨을 따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공안을 읽는 우리 목숨을 따버린것과 마찬가지였다. 진리를 모르면 살았어도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다.
저녁이 되어 밖에 나갔던 조주 큰스님이 돌아온다. 남전 큰스님은 낮의 일을 조주 큰스님에게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당신이라면 고양이를 살려낼수 있었을까?"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주 큰스님은 말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버린다. 남전은 조주가 진리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죽지 않았을 것을.'
진리는 말에 있지 않다. 일상적 감각이나 습관적 의식 너머의 '낯선' 세계이다. 논리나 판단이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다. 짚신은 알다시피 원래 발에 신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주는 습관적 판단을 뒤짚어 놓는다. 짚신을 머리에 신은(?) 것이다. 진리는 설명이 불가능 하기에 조주는 말없이 방을 나가버린다. 그것이 남전이 기대한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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