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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1, 2012

옮긴이의 말


옮긴이의 말


"선의 나침판은 숭산 큰스님이 외국인 제자들에게 설법하신 영어 법문을 미국인 제자 현각 스님이 "The Compass of Zen"이라는 젬목으로 엮어 1997년 미국에서 출판한 책이다. 현각 스님은 큰스님의 30여 년간 설법한 녹음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들을 녹취하여 무려 4년여 동안에 걸쳐 이 책을 완성 했다고 한다.

나는 "The Compass of Zen"을 몇 년 전 홍콩 공항 면세점 책방에서 스쳐 만난적이 있다. 그때는 불교에 문외한 이었고 당시만 해도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숭산 스님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분명 영어로 된 책인데, 표시에는 우리나라 석굴암의 불상 사진이 아름답게 앉혀 있었고,

표지를 펼치자 주장자를 들고 환하게 웃고 계신 한국 스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새겨진 큰스님의 모습은, 서울로돌아와 다시 일상에 묻히면서 점점 잊혀갔다.. 얼마후 책의 저자인 현각 스님을 우연한 기회에 직접 뵙게 되였고 오늘날 이렇게 번역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부끄럽지만------ 기쁘다.


이 책은 본래 지난 99년 1년 동안 현각 스님이 서울 마포와 강남에 있는 사찰들에서 했던 '영어로 듣는 참선 불교' 의 교재로 쓰였다. 스님의 청으로 강연 때마다 청중들을 위해 번역문으로 나눠드린 것이 인연이 돼 이번에 책으로까지 묶여 나왔다. 현각 스님의 자전적 에세이 "만행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쓰면서도 그랬지만 이번에 "선의 나침판"번역작업도 나의 능력으론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원편역자인 현각 스님이 옆에 계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영어로 쓰여진 한국 불교 책을 다시 한국어로 변역하는 일은 '메이드인 코리아'로 수출한 옷을 다시 내 몸에 맞추는 일 같은 경험이었다. 이미 한자어에 익숙해 있던 불교 용어를 영어로 만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번역하면서 도서관과 서점을 오가며 이미 국내에 훌륭한 불교 서적들이 많이 나와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은


한국인이 아닌, 불교를 전혀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해 쓰여진 불교 개괄서이다. 믿지는 않아도 불교의 기본개념이라 할 수 있는 '전생' 윤희' '업' 같은 말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때로 너무 쉽게 느껴질 정도로 기초적인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이것을 책으로 펴내게 된 데에는 서구의 합리적 사고방식에 이미 젖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그 어떤 불교 책보다 이해가 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스님의 쉽고 친절하면서도 직접적인 설명은, 불교 공부가 어려운 한자로 가득한 경전 공부가 아니라 참선 수행이라는 마음 공부를 통해 삶을 혁명적으로 아름답게 바꾸는,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길잡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깨달음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공부도 짧은 사람이 큰일을 맡겠다고 선뜻 나섰다.
2001년 2월 허문명 합장



옮긴이 허문명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현각 스님의 출가 수행기 "만행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역었고 "타닛한이 전하는 마음의 평안 정". "죽음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를 번역 하였다. 숭산 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선의 나침판", 세상을 바꾼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담은 "나는 여자다. 나는 역사다"를 출간하였다.


광우병과 나침판

광우병과 나침판--- 현각
얼마전 나는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인디펜던트>지에서 최근 유럽에서 번지고 있는 '광우병' 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광우병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고기를 인간이 먹었을 때 걸리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그들의 뇌는 말 그대로 병원균에게 '먹혀' 정상적인 기능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모든 신체 기능도 급속히 저하되어 마침내 용변도 가라지 못하는 식물인간의 상태가 되고 만다. 아직까지 치료방법은 전혀 없는 상태이나, 비교적 소수의 사람만이 이 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많은 권위있는 과학자들과 보건부 관리들의 말에 따르면, 이 병의 잠복기간은 40년이 넘을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병에걸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수년 이내에 광우병으로 13만 5천 명 정도의 사람이 목숨을 잃을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물론 이 뉴스를 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더욱더 충격적인 부분이 있었다. 시끄럽고 자극적인 서울을 떠나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경북 영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더욱 우려할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많이 진실되고 자연스러운 길에서 벗어나 있는가 생각하며 나는 억누를 수 없는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도 알고 있겟지만 광우병은 우리가 먹는 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잔꾀로 인해 발병된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우병은 실제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1950년대에 유럽에서 쇠고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영국의 축산업자들은 시장에 내다 팔 소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비용이 적게드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이미 도살된 소들의 가공하고 남은 부분들을 소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보통 소들이 먹는 곡물이나 풀 등에 죽은 소의 뼛조각과 내장 지방등을 섞어 만든 사료에는 그야말로 고기가 들어있기 때문에 단백질이 상당히 풍부하다. 따라서 '썩은 고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료는 소의 체중을 급격히 증가시켰고, 그 결과 우리는 모다 짧은 시간에, 보다 싼 가격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허지만 이 원료들은 냉장보관되지 않았으므로 썩기 시작했고 도살된 소가 걸린 병의 병원균 또한 들어 있었다. 이런 더럽고 썪은 고기에 곡물을 섞어 만든 썩은 사료를 매일매일 소들이 먹었던 것이다.
소는 원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소는 풀과 같은 식물만 먹도록 태어났다. 따라서 소가 이 썩은 고기 찌꺼기를 먹는다면, 즉 다른소의 몸을 먹는다면, 소는 같은 종족, 심지어 자기 가족의 몸을 먹는 것과 다를바 없으므로 병에 걸리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병 말이다. 소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미쳐서' 날뛰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유럽과 미국의 보건부 관리들은 이 전대미문의 끔찍한 병의 원인이 이 배합사료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이 병의 원인은 인간이 맛있는 먹거리를 탐하고 빠른 시간에 돈을 벌려는 욕망에 있었다. 한 종[種]동물에게 자연 상태에서는 먹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먹인 데 있다고 하겠다.
더욱 염려스러운 점은 소들이 자기와 같은 종을, 다시말해 자기 자신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디펜던트>지에서 한 과학자는 그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본질적으로 우리인간은 초식동물인 소를 육식동물로 변하게 했다. 아니, 그보다 한술 더 떠 우리는 소들을 '동족을 잡아먹는 동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이것이 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 과학자는 이런 말로 덧붙였다. "이 썩은 고기는 시장에서 거래되어 양어장이나 돼지 목장, 양 목장으로도 팔려 나갔다. 그 결과 인간은 다른 초식 동물들도 육식동물로 변하게 했다.".
이것은 지구상에 있는 한 생물이 자신의 막강한 지적능력을 오용하여 다른 생물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도록 한 것이다. 어린아이라도 이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런 문제로 인해 전 세계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인류는 길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한다. 인류는 방향을 상실했고, 자신의 혀와 지갑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의 질서를 자의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광우병은 최근의 한 예에 불과하다. 이것은 심각한 비극이다.
우리는 인테넷을 발명한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인터넷 덕분에 우리는 집안에 앉아서 쇼핑을 할 수 있고, 매일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동시에 우리는 다른 동물들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먹도록 만들고 있다. 인류는 이제 깨어나야 한다.
지금 여러분이 손에들고 있는 책에는 매우 혁신적인 기르침이 담겨있다. 이 책은 '깨어나는' 방법으로 어러분을 인도하는 나침판이다. 현재 서울에 있는 화계사의 국제선원과 계룡산의 무상사 국제선원에서 수행중인 외국인 비구와 비구니는 50여 명이 넘는다.
숭산 대선사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깨워 이 세상에 도움이 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매일매일 수행을 통해 우리자신의 본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드시 매일 일찍 일어나 108배를 드리고, 불경을 외고, 특히 참선을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 일에는 휴일이없다.
한번은 큰스님이 보스턴에서 가르침을 펴기 위해 프로비던스 선원을 며칠 비운적이 있다. 큰스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돌아와 보니 미국인 제자들이 아직도 자고 있었다. 그날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인가? 어째서 모두들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거지?"
제자중의 한 사람인 부라운 대학교수가 대답했다.
"선사님, 미국에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우리는 매일 열심히 수행했으니 하루정도는 쉬어야 하지 않을 까요? 어제 우리는 모두 일주일에 하루는 쉬기로 결정했읍니다. 그게 미국 스타일입니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르켰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보이는가?"
제자가 대답했다.
"네, 보입니다."
"태양은 쉬는 날이 없네.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리는가?"
"네, 선사님, 들립니다."
바람 역시 쉬는 날이 없네, 태양도, 바람도, 새도, 나무도, 꽃도, 그리고 모든 식물들도 쉬는 날이 없다네. 자네들은 선을 수행 중이네, 다시말해서 보살이 되고자 하는 거지. 보살의 마음은 쉬는 날이 없어. 그건 한국 스타일도, 미국 스타일도 이나야. 다만 대자대비[大慈大悲]일 뿐이네. 자네들은 그 경지에 도달해야 하네."
이 '선의 나침판' 은 대단히 혁신적이며 역사적인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인이지만, 원본은 영어로 출간되었다. " The Compass of Zen"(선의 나침판) 이라는 제목으로 1997년에 출간되자마자 당시 급속히 확장되던 미국과 동유럽 불교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에는 숭산 대선사께서 서양의 독자들에게 영어로 직접가르쳤다는 점 때문에 이 책에 들어있는 가르침은 한국인들에게 새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대부분 불교 지도자들은 이보다 훨씬 형식을 갖추어 법문을 전한다. 또한 대개의 경우 지니치게 한문에 의존하며, 고대 중국 불교의 전통과 그것의 수많은 해석을 따르는 철학적 가설들에 의존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한문을 공부한 독실한 불교 신자들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전처럼 한문 공부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동양의 불교 신자들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어렵고, 추상적이고, 끝까지 매우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로인해 많은 동양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어렵거나'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와 동 떨어져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잘못이다.
다시말하지만 이 책은 지적인 성찰을 위한 책이 이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책의 말씀을 접하며 때로는 색다른 가르침을 받기를 바란다. 이것은 다른 책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가르침을 줄 때 우리가 실체와 실상, 그리고 실용ㅇ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상'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모든 것들은 진리이다. '실용'은 매 순간 물질과 진실의 본래 기능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살의 행동이고 모든 것에 대한 크나큰 사랑이다. '실체' 즉 우리의 본성은 글이나 말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어떤종류의 생각이나 해설도 그것을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연다면, 그 순간 당신은 실수한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말이나 글 이전에, 생각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지적인 활동은 생각의 산물이며, 그것의 반대되는 영역에 속 한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생각도 우리의 본성을 표현할 수 없다. 옛날 고승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할!"
또 어떤 고승들은 제자가 입을 열거나 글을 쓰려고 하면 손가락을 치켜들어 제지하거나 제자를 때렸다. 그들은 우리 실체의 이런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다. 실체는 글이나 생각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성경을 보면 히브리인들은 '야훼'의 이름을 말하거나 글로 쓸 수 없었다. '야훼'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하느님께 불경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무한한 하느님의 실체를 글로, 심지어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 내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도 신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거나 어떤 종류의 묘사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있다. 이것은 모두 동일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의 마음과 우주 삼라만상의 본성은 글이나 말, 그밖에 생각에서 나오는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숭산 대선사 께서는 말씀중에 탁자를 치면서 그 점을 표현했다. "탕!"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설명하는 완벽한 스타일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책을 읽다가 "탕!"이라는 단어와 마주치면 그 단어를 읽으며 탁자를 두드리는 것이 좋다. 손으로 탁자를 치기만하면 된다. 이 책을 읽는 장소에 탁자가 없다면 손바닥으로 다리를 쳐도 좋다. 그렇게 한다면 이 가르침과 우주 삼라만상의 실체가 여러분에게 좀더 명활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는 게 어색할 수도 있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와 모든 종교적인 실행에서 여러분은 뭔가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탕!"이라는 단어를 보면 절대 아무생각도 하지말고 즉시 탁자를 쳐야한다. 100퍼센트 이렇게 하면, 100퍼센트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나 생각, 의견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파악할 수 있고,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우주 삼라만상과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본성과 모든것들의 본성을 파악하게 되며, 진실에 도달하고(실체) 그것의 올바른작용을 발견할(실용)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왜 이 "선의 나침판"이 필요한가? 현대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437년전인 1564년 서산 대사께서는 "선가귀감"이라는 책을 쓰셨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한국의 많은 '강원[講院]'에서 여러 비구와 비구니들이 교습서로 사용하고 있다. 서산 대사께서는 이 책에 불경의 주요 문구를 고르고 그것에 주를 달아 놓았다. 대사께서는 이렇게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비록 불초하나, 예날의 배움에 뜻을 두어 경 가운데 신령한 글월로서 보배를 삼거니와, 그러나 그 글이 너무 번다하고 '장경[藏經]'의 바다가 아득히 광대하여서 훗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가지를 헤쳐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를 면치못할 것이므로, 이에 글월 가운데 요긴하고 간결한 말씀 몇백을 추려 적노니, 가히 글은 간단하지만 뜻은 두루깊다 할 수 있다."
1972년 숭산 대선사는 처음으로 서양에서 가르침을 펼 때 이미 많은 불교 종파가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티베트 불겨화 중국 불교, 일본 불교, 베트남 불교, 비피사나는 1960년대 초부터 서양에서 대중화 되었다. 서양에는 이미 많은 스승들과 종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활동중인 종파들이 너무도 많아서 서양 불제자들은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진정한 불교인가?" "불경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교의 가르침들이 나의 일상생활에 어떤 실용성을 지니는가?" 등등. 그러나 새로운 불교 공동체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때로는 한 도시에서도 몇개의 다른 공동체들이 활동하기도 했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어떤 종파가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여러명의 스승과 종파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숭산 대선사께서 이 나침판을 고안해낸 것이다. 이것은 원래 새로 입문한 서양 불제자들을 올바른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한 안내서 였다. 서산 대사께서 조선시대에 했던 것처럼 숭산 큰스님께서도 서양인들이 불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큰스님께서는 참선을 매우 중시하며, 오늘날에도 가장 강조하는 수행방법중 하나이다. 그러나 서양 불제자들 역시 불경과 글로 쓰여진 가르침을 알아야 하며, 그래야 그들의 수행에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산 대사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글이 너무 번다하고 '장경의 바다가 아득히 광대하여서 훗날 뜻을 같아하는 이들이 가지를 헤쳐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서산 대사께서 조선시대의 스님들을 위해 했던 일을 숭산 대선사께서 그들을 위해 한 것이다. 그는 불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뽑아 그것에 대해 간단한 주를 달아놓았다.
아기가 어릴 때 엄마는 음식을 잘게 잘라서 먹이곤 한다. 이기들은 작은 조각의 음식을 잘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아기들은 무럭무럭 자라 튼튼해지고, 나중에는 스스로 음식을 잘라 씹어먹을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 여러분이 이 책에 있는 글을 읽으며 그 뜻에 얽매이지 말고, 여러분의 참된 길을 찾기 위해 늘 수행 정진하는 데 이글을 이용하기 바란다.
덕분에 나와 많은 서양인들은 불교에 접할 수 있었고, 우리 자신을 찾고 이 세상을 구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많은 스님들이 미국에가서 서양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지만 그들은 숭산 대선사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제자들이 따르지 못한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그런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번역, 출간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일일이 다 감사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변역자인 허문명 씨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허문명씨는 기자로서 많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면서 이 긴 책을 변역하는 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도 큰 영광이었다.
또한 화계사 주지스님이신 성광 스님, 선덕 스님,(견향 스님), 대봉 스님, 무심 스님, 도관 스님, 대선행 신도회장님, 그리고 화계사의 서울 국제선원과 무상사의 계룡산 국제선원에 계신 모든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 서울 성북구 길상사 모든 스님들, 정윤화(광명장) 보살님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누구보다 숭산 스님께 늘 감사드린다. 그의 가르침과 그가 서양에 오신것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주신 것에 대해 나는 무한히 감사드린다.
2001년 3월 1일 경북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현정사에서 ---현각합장---
광우병과 나침판--- 현각
얼마전 나는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인디펜던트>지에서 최근 유럽에서 번지고 있는 '광우병' 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광우병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고기를 인간이 먹었을 때 걸리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그들의 뇌는 말 그대로 병원균에게 '먹혀' 정상적인 기능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모든 신체 기능도 급속히 저하되어 마침내 용변도 가라지 못하는 식물인간의 상태가 되고 만다. 아직까지 치료방법은 전혀 없는 상태이나, 비교적 소수의 사람만이 이 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의 많은 권위있는 과학자들과 보건부 관리들의 말에 따르면, 이 병의 잠복기간은 40년이 넘을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병에걸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수년 이내에 광우병으로 13만 5천 명 정도의 사람이 목숨을 잃을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물론 이 뉴스를 접하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더욱더 충격적인 부분이 있었다. 시끄럽고 자극적인 서울을 떠나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경북 영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더욱 우려할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많이 진실되고 자연스러운 길에서 벗어나 있는가 생각하며 나는 억누를 수 없는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도 알고 있겟지만 광우병은 우리가 먹는 소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잔꾀로 인해 발병된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관우병은 실제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1950년대에 유럽에서 쇠고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영국의 축산업자들은 시장에 내다 팔 소의 무게를 늘리기 위해 비용이 적게드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이미 도살된 소들의 가공하고 남은 부분들을 소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보통 소들이 먹는 곡물이나 풀 등에 죽은 소의 뼛조각과 내장 지방등을 섞어 만든 사료에는 그야말로 고기가 들어있기 때문에 단백질이 상당히 풍부하다. 따라서 '썩은 고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료는 소의 체중을 급격히 증가시켰고, 그 결과 우리는 모다 짧은 시간에, 보다 싼 가격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허지만 이 원료들은 냉장보관되지 않았으므로 썩기 시작했고 도살된 소가 걸린 병의 병원균 또한 들어 있었다. 이런 더럽고 썪은 고기에 곡물을 섞어 만든 썩은 사료를 매일매일 소들이 먹었던 것이다.
소는 원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소는 풀과 같은 식물만 먹도록 태어났다. 따라서 소가 이 썩은 고기 찌꺼기를 먹는다면, 즉 다른소의 몸을 먹는다면, 소는 같은 종족, 심지어 자기 가족의 몸을 먹는 것과 다를바 없으므로 병에 걸리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병 말이다. 소는 이상한 행동을 하고, '미쳐서' 날뛰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유럽과 미국의 보건부 관리들은 이 전대미문의 끔찍한 병의 원인이 이 배합사료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이 병의 원인은 인간이 맛있는 먹거리를 탐하고 빠른 시간에 돈을 벌려는 욕망에 있었다. 한 종[種]동물에게 자연 상태에서는 먹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먹인 데 있다고 하겠다.
더욱 염려스러운 점은 소들이 자기와 같은 종을, 다시말해 자기 자신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디펜던트>지에서 한 과학자는 그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본질적으로 우리인간은 초식동물인 소를 육식동물로 변하게 했다. 아니, 그보다 한술 더 떠 우리는 소들을 '동족을 잡아먹는 동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이것이 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 과학자는 이런 말로 덧붙였다. "이 썩은 고기는 시장에서 거래되어 양어장이나 돼지 목장, 양 목장으로도 팔려 나갔다. 그 결과 인간은 다른 초식 동물들도 육식동물로 변하게 했다.".
이것은 지구상에 있는 한 생물이 자신의 막강한 지적능력을 오용하여 다른 생물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도록 한 것이다. 어린아이라도 이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런 문제로 인해 전 세계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인류는 길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한다. 인류는 방향을 상실했고, 자신의 혀와 지갑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의 질서를 자의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광우병은 최근의 한 예에 불과하다. 이것은 심각한 비극이다.
우리는 인테넷을 발명한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인터넷 덕분에 우리는 집안에 앉아서 쇼핑을 할 수 있고, 매일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동시에 우리는 다른 동물들로 하여금 자기자신을 먹도록 만들고 있다. 인류는 이제 깨어나야 한다.
지금 여러분이 손에들고 있는 책에는 매우 혁신적인 기르침이 담겨있다. 이 책은 '깨어나는' 방법으로 어러분을 인도하는 나침판이다. 현재 서울에 있는 화계사의 국제선원과 계룡산의 무상사 국제선원에서 수행중인 외국인 비구와 비구니는 50여 명이 넘는다.
숭산 대선사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깨워 이 세상에 도움이 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매일매일 수행을 통해 우리자신의 본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드시 매일 일찍 일어나 108배를 드리고, 불경을 외고, 특히 참선을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 일에는 휴일이없다.
한번은 큰스님이 보스턴에서 가르침을 펴기 위해 프로비던스 선원을 며칠 비운적이 있다. 큰스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돌아와 보니 미국인 제자들이 아직도 자고 있었다. 그날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무슨 일인가? 어째서 모두들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거지?"
제자중의 한 사람인 부라운 대학교수가 대답했다.
"선사님, 미국에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우리는 매일 열심히 수행했으니 하루정도는 쉬어야 하지 않을 까요? 어제 우리는 모두 일주일에 하루는 쉬기로 결정했읍니다. 그게 미국 스타일입니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르켰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보이는가?"
제자가 대답했다.
"네, 보입니다."
"태양은 쉬는 날이 없네. 밖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리는가?"
"네, 선사님, 들립니다."
바람 역시 쉬는 날이 없네, 태양도, 바람도, 새도, 나무도, 꽃도, 그리고 모든 식물들도 쉬는 날이 없다네. 자네들은 선을 수행 중이네, 다시말해서 보살이 되고자 하는 거지. 보살의 마음은 쉬는 날이 없어. 그건 한국 스타일도, 미국 스타일도 이나야. 다만 대자대비[大慈大悲]일 뿐이네. 자네들은 그 경지에 도달해야 하네."
이 '선의 나침판' 은 대단히 혁신적이며 역사적인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한국인이지만, 원본은 영어로 출간되었다. " The Compass of Zen"(선의 나침판) 이라는 제목으로 1997년에 출간되자마자 당시 급속히 확장되던 미국과 동유럽 불교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에는 숭산 대선사께서 서양의 독자들에게 영어로 직접가르쳤다는 점 때문에 이 책에 들어있는 가르침은 한국인들에게 새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대부분 불교 지도자들은 이보다 훨씬 형식을 갖추어 법문을 전한다. 또한 대개의 경우 지니치게 한문에 의존하며, 고대 중국 불교의 전통과 그것의 수많은 해석을 따르는 철학적 가설들에 의존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한문을 공부한 독실한 불교 신자들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전처럼 한문 공부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동양의 불교 신자들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어렵고, 추상적이고, 끝까지 매우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로인해 많은 동양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어렵거나'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와 동 떨어져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잘못이다.
다시말하지만 이 책은 지적인 성찰을 위한 책이 이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책의 말씀을 접하며 때로는 색다른 가르침을 받기를 바란다. 이것은 다른 책에서는 접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숭산 대선사께서는 가르침을 줄 때 우리가 실체와 실상, 그리고 실용ㅇ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상'은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모든 것들은 진리이다. '실용'은 매 순간 물질과 진실의 본래 기능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살의 행동이고 모든 것에 대한 크나큰 사랑이다. '실체' 즉 우리의 본성은 글이나 말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어떤종류의 생각이나 해설도 그것을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연다면, 그 순간 당신은 실수한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말이나 글 이전에, 생각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지적인 활동은 생각의 산물이며, 그것의 반대되는 영역에 속 한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생각도 우리의 본성을 표현할 수 없다. 옛날 고승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할!"
또 어떤 고승들은 제자가 입을 열거나 글을 쓰려고 하면 손가락을 치켜들어 제지하거나 제자를 때렸다. 그들은 우리 실체의 이런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다. 실체는 글이나 생각으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성경을 보면 히브리인들은 '야훼'의 이름을 말하거나 글로 쓸 수 없었다. '야훼'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하느님께 불경을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무한한 하느님의 실체를 글로, 심지어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 내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도 신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거나 어떤 종류의 묘사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있다. 이것은 모두 동일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의 마음과 우주 삼라만상의 본성은 글이나 말, 그밖에 생각에서 나오는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숭산 대선사 께서는 말씀중에 탁자를 치면서 그 점을 표현했다. "탕!"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설명하는 완벽한 스타일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책을 읽다가 "탕!"이라는 단어와 마주치면 그 단어를 읽으며 탁자를 두드리는 것이 좋다. 손으로 탁자를 치기만하면 된다. 이 책을 읽는 장소에 탁자가 없다면 손바닥으로 다리를 쳐도 좋다. 그렇게 한다면 이 가르침과 우주 삼라만상의 실체가 여러분에게 좀더 명활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는 게 어색할 수도 있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와 모든 종교적인 실행에서 여러분은 뭔가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탕!"이라는 단어를 보면 절대 아무생각도 하지말고 즉시 탁자를 쳐야한다. 100퍼센트 이렇게 하면, 100퍼센트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나 생각, 의견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것을 파악할 수 있고,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우주 삼라만상과 완벽하게 하나가 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본성과 모든것들의 본성을 파악하게 되며, 진실에 도달하고(실체) 그것의 올바른작용을 발견할(실용)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왜 이 "선의 나침판"이 필요한가? 현대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역사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437년전인 1564년 서산 대사께서는 "선가귀감"이라는 책을 쓰셨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한국의 많은 '강원[講院]'에서 여러 비구와 비구니들이 교습서로 사용하고 있다. 서산 대사께서는 이 책에 불경의 주요 문구를 고르고 그것에 주를 달아 놓았다. 대사께서는 이렇게 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비록 불초하나, 예날의 배움에 뜻을 두어 경 가운데 신령한 글월로서 보배를 삼거니와, 그러나 그 글이 너무 번다하고 '장경[藏經]'의 바다가 아득히 광대하여서 훗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가지를 헤쳐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를 면치못할 것이므로, 이에 글월 가운데 요긴하고 간결한 말씀 몇백을 추려 적노니, 가히 글은 간단하지만 뜻은 두루깊다 할 수 있다."
1972년 숭산 대선사는 처음으로 서양에서 가르침을 펼 때 이미 많은 불교 종파가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티베트 불겨화 중국 불교, 일본 불교, 베트남 불교, 비피사나는 1960년대 초부터 서양에서 대중화 되었다. 서양에는 이미 많은 스승들과 종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활동중인 종파들이 너무도 많아서 서양 불제자들은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진정한 불교인가?" "불경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교의 가르침들이 나의 일상생활에 어떤 실용성을 지니는가?" 등등. 그러나 새로운 불교 공동체는 매우 활동적이었다. 때로는 한 도시에서도 몇개의 다른 공동체들이 활동하기도 했고,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어떤 종파가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여러명의 스승과 종파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숭산 대선사께서 이 나침판을 고안해낸 것이다. 이것은 원래 새로 입문한 서양 불제자들을 올바른 가르침으로 인도하기 위한 안내서 였다. 서산 대사께서 조선시대에 했던 것처럼 숭산 큰스님께서도 서양인들이 불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큰스님께서는 참선을 매우 중시하며, 오늘날에도 가장 강조하는 수행방법중 하나이다. 그러나 서양 불제자들 역시 불경과 글로 쓰여진 가르침을 알아야 하며, 그래야 그들의 수행에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산 대사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글이 너무 번다하고 '장경의 바다가 아득히 광대하여서 훗날 뜻을 같아하는 이들이 가지를 헤쳐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서산 대사께서 조선시대의 스님들을 위해 했던 일을 숭산 대선사께서 그들을 위해 한 것이다. 그는 불경의 중요한 가르침을 뽑아 그것에 대해 간단한 주를 달아놓았다.
아기가 어릴 때 엄마는 음식을 잘게 잘라서 먹이곤 한다. 이기들은 작은 조각의 음식을 잘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아기들은 무럭무럭 자라 튼튼해지고, 나중에는 스스로 음식을 잘라 씹어먹을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 여러분이 이 책에 있는 글을 읽으며 그 뜻에 얽매이지 말고, 여러분의 참된 길을 찾기 위해 늘 수행 정진하는 데 이글을 이용하기 바란다.
덕분에 나와 많은 서양인들은 불교에 접할 수 있었고, 우리 자신을 찾고 이 세상을 구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많은 스님들이 미국에가서 서양제자들을 가르치고자 하지만 그들은 숭산 대선사처럼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제자들이 따르지 못한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그런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번역, 출간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일일이 다 감사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변역자인 허문명 씨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허문명씨는 기자로서 많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면서 이 긴 책을 변역하는 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도 큰 영광이었다.
또한 화계사 주지스님이신 성광 스님, 선덕 스님,(견향 스님), 대봉 스님, 무심 스님, 도관 스님, 대선행 신도회장님, 그리고 화계사의 서울 국제선원과 무상사의 계룡산 국제선원에 계신 모든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 서울 성북구 길상사 모든 스님들, 정윤화(광명장) 보살님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누구보다 숭산 스님께 늘 감사드린다. 그의 가르침과 그가 서양에 오신것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주신 것에 대해 나는 무한히 감사드린다.
2001년 3월 1일 경북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현정사에서 ---현각합장---

Tuesday, August 21, 2012

10문 고양이 밥 그릇이 깨졌다.

10 문 고양이 밥그릇이 께졌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다가 고양이 밥그릇이 깨졌다.

질문

1.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공안은 如如를 표현하는 공안이다.
여여의 경지에는 분별이 없다. 상대적인 것도 없다. 만물이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 하나에 '25센트'라고 하지.
그리고 25샌트를 지불하고 그것을 사먹었다고하자.

1쿼터, 25센트, 이이스크림, 그리고 행복감------.
모양은 변했지만 본질은 하나이다.

공안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신이 이해하는 것은 단지 쥐,
고양이밥 고양이 밥그릇, 깨졌다.하는것 등등이다.
그 뒤에 숨겨진 뜻을 파악해야 한다.

1쿼터의 숨겨진 뜻은 25센트이고 25센트의 숨겻진 의미는
아이스크림이 배 안에 들어가 "아, 시원하다" 그것이 전부이다.

우리 어른들은 너무 똑똑해서 이것을 잘모른다.
그러나 이이들이라면 척 보면 알 것이다.

세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세남자가걸어가고있다. 첫 번째 남자는 칼 소리를 만들고,
두 번째 남자는 손을 흔드는 흉내를 내고
세 번째 남자는 손수건을 흔든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질문

1.만일 그대가 거기 있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2. 관계란 무엇인가?

3. 상황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완벽히 즉여[卽如]의 공안이다. 마치 TV 퀴즈 게임 같다.

아니운서가 몇가지 를 말하고 참가자들에게 묻는다.

"지금 이 제시어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화면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청중 중 한 사람이 이것을 보고 웃으면 다른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 웃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웃는다.

상황은 마찬가지이지만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10개의 공안을 끝내면 이 질문을 숙제로 받게된다.
이것까지 통과하면 당신은 선사님께 깨달음을 점검 받고 인가를 받게된다.

Monday, August 20, 2012

9 문 남전참묘


9 문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이 고양이 목을 베어버렸다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것을 본 남전 큰스님이 "내가 중재를 하지" 하시면서
한 손에 고양이를 들고 한 손에 칼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들 중에 한마디 깨달은 말을 하면 이 고양이를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남전 큰스님이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그날 저녁 조주 큰스님이 밖에서 돌아왔다. 남전 큰스님이 낮에 있었던 일을 조주 큰스님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조주 큰스님은 짚신을 벗어 머리위에 모자처럼 쓰고 맨발로 걸어나갔다.
그 모습을 본 남전 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조주스님이 아까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 목슴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질문
1. 남전 큰스님이 "한마디 깨달은 말을 하면 고양이를 살려준다."고 했을 때 여러분이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2. 조주 큰스님이 신발을 머리위에 이고 가버렸다. 이는 무슨 뜻인가?


남전 큰스님의 문하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고양이 하나를 놓고 싸우고 있었다. 여기서 싸운다는 얘기는 속세 사람들처럼 고양이를 서로 가지려고 싸운것이 아니라. 고양이에게 과연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논란이 오간 것이다. 짐승에게 불성이 있는지를 논하는 것을 당시의 한 유행이었다. 이 논쟁의 한가운데에 조주의 일대공안,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가 태어난 것이다.


고양이에게 불성이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싼 논쟁을 본 스승 남전이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고양이를 들고 외친다.
"진리를 말하는 자가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주겠다. 그렇지 못하면 너회들을 대신하여 고양이를 죽이겠다."
그러자 다들 묵묵부답이었고, 남전 큰스님은 한칼에 고양이 목을 따버린다.


살생을 절대 금기로 알고있는 불문[佛門]에서 죄 없는 고양이 목을 따버린 것이다. 고양이 목은 당시 스님네들의 목숨을 따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고, 공안을 읽는 우리 목숨을 따버린것과 마찬가지였다. 진리를 모르면 살았어도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다.


저녁이 되어 밖에 나갔던 조주 큰스님이 돌아온다. 남전 큰스님은 낮의 일을 조주 큰스님에게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당신이라면 고양이를 살려낼수 있었을까?"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주 큰스님은 말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버린다. 남전은 조주가 진리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는 죽지 않았을 것을.'
진리는 말에 있지 않다. 일상적 감각이나 습관적 의식 너머의 '낯선' 세계이다. 논리나 판단이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다. 짚신은 알다시피 원래 발에 신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주는 습관적 판단을 뒤짚어 놓는다. 짚신을 머리에 신은(?) 것이다. 진리는 설명이 불가능 하기에 조주는 말없이 방을 나가버린다. 그것이 남전이 기대한 '한마디'였다.




Sunday, August 19, 2012

8 문 덕산 큰스님의 발우

8 문 덕산 큰스님의 발우

어느 날 덕산 큰스님이 발우를 옆에 들고 내려와 식당으로 가다가 설봉 스님과 마주쳤다.
설봉 스님이 덕산 큰스님에게 "아니, 스님, 종도 울리지 않고 북도 안 쳤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세요?" 라고 여쭈자 덕산 큰스님이 이 말을 듣고 되돌아 방장으로 가셨다 (방장이란 노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방이다).
설봉 스님은 이 일을 선방 입승스님(head monk)이자 덕산 큰스님의 애 제자인 암두 스님에게 전했다.


그러자 암두는 "그 대단하신 덕산 큰 스님도 아직 마지막 한 마디 말[末後句]을 터득하지 못하셨구만" 했다.
덕산 스님이 이 암두 스님의 말을 전해듣고 화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자네는 이 노승을 믿지 않느냐?(汝不背老僧那)"
그러자 암두 스님이 덕산 큰스님 귀에 대고 무언가 소곤소곤했다.


그러자 덕산 큰스님은 머리를 끄덕끄덕 하시더니 성난 것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돌아가셨다.
다음날 법당에 오른 덕산 큰스님은 평소와 달랐다.
이를 본 암두 스님이 앞자리에서 손뼉을 치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기쁘다, 우리 노스님께서 선의 마지막 경지를 다 터득하셨다. 이제 천하의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질문
1. 어떤 것이 덕산 큰스님의 마지막 한마디[末後句]인가?
2. 암두 스님은 덕산 큰스님의 귀에 대고 무엇이라고 소곤소곤하였는가?
3. 덕산 큰스님이 예전과 다르게 법문했다 하니 어떻게 한 것인가?
4. "아직 종도 안 울리고 법고도 안 울렸는데 발우를 옆에들고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설봉 스님의 질문을 여러분이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공안이다. 하지만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렵지 않다.
이 공안은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을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준다.


덕산 큰스님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마지막 구절' 이란 올바른 상황, 관계, 실천에서 온 말아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아직 저녁 공양시간 전이라서 종도 울리지 않고 법고도 울리지 않았는데, 덕산 큰스님이 발우를 들고 선방을 나선다. 설봉 스님이 그것을 보고 여쭙자 큰스님은 다시 아무 말 없이 당신의 방으로 돌아간다.설봉 스님이 이것을 암두 스님께 말했더니 암두 스님이 말하기를 "우리 위대한 스승도 마지막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말은 곧 "우리 스승이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에 대해 이해를 못한 모양"이라는 말과 같다.
공양 시간도 아닌데 밥그릇을 들고 나가니까 말이다.
암두 스님은 설봉 스님의 말을 전해듣고 스승에 대해 이렇게 소문을 낸 모양이다.
"아마 큰스님께서 마지막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


덕산 큰스님은 이 말을 듣고 아주 화가가 났을 것이다.
감히 제자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덕산 큰스님은 암두 스님을 그의 방으로 부른다.
"너는 왜 나를 두고 나쁜 말을 하고 돌아다니느냐. 너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그때 암두 스님이 덕산 큰스님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자 큰 스님의 기분이 풀렸다.


다음날, 큰스님이 연단으로 올라가 법문을 한다. 그는 전과달리 아주 훌륭한 법문을 했다.
암두 스님은 손벽을 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우리 큰스님이 궁극적 진리에 이르렀다. 지금부터 아무도 그를 어쩌지 못할 것이야."
종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느냐고 제자가 물었으나
큰스님은 한마디 설명도 없이 방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큰스님이 입을 열어 뭔가 합리적인 설명을 했다면
암두 스님은 큰스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스님은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고 암두 스님이 나중에 큰스님 귀에 속삭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 순간 설봉 스님이 제대로 얘기만 했어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네 번째 질문의 핵심은 덕산 큰스님이 어떻게 그의 실수를 교정해야 하는가이다.
실수를 하는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떻게 그것을 바로잡는가, 그것이 문제다. 이와 관련한 오랜 일화가 있다.


수 년전 어느 날 밤 고봉 스님이 술에 잔뜩 취해 새벽녘에야 들어왔다.
그때 다른 스님들은 이미 다 깨어서 아침염불 중이었다.
그러나 고봉스님은 자기방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스승인 만공 큰스님에게 큰 소리로 갖은 욕을 다해댔다.
"만공은 가짜다, 그놈의 가르침은 사기다."


이 소리를 들은 스님들이 깜짝 놀랐다.
만공스님은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님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고봉 스님이 만공 스님에 대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 만공 큰스님은 마침 법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모든 스님들이 뛰어나와 숨을 죽이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큰스님은 고봉 스님의 방문을 열어제쳤다.


"고봉아, 너는 왜 내 욕을 하고 다니느냐?"
그때 고봉 스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고봉 스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큰스님, 나는 큰스님을 욕한 적이 없읍니다."
"아니 무엇이라고? 방금까지 내 욕을 하고 있었던 것을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 들었다.
이제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나는 스님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바보같은 '만공'이라는 스님에 대해 욕을하고 있었읍니다."
고봉스님은 만공이라는 이름역시 누군가 지어준 이름이므로 앞에서 있는 만공 큰스님과
그의 본성 자체를 구별지어 대답한 것이다.그러자 만공 큰스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만공과 내가 같으냐, 틀리냐?"
고봉 스님은 "할" 하고 소리쳤다. 만공 큰스님은 호탕하게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구나. 이제 그만 자거라."
그렇다 실수를 했는지, 않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한다.
덕산과 같은 큰스님도 실수를 한다.
중요한것은 그것을 어떻게 고치느냐이다.


고봉 스님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순간순간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실수는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는 즉각적으로 어떤 맑은 목적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덕산 큰스님이 실수를 해서 그의 실수를 바로잡지 않고 그의 방으로 돌아간다면 절은 온통 난리가 날 것이다.
그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실수를 했다.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그것이 네번째 질문의 핵심이다.




Thursday, August 16, 2012

7 문 고봉삼관


7 문 고봉삼관 [高捧三關] 고봉의 3개문

질문
1. 밝은 해가 허공에 높이 떠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째서 왜 조그만 조각구름이 해를 가리었는가?
2. 사람마다 모두 그림자가 따르고 있어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밟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온 천지가 모두 불구덩이다. 어떤 삼매를 얻어서 타 죽지 않겠는가?

이것은 완벽한 행동공간이다. 어떤 것도 점검하지 말고 단지 행하라.
실체를 바로보고 실상을 깨달아 실용을 한다면 이 공안은 문제가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 해 전에 일본에는 사무라이 역을 잘하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다.
그는 20년 경력의 검도 7단이었고 아주 잘 생긴데다가 기술도 좋았다. 일본에서 아주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의 아주 유명한 감독이 만드는 사무라이 서사극의 주연 배우로 캐스팅 됐다.


대형 영화회사가 돈을 대는 작업이었다. 조명사, 의상 담당자.
음악 담당자 등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였다.
시나리오는 보통 사무라이 영화들처럼 아주 단순하다.
악당이 나타나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면 주인공이 나타나 그들을 무찌른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최고다. 누구도 이 영화에서 나 만큼 연기를 잘할 수 없다.
드디어 첫 번째 장면을 찍는 알이었다. 감독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렇게 소리쳤다.
"조명, 카메라, 준비됐으면 액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악당이 바위뒤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고,
주인공이 단칼에 악당을 무찌르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생각했던 바대로 실감나게 연기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감독이 NO 사인을 내는것이 아닌가. 주인공은 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도대체 왜NG 사인을 내는거야?'
주인공의 의구심에도 아랑곳없이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그러나 감독은 "아니야 아니야, 다시해, 다시"라며 또 NG 사인을 냈다.
주인공은 화가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이렇게 대한 적이 없어, 이건 완전히 나를 갖고 노는거야.'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한숨을 크게 내쉰 후 집중했다.
'아마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것일 수도 있어, 이번에는 잘되겠지.'
악당이 다시 튀어나왔고 그 순간 주인공은 마치 도술을 부리듯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곤 악당을 완벽하게 무찔렀다.


그러나 감독은 다시 NG 사인을 내는것이 아닌가. 주인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사무라이 배우다. 나한테 이처럼 세번씩이나 NG를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너무 화가 나 자기 몸집의 절반도 안되는 감독을 노려 보았다.
감독은 배우의 마음을 알아 차렸지만 얼굴에는일말의 동요도없었다.


그 감독은 이미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다시 돌아갔다. 감독이 사인을 냈다.
"조명, 카메라, 액션."악당이 나타났고 주인공이 뛰어 오를 찰라였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공이 방향을 바꿔 감독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아---- 당신을 죽이고야 말겠어."
그는 감독의 멱살을 잡아 땅에 내리쳤다.
그러나 감독은 그의 행동에 전혀 동요하지않고 도리어 마구 웃더니 아렇게 소리쳤다.


'하하하하 맞아, 맞아.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주인공은 그제야 정신이 난듯 감독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이제 감독님 가르침을 알겠읍니다."
감독은 그저 웃음만 터뜨리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 그들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돼 모든 장면에서 한번이나 두 번 정도만 찍고 넘어갔다.


주인공은 오로지 머릿속에 연기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런 일이 있고 부터는 자만이나 헛된 감정은 없었다.
이 영화는 나중에 일본에서 가장 훌륭한 사무라이 영화로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감독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그는 자만에 가득찬 배우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최고야, 누구도 나를 가르칠 수 없어.'
이런 마음이 문제이다. 이런 점검하는 마음이 나타나면 연기는 완전하지 않다.
그리하여 주인공에게 자극을 가함으로서 100퍼센트 집중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으아아아아---- 내가 너를 죽이겠다."
당신이 무언가를 할 때 그냥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과 전 우주가 하나가 된다.
이것이 고봉 스님 질문의 핵심이다.

6 문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6 문 부처님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한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문 채 법당에 들어와 부처님 얼굴에 연기를 내뿜기도 하고 손 위에 담뱃재를 털기도 한다.
스님 한 분이 놀라서 뛰어와 이렇게 꾸짓는다.
" 지금 성스러운 법당에서 뭐 하는 것이냐?"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성스렁운 것도, 속된 것도 본래 따로 없는 것이거늘, 부처님의 머리에 재를 털었기로서니 무엇이 잘못됐는가요?
이 우주 삼라만상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바로 나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든 다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요?"


질문
1. 당신이 스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 제도[濟度] 하겠는가?

언뜻 생각하면 이 남자 말이 맞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많은 절의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온 우주가 부처이다'


아주 훌륭한 가르침이다. 부처는 도처에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우주에 부처의 몸 아닌 것이 없다.
한 남자가 법당에 담배를 피우면서 들어온다. 그는 불상에 연기를 내뿜고 머리에 재를 떨어뜨린다. 스님이 놀라 뛰어온다.


"미쳤느냐, 왜 성스러운 부처님의 머리에 담뱃 재를 터느냐?"
하지만 남자는 절의 기둥에 적힌 문구를 가르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니, 여기 이렇게 우주 만물이 부처라고 씌어 있지 않습니까?
이 담뱃재도 불성을 가지고 있읍니다. 내가 재를 어디에 떨어뜨린다 해도 부처님의 땅 아닌곳이 어디 있읍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는 알고 있지만 둘은 모르고 있다.
그는 모든 법이 여여[如如], 즉여[卽如] 그리하여 올바른 실용으로 나아가는 경계를 아직 깨우치지 못했다. 그는 '공'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신심이 깊은 한 보살이 무려 10년 동안 한 스님의 수행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암자를 지어주고 음식과 옷과 약을 주었다. 보통 10년 정진,
수행을 하면 깨닫는다고 생각한 그보살은 10년 후 그 스님이 얼마나 깨달았는지 듣고 싶었다.
마침 보살에게는 예쁘고 젊은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날 보살은 딸에게 아주 예쁜 옷을 입힌 다음 맛있는 음식 훌륭한 옷을 스님에게 보내면서 색다른 당부를 했다.


"이것들을 스님께 갖다드려라. 그런다음 스님을 유혹하거라. 그런다음 스님의 반응을 내게 알려다오."
딸은 스님이 있는 암자로 갔다. 그러고는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 듣지하니 당신은 위대한 스님이십니다. 10년 동안 열심히 수행을 하셨다구요.


어머니께서 이것들을 가져다 주라고 하셔서 이렇게 왔읍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순간, 스님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내치며 이렇게 말했다.
"찬 바위에 썩은 통나무다 엄동설한에는 온기가 없는 법이다."
딸은 마을로 내려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머니, 정말 훌륭한 스님이세요. 저를 "찬 바위에 썩은 통나무이다. 엄동설한에는 온기가 없는 법이다"라고 하시면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요."
그러나 딸의 말을 들은 보살은 스님에게 냅다 뛰어 올라갔다. 그러더니 스님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10년동안 악마를 봉양했구나. 여기서 나가라. 이 악마야."


보살은 스님을 암자 밖으로 내쫓았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작스런 보살의 행동은 무엇인가? 스님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인가?
이 스님은 불상에 재를 떨어뜨리는 담배 피우는 남자와 같다. 스님는 단지 그의 생각에 집착해 있을 쁜이었다.


그는 그의 수행 경험에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행했을 뿐이었다.
외국에는 이런종류의 수행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물론 조용하고 평화롭고 움직이지않는 마음을 기지기 위해 수행을 열심히 하면 원하는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명상을 해서 어던 좋은 감정을 가질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속에 지혜가 있는가?
단지 평화로운 마음만 간직한다면 지혜가 어떻게 자랄 것인가. 이런 식으로 수행한다면 지혜는 자라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 바른 상황, 바른 관계, 바른 실천을 행할 수 없다.
앞서 예로 든 그 스님이 그 상황에서 인식해야 할 바른 관계란 그 딸이 자신을 10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봉양해준 보살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바른 행동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이 젊은 여자에게 맑고 자비로운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누군가 법당에와서 부처님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고 머리에 재를턴다. 그는 그가 처한 현재 상황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순간순간 올바른 실천도 하지 못한다. 당신이라면 부처님 불상에 재를 턴 그 남자를 무슨 말로 가르칠 것인가?
조심하라. 그 남자는 아주 집착이 강한 사람이여서 여러분이 그를 때리면 그는 더 세게 어러분을 때릴 것이다. (하하하)


Wednesday, August 15, 2012

5 문 향엄 상수

5 문 향엄상수[香嚴上樹]
나뭇가지를 물고 나무에 매달려 오르기


향엄 큰스님이 말했다.
"가령, 누가 나무위에 매달려 있다고 하자. 두 손은 등위에 꽁꽁 묶여 있고,
발판도 없이 다만 입으로 가지를 물고 있다고 하자.

그때 나무 아래서 누군가 나무위에 있는 사람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어쩔 것인가.
대답하지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않은것이 되고(즉, 죽게되고),
대답을 하면 입을 열어야 하므로 목슴을 잃는다."


질문
1.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이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공안 이다. 입을 열어도 죽고, 침묵을 지켜도 죽는다.
달마 선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무엇을 이러쿵 저렇쿵 설명하겠는가.

입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이 공안은 일종의 비유이다.
지금 이 입 하나에 달려있다는 것,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 흐르듯 말을 한다해도,
입을 놀려 장광설로 멋있는 설명을 거침없이 해나간다 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말은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고 잘못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오직 모를 뿐'을 깨닫는다. 이것이 생각 이전의 상태이다.
삶도, 죽음도 없다. '오직 모를 뿐' 이 싦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면 삶이다.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 한계를 넘어 선 것이다.


그래서 이 공안에서는 우리가 살고 싶으면 죽는다는 역설을 가르친다. 나무 위에서 가지를 입에물고 있을 때 어느 것이 올 바른 행동인가.
다 내려놓아라 그러면 당신앞에 맑게 나타난다.

Monday, August 13, 2012

달마 대사의 수염

4 문 달마 대사의 수염


혹암[或菴]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달마 대사는 왜 수염이 없는가?"


질문
1. 달마 대사의 본래 얼굴은 무엇인가?
2. 당신에게 묻겠다.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이것은 상당히 공격적인 공안이다. 선은 마음속에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혹암 큰스님은 뭔가를 만들어 냈다.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우리는 먼저 달마 대사의 본래 모습을 알아야 한다. 달마 대사의 본래 모슴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달마는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없다. 또한 수염도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공'함에 집착하면 부처님 조차도 여러분을 도울 수 없다.
그러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이름과모양을 걷어내려 노력하라.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하는가. 그들의 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이름과 모양의 바른 기능(실용)을 찾는 다면 아마 수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스님들은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하고 물었을 때 제자들이 '무' 하고 대답하면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이름과 모양의 바른 기능을 집어내지 않는다.
옛날 금강산에는 마하연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한 번에 1천여 스님들이 참선수행을 했을 정도로 크고 유명했다.
산 밑에는 유점사라는 아주 유명한 강원이 있었고, 산 중턱쯤에는 유명한 금강산 온천이 있었다.
그 온천의 주인은 아주 신실한 불자여서 스님들에게 온천을 무료로 이용하게 했다.


어느 날 유점사에서 학승들을 가르치는 솔해라는 강사가 온천에 왔다. 그는 당시 아주 유명한 강사였다.
솔해 스님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주인 여자가 공손하게 예를 갖춰 그에게 말했다.


"스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네, 여기 온천물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뜨거운 물에 몸은 깨끗이 씻으셨는데, 마음은 어떻게 씻으셨읍니까?"
그러자 순간 솔해 스님은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을 어떻게 씻었느냐?' 만약 마음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란 것이 과연 있는가?
여러분이 있다고 해도 나는 여러분을 이주장자로

30방 때릴 것이고 없다고 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 역시 아주 공격적인 공안이다. 이것이 혹암 큰스님 질문의 핵심이다.

Saturday, August 11, 2012

3문 암환주인


三門 巖喚主人 서암이 스스로를 주인으로 부르다

서암 큰스님은 날마다 자기에게 "主人公 아!" 하고 부른다음
"예" 하고 대답했다.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려라."
"예."
"어떤 순간, 어떤 장소에서도 남에게 속지 마라."
"예." "예."

질문
1.서암 큰스님의 마음은 두 개이다. 어떤 마음이 참 주인공인가?
종종 아이들이 소꼽놀이나 인형놀이를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너는 나를 좋아하니? 나도 너를 좋아"한다.

인형은 전혀 말을 못하는데도 아이들은 대화하듯 혼자 얘기한다.
이 아이의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서암 큰스님의 마음은 이 어린아이들과 같다.
그는 아주 단순하고 맑은 마음을 가졌다.

내가 묻고, 또 다른 내가 답한다. 진정한 '나'란 누구인가.
우리가 맑은 마음을 가지면 만물이 바로 '나'이다.

하늘도 '나'이고, 나무도 '나'이고 멍멍 짖는 개도 '나'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다. 단지 일종의 설명에 불과하다.
이 설명을 소화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앞에 진리가 아주 맑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 안에 주인공을 자처하는 두 놈이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 진짜 주인공과 가짜 주인공이 있다.
약한마음도 있고 굳센 마음도 있고 삐뜰어진 마음도 있고 바른 마음도 있다.
순수한 마음도 있고 불순한 마음도 있다. 여러분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Friday, August 10, 2012

2 문 조주세발

2 問 조주세발[趙州洗鉢] 발우나 씻고 가거라

한 스님이 조주 큰스님에게 물었다.
"막 절 문에 들어섰읍니다. 부디 가르쳐주십시요."
그러자 조주 큰스님께서 물었다.

"아침은 먹었느냐?"
"네, 먹었읍니다."
"그러면 발우나 씻고 가거라." 순간 젊은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질문
1. 젊은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2. 여러분이 만약 질문을 한 스님이라면 조주 큰스님이 "발우나 씻고 가거라"고 하셨을 때 무엇이라고 했겠는가?

이 공안은 매일 우리가 일상에서 거쳐야할 마음, 즉 평상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공안이다. 평상심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길, 올바른 생활이다. 평상심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길, 올바른 생활이다. 질문을 한 스님이 "발우나 씻고 가거라" 하는 조주 큰스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평상심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공안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조주 큰스님은 때때로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침은 먹었느냐?"고 물으시고는 제자가 "네, 먹었읍니다"고 하면 아침 식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조주 큰스님은 발우를 씻으라고 하셨다. 보통 발우는 공양(식사)을 마치는 즉시 하는 일이다.

조주 큰스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바로 이것이 조주 큰스님의 독특한 방식이다. 그는 제자들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는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제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어떻게 제자들의 마음을 깨울 것인가? 그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조주 큰스님은 항상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시험하셨다. 여러분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조주 큰스님이 발우를 씻으라고 했을 때 어떻게 했을 것인가? 아침 식사는 오래전에 끝났다. 그릇도 이미 깨끗하다. 그러면 가서 다시 그릇을 닦겠느냐. 마음을 맑게하여 그에 맞게 대답해야 한다. 초심자는 '그릇을 닦겠다'는 종류의 간단한 대답도 가능하다.

하지만 수행을 한 사람이라면 조주 큰스님의 등을 내리쳐야 한다.(하하하) 선은 순간순간 직관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상황, 관계, 실천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 훌륭한 선서들로부터 나오는 어떤 종류의 '말'도 중요하지 않다. 순간순간 그것을 바르게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혜이다.

첫째 질문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一 問 조주[趙州]의 개[狗]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조주 선사께서 어떤 스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읍니까, 없읍니까?[狗子還有佛性也無]"

조주 큰스님은 "무[無]"라고 말했다.

질문

1. 부처님은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조주 대선사는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하셨다. 어느것이 옳은가?

2. 조주 대선사께서 '무[無]"라고 말한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그러면 내가 여러분에게 묻겠디.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이것은 아주 유명한 '무'자공안이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태양, 달, 별, 산, 너, 나, 우리 모두 똑같은 실체라고 했으며, 너의 본성, 나의 본성, 개의 본성이 모두 하나라고 했다. 불성을 일컫는 이름이 '실체'이다 만물이 비록 제각각 이름과 모양이 다르다 할지라도 우주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조주 대선사님은 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원래 모든것은 공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부처님도 불성이 없는가? 부처님도 공하기 때문에? 이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만물의 본성을 굳이 표현하고 싶으면 어떤 구체적인 표현을 하는것이 중요하다.

예를들어 여기 시계가 있다. 내가 이렇게 묻겠다. 이 시계에는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크다' '무겁다' 도금이 되었다' 등등으로 대답 한다면 충분하지않다.
뭐, 한 면만 본다면 그런대답이 어떤 설명이 될수는 있겠다. 그러나 한쪽 면에서먼 사실이라면 그것은 완벽한 대답이 아니다. 또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라고 대답 할 수도 있다. 유효한 진리를 얘기한 것이지만 그것도 충분하지않다. 그런 대답은 형이상학적인 대답이다.

그렇다면 이 시계의 본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은 낮 1시다. 시계와 관련한 바른 실천은 무엇인가.이 시계의 바른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기계라는 것이다. 모든 공안이 그와같다. 아주 쉽다.

참선은 이처럼 우리가 바로 이 순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조주스님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신 것은 어쩌면 틀린말일 것이다. 하지만 선사들은 참선이모든 생각에 대한집착을 끊는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종종 제자들에게 틀린 말을 하기도 한다. 말과 단어에 대한 의존을 끊는 것이다. 맞다, 틀리다에 집착ㅎ하지 않고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은 언제나 바뀐다. 선과 악에 대한 모든 생각은 (그전엔는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것도) 완전히 다른 생각으로 바뀐다. 옳고 그름도 마찬가지이다.

조주 큰스님의 무'자 공안도 이와 비슷하다. 조주 큰스님에게 질문을 했던 스님은 개가 정말 불성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언지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만물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개에게도 있을까? 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 스님은 머릿속으로 아주 많은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어떻게 이 스님의 생각을 끊게 할 수 있을까. 조주 큰스님은 이런 상황에서 '틀린' 대답을 함으로서 그 스님의 생각을 끊으려 한 것이다. 이것이 '무'자 공안의 핵심이다. 조주 큰스님은 맞다. 틀리다는 개념적인 답이 아니라 제자의 마음속에 똑바로 들어가서 제자에게 큰 의문을 안겨준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후 조주스님이 본래 가르치고자 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오직 참선할 때 '무'자 화두를 사용하는 수행법이 등장했다. 이는 조주 큰스님이 내민 약에 집착하는 경우이다. 특히 일본불교에서 많은 사람들은 제자들에게 이 '무'를 강하게 잡아서 '삼매'에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수행자는 소리를 지른다. "무------" 그러면 스승ㅇ은 이렇게 말한다. "더 강하게" 학생이 "무우우------"하면 스승은 만족해 한다.

이것은 옳은 수행이 아니다. 진정한 삼매도 아니다. 선은 순간순간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無] 삼매는 마음속 만물이 단지 무가 되는 것이다. 붉은 것이 와도 '무' 이고, 흰것이 와도 '무'이다. 오직 '무'이다. 이것은 집착이다. 배고픈 사람이 와도 '무'이고, 목마른 사람이 와도 '무'이다. 이것은 집착이다. 아주 나쁜 선병이다. 실제로 참선수행은 삼매와 관련이 없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선은 언제나 맑은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심리치료와 참선 수행을 연결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선이나 명상을 하면 편안한 느낌을 갖기 때문이다. 순간적이라 할 지라도 괴로움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편과 같다. 수행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일상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려 하지않고 다만 참선만 하려한다. 그러면 수행과 삶은 분리된다. 참선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서쪽으로 가고 싶은데, 동쪽으로 가는 셈이다. 선은 특별한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평상심, 이것이 진정한 선의 마음이다. 단지 '무'의 삼매 수행에만 집착하다면 중생이 가지고있 는 각각의 요구, 각자의 다른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줄 수가 없다. 단지 '무'만을 볼 뿐이다.

이 공안에서 첫 번째 질문은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주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했다. 어느것이 옳은가?" 였다.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있는가,없는가? 있는가 , 없는가? 이것은 오직 생각이다. 불성이 있든 없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조주 스님은 '없다'라고 대답함으로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생각을 놓아버리고 말과 단어에 집착하지 말라. 그것이 이 첫 번째 질문의 핵심이다.

두 번째 질문 "조주 큰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무'라고 하셨다. 이것은 무슨뜻인가? 질문도 마음속에 완벽히 생각을 끊으면 명확해진다. '무[無]'란 특별한 의미가 아니다. 어떤사람들은 '무'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지만 본래 특별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만공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조주의 '무'자 공안에서 '무'란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만공은 "절 앞 밭을 보아라. 거기에(먹는)무가 많을 것이다."라고 했다. 바로 지금 이순간, 것이 진리이다.

세 번째 질문인 "그러면 내가 너에게 묻겠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가 묻는 의미도 아주 명쾌하다. 실체와 진리를 깨달아 바른 실천을 하는것, 그것이 조주 큰스님의 '무'자 공안이다.

Tuesday, August 7, 2012

10개의 공안

10개의 공안

임제종은 1백칙 공안을 뽑아 '벽암록[碧巖錄]'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조중동은 이른바 '종용록[宗容錄]'이라 불리는 1백칙을 사용한다. 조중동의 공안 모음집이 단순한 것임에 반해, 임제종의 그것은 아주 복잡한 공안 모음집이다.

이중에 48개 공안을 선택해서 엮은 것이 '무문관[無門關]'이다. 때때로 '문 없는 문' 혹은 '문없는 길목'이라 번역된다. 한국불교의 조계종은 1천 7백 개의 중요한 공안 모음집을 발전시켰고, 우리 관음선종에서 추린 10개의 공안을 통과하면 주요 공안들을 거치는 셈이된다.

물론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그이상 공부를 하지만 10개의 문을 통과하면 모든 공안수행의 본질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공안이 무엇인지 알면 바른 수행이 무엇인지도 알게된다. 하지만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않다. 개념적인 이해만가지고서는 공안의 참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공안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안들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종종있다. 또 공안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수행을 열심히 하지않는 사람들이 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점검해서 공안의 의미를 소화하지 못한다면 이 공안은 단지 마른 지식일 뿐이다. 공안은 수행에 방향을 제시한다. 그 방향이 바로 '오직 모를 뿐' 이다. 공안에 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완벽하게 행할 때 비로소 공안의 지혜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 남쪽으로 10리 가량 가면 독수리 머리모양의 봉우리를 가진 큰 산이나온다. 더 올라가면 개울이 흐르는 계곡이 나온다. 여기서 10리를 더가면 동굴이 나오는데, 그 동굴에 금주전자가 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금주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선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말을 잘 이해한다 해도 스스로 걸어가지 않으면 결코 금주전자를 얻을 수 없다. '돈'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아는것과 실제 내 주머니에 갖고 있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말이다.

공안도 마찬가지다. 잔지 공안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공안 인터뷰를 할 때에는 좋은 대답을 하지만 막상 일상생활에서는 그렇게 살지못하는 경우가 많다. 공안을 '이해'하는것은 좋지않다. 답이 옳읁지, 틀린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이 맑고 순간순간 바르면 공안의 답은 큰 문제가 아니다. 수행과 일상은 하나이다.

우리 관음선종에서 제시하는 공안 수행의 핵심은 '오직 모를 뿐' 과 일상생활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참선을 통해 어떻게 순간순간 중생을 도우며 살까 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매우 빨리 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엤날처럼 '화두'만 잡고 있거나 시적인 주석에만 몰두하기 힘들다. '무' 자 화두를 들고 길을 걸을 때나 잠잘 때나 24 시간 내내 한 생각만 하고 있다면 아마 차에 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안 수행이 필요하다. 옛 스승들의 지혜를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수행함으로서 순간순간 변화하는 삶 속에 선의 올바른 실천을 위해 공안을 사용하는것이다. 순간순간 따지는 마음없이 오직 다른사람들을 돕기위해 공안을 사용하는것이다.

공안에서 제시하는 질문들은 우리 삶의 기본방향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본래 마음의 지혜를 바로 지금 어떻게 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부를 열심히하면 마음이 항상 맑게 유지되며, 매 상황마다 모든 중생을 도울 수 있다.

오직 모를 뿐 으로 정진하라

'오직 모를 뿐'으로 정진하라.

이 책에는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등의 아주 많은 가르침들이 있으며, 기독교나 카톨릭에 관련된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말과 단어는 단지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이 고통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을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한다.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오직 모를 뿐'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동양도, 서양도, 한국도, 일본도, 미국도 없다. '오직 모를 뿐'은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고, 참선도, 그 어느것도 아니다. 미국인 제자 한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만물이 하나라고 하셨는데, 왜 소승이니, 대승이니, 참선이니 하는것을 구분하십니까?
나는 아렇게 대답했다.

"나는 소승이니, 대승이니, 참선이니 하는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불교조차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모를 뿐'을 기르칠 뿐이다. 알겠느냐?"

언제 어디서나 오직 모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소승이니, 대승이니, 참선이니 하는것에 얽매이지 말라. 뼈대는 오직하나. 어떻게 지금 이 순간 중생의 잠을 깨워 이 세상을 도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이용해 모든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면된다. 참선수행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적과 축복과 행복을 보장해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물론 때때로 이런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내면 속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태어날 때 나는 어디서 왔으며 죽을 때 나는 어디로 가느냐이다.

삶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이 물음은 제쳐두고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욕심, 분노, 무지를 좇는 데 사용한다. 결국에는 변할 것, 무상할 것들을 좇으며 산다. 감정과 고통에 집착하고, 어떨 때는 고통을 즐기기까지 한다.
인간은 영리한 동물이면서도 그들의 전 삶은 고통의 바다를 떠다닌다.

우리의 업을 지배하지 못하면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죽을 때(몸이 사라질 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죽는순간 당신의 업은 당신을 어딘가로 끌고 갈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아마 십중팔구 다시 고통의 바다에 태어날 것이다. 모든 생각을 끊으면 '참나'로 돌아갈 수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으로 정진하라.

Thursday, August 2, 2012

있는 그대로 부처다

있는 그대로 부처다• 卽如如佛 Just-like -This is Buddha
靈光獨曜 逈 脫根塵 신령스런 빛 홀로 빛나 육근 육진을 멀리 벗어났네.
The sprit remains clear and bright. The six roots(senses) and six dusts(perceptions)fall away.
休露眞常 不拘文字 진여의 항상한 본체 드러나 문자에 구애받지 않네.
The original body remains clear constantly. Speech and words cannot hinder it.
眞性無染 本自圓成 마음의 성품에 물듦이 없으니 본래 스스로 원만한 이룸이다.
True Nature has no taint, and is already a perfect sphere.
但難妄緣 卽如如佛 허망한 생각 여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부처라네.
Not attached to any thinking, just-like-this is Buddha.
四大各難如夢中 지수화풍 4대가 각기 꿈 가운데 흩어지고
The four elelments(earth, fire, water, air) disperse as in a dream.
六塵心識本來空 육근 육진 심식이 모두 공하도다.
The six dusts(perceptions), roots(senses), and consciousness are originally empty.
慾識佛祖廽先處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달은 곳을 알고자 하는가 ?
Do you want to understand the Buddha and the eminent teachers?
日落西山月出東 서산에 해가 떨어지면 동산에 달이 솟는다.
The sun sets over the western mountains. The moon rises in the east.
오래전 중국에 '신찬[神讚]'이란 스님이 한 분 살았다. 그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서 어려운 실험을 모두 통과했다. 은사스님이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은사스님은 참선 수행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신찬에게 경전만 가르쳤고, 나중에 훌륭한 학승이되어 그이 맥을 이어가기을 바랐다.
그러나 신찬은 경정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의문이 생겼다.
어느 날 은사스님은 뛰어난 제자 세명을 뽑아 3년동안 장학금을 주기로 했다. 그 돈으로 중국어디서나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무엇이든 공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찬도 그중 하나로 뽑혔다. 은사스님이 제자 세 명을 불러모았다. 그들 각자에게 앞으로 3년동안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물었다.
첫 번째 스님은 유교를 공부하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 스님은 도교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내 신찬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네가 이미 경전에 도통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나 신찬은 단호했다.
"죄송합니다. 3년동안 좀 쉬었으면 좋겠읍니다."
스승은 약간 서운했지만 승낙했다. 신찬은 곧바로 길을 떠나 참선을 가르치는 절로가서 아주 열심히 수행했다. 그는 오직 100퍼센트 '모르는 마음'을 간직하며 3년 정진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그곳에 그대로 머물까도 생각했지만 어릴 때 부터 항상 그를 돌봐주어 왔던 은사스님에 대한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신찬을 비롯한 제자 세 명이 모두 3년 뒤 약속한 날짜에 모였디. 은사스님은 제자들을 하나씩 불러 그동안 공부한 것을 물었다.
"그래, 유교를 공부하여 무엇을 배웠느냐?"
"언제나 다른사람과 좋은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을 배웠읍니다. 부모와 스승을 공경하라는 것도 배웠읍니다."
"훌륭하다."
"그래 신찬은 지난 3년간 무엇을 배웠느냐?"
" 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읍니다."
"아니, 저 두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너는 배운 게 없다고?"
"피곤할 때 잠자고 배고풀 때 먹었읍니다."
엉뚱한 대답에 은사스님은 화를 냈다.
"이 발칙한 놈 같으니. 저 두사람은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스승이 될 터인데, 너는 시간만 낭비하고 돌아왔다는 말이냐. 너는 내일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심부른이나 하거라."
스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신찬을 마음속 깊이 아꼈기에 내칠 수가 없었다. 신찬은 매일 스승의 방을 청소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옷을 빨았다. 어느 날 은사스님이 목욕을 하면서 신찬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신찬은 그의 등을 밀면서 온잣말을 했다.
"법당은 훌륭한데 영험이 없구나 [好所佛堂 而佛不聖]"
은사스님이 무슨 말인지 몰라 천천히 얼굴을 돌려 신찬을 바라보자 신찬은 계속해서 말했다.
"부처는 비록 영험이 없지만, 능히 放光을 하는구나."
이말을 들은 은사스님은 겉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속으로는 충격을 받고 신찬이 보통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녀석이 뭔가 바뀌어 돌아왔구나.'
며칠후 어느 날, 은사스님은 방에서 열심히 경전을 일고있었다. 신찬은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룻바닥을 조용히 닦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지기 벌 한 마리가 방 옆 창호지에 달라붙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옆문이 열려 있었는데도 나갈곳을 찾기위해 아둥바둥거리고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보고있던 신찬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세계는 광대하고 넓은데 어찌하여 낡은 창호지만 뚫고 있는냐." 그리고 신찬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열린 문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空門不背出]
창을 뚫고 있으니 어리석구나[投窓也太癡]
백년을 낡은 종이 뚫어보아야[百年鑽故紙]
언제나 깨칠 날을 기약하리오[何日出痘時]
은사스님은 신찬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신찬의 눈을 꿇어져라 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은사스님은 잠시 후 이렇게 물었다.
"네가 바깥에서 행각하며 누구를 만났고 어떤것을 배웠기에 그런 말을 하느냐?"
신찬이 말했다.
"저는 이곳을 떠나 백장[白丈] 큰 스님께 갔읍니다. 그리고 백장 스님의 가르침을 입어 얻은 바가 있읍니다만, 은사스님께서 연로하신것을 생각하고 일부러 돌아와 지비은덕을 갚고자 한것 뿐입니다. 스승님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조잡한 언어로 시를 지어보았읍니다. 용서하십시요."
은사스님은 잠시 침묵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다. 너는 나의 제자였지만 이제 네가 나를 가르치는구나. 너의 깨달음을 나에게도 전해다오."
은사스님은 북을 울려 모든 스님들을 법당 안으로 모이게 한 뒤 신찬에게 설법을 청했다. 신찬은 법좌에 올라서 이렇게 말했다.
신령스런 빛 홀로 빛나 (靈光獨輝)
육근 육진을 멀리 벗어났네 (迥脫根塵)
진여의 항상한 본제 드러나 (體露眞常)
문자에 구애받지 않네 (不拘文字)
마음의 성품이 물듦이 없으니 (心性無染)
본래 스스로 원만한 이룸이다 (本自圓成)
허망한 생각 여의기만 하면 (但難妄緣)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부처라네 (卽如如佛)
지수화풍 4대가 각기 꿈 가운데 흩어지고 (四大各難如夢中)
욱근 육진 심식이 모두 공하도다 (六塵心識本來空)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달은 곳을 알고자 하는가? (慾識佛祖廻先處)
서산에 해가 떨어지면 동산에 달이 솟는다 (日落西山月出東)
신창의 시를 찬 줄 한 줄 보자.
'신령스런 빛 홀로 빛나 육근 육진을 멀리 벗어났네.'
이 문장은 본성과 공을 설명하고 있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엊ㅄ고 마음도 없다.
'진여의 항상한 본체 드러나 문자에 구애받지 않네.'
경전의 공부와 학문적 사고의 틀을 깨도 있다.
'마음의 성품에 물듦이 없으니 본래 스스로 원만한 이룸이다.'
본성이 맑으며 이미 완전한 원[圓]이다. 우리 본성은 그대로 완전하다 . 따라서 원죄란 없다.
우주처럼 시작도 , 끝도 없다. 그래서 그다음 문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허망한 생각 여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부처'다.
다음 문장은 '지수화풍 4대가 각기 꿈 가운데 흩어지고' 이다.
이는 소승불교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고통의 세계, 아니 사실은 고통으로 가득한 꿈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공함, 열반을 얻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육근 육진 심식이 모두 공하도다.'
모든것은 오로지 우리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섯 가지 먼지(인식작용). 여섯가지 뿌리(감각). 그리고 여섯가지 의식은 본래 공하다.
이 문장은 대승불교 가르침의 벼대를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과 조시들이 깨달은 곳을 알고자 하는가?
미지막 문장은 이에대한 답이다. 다름 이닌 완벽한 있는 그대로의 진리(Just like-this Buddha ) 를 표현하고 있다.
'선산에 해가 떨어지면 동산에 달이 솟는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 이다. 여여[如如]하다. 구것이 전부이다. 마음이 공하면 맑은 거울과 같다. 태양이면 태양, 달이면 달, 있는 그대로 비춘다. 그때 우리는 순간의 세계(moment-world)를 얻는다. 그것이 단지 진리이다. 비추는 것이다. 이것ㅇ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본성이란 바로 불성이다. 그것은 본래 이름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든 말로 표현할력고 하니까 '불성' ,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는 미국 가톨릭 겟세마네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게 참선 지도를 할 때마다 한 번도 '부처'라거나 '불성'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대신 '신성(神聖)' 으로 바꿔 불렀다. 수도사들은 아주 행복해했고 우리 모두는 완전히 서로를 공유할 수 있었다. 어떻게 부르든 말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탕!"
은사스님은 신찬의 말에 즉각 깨닫고 말하기를 "다 늙어서야 궁극의 일을 듣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何期垂老 得聞極則事)"하였다.
이리하여 절의 소임을 신찬에게 맡기고 도리어 신찬스님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Sunday, July 29, 2012

본래얼굴

본래얼굴 Original Face

山堂靜夜坐無言 고요한 밤 말없이 절집에 앉아 있으니,
Sitting in silence in a mountain temple in the quiet night,

寂寂寥寥本自然 한없이 적막하고 고요하여 본래 성품 그대로이다.
Extreme quiet and stillness are our original nature.

何事西風動林野 무슨일로 서풍에 숲이 움직이는가 ?
Why then does the western wind shake the forest ?

一聲寒雁唳長天 겨울 하늘 기러기 소리 장천을 울린다.
A single cry of cold-weather geese fills the sky.

이것은 전향적인 선시의 아주좋은 예이다. 진정한 선시는 장식적인 스타일의 시가 아니다. 예술적인 어떤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선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표현하는 말과 단어를 사용하며, 오직 가르침에 사용될 뿐이다.

사람이 날때 나서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을 때 죽어 삶을 욕되게 하지않기도 어렵다. 삶과 죽음의 가림길에 서 있는 인생이 만일 이것을 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어 다시 살지 못할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선사는 절에 살면서 밤을 맞이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절 집은 고요한데, 오가는 손님하나 없는 절에 고요히 앉아 있는 스님의 마음이야 오죽이나 적적하겠는가? 그 적요는 만들어서 지어진 寂寥가 아니라 본래의 자연 그대로 였다. 누구나 본래의 순수한 마음은 파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람이 왜 불어 정적을 뒤흔드는가? 어디서 바람이 오는가? 왜 나타나는가?
대아를 얻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우주와 같이 맑다. 모든것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 하늘을 나는 새소리, 날개치는 소리, 기러기가 구구구 우는 소리, 그것이 본성이다. 단지 듣는 것. 보는 것이 불성이다. 진리이다. 만물이 완벽하다.

이것이 선시가 언제나 가르치는 것이다. 수많은 문장들이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언제나 같다. 첫 문장은 어떤 반대의 관점이나 생각을 표현한다. 다음문장은 큰 의문을 준다. 혹은 때때로 어떤 정적의 지점을 표현한다. 세 번째 문장은 신비의 관점을 표현한다. 그러나 진리는 마지막 문장에 담겨 있다. 있는 그대로의 영역으로 돌아가게 한다.

어느 것이 생사를 벗어난 것인가

어느 것이 생사를 벗어난 것인가 如何是 能死能活 之 一句麽
Which of the Following Four Sentences is Freedom from Life and Death?

海底泥牛 啣月走 바다 속 진흙 소가 달을 물고 가고
Under the sea, the mud cow eats the moon.
岩前石虎抱兒眠 바위 옆 돌 호랑이가 애기를 안고 잔다.
In front of the cliff, the stone tiger sleeps, holding a baby in his arms.

鐵蛇鑽入金剛眼 철 뱀이 금강의 눈을 뚫는데,
The steel snake drills into the eys of a diamond.
崐崙騎象 鷺鷺牽 코낄리 등에 탄 곤륜산을 백로가 끌고간다.
Mount Kun-Lun rides on the back of an elelphant pulled by a littles bird.

도솔 스님은 다시 앞서 적은 네 구를 놓고 여기서 어떤 글귀가 산 것인고 어떤 글귀가 죽은 것이지 가려내라고 하였다.

중국에는 주로 산에 살면서 어떤 특별한 수행을 통해 특별한 에너지를 얻는 많은 도교와 유교 선사들이 있다. 그들은 하늘을 날고 호랑이로 변할 수도 있다. 연기도 만들 수 있다. 소위 마술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우주 에너지와 당신의 에너지가 하나가 된다. 소위 말하는 기(氣)라는 것이다.

매일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공기를 마신다. 당신의 에너지를 호흡에 집중하면(공기) 우주 에너지와 하나가 되고(啣氣) 당신은 대기, 즉 큰 에너지를 얻는다. 이 에너지만 있으면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몸을 바꿀 수도 있고 날아다닐 수고 있다. 기적과 신비를 행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나, 나의, 나를(I, MY, ME)' 이라는 이 '나'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다. '나'라는 것을 가지고 수행하면 큰 에너지, 우주에너지, 장신 자신의 에너지가 하나가 될 수 없다. 신비와 완벽히 자유로운 나의 영역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앞의 네 문장은 모두 그영역에 관한 것으로, 젠 서클의 270도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각 문장은 당신이 실제로 이 절대 존재의 영역을 깨닫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함啣의를 가지고 있다. '바다 속, 진흙 소가 달을 몰고 간다.'

아주 이상한 말이다. 어떻게 진흙 소가 달을 몰고 간다는 말인가. 아이들 만화에는 동물이 얘기하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아이들은 이런 만화를 보고 좋아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우리 마음은 고정되어서 정해진 이름과 모양에 대해 강하게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270도의 영역에서는 이름과 모양에 자유롭다. 그것이 자유의 생각이다.

'바위 옆 돌 호랑이가 얘기를 안고 잔다.'
돌 호랑이가 얘기를 안고 잔다니, 이것은 무슨 말인가.
'철 뱀이 금강의 눈을 뚫는다.'
다이야몬드는 철보다 강하다. 이것은 말이 되는가.
'코끼리 등에 탄 곤륜산을 백로가 끌고 간다.'

곤륜산은 중국에서 가장 큰 산이다. 이 거대한 산이 코끼리 등을 타고있다. 또 백로가 끌고 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열심히 참선수행을 하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Thursday, July 26, 2012

어느 곳으로 가는가

어느 곳으로 가는가

어느 곳으로 가는가• 去甚麽 Where are you going?

古佛也 伊麽去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ancient buddhas went like this.
今佛也 伊麽去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가고 Present buddhas go like this.
汝亦是 伊麽去 당신도 이렇게 가고 You go like this.

我亦是 伊麽去 나 또한 이렇게 갈것이니 I also go like this.
何物不敢壞 어떤 물건이 부서지지 않는가? Wha is the thing that is not broken?
是誰長堅固 누가 길이 견고할 자인가? Who is it that is eternally indestructible?

諸人還知麽 그대들은 아는가? Do you understand?
( 打 住杖 云) 스님은 주장자를 한 번 치고 말했다. (The Zen stick held overhead, and hit on the ground.)
輿三世諸佛 一時成道 과거, 현재, 미래 삼세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성불하고
In the three worlds, all buddhas of pst, present, and future simultaneously attain enlightenment.

共十類群生 同日涅槃 10류 군생이 같은 날에 열반에 들었다. On the ten levels, all beings on the same day into nirvana.
其或未然 着目下句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음 글에 주목하라. If you don't understand this, check the following.
有眼石人 齊下淚 "눈 가진 돌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The statue has eyes and tears silently drip down.

無言童子 暗噓噓 말 없는 동자는 어둠 속에서 코만 훌쩍거린다.

여러분과 나는 겉모양은 다르지만 실제는 똑같다 그것은 바로 우주적 실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미 그것에 대해 얘기했다. "탕!" 그것이 나의실체이고, 당신의 실체이고, 모둔것의 실체이다. "탕!" 보살의 실체이고 , 동물위 실체이며, 차의 실체, 바위의 실체, 물의 실체이다. 그것은 또한 신의 실체이며, 악마의 실체이다. "탕!"
'어떤 물건이 부서지지 않는가?'

시간과 공간은 이 세상의 모든것을 지배한다. 만물은 모양과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변하고 변한다. 하늘, 땅, 나무, 산, 강, 인간, 동물, 차, 모두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 나타나고 사라진다. 어떤 것들은 아주 빨리, 어떤 것들은 아주 오랜 억겁의 시간이 걸릴 뿐이다. 하루만 살다가 죽는 곤충들도 있으며. 수천 년 동안 지각 변동을하며 모양을 바꾸는 대륙도 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나타났다가 잠시동안 머물고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 그것들모두는 모양과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구조차 종국에는 사라질 것이고 태양에 의해 불태워질 것이다.
"마음이 생기면 법이 나타난다. 법이 나타나면 이름, 모양, 가고 옴,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모든것이 나타난다. 하지만 마음이 사라지면 법도 사라진다. 법이 사라지면 이름과 모양, 가고 옴,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탕!" 결코 나타나거나 사라지지않고 깨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당신의 실체이며 만물의 실체이다. 그것을 찾고 깨달을 때 참 자유를 얻는다.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일시에 생불한다."
만물이 동시에 부처가된다. "탕!" 실제로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은 단지 생각에서 온다. 과거가 어디 있는가. 당신은 그것을 어디에 보관해놓고 있는가. 있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과거는 단지 꿈이다.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있다고 한다면 나에게 보여달라. 그런데도 우리는 과거, 미래가 마치 실제로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과거에 일어났던일,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분노하고 걱정하고 행복해하고 슬퍼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생각이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도 현재만큼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있다. 그러나 당신이 '현재'라고 말하는 지금 이 순간도 엄밀히 따져보면 이미 지난 시간이다.

과거란 말이다. 현재는 없다. 우리 생각이 현재를 만들고 과거와 미래를 만들 뿐이다.
생각을 하면 시간과 공간이 생기고 시간은 언제나 끊임없이 흘러간다. 하지만 이 시간이란 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단지 생각에서 나온다. 시간은 우리 지신의 생각하는 마음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이 순간만 갖는다. 우리 삶은 순간순간 일어난다. 이 순간은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공간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없음을 말하는 또 다른 길이다.

"삼세 부처님들이 일시에 성불한다." 는 말은 그대가 성불하면 삼세제불이 언제나 성불속에 살고 있는것을 볼 것이라는 말도 되지만 이미 시간 이전에 그들은 성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것이 순간의 마음이다. "탕!"순간에 과거 , 현재, 미래가 있다. 거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뒤집어 말하면 무한대의 시간과 무한대의 공간이 있다는 얘기이다. 순간에 모든것이 있다. 민약 당신이 이 순간을 깨달으면 당신은 모든것을 깨닫는다. 당신이 순간이고 순간이 당신이다.
앞서 소개한 시의 다음문장을 보자. 아주 재미있다.

"10류 군생이 같은 날에 열반에 들었다."
10류 군생이란 부처에서부터 보살, 아라한, 성문, 천국, 아수라, 인간, 동물, 아귀, 지옥이다.
10류 군생은 모든 사람의 마음안에 다 있다. 보살부터 지옥까지 다 우리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당신은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동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길을 걸어보라. 그러면서 지나치는 얼굴들을 보아라.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얼굴을 갖고 있는것 같지만 사실은 의식 밑바닥에 동물의 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망음이 맑으면 쉽게 그것을 알 수 있다. 이건 단지 비유가 아니다. 바깥형태는 인간일지 모르지만 안의 의식은 동물에의해 지배된다. 아마 그들의 20%는 인간이고 80%는 개나 뱀 혹은 사자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강한 '지옥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이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 경험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 예를 들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ㅇ은 또 '보살 의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얼마나 부처의 마음을 갖지고 있고 지옥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99%가 '뭔가 원하는 마음' 을 가지고 있고, 단지 1%만이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마음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 부처의 마음, 보살의 마음, 아라한의 마음, 인간의 마음, 동물의 마음, 혹은 지옥의 마음----- 이것이 바로 지금 당신의 삶, 이 순간 당신의 삶을 만들고 다음 생도 만든다. 10류 군생은 우리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서 맑음 마음을 갖게 된다면 10류 군생의 모든존재가 동시에 열반에 들어간다. 부처, 지옥, 보살, 아귀, 인간, 모든 동물들도 동시에 열반에 들어간다. 시간과 공간은 사라진다. 전우주는 하나가 된다. 우리는 순간의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모양과 이름, 시간과 공간, 원인과 결과, 모든 것이 하나가된다. "탕!"" 아주 단순 명확 하다.

시간과 공간이 완벽히 공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당신은 지금 이순간의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로 되돌아가얌만 한다.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것은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위해 대지대비심을 쓰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선원[禪圓]을 설명하면서 270도의 영역에대해 얘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앞에 보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염불기도를 하고 있는데 관세음보살님을 보았어. 관세음보살님이 나에게 이러이러한 것을 하라고 하셨어."
이런 경험은 270도 영역이다. 만약 당신이 관세음보살님을 믿는다면 관세음보살님이 당신앞에 나타날 것이다. '나는 관세음보살님의 도움이 필요해. 관세음보살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면서 열심히 절하고 염불을 외면 아마 많은 관세음보살님을 볼지도 모른다.

이것은 불교 신자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예수나 마리아를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주 많다. 예수 상이 피를 흘리고 계셨다느니, 마리아가 울고 있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실제 확인하기 위해 멀리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실제 병을 고쳤다며 자랑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마리아가 보고 싶어'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강한 신념이 생겨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기적을 보고 싶어.' '예수님이 내 병을 고쳐주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강열한 의식이 어떤 경험을 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비한 생각의 영역이고 완벽한 자유생각의 영역이다.

"불상이 눔물을 흘린다." 이 문장은 그러한 경험의 영역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한것이 아니다. 단지 기술이다. 이런 기술에 집착하면 그것은 업, 의 악마가 된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 순간의 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삶을 바로 만들기 위해 이 순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갔고 지금 부처님도 이렇게 가고 당신도 이렇게 가고 나도 또한 이렇게 갈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 나와 너가 있는 영역은 젠 서클(Zen circle)의 90도로 표현한다. 다음, "영원히 사라지지않는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이 주장자로 책상을 "탕!"치면 이 지점은 모양도, 이름도 없어서 만믈이 실체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것은 젠 서클 180도를 대표 한다.

"삼세 부처님들이 동시에 깨달음을 얻는다. 10류 군생의 모든 중생이 같은 날에 열반에 든다"는 점을 깨달으면 이름과 모양이 사라진다. 과거, 현재, 미래 불이 동시에 깨닫는다는 것은 시간의 영역을 의미한다. 10류 군생의 모든중생은 각기 다른 공간의 영역을 말한다. 0도에서부터 180도에는 사간과 공간이 있다. 하짐만 180도를 넘으면 실제로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된다. 그것이 절대의 세계이다.

그다음이 270도의 세계이다. 신비하고 기적의 영역인 270도의 세계이다. 어떻게 이 순간의 마음을 쓸 것인가. 배고픈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느냐. 마음이 맑다면 순간순간 다른 사람을 돕는 것으로 그 마음을 쓸 일이다. 그것이 큰 사람, 큰 자비이며 대보살행이다. 깨달음의 일이다.
"소년이 어둠 속에서 코를 훌쩍거린다."
우리가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누군가 고통받고 있다고 듣게되면 우리의 자비심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돕고 싶은 사람과 연결된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0도에서 시작해 90도를 지나 180도 가 된다. 180도네서는 말도 없고 단어도 없다. 업을 여는 것조차 실수이다. 그러고 난 뒤 우리는 270도로 간다. 어떤종류의 말이 나타난다.

"눈을가진 돌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 같은 것 말이다.
수행을 통해 이런경험을 소화한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된다. 그단계가 바로 360도 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영역이다. 똑같이 0도 이다. 이 점에서 비로소 젠 서클의 모든 각도가 사라지고 원이 사라진다. 원은 단지 하늘이고 아무가 아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눈이 예리한 스승이라면 더 나아가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러면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개는 짖는다. 설탕은 달다. 볼 때, 들을 때, 냄새맡을 때, 맛 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이 점에서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안과 밖이 없다. 모든것이 완벽히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당신의 모든 행동은 단지 다른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대보살행이다.

Monday, July 23, 2012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하는 마음은 참 나를 찾고 싶은 마음이다.'내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미음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우리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부처님과 위대한 조사들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념적으로 이런 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 마음, 마음,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 마음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얼만나 큰가? 무슨 색인가? 딱딱한가, 부드러운가? 둥근 것이ㅣ가. 네모난 것인가? 우리는 단지 '마음'이라는 단어만 이해한다. 그러나 철학 책이 수만 권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확실히 모른다. 내 팔 안에? 내 위장 안에? 도대체 마음은 어디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머물게 만들고 어디로 가는가? 미음이란 것이 도대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무엇이 마음인가?

이런 질문을 절실하게 한다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오직 모를 뿐' 이다.
한반 테스트 해보자 . '마음이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내가 들고 잇는 주장자와 당신의 마음이 다른가, 같은가? "같다"고 말하면 나는 여러분을 이 주장자로 30방을 치겠다. 다륻다고 말해도30방을 치겠다. 이 주장자, 이 마음이란 단지 빈 이름일 뿐이다. 이 이름들은 본성이 없다. 당신이 참나를 모르면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름과 모양이라는 이 지엽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머리가 좋은 동물이다. 하늘이 푸르고 나무가 초록색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강이고 저것은 산이라는 것도 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이해란 단지 다른사람, 즉 누군가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진짜 생각이 아니다.

"하늘은 푸르다"라고 말하지만 결코 하늘 스스로 "나는 푸르다"고 얘기한 적이없다. 나무역시 "나는 초록색이다"고 말한적이 없다. 개, 고양이 역시 '나는 개다. 고양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인간이 이 모든 이름과 모양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것에 집착한다.

예를 들면 개가 짖는것을 한국에서는 '왕왕'. 중국에서는 '워워'. 미국에서는 '우프우프'라고 표현한다. 어느 것이 맛는가? 왕왕도 아니요,워워도 아니요, 우프우프도 아니요, 하우하우도 아니다. 인간들이 각자 다른 소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개의 모습니다. 어떤 개도 이것들을 말한적이 없다. 사실 개는 결코 자신을 '개'라고 한 적이 없다. 개한테 가서 물어봐라. "너 정말 개냐?" 아마 개는 당신한테 좋은 대답을 줄 것이다.
이름과 모양이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늘'도 만들고 '푸르다'도 만들고 '나무'도 만들고 '초록색'도 만들고 '개'도 만든다. 우리는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Sky is blue"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소라와 아오이데스"라고 한다. 모두 다른 소리를 낸다.

그러므로 이름과 모양은 진리가 아니다. 실제로 없는, 가짜 생각이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싶으면 원점으로 돌아와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만물이 우주처럼 맑은 지점을 의미한다. 미음이 우주처럼 맑으면 우주는 완벽히 하나가 된다. 분리도, 생각도, 주체도, 객체도 없다. 눈이 천천히 열리고, 귀가 천천히 열리고 ,코가 열리고, 혀가 열리고, 몸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맑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맑다. 그러면 하늘과 하나가 된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와 하나가 된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개와 하나가 된다. '멍멍' 설탕과 하나가 된다. '달다' 그것을 표현하는 이름이 바로 진리이다. 아주 단순하다. 진리란 무든것이 너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늬 수행은 진실로 우리의 본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의 옳은 방향, 진리, 바른 삶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본래 생각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 안에 있다.

그러므로 부처의 모든 영역을 이해하고 싶으면 '무엇이 부처인가?' 하는 큰 의심을 가져 먼저 당신의 마음이 우주처럼 맑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는 생각도 없고 욕심도 없다. 여기서부터 당신의 마음은 단지 우주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아무런 장애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ㅈ종종 근본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떻게 원점(primary point)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 자신에게 아주 깊이 "내가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으로 불으면 된다. 모르는 마음을 간직해라. 그러면 우리 생각은 점점 더 맑아진다. 마음은 우주처럼 맑아진다.

우주처럼 맑은 마음이란 자연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부처, 보살, 악마 조차도 그 점에서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하나씩 하나씩 각자가 완벽하다. 하나씩 하나씩 각각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좀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실제로 아주 단순 명쾌하다. 만물은 똑같은 우주적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실체가 바로 우리의 본성이다.

예를 들면 여기 과자 공장이있다. 그곳에는 과자 반죽으로 가득찬 큰 방이 있다. 그러면 과자 제조자들은 이 반죽으로 하나씩 다양한 형태를 만든다. 비행기, 차, 인간, 탱크, 악마, 보살도 만든다. 개, 새, 고양이도 만든다. 과자들은 모두 다른모양과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똑같은 반죽에서 아온 것이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다. 전건 비행기 과자이고, 이건 개 과자이다. 다 다르다"라고 하겠지만 그것들을 한 입에 넣어보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아, 똑 같은 맛이로구나." 그래서 사의 맛, 하늘의 맛, 부처의 맛, 보살의 맛, 하느님의 맛, 악마의 맛, 너의 맛, 나의 맛이 모두 같다. 이 우주의 모든것이 똑같은 실체이다.
이 시는 똑같은 점을 말하고 있다. 우주, 태양, 별, 달, 나무, 너의마음, 나의 마음, 모든 것이 똑같은 우주적 실체에서 나온다. 모든것의 이름과 모양이 다 다르지만 실체는 똑같다. 태양, 달, 지팡이, 너와 나 모두 같은 실체이다.

"하나씩 하나씩 각자 완벽하다. 하나씩 하나씩 각각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一一當當 一一俱足)"
만물은 똑같은 실체이다. 지옥과 천국도 모두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지옥과 천국도 모두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신과 악마가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반죽이고 똑같은 맛이고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또 당신 자신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오직 모양과 이름만이 다를 뿐이며, 이 모든 것들은 생각에서 나온다. 모양과 이름에 집착하지 않으면 만물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각자각자가 완벽하다. 하나하나 각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 낱낱이 티끌이 서로 통하고 일체 만물이 서로 드러난다." 우리의 실체와 모든 것의 실체는 이미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겐쇼'라고 하며 부처의 본질을 의미한다. 이미 당신은 이 소리(책상 치는소리) 를 명백히 듣는다. 그것은 이미 맑고 명백하다. 그러면 (책상위에 컵을 가리키며) 이 컵의 본질은 무엇인가. 컵을 보아라. 부처의 본질이 아닌 것이 있는가.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모든것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 하늘은 푸르다. 나무는 초록색이다. 물이 흐른다. 향냄새가 난다. 내 목소리를 들어라. 모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것, 맛 보는것, 만지는것, 생각하는것, 이 모든 것이 부처의 본질이다.
한 제자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생각을 멈츨 수가 없읍니다. 어떻게하면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요? "아주 쉽다."
"아니요, 너무 어려워요. 앉아서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지만 생각을 멈출 수가없어요."
"좋다 5달러만 있으면 너의 생각을 없앨 수 있다. 극장가서 표를 사라." "무슨 말씀이세요?"
"ET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이 자전거르 타고 하늘로올라갈때 너는 그때 다른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아니요."

"영화를 보는동안 너는 지나주에 겪었던 일에 대해, 혹은 각종 고민거리에 대해, 또는 은행에 돈이 얼마 있는지에 대해 전혀 생각을 안 한다. 이이들이 하늘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극장 안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어한다. 이 마음은 완벽하게 집착이 없는 생각이다. 집착이 없는 생각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너도 행복하다. 주인공이 죽으면 슬퍼진다. 악당이 주인공과 싸울때면 사람들은 똑같은 마음이 된다. 일어나, 어서일어나 저 나쁜 사람을 때리라고."

단지 보라. 들어라. 냄새 맡아라, 맛보라, 모든 사람들은 영화를 볼때 이런 마음 상태에 있지만 영화관을 떠나자마자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여기저기 점검하고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는것은 생각에 집착하지않는 것이다. 단지 생각이다. 그림이나 아름다운 음악들은 우리에게 잠깐동안 생각이 없는 똑같은 경험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생각과 욕심을 떨어뜨리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마음 닦을 것도 없이 당신은 이미 완벽하다."

만약 당신이 모든것을 내려놓고 공허한 마음을 유지하면 볼 때, 들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너와 모든 것은 결코 분리 되지 않는다. 만물은 언제나 하나이다. 하늘을 볼 때 하늘과 하나이다. 설탕을 맛볼 때 설탕과 하나이다. 소가 '음매'하고 가면 바로 그때 소와 하나이다.

설탕의 단맛은 바로 우리 자신의 본성이다. 중요한 것은 참 나를 믿는 것이다. 그 길로 가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나'를만들지않는 것이다. 그러면 결코 다른 어떤 것과도 분리 되지 않는다.
본성을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척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본성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벽은 하얗다. 마루는 갈색이다. 바깥에 새들이 지저귀고 있다. 이것이 너의 본성이다. 마음이 우주처럼 맑을 때 만물은 이미 맑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한낱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좋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내 보겠다.

"이미 당신은 분명히 보고 , 분명히 듣고 있다. 그러면 (주장자를 "탕!"치며) 이 소리와 당신의 마음은 같은가, 다른가?"

만약 같다고 대답해도 나는 당신을 이 주장자로 때릴 것이고, 다르다고 해도 때릴 것이다. 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본성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이 깨달음은 이미 우주처럼 맑아서 머떤 말이나 단어로도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어떤 이분법적인 개념이 없다. 당신 혼자 고스란히 겪는 절대 경험의 영역이다. '똑같다' 혹은 '다르다'고 말하는것은 이미 이분법적인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다. 따리서 입을 열어 이 점을 설명하려 한다면 이미 그것은 큰 실수 이다. 어떤 종류이든 보여주는 행동이 필요하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임제 선사는 다만 '할' 하고 소리를 질렀고, 덕산 선사는 때렸고, 그지 선사는 단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자! 다시 묻겠다. 임제 선사의 '할' 덕산 선사의 방망이, 구지 선사의 손가락이 같은 것인가 , 틀린 것인가. 같다고 말하면 나는 당신을 이주장자로 때리겠다. 다르다고 얘기해도 때리겠다. 어떻게 하면 되겠는다. 어떤 종류의 보여주는 행동이 필요하다. 오직 이것 뿐이다.(책상을 친다) "탕!"

아주 단순 명쾌한데도 복잡다단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앞서 소개한 시의 마지막 문장은 아주 재미있다. 3 곱하기 3은 9이다. 이 문장은 '할' 혹은 책상을 "탕!" 치는 행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만물이 있는 그대로 진리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벽은 하얗다. 하늘은 푸르다. 승복은 희색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 완벽한 세계로 돌아온다. 소금은 짜다. 설탕은 달다. 3 곰하기 3은 9이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특별한것이 아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이것을 깨닫는다면 당신은 모든것을 얻는다. 이미 완전하다. 그것이 불성이다.

Tuesday, July 17, 2012

보는자가 여래다

보는 자가 여래다• 卽見如來 Just Seeing is Buddha-nature


若人欲識佛境界 만일 그대가 부처를 알려고 하면
If you wnat to understand the realm of Buddhas,


當淨其意如虛空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맑게 해야 한다.
Keep a mind that is clear like space.


遠離妄想反諸趣 모든 생각과 욕망을 놓아버리고
Let all thinking and external desires fall away.


令心所向皆無碍 마음가는 곳에 걸림이 없게 하라.
Let your mind go anywhere with no hindrance.


還當淨其意如虛空麽 자, 그러면 이제 그대의 마음을 허공과 같이 했는가?
Then what is keeping a mind that is clear like space?


其或未然 更聽註脚 此正覺覺性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다음에 하는 말을 잘 보라. 이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의 성품이다.

If your mind is not clear, listen to the following, It is enlightenment nature.


上至諸佛 下至六凡 위로는 여러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6도 중생에 이르기 까지

Above is the dwelling place of all Buddhas Below are the six realm of existence.


一一當當 一一 俱足 각각 완전한 존재이며 각자가 일체를 갖고 있다.
One by one, each thing is complete. One by one, each thing has it


塵塵上通 物物上現 낱낱의 티끌이 서로 통하고 일체 사물이 서로 드러나니,
It and dust interpenetrate, It is already apparent in all things.


不得修成 了了明明
마음 닦을 것도 없이 당신은 이미 완벽하다. 분명하고도 분명하다.
So, without cultivation, you are already comlete. Understand, understand, clear, clear.


(拈柱杖云 ) 還見麽 (주장자를 들며 ) 이제 보이는가 ?
(Holding the Zen stick) Do you see?


(打柱杖云) 還聞麽 (주장자를 치며) 이제 들리는가?
Hitting with the Zen stick) Do you hear?


旣了了見 旣丆丆聞 이미 당신은 분명히 보고 분명히 듣고 있다.
Already you see clearly, Already you hear clearly.


畢竟 是個甚麽 同耶 別耶
그러면 이것들이(그대의 마음, 주장자, 이 소리) 같은가, 다른가?
Then what are this stick, this sound, and your mind?
Are they the same? Or different?


同也 打三十棒 같다고 해도 이 주장자로 30방을 때리겠고
If you say same' I will hit you thirty times.


別也 打三十棒 다르다고 해도 30방을 때리겠다.
If you say 'different' I will hit you thirty times.


何以故 喝 三三九 왜인가? 할! 삼삼은 구
Why? Katz! 3x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