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문 덕산 큰스님의 발우
어느 날 덕산 큰스님이 발우를 옆에 들고 내려와 식당으로 가다가 설봉 스님과 마주쳤다.
설봉 스님이 덕산 큰스님에게 "아니, 스님, 종도 울리지 않고 북도 안 쳤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세요?" 라고 여쭈자 덕산 큰스님이 이 말을 듣고 되돌아 방장으로 가셨다 (방장이란 노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방이다).
설봉 스님은 이 일을 선방 입승스님(head monk)이자 덕산 큰스님의 애 제자인 암두 스님에게 전했다.
그러자 암두는 "그 대단하신 덕산 큰 스님도 아직 마지막 한 마디 말[末後句]을 터득하지 못하셨구만" 했다.
덕산 스님이 이 암두 스님의 말을 전해듣고 화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자네는 이 노승을 믿지 않느냐?(汝不背老僧那)"
그러자 암두 스님이 덕산 큰스님 귀에 대고 무언가 소곤소곤했다.
그러자 덕산 큰스님은 머리를 끄덕끄덕 하시더니 성난 것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돌아가셨다.
다음날 법당에 오른 덕산 큰스님은 평소와 달랐다.
이를 본 암두 스님이 앞자리에서 손뼉을 치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기쁘다, 우리 노스님께서 선의 마지막 경지를 다 터득하셨다. 이제 천하의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질문
1. 어떤 것이 덕산 큰스님의 마지막 한마디[末後句]인가?
2. 암두 스님은 덕산 큰스님의 귀에 대고 무엇이라고 소곤소곤하였는가?
3. 덕산 큰스님이 예전과 다르게 법문했다 하니 어떻게 한 것인가?
4. "아직 종도 안 울리고 법고도 안 울렸는데 발우를 옆에들고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설봉 스님의 질문을 여러분이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공안이다. 하지만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어렵지 않다.
이 공안은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을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준다.
덕산 큰스님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마지막 구절' 이란 올바른 상황, 관계, 실천에서 온 말아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아직 저녁 공양시간 전이라서 종도 울리지 않고 법고도 울리지 않았는데, 덕산 큰스님이 발우를 들고 선방을 나선다. 설봉 스님이 그것을 보고 여쭙자 큰스님은 다시 아무 말 없이 당신의 방으로 돌아간다.설봉 스님이 이것을 암두 스님께 말했더니 암두 스님이 말하기를 "우리 위대한 스승도 마지막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말은 곧 "우리 스승이 올바른 상황, 올바른 관계, 올바른 실천에 대해 이해를 못한 모양"이라는 말과 같다.
공양 시간도 아닌데 밥그릇을 들고 나가니까 말이다.
암두 스님은 설봉 스님의 말을 전해듣고 스승에 대해 이렇게 소문을 낸 모양이다.
"아마 큰스님께서 마지막 구절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
덕산 큰스님은 이 말을 듣고 아주 화가가 났을 것이다.
감히 제자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덕산 큰스님은 암두 스님을 그의 방으로 부른다.
"너는 왜 나를 두고 나쁜 말을 하고 돌아다니느냐. 너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구나."
그때 암두 스님이 덕산 큰스님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자 큰 스님의 기분이 풀렸다.
다음날, 큰스님이 연단으로 올라가 법문을 한다. 그는 전과달리 아주 훌륭한 법문을 했다.
암두 스님은 손벽을 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우리 큰스님이 궁극적 진리에 이르렀다. 지금부터 아무도 그를 어쩌지 못할 것이야."
종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느냐고 제자가 물었으나
큰스님은 한마디 설명도 없이 방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큰스님이 입을 열어 뭔가 합리적인 설명을 했다면
암두 스님은 큰스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스님은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고 암두 스님이 나중에 큰스님 귀에 속삭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 순간 설봉 스님이 제대로 얘기만 했어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네 번째 질문의 핵심은 덕산 큰스님이 어떻게 그의 실수를 교정해야 하는가이다.
실수를 하는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떻게 그것을 바로잡는가, 그것이 문제다. 이와 관련한 오랜 일화가 있다.
수 년전 어느 날 밤 고봉 스님이 술에 잔뜩 취해 새벽녘에야 들어왔다.
그때 다른 스님들은 이미 다 깨어서 아침염불 중이었다.
그러나 고봉스님은 자기방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스승인 만공 큰스님에게 큰 소리로 갖은 욕을 다해댔다.
"만공은 가짜다, 그놈의 가르침은 사기다."
이 소리를 들은 스님들이 깜짝 놀랐다.
만공스님은 그 당시 한국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님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고봉 스님이 만공 스님에 대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 만공 큰스님은 마침 법당으로 가는 중이었다.
모든 스님들이 뛰어나와 숨을 죽이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큰스님은 고봉 스님의 방문을 열어제쳤다.
"고봉아, 너는 왜 내 욕을 하고 다니느냐?"
그때 고봉 스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고봉 스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큰스님, 나는 큰스님을 욕한 적이 없읍니다."
"아니 무엇이라고? 방금까지 내 욕을 하고 있었던 것을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다 들었다.
이제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나는 스님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바보같은 '만공'이라는 스님에 대해 욕을하고 있었읍니다."
고봉스님은 만공이라는 이름역시 누군가 지어준 이름이므로 앞에서 있는 만공 큰스님과
그의 본성 자체를 구별지어 대답한 것이다.그러자 만공 큰스님이 이렇게 물으셨다.
"만공과 내가 같으냐, 틀리냐?"
고봉 스님은 "할" 하고 소리쳤다. 만공 큰스님은 호탕하게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었구나. 이제 그만 자거라."
그렇다 실수를 했는지, 않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한다.
덕산과 같은 큰스님도 실수를 한다.
중요한것은 그것을 어떻게 고치느냐이다.
고봉 스님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순간순간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실수는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는 즉각적으로 어떤 맑은 목적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덕산 큰스님이 실수를 해서 그의 실수를 바로잡지 않고 그의 방으로 돌아간다면 절은 온통 난리가 날 것이다.
그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실수를 했다.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그것이 네번째 질문의 핵심이다.
Sunday, August 19, 2012
Thursday, August 16, 2012
7 문 고봉삼관
7 문 고봉삼관 [高捧三關] 고봉의 3개문
질문
1. 밝은 해가 허공에 높이 떠 비추지 않는 곳이 없는데, 어째서 왜 조그만 조각구름이 해를 가리었는가?
2. 사람마다 모두 그림자가 따르고 있어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밟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온 천지가 모두 불구덩이다. 어떤 삼매를 얻어서 타 죽지 않겠는가?
이것은 완벽한 행동공간이다. 어떤 것도 점검하지 말고 단지 행하라.
실체를 바로보고 실상을 깨달아 실용을 한다면 이 공안은 문제가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 해 전에 일본에는 사무라이 역을 잘하는 유명한 배우가 있었다.
그는 20년 경력의 검도 7단이었고 아주 잘 생긴데다가 기술도 좋았다. 일본에서 아주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의 아주 유명한 감독이 만드는 사무라이 서사극의 주연 배우로 캐스팅 됐다.
대형 영화회사가 돈을 대는 작업이었다. 조명사, 의상 담당자.
음악 담당자 등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였다.
시나리오는 보통 사무라이 영화들처럼 아주 단순하다.
악당이 나타나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면 주인공이 나타나 그들을 무찌른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최고다. 누구도 이 영화에서 나 만큼 연기를 잘할 수 없다.
드디어 첫 번째 장면을 찍는 알이었다. 감독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렇게 소리쳤다.
"조명, 카메라, 준비됐으면 액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악당이 바위뒤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고,
주인공이 단칼에 악당을 무찌르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생각했던 바대로 실감나게 연기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감독이 NO 사인을 내는것이 아닌가. 주인공은 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도대체 왜NG 사인을 내는거야?'
주인공의 의구심에도 아랑곳없이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그러나 감독은 "아니야 아니야, 다시해, 다시"라며 또 NG 사인을 냈다.
주인공은 화가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이렇게 대한 적이 없어, 이건 완전히 나를 갖고 노는거야.'
다시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한숨을 크게 내쉰 후 집중했다.
'아마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것일 수도 있어, 이번에는 잘되겠지.'
악당이 다시 튀어나왔고 그 순간 주인공은 마치 도술을 부리듯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둘렀다.
그러곤 악당을 완벽하게 무찔렀다.
그러나 감독은 다시 NG 사인을 내는것이 아닌가. 주인공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사무라이 배우다. 나한테 이처럼 세번씩이나 NG를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너무 화가 나 자기 몸집의 절반도 안되는 감독을 노려 보았다.
감독은 배우의 마음을 알아 차렸지만 얼굴에는일말의 동요도없었다.
그 감독은 이미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다시 돌아갔다. 감독이 사인을 냈다.
"조명, 카메라, 액션."악당이 나타났고 주인공이 뛰어 오를 찰라였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공이 방향을 바꿔 감독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아---- 당신을 죽이고야 말겠어."
그는 감독의 멱살을 잡아 땅에 내리쳤다.
그러나 감독은 그의 행동에 전혀 동요하지않고 도리어 마구 웃더니 아렇게 소리쳤다.
'하하하하 맞아, 맞아.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주인공은 그제야 정신이 난듯 감독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이제 감독님 가르침을 알겠읍니다."
감독은 그저 웃음만 터뜨리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 그들 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돼 모든 장면에서 한번이나 두 번 정도만 찍고 넘어갔다.
주인공은 오로지 머릿속에 연기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런 일이 있고 부터는 자만이나 헛된 감정은 없었다.
이 영화는 나중에 일본에서 가장 훌륭한 사무라이 영화로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감독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그는 자만에 가득찬 배우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최고야, 누구도 나를 가르칠 수 없어.'
이런 마음이 문제이다. 이런 점검하는 마음이 나타나면 연기는 완전하지 않다.
그리하여 주인공에게 자극을 가함으로서 100퍼센트 집중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으아아아아---- 내가 너를 죽이겠다."
당신이 무언가를 할 때 그냥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과 전 우주가 하나가 된다.
이것이 고봉 스님 질문의 핵심이다.
6 문 부처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6 문 부처님머리에 담뱃재를 털고
한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문 채 법당에 들어와 부처님 얼굴에 연기를 내뿜기도 하고 손 위에 담뱃재를 털기도 한다.
스님 한 분이 놀라서 뛰어와 이렇게 꾸짓는다.
" 지금 성스러운 법당에서 뭐 하는 것이냐?"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성스렁운 것도, 속된 것도 본래 따로 없는 것이거늘, 부처님의 머리에 재를 털었기로서니 무엇이 잘못됐는가요?
이 우주 삼라만상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바로 나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든 다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요?"
질문
1. 당신이 스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 제도[濟度] 하겠는가?
언뜻 생각하면 이 남자 말이 맞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많은 절의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온 우주가 부처이다'
아주 훌륭한 가르침이다. 부처는 도처에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우주에 부처의 몸 아닌 것이 없다.
한 남자가 법당에 담배를 피우면서 들어온다. 그는 불상에 연기를 내뿜고 머리에 재를 떨어뜨린다. 스님이 놀라 뛰어온다.
"미쳤느냐, 왜 성스러운 부처님의 머리에 담뱃 재를 터느냐?"
하지만 남자는 절의 기둥에 적힌 문구를 가르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니, 여기 이렇게 우주 만물이 부처라고 씌어 있지 않습니까?
이 담뱃재도 불성을 가지고 있읍니다. 내가 재를 어디에 떨어뜨린다 해도 부처님의 땅 아닌곳이 어디 있읍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는 알고 있지만 둘은 모르고 있다.
그는 모든 법이 여여[如如], 즉여[卽如] 그리하여 올바른 실용으로 나아가는 경계를 아직 깨우치지 못했다. 그는 '공'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신심이 깊은 한 보살이 무려 10년 동안 한 스님의 수행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암자를 지어주고 음식과 옷과 약을 주었다. 보통 10년 정진,
수행을 하면 깨닫는다고 생각한 그보살은 10년 후 그 스님이 얼마나 깨달았는지 듣고 싶었다.
마침 보살에게는 예쁘고 젊은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날 보살은 딸에게 아주 예쁜 옷을 입힌 다음 맛있는 음식 훌륭한 옷을 스님에게 보내면서 색다른 당부를 했다.
"이것들을 스님께 갖다드려라. 그런다음 스님을 유혹하거라. 그런다음 스님의 반응을 내게 알려다오."
딸은 스님이 있는 암자로 갔다. 그러고는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 듣지하니 당신은 위대한 스님이십니다. 10년 동안 열심히 수행을 하셨다구요.
어머니께서 이것들을 가져다 주라고 하셔서 이렇게 왔읍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순간, 스님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내치며 이렇게 말했다.
"찬 바위에 썩은 통나무다 엄동설한에는 온기가 없는 법이다."
딸은 마을로 내려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머니, 정말 훌륭한 스님이세요. 저를 "찬 바위에 썩은 통나무이다. 엄동설한에는 온기가 없는 법이다"라고 하시면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요."
그러나 딸의 말을 들은 보살은 스님에게 냅다 뛰어 올라갔다. 그러더니 스님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10년동안 악마를 봉양했구나. 여기서 나가라. 이 악마야."
보살은 스님을 암자 밖으로 내쫓았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작스런 보살의 행동은 무엇인가? 스님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인가?
이 스님은 불상에 재를 떨어뜨리는 담배 피우는 남자와 같다. 스님는 단지 그의 생각에 집착해 있을 쁜이었다.
그는 그의 수행 경험에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행했을 뿐이었다.
외국에는 이런종류의 수행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물론 조용하고 평화롭고 움직이지않는 마음을 기지기 위해 수행을 열심히 하면 원하는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명상을 해서 어던 좋은 감정을 가질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속에 지혜가 있는가?
단지 평화로운 마음만 간직한다면 지혜가 어떻게 자랄 것인가. 이런 식으로 수행한다면 지혜는 자라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 바른 상황, 바른 관계, 바른 실천을 행할 수 없다.
앞서 예로 든 그 스님이 그 상황에서 인식해야 할 바른 관계란 그 딸이 자신을 10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봉양해준 보살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바른 행동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이 젊은 여자에게 맑고 자비로운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누군가 법당에와서 부처님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고 머리에 재를턴다. 그는 그가 처한 현재 상황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순간순간 올바른 실천도 하지 못한다. 당신이라면 부처님 불상에 재를 턴 그 남자를 무슨 말로 가르칠 것인가?
조심하라. 그 남자는 아주 집착이 강한 사람이여서 여러분이 그를 때리면 그는 더 세게 어러분을 때릴 것이다. (하하하)
한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문 채 법당에 들어와 부처님 얼굴에 연기를 내뿜기도 하고 손 위에 담뱃재를 털기도 한다.
스님 한 분이 놀라서 뛰어와 이렇게 꾸짓는다.
" 지금 성스러운 법당에서 뭐 하는 것이냐?"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성스렁운 것도, 속된 것도 본래 따로 없는 것이거늘, 부처님의 머리에 재를 털었기로서니 무엇이 잘못됐는가요?
이 우주 삼라만상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바로 나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든 다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요?"
질문
1. 당신이 스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을 어떻게 제도[濟度] 하겠는가?
언뜻 생각하면 이 남자 말이 맞다. 부처님은 만물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많은 절의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온 우주가 부처이다'
아주 훌륭한 가르침이다. 부처는 도처에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우주에 부처의 몸 아닌 것이 없다.
한 남자가 법당에 담배를 피우면서 들어온다. 그는 불상에 연기를 내뿜고 머리에 재를 떨어뜨린다. 스님이 놀라 뛰어온다.
"미쳤느냐, 왜 성스러운 부처님의 머리에 담뱃 재를 터느냐?"
하지만 남자는 절의 기둥에 적힌 문구를 가르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니, 여기 이렇게 우주 만물이 부처라고 씌어 있지 않습니까?
이 담뱃재도 불성을 가지고 있읍니다. 내가 재를 어디에 떨어뜨린다 해도 부처님의 땅 아닌곳이 어디 있읍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는 알고 있지만 둘은 모르고 있다.
그는 모든 법이 여여[如如], 즉여[卽如] 그리하여 올바른 실용으로 나아가는 경계를 아직 깨우치지 못했다. 그는 '공'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신심이 깊은 한 보살이 무려 10년 동안 한 스님의 수행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를 위해 암자를 지어주고 음식과 옷과 약을 주었다. 보통 10년 정진,
수행을 하면 깨닫는다고 생각한 그보살은 10년 후 그 스님이 얼마나 깨달았는지 듣고 싶었다.
마침 보살에게는 예쁘고 젊은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날 보살은 딸에게 아주 예쁜 옷을 입힌 다음 맛있는 음식 훌륭한 옷을 스님에게 보내면서 색다른 당부를 했다.
"이것들을 스님께 갖다드려라. 그런다음 스님을 유혹하거라. 그런다음 스님의 반응을 내게 알려다오."
딸은 스님이 있는 암자로 갔다. 그러고는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 듣지하니 당신은 위대한 스님이십니다. 10년 동안 열심히 수행을 하셨다구요.
어머니께서 이것들을 가져다 주라고 하셔서 이렇게 왔읍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스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순간, 스님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내치며 이렇게 말했다.
"찬 바위에 썩은 통나무다 엄동설한에는 온기가 없는 법이다."
딸은 마을로 내려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머니, 정말 훌륭한 스님이세요. 저를 "찬 바위에 썩은 통나무이다. 엄동설한에는 온기가 없는 법이다"라고 하시면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어요."
그러나 딸의 말을 들은 보살은 스님에게 냅다 뛰어 올라갔다. 그러더니 스님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10년동안 악마를 봉양했구나. 여기서 나가라. 이 악마야."
보살은 스님을 암자 밖으로 내쫓았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작스런 보살의 행동은 무엇인가? 스님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인가?
이 스님은 불상에 재를 떨어뜨리는 담배 피우는 남자와 같다. 스님는 단지 그의 생각에 집착해 있을 쁜이었다.
그는 그의 수행 경험에 집착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단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행했을 뿐이었다.
외국에는 이런종류의 수행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물론 조용하고 평화롭고 움직이지않는 마음을 기지기 위해 수행을 열심히 하면 원하는 상태를 얻을 수 있다.
명상을 해서 어던 좋은 감정을 가질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르침속에 지혜가 있는가?
단지 평화로운 마음만 간직한다면 지혜가 어떻게 자랄 것인가. 이런 식으로 수행한다면 지혜는 자라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 바른 상황, 바른 관계, 바른 실천을 행할 수 없다.
앞서 예로 든 그 스님이 그 상황에서 인식해야 할 바른 관계란 그 딸이 자신을 10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봉양해준 보살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바른 행동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이 젊은 여자에게 맑고 자비로운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누군가 법당에와서 부처님의 얼굴에 연기를 내뿜고 머리에 재를턴다. 그는 그가 처한 현재 상황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순간순간 올바른 실천도 하지 못한다. 당신이라면 부처님 불상에 재를 턴 그 남자를 무슨 말로 가르칠 것인가?
조심하라. 그 남자는 아주 집착이 강한 사람이여서 여러분이 그를 때리면 그는 더 세게 어러분을 때릴 것이다. (하하하)
Wednesday, August 15, 2012
5 문 향엄 상수
5 문 향엄상수[香嚴上樹]
나뭇가지를 물고 나무에 매달려 오르기
향엄 큰스님이 말했다.
"가령, 누가 나무위에 매달려 있다고 하자. 두 손은 등위에 꽁꽁 묶여 있고,
발판도 없이 다만 입으로 가지를 물고 있다고 하자.
그때 나무 아래서 누군가 나무위에 있는 사람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어쩔 것인가.
대답하지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않은것이 되고(즉, 죽게되고),
대답을 하면 입을 열어야 하므로 목슴을 잃는다."
질문
1.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이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공안 이다. 입을 열어도 죽고, 침묵을 지켜도 죽는다.
달마 선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무엇을 이러쿵 저렇쿵 설명하겠는가.
입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이 공안은 일종의 비유이다.
지금 이 입 하나에 달려있다는 것,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 흐르듯 말을 한다해도,
입을 놀려 장광설로 멋있는 설명을 거침없이 해나간다 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말은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고 잘못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오직 모를 뿐'을 깨닫는다. 이것이 생각 이전의 상태이다.
삶도, 죽음도 없다. '오직 모를 뿐' 이 싦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면 삶이다.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 한계를 넘어 선 것이다.
그래서 이 공안에서는 우리가 살고 싶으면 죽는다는 역설을 가르친다. 나무 위에서 가지를 입에물고 있을 때 어느 것이 올 바른 행동인가.
다 내려놓아라 그러면 당신앞에 맑게 나타난다.
나뭇가지를 물고 나무에 매달려 오르기
향엄 큰스님이 말했다.
"가령, 누가 나무위에 매달려 있다고 하자. 두 손은 등위에 꽁꽁 묶여 있고,
발판도 없이 다만 입으로 가지를 물고 있다고 하자.
그때 나무 아래서 누군가 나무위에 있는 사람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어쩔 것인가.
대답하지않으면 의무를 다하지 않은것이 되고(즉, 죽게되고),
대답을 하면 입을 열어야 하므로 목슴을 잃는다."
질문
1.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이것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공안 이다. 입을 열어도 죽고, 침묵을 지켜도 죽는다.
달마 선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 이렇게 물었을 때 무엇을 이러쿵 저렇쿵 설명하겠는가.
입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이 공안은 일종의 비유이다.
지금 이 입 하나에 달려있다는 것,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 흐르듯 말을 한다해도,
입을 놀려 장광설로 멋있는 설명을 거침없이 해나간다 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말은 언제든지 잘못될 수 있고 잘못 전달될 수 있다.
우리가 생각을 완전히 끊으면 '오직 모를 뿐'을 깨닫는다. 이것이 생각 이전의 상태이다.
삶도, 죽음도 없다. '오직 모를 뿐' 이 싦과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면 삶이다.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 한계를 넘어 선 것이다.
그래서 이 공안에서는 우리가 살고 싶으면 죽는다는 역설을 가르친다. 나무 위에서 가지를 입에물고 있을 때 어느 것이 올 바른 행동인가.
다 내려놓아라 그러면 당신앞에 맑게 나타난다.
Monday, August 13, 2012
달마 대사의 수염
4 문 달마 대사의 수염
혹암[或菴]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달마 대사는 왜 수염이 없는가?"
질문
1. 달마 대사의 본래 얼굴은 무엇인가?
2. 당신에게 묻겠다.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이것은 상당히 공격적인 공안이다. 선은 마음속에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혹암 큰스님은 뭔가를 만들어 냈다.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우리는 먼저 달마 대사의 본래 모습을 알아야 한다. 달마 대사의 본래 모슴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달마는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없다. 또한 수염도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공'함에 집착하면 부처님 조차도 여러분을 도울 수 없다.
그러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이름과모양을 걷어내려 노력하라.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하는가. 그들의 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이름과 모양의 바른 기능(실용)을 찾는 다면 아마 수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스님들은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하고 물었을 때 제자들이 '무' 하고 대답하면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이름과 모양의 바른 기능을 집어내지 않는다.
옛날 금강산에는 마하연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한 번에 1천여 스님들이 참선수행을 했을 정도로 크고 유명했다.
산 밑에는 유점사라는 아주 유명한 강원이 있었고, 산 중턱쯤에는 유명한 금강산 온천이 있었다.
그 온천의 주인은 아주 신실한 불자여서 스님들에게 온천을 무료로 이용하게 했다.
어느 날 유점사에서 학승들을 가르치는 솔해라는 강사가 온천에 왔다. 그는 당시 아주 유명한 강사였다.
솔해 스님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주인 여자가 공손하게 예를 갖춰 그에게 말했다.
"스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네, 여기 온천물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뜨거운 물에 몸은 깨끗이 씻으셨는데, 마음은 어떻게 씻으셨읍니까?"
그러자 순간 솔해 스님은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을 어떻게 씻었느냐?' 만약 마음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란 것이 과연 있는가?
여러분이 있다고 해도 나는 여러분을 이주장자로
30방 때릴 것이고 없다고 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 역시 아주 공격적인 공안이다. 이것이 혹암 큰스님 질문의 핵심이다.
혹암[或菴]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달마 대사는 왜 수염이 없는가?"
질문
1. 달마 대사의 본래 얼굴은 무엇인가?
2. 당신에게 묻겠다.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이것은 상당히 공격적인 공안이다. 선은 마음속에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혹암 큰스님은 뭔가를 만들어 냈다.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우리는 먼저 달마 대사의 본래 모습을 알아야 한다. 달마 대사의 본래 모슴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달마는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없다. 또한 수염도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공'함에 집착하면 부처님 조차도 여러분을 도울 수 없다.
그러니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이름과모양을 걷어내려 노력하라.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하는가. 그들의 바른 기능은 무엇인가.
이름과 모양의 바른 기능(실용)을 찾는 다면 아마 수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스님들은 "왜 달마 대사는 수염이 없는가?" 하고 물었을 때 제자들이 '무' 하고 대답하면 만족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이름과 모양의 바른 기능을 집어내지 않는다.
옛날 금강산에는 마하연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한 번에 1천여 스님들이 참선수행을 했을 정도로 크고 유명했다.
산 밑에는 유점사라는 아주 유명한 강원이 있었고, 산 중턱쯤에는 유명한 금강산 온천이 있었다.
그 온천의 주인은 아주 신실한 불자여서 스님들에게 온천을 무료로 이용하게 했다.
어느 날 유점사에서 학승들을 가르치는 솔해라는 강사가 온천에 왔다. 그는 당시 아주 유명한 강사였다.
솔해 스님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주인 여자가 공손하게 예를 갖춰 그에게 말했다.
"스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네, 여기 온천물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여자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스님은 뜨거운 물에 몸은 깨끗이 씻으셨는데, 마음은 어떻게 씻으셨읍니까?"
그러자 순간 솔해 스님은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을 어떻게 씻었느냐?' 만약 마음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란 것이 과연 있는가?
여러분이 있다고 해도 나는 여러분을 이주장자로
30방 때릴 것이고 없다고 해도 30방을 때릴 것이다. 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 역시 아주 공격적인 공안이다. 이것이 혹암 큰스님 질문의 핵심이다.
Saturday, August 11, 2012
3문 암환주인
三門 巖喚主人 서암이 스스로를 주인으로 부르다
서암 큰스님은 날마다 자기에게 "主人公 아!" 하고 부른다음
"예" 하고 대답했다.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려라."
"예."
"어떤 순간, 어떤 장소에서도 남에게 속지 마라."
"예." "예."
질문
1.서암 큰스님의 마음은 두 개이다. 어떤 마음이 참 주인공인가?
종종 아이들이 소꼽놀이나 인형놀이를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너는 나를 좋아하니? 나도 너를 좋아"한다.
인형은 전혀 말을 못하는데도 아이들은 대화하듯 혼자 얘기한다.
이 아이의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서암 큰스님의 마음은 이 어린아이들과 같다.
그는 아주 단순하고 맑은 마음을 가졌다.
내가 묻고, 또 다른 내가 답한다. 진정한 '나'란 누구인가.
우리가 맑은 마음을 가지면 만물이 바로 '나'이다.
하늘도 '나'이고, 나무도 '나'이고 멍멍 짖는 개도 '나'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다. 단지 일종의 설명에 불과하다.
이 설명을 소화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앞에 진리가 아주 맑게 나타날 것이다.
우리 안에 주인공을 자처하는 두 놈이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 진짜 주인공과 가짜 주인공이 있다.
약한마음도 있고 굳센 마음도 있고 삐뜰어진 마음도 있고 바른 마음도 있다.
순수한 마음도 있고 불순한 마음도 있다. 여러분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Friday, August 10, 2012
2 문 조주세발
2 問 조주세발[趙州洗鉢] 발우나 씻고 가거라
한 스님이 조주 큰스님에게 물었다.
"막 절 문에 들어섰읍니다. 부디 가르쳐주십시요."
그러자 조주 큰스님께서 물었다.
"아침은 먹었느냐?"
"네, 먹었읍니다."
"그러면 발우나 씻고 가거라." 순간 젊은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질문
1. 젊은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2. 여러분이 만약 질문을 한 스님이라면 조주 큰스님이 "발우나 씻고 가거라"고 하셨을 때 무엇이라고 했겠는가?
이 공안은 매일 우리가 일상에서 거쳐야할 마음, 즉 평상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공안이다. 평상심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길, 올바른 생활이다. 평상심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길, 올바른 생활이다. 질문을 한 스님이 "발우나 씻고 가거라" 하는 조주 큰스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평상심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공안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조주 큰스님은 때때로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침은 먹었느냐?"고 물으시고는 제자가 "네, 먹었읍니다"고 하면 아침 식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조주 큰스님은 발우를 씻으라고 하셨다. 보통 발우는 공양(식사)을 마치는 즉시 하는 일이다.
조주 큰스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바로 이것이 조주 큰스님의 독특한 방식이다. 그는 제자들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는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제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어떻게 제자들의 마음을 깨울 것인가? 그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조주 큰스님은 항상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시험하셨다. 여러분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조주 큰스님이 발우를 씻으라고 했을 때 어떻게 했을 것인가? 아침 식사는 오래전에 끝났다. 그릇도 이미 깨끗하다. 그러면 가서 다시 그릇을 닦겠느냐. 마음을 맑게하여 그에 맞게 대답해야 한다. 초심자는 '그릇을 닦겠다'는 종류의 간단한 대답도 가능하다.
하지만 수행을 한 사람이라면 조주 큰스님의 등을 내리쳐야 한다.(하하하) 선은 순간순간 직관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상황, 관계, 실천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 훌륭한 선서들로부터 나오는 어떤 종류의 '말'도 중요하지 않다. 순간순간 그것을 바르게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혜이다.
한 스님이 조주 큰스님에게 물었다.
"막 절 문에 들어섰읍니다. 부디 가르쳐주십시요."
그러자 조주 큰스님께서 물었다.
"아침은 먹었느냐?"
"네, 먹었읍니다."
"그러면 발우나 씻고 가거라." 순간 젊은 스님은 깨달음을 얻었다.
질문
1. 젊은 스님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2. 여러분이 만약 질문을 한 스님이라면 조주 큰스님이 "발우나 씻고 가거라"고 하셨을 때 무엇이라고 했겠는가?
이 공안은 매일 우리가 일상에서 거쳐야할 마음, 즉 평상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공안이다. 평상심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길, 올바른 생활이다. 평상심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올바른 길, 올바른 생활이다. 질문을 한 스님이 "발우나 씻고 가거라" 하는 조주 큰스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평상심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공안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조주 큰스님은 때때로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침은 먹었느냐?"고 물으시고는 제자가 "네, 먹었읍니다"고 하면 아침 식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조주 큰스님은 발우를 씻으라고 하셨다. 보통 발우는 공양(식사)을 마치는 즉시 하는 일이다.
조주 큰스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바로 이것이 조주 큰스님의 독특한 방식이다. 그는 제자들의 마음을 자극하기 위해서 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는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제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어떻게 제자들의 마음을 깨울 것인가? 그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조주 큰스님은 항상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시험하셨다. 여러분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조주 큰스님이 발우를 씻으라고 했을 때 어떻게 했을 것인가? 아침 식사는 오래전에 끝났다. 그릇도 이미 깨끗하다. 그러면 가서 다시 그릇을 닦겠느냐. 마음을 맑게하여 그에 맞게 대답해야 한다. 초심자는 '그릇을 닦겠다'는 종류의 간단한 대답도 가능하다.
하지만 수행을 한 사람이라면 조주 큰스님의 등을 내리쳐야 한다.(하하하) 선은 순간순간 직관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올바른 상황, 관계, 실천을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 훌륭한 선서들로부터 나오는 어떤 종류의 '말'도 중요하지 않다. 순간순간 그것을 바르게 나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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